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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하파의 서재입니다.

허균의 슬기로운 조선 혁명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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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하파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8.14 13:14
최근연재일 :
2024.09.18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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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4.08.14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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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3화. 저랑 함께 이걸 만들어 보시렵니까?

DUMMY

3화. 저랑 함께 이걸 만들어 보시렵니까?




가을이라지만, 유독 추운 날씨였다.

노비 두 사람이 한 아이를 바라보며 쑥덕거린다.


“저분이 대사성(大司成) 어른의 막내 아드님이신가?”

“그렇다네. 어떤가? 한눈에 봐도 여간내기가 아니지?”

“확실히 그렇구먼. 저분을 누가 여섯 살로 보겠나. 거참.”

“잘 보이는 게 좋을 걸세. 혹시 아나? 여기 말고 한양에 가서 살게 될지.”


둘은 같은 노비였지만 상황은 달랐다.

한쪽은 이 집에서 태어난 베테랑이고,

다른 한쪽은 이틀 전에 새로 들어온 신입.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누마루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허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작 여섯 살. 그것도 만으로는 4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의젓한 자세로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이의 모습은 실로 신선이 이 세상에 강림한 듯 점잖고 무게가 있었다.


“무슨 그림을 그리시는 걸까?”

“모르지. 우리 같은 잡것들이 보면 뭘 알겠어? 이제 다른 곳이나 좀 가르쳐 주게. 쌀이 그득한 곳간이나 어여쁜 아씨······.”

“예끼! 입 좀 다물게. 데련님(도련님의 강원도 방언)께 방해가 되었다가는 마님한테 된통 혼날 테니.”


쑥덕거리던 두 노비가 사라진 후에도.

허균은 혼자서 계속 그림을 그려나갔다.

아이가 그리고 있던 그림은 지금껏 본 적 없는 그림이었다.


흰 종이에 검은색 먹으로 네모난 칸을 그리고는,

그걸 4개 연속으로 이어서 붙였다.

그 안에는 각각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데,

무엇보다 신기했던 건 둥그런 원 안에 글자가 적혀 있다는 점이었다.


“후우. 간만에 그리니까 쉽지 않네. 게다가 붓으로 그리니까 더 어려워.”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고?

별거 아니다.

만화 중에서도 가장 쉬운 편에 속하는 4컷 만화를 그리는 중이다.

내용은 시대 상황에 맞춰 어디까지나 교육적인 내용으로 채워봤다.

그것도 내가 애지중지 아끼는 소학에 담긴 내용.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첫 번째 칸에는 공자가 근엄한 얼굴로 이런 대사를 한다.


“부모가 생존해 계시면 멀리 다니지 않아야 하느니라.”


이어서 두 번째 칸에는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며 “예!”라고 답한다.

세 번째 칸에는 다시 공자가 등장.


“멀리 다녀야 함에는 반드시 가는 행선지를 분명히 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네 번째 칸에서 다시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며 “예!”라고 답하는 식이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초딩 학습만화.

왜 하고많은 그림 중에 만화냐고 하면 이게 이 시대에는 없는 획기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와 똑같이 사군자나 그려댔다가는 누이가 내게 별 흥미를 안 느낄지도 몰라. 그런 것보다는 그녀가 모르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게 더 호기심을 끌 수 있겠지.’


그렇게 한참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추운데 여기서 뭘 하는 게야?”


봄 햇살 같은 따스한 목소리.

누이인 허초희(許楚姬)였다.


‘보면 볼수록 예쁘단 말이지.’


농담이 아니라 저렇게 예쁜 사람은 미래 한국에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어느새 옆자리까지 다가온 누이는 내가 그린 그림을 자세히 관찰하더니,

깜짝 놀란 얼굴로 묻는다.


“에구머니나! 이게 대체 뭐니?”

“만화(漫畵)라는 겁니다.”

“만화? 그게 뭐야?”

“마음대로 만(漫) 자에 그림 화(畵) 자를 써서 만화죠. 즉 제 마음대로 그린 그림이란 뜻이에요.”

“그, 그런 게 있어? 처음 듣는 말인데?”


그렇겠지. 이 시대에 만화라는 게 있을 턱이 없으니까.

이게 흥미로워 보였던 걸까?

그녀는 소학에 있는 내용이 아니냐며 무릎을 쳤다.


“맞습니다. 소학에 있는 내용을 떠올리며 그렸어요.”

“대단해! 양민 중에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걸 배포한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어!”


흠. 그 생각까지는 못 해봤는데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아직 이 시기에 그림으로 표현된 학습서는 없으니까.

게다가 이건 소학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학습용 만화.

유생들도 이런 게 다 있냐며 쌍따봉을 날릴지도 모를 일이다.

좋아요 올라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쯤에서 슬슬 준비한 멘트를 꺼내본다.


“누이.”

“응?”

“저랑 함께 이걸 만들어 보시렵니까?”

“뭐어?”

“누이 말대로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도움을 주는 겁니다. 누이도 소학에 대해서는 다 알잖아요?”


누이의 얼굴에 당혹함이 가득하다.


“하, 하지만 나는 이런 건 그릴 줄 모르는 걸······.”

“누이의 그림 솜씨는 제가 제일 잘 압니다. 어떻게 그리면 되는지 알려드릴 테니 우리 함께해요. 네?”


바로 그때 강릉 김씨(江陵 金氏). 아니지. 어머니가 누이를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초희야! 어딨니? 응? 얘가 대체 또 어딜 간 거람?”


누이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남매지간이라곤 하지만 남녀칠세부동석.

나는 여섯 살로 일곱 살이 되려면 1년 남았지만, 누이와 함께 있는 모습이 들켰다가는 어머니에게 죽이 되도록 맞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여긴 남자들만 모여있는 사랑방 아닌가.

아무래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스승인 이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겠다.

그에게서 글 공부를 배울 때만큼은 어머니도 뭐라고 하지 않으셨으니까.


#


“허허. 이걸 네가 그린 거라고?”

“네, 스승님.”


내가 건넨 4컷 만화를 살펴본 이달의 표정이 다채롭기 그지없다.

흥미로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삿된 것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내용은 좋구나.”

“그렇죠? 소학에 나와 있는 구절이니까요.”

“하지만 말이다. 이건 한자이지 않으냐.”

“네? 그게 왜요?”


이달은 피식 웃으며 이에 대해 설명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앗! 그렇군. 아무리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고 해도 정작 말풍선 안에 들어있는 말은 한자였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쓴웃음을 짓는다.


“언문(諺文, 한글)으로 바꿔야겠네요.”

“그렇지. 아무튼 생각 자체는 나쁘지 않아. 소학뿐만 아니라 다른 경전의 내용도 이렇게 옮길 수 있겠니?”

“물론이죠! 스승님께서도 도와주신다면 더 빨리 작업할 수 있을 거예요.”

“녀석하고는.”


스승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허균이 두고두고 아쉬워했던 남자.

허균은 서자 출신인 이달이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관직에 나가지 못하자 그의 처지에 비애를 느끼고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한다.

본인 또한 둘째 부인의 소생으로 서자나 다름없는 형편이라 이달의 불우한 처지에 깊이 공감했을 테니까.

이게 맞는지 궁금했던 나는 바로 소학을 펼쳐보았다.


<그 말이 맞다. 나는 스승님의 처지에 깊은 비애를 느끼며 홍길동전을 지었지>


역시. 이렇게 되면 홍길동전의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은 더 이상 의미 없다.

그럼 혹시 최초의 한글 소설인가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도 알려줄 수 있으려나?

하지만 허균은 더 이상 말. 아니 글을 쓰지 없었다.

묵묵부답.

마치 조금 더 친해지면 알려주겠다는 뜻인 것 같다.

이걸 본 스승님이 웃으며 말한다.


“하하. 소학을 다 뗀 지가 오랜데, 여전히 그걸 손에서 놓을 생각이 없구나. 그 책이 그리 좋더냐?”


그게 아니라 망령과 이야기를 나누려면 이것밖에 없어서 그렇습니다.

춘추나 예기 같은 것에 깃들면 좀 좋아?

하여간 까칠한 양반이란 말이지.


아무튼 스승 덕분에 나와 누이는 내 방에서 공부를 핑계로 4컷 만화를 그려나갈 수 있었다.

소학에 있는 내용을 만화로 다 옮기면 이걸 책으로 엮어 주변 양민들에게 빌려줄 생각이다.

물론 그게 어떤 효과를 발휘할지는 내 알 바 아니다.

내게 중요한 건 이 과정을 통해 누이와 더욱 친해지는 것에 있으니까.


한편, 만화를 그리는 누이의 집중력은 가히 무서울 정도다.

게다가 만화라는 건 기본적으로 인체 데생 및 원근법 등 서양의 미술을 기초로 하는데,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이걸 빠르게 습득해 나갔다.

과연 그림 천재.

심지어 나도 생각해 내지 못한 구도와 연출을 종종 선보이니 이런 게 바로 청출어람이라는 걸까?

나를 바라보는 이달의 표정이 왜 저리도 밝은지 이제는 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


한편, 그 시각, 경복궁의 근정전에서는 조정(朝廷)이 열리고 있었다.

국가 대사와 관련된 중요한 의례가 다뤄지며,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던 중.

강원도관찰사가 올린 장계(狀啓)가 화제를 모았다.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 허엽의 삼남 허균이 불과 6세에 사서삼경을 달달 왼다고 하니 이 어찌 나라의 기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허균을 한양에 불러 그의 실력을 주상께서 직접 살펴보시는 게 어떠할까 사료되옵니다.”


분명 허균이 익힌 건 사서까지만이었을 터인데, 소문이란 으레 과장되기 마련.

명나라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는 일로 골치가 아팠던 조정은 불쑥 튀어나온 가벼운 주제에 화색을 비췄다.


“오오. 대사성의 자녀께서 그토록 영민할 줄이야. 과연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장(長)을 맡으신 분의 자녀답군요. 하하.”

“실로 나라의 경사입니다. 여섯 살 아이가 사서삼경을 달달 왼다니. 공자께서도 기뻐하실 일이옵니다.”


많은 이들이 허균에 대한 칭찬으로 여념이 없는 가운데,

몇몇 이들은 이를 의심쩍어 여겼다.


“분명 축하할 일입니다만, 여섯 살 아이가 사서삼경을 다 외운다는 건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이로군요. 반드시 이를 조사하여 사실 여부를 가려야 할 것이오.”

“소신의 생각도 그러하옵니다. 만약 이게 거짓이라면, 주상 전하의 눈을 현혹게 한 중범죄가 아니겠습니까?”


아직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파벌 싸움이 일어나기도 전이었건만.

관료들은 서로 자기가 맞다며 치열한 기싸움을 벌였다.

임금인 이연(李昖, 선조)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훈구파의 기를 누르려고 사림들을 들인 게 엊그제인데, 벌써 내부 분열이란 말인가. 쯧.’


이 당시 사림파는 두 개의 세력으로 갈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훈구파와 기존 사림파를 강하게 비판하여 훗날 동인(東人)이 되는 이들.

그리고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견지했던 서인(西人)들.

허균의 아비인 허엽은 후에 동인의 지도자가 되어 활약하였으니, 이들이 이렇게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단순히 여섯 살 아이가 정말로 사서삼경을 외울 수 있는지 궁금해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그저 상대를 비난하여 헐뜯고 싶을 뿐.


‘정말 지긋지긋하군.’


선조는 신하들의 다툼을 보며 혀를 찼다.

그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하나는 이 지루하고 피곤한 정치 싸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갈망.

또 하나는 어린아이가 사서삼경을 외울 수 있을 만큼 천재라면 그 아이가 조선의 미래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진정 그런 능력을 가졌다면, 조선의 역사를 바꿀 수도 있을지 모른다.'


선조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만하시오! 내 직접 아이를 도성에 불러 그가 정말로 사서삼경을 외울 수 있는 것인지 확인할 터니 경들은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입을 열지 말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곧바로 고개를 숙이는 신하들.

사실 선조로서도 이건 나쁘지 않은 이벤트였다.

따분하던 참에 좋은 장난감을 발견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아이가 사서삼경을 외웠든 안 외웠든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참에 강원도의 실상이나 파악해야겠군. 아이가 내게 거짓을 고할 일은 없을 테니.’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선조는 백성들의 실태가 무엇보다 궁금했다.

원래라면 절대로 왕이 될 수 없는 위치였으나 어쩌다 보니 왕이 되어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조선의 적극적인 개혁을 주창하고 싶었으나,

신하들은 파벌 싸움에 여념이 없었고, 백성들이 어찌 지내는지는 상소나 장계를 통해 추측할 뿐.

두 눈으로 직접 살펴보기는 어려운 면이 많았다.


선조는 만약 아이가 사서삼경을 외우지 못하더라도 적당히 잘 한다고 둘러댈 결심을 굳히며 어서 아이가 이곳에 와주길 바랐다.

과연 아이의 소문은 거짓일까 아니면 그 이상일까?

모든 것은 이제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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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화. 오오. 어쩜 이런 식감과 맛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6 24.08.22 1,938 57 12쪽
11 11화. 내 누이께 드릴 말씀이 있소 +4 24.08.21 1,967 58 12쪽
10 10화. 형씨는 뉘신데, 그런 말을 하는 거요? +4 24.08.20 2,003 5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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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7화. 우 우 풍문으로 들었소~ +5 24.08.17 2,079 60 14쪽
6 6화. 내가 사주를 좀 볼 줄 아는데 +8 24.08.16 2,138 59 12쪽
5 5화. 너, 너무 속이 안 좋아서 +7 24.08.15 2,161 55 12쪽
4 4화. 벌써 이 시대 사람이 다 되었구려 +7 24.08.15 2,257 60 14쪽
» 3화. 저랑 함께 이걸 만들어 보시렵니까? +4 24.08.14 2,393 68 12쪽
2 2화. 그것 이외에 추가 보상은 없나요? +8 24.08.14 2,832 65 15쪽
1 1화. 네가 정말 그렇게 자신만만하다면 어디 한 번 해보거라 +5 24.08.14 3,913 6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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