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테이니르 님의 서재입니다.

세기말 악의 조직의 말단조직원이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현대판타지

아함(阿含)
작품등록일 :
2022.10.28 18:46
최근연재일 :
2022.12.25 10:00
연재수 :
39 회
조회수 :
5,692
추천수 :
278
글자수 :
235,629

작성
22.11.05 15:00
조회
138
추천
9
글자
14쪽

1장. 나는야 말단 조직원-8

DUMMY

만일 이 세상에 ‘설정 오류’가 존재한다면 그 세계는 하나의 세계로 성립될 수 있을까?

이 세계에서 ‘저주’는 그런 오류를 가려주는 개연성의 덩어리였다.


‘뭐지? 저주가 이렇게 쉽게 걸리는 거던가? 아닐 텐데?!’


저주는 절대 쉽게 걸리는 게 아니다.

걸리는 자는 물론, 거는 자에게까지 적지 않은 대가를 요구하는 게 바로 저주다.


또한 명확한 대상을 요구하기에 대상이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범위가 광범위하면 광범위할수록 저주의 위력은 약해진다.

그 간극을 메우려면 더욱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저주 중에서 지금 내가 걸린 외신의 저주는 여타 저주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걸 저주라고 분류할 수나 있을까?


외신의 저주... 일명, 세계 그 자체에 새겨진 흔적.

저주 자체가 이 세계의 어떤 순환이 되어버린 구조다.


그런 만큼 이것을 고작 머릿속에서 떠올린 정도로 걸린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방인, 어디가 안 좋습니까?”


내가 돌연 얼굴을 와락 찌푸리자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선배가 걱정된다는 듯 조심히 내게 물어왔다.

꽤 오랜 시간 사색을 이어간 것 같았지만 ‘사고 가속’ 덕분에 실제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제, 제아- 아으......?”


나는 내가 저주에 걸린 것 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많이 긴장하셨나 보군요. 혼내려고 부른 건 아니니 그리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아까 교육도 받으셨으니 갑자기 혀가 굳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요.”


광원 선배는 세뇌의 영향으로 내가 원로의 위대함 앞에 굳어버렸다고 생각했는지 내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해줬다.


‘긴장 한 건 맞지만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여전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외신의 저주, 그 대표적인 특징인 임의 침묵... 벌써 이 정도까지 진행될 줄이야...!’


‘임의 침묵’, 그것은 저주에 대한 ‘발설 금지’와 ‘망각’을 뜻한다.

외신의 저주에 걸린 자는 자신이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으며, 종국에는 스스로가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잊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임의 침묵도 거의 반년은 지나야 나타나는 현상.


‘저주의 진행이 끝에 이르면 숙주의 행동마저 조작한다는데 이 정도 속도면...!’


하루 만에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닐까?


원작에선 외신이란 존재가 너무 거대하여 함부로 이 세계에 개입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저주의 형태로 세계에 관여한다고 설명했다.


‘멀리 갈 것도 없어. 그 예시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까.’


이강현 원로, 그는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지만 저주로 인해 자신의 아들을 죽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다.

이게 바로 내가 이 사람을 동정하게 된 두 번째 이유...


‘내 코가 석잔데 소설 속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어쩌잔 거냐...’


그래도 해주가 불가능한 저주는 아니다.

무척 까다롭긴 하지만, 이 세계에는 어찌 보면 ‘저주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감시자’들이 존재하므로.


그리고 무척 다행스럽게도 조직의 원로 중에서도 감시자가 한 명 있었다.

물론 만난다 해도 원로인 그가 일개 말단 조직원에 불과한 나를 위해 힘을 써줄 지는 미지수였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현재의 나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미래의 일은 미래에 내게 맡기면 된다.


“부,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아무리 사고가속을 쓰는 중이라지만 생각이 너무 길어졌다.

나는 그들이 이상함을 느끼기 전에 재빨리 허리부터 숙였다.


“그래, 너도 슬슬 준비에 들어가야겠지. 예언에 대해선 알고 있나?”


이강현 원로는 거두절미 없이 나를 부른 용건부터 말하였고 나는 허리를 펴지 않은 채 이야기를 들었다.


“직접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제야 허리를 펴며 최대한 무난한 답을 말했다.

이 예언은 내가 자유를 속박당하면서도 조직을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벗어나고자 한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조직은 재앙이 일어나는 시기와 종류를 모두 알고 있다.’


나처럼 원작의 지식을 갖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트로이의 왕녀, 비운의 예언자 카산드라.

태양의 신 아폴론에게 예언 능력을 받았지만, 그 사랑을 거절한 대가로 저주도 함께 받은 비운의 여인.

그녀가 작성한 예언서, 그 원본이 바로 조직에 있다.


그렇게 아주 오래 전부터 미래의 정보를 쥐어온 조직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이 정보들을 바탕으로 언제나 막대한 이득을 취해왔으며 지금도 이렇게 재앙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 중에 있다.


‘인류의 크나큰 사건마다 그 뒤에 있어왔다는 조직... 만약 조직이 없었다면 인류는 진작 멸망했겠지.’


이곳은 분명 악의 조직이자 직원들을 개처럼 굴리는 블랙 기업이긴 했지만, 양립 불가능할 정도의 악(惡)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선(善)도 아니지만...’


어쨌든 예언을 가지고 오랜 기간 암약하며 세를 불려온 만큼 조직의 저력은 가히 대단한 것이어서 일견, 재앙을 대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전에 막아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보이지만, 소설 속 등장하는 조직의 모습은 이와 대비되게 무척 수동적으로 묘사된다.


사전에 막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최소화하거나 재앙이 일어난 이후에 대응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주인공에게 역할을 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설정오류도 아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이 세계는 신탁을 통해 미래를 알아도 바꿀 수가 없으니까.’


이것은 ‘상실의 역사’와 함께 이 세계관의 주요 설정 중 하나로 ‘자기실현적 예언’, 혹은 ‘자성예언(自成豫言)’이라고 불리며, 누군가 예언을 막고자, 혹은 바꾸고자 한다면 그 순간 자신이 그 예언을 일어나게 하는 주체가 되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볼까?

우선 이 세상 어딘가에 세상을 공포에 몰아넣은 무적의 마왕이 있다고 치자.

마왕은 돌연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시골 출신의 듣보잡 용사에게 살해당한다는 예언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예언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 마왕은 당연하게도 어떻게든 미래를 바꾸고자 발버둥 치리라.


부하도 보내고, 용사의 마을도 파괴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행동들은 결국 기폭제가 되어 오히려 예언의 실현을 앞당기게 된다.


용사는 복수심에 칼을 갈 것이며, 마왕의 부하들을 죽이며 날카롭게 벼려져 결국 마왕의 심장까지 닿으리라.


‘물론 아무것도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죽겠지만...’


이것이 바로 예언을 일어나게 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의 의미.

플라시보 효과와도 비슷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달랐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방법이 없었다면 원작의 지식을 그저 알고 있을 뿐인 자신의 무력함에 주저앉았을 거다.

하지만 원래 광원 선배에게 가야했을 역할을 내가 맡게 된 것처럼 운명을 바꿀 방법이 존재한다.


“그런가... 원본을 주진 못하지만 그 해석본 정도는 읽게 해주마. 예언의 내용을 함부로 퍼트리면 어떻게 되는지 정도는 너도 알고 있겠지?”


강현의 말에 나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어떻게 되는지 아냐고?

설마 그걸 나한테 물은 건가?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이 예언의 내용을 함부로 퍼트린다면 ‘카산드라의 저주’를 받게 된다.

보다 정확히는 카산드라에게 예언의 힘을 내려준 ‘아폴론의 저주’를...


보통은 그 예언을 ‘불신’하는 정도에서 그치겠지만, 운이 나쁘면 정신이 파괴되고 만다.

외신의 저주만큼은 아니더라도 신이 직접 내린 이 인식을 개변시키는 최상위 저주는 함부로 예언을 퍼트리는 자를 미치게 하기에 충분한 힘이 있었다.


‘이 저주에 걸리면 저주가 카산드라의 목소리를 빌어 이렇게 속삭인다고 하지. 「아폴론이여, 아폴론이여. 길의 신이여, 나의 파괴자여!」’


그리스 어로 ‘아폴론(Apolon)’은 ‘파괴자(apolon)’와 같은 철자를 지닌다.

카산드라의 절규를 들은 사람은 마치 밴시의 비명을 들은 사람처럼 제 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미치거나, 죽고 만다.


‘이성의 확신을 보유한 나도 미칠까...?’


순간 그런 호기심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직접 시험해볼 깜냥은 없었다.


‘태양’이라는 최상위 신격을 가진 존재가 자신의 신성 대부분을 바쳐 자신의 사랑을 좋을 대로 이용한 인간에게 내린 저주는 분명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일 테니까.


작중 주연들 중 하나도 이 예언에 대해 알고, 이것을 대중들에게 알리며 재앙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으나 결국 저주를 받아 미쳐버리지 않았는가.


‘꽤 좋아하던 등장인물이라서 명확히 기억해.’


2부의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최악(最惡)과 차악(次惡)만 보이는 선택지에서 어떻게든 최선(最善)의 선택지를 찾아내는... 심지어 만들어내기까지 하는 그런 인물이라 나도 무척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이 광화는 영원토록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언이 이루어지면 광화는 저절로 풀리게 된다.

이미 이루어진 예언을 불신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작을 아는 나는... 이 ‘예언’이란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알았다.

예언의 메커니즘과 세상에 퍼진 예언서의 종류, 그 주인이 누구인지까지도.


“그래서 어떤 예언서를 주실 건가요?”

“어떤... 예언서라니...?”


푸른 안광을 번뜩이며 잔뜩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내오는 이강현 원로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갸아아앍! 시, 실수했다!!’


마침내 원로를 마주했다는 사실에 너무 우쭐했던 모양이다.

이건 조직 내에서도 아는 이가 얼마 없는 정보였다.


당장 광원 선배만 하더라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고 있지 않은가.


강현이 조직이 소유한 ‘카산드라의 예언서’와는 다른 대현자 미미르가 직접 작성한 ‘예언의 서’의 주인이란 사실은... 적어도 나 같은 말단이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어떻게든 당혹감을 감추며 최대한 의연한 척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의심의 눈초리가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사바나 최고 원로에게 들었나 보군.”


그때 그의 입에서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이름이 나왔다.


‘사바나 최고원로? 내가 그런 거물과 접점이 있었어?!’


사바나 최고 원로, 풀네임은 ‘사바나 위치엔드(Witch End)’.

이번 대의 에테르의 원로이자 그 성(姓)처럼 이 세계에 남겨진 최후의 마녀로 지금 시점에선 부정할 수 없는 세계관 최강자 중 한 명이다.


그리고 그녀는...


‘훗날 주인공의 대모(代母)... 즉, 후견인이 되지.’


이른바 반드시 친해져야할 핵심인물 중 하나.


아카샤의 원로인 강현도 충분히 최고원로의 후보가 될 수 있지만, 사바나에 비하자면 임기가 50년도 되지 않은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설마 아도니스 원로가 아니라 사바나 원로 밑에서 일했던 거야?!’


아도니스 원로도 분명 원로들 중 가장 긴 역사를 가진 단 셋뿐인 ‘가장 오래된 원로’ 중 하나였지만, 이것은 그저 그 역사를 인정한다는 의미일 뿐, 원로들의 수장인 최고원로와 달리 여타 원로와 크게 차별화된 권한이 없다.


더욱이 아도니스는 이전 최고 원로이자 가장 오래된 원로였던......


‘크윽...!’


생각이 더 진행되지 않는다.

저주의 진행 속도가 상상 이상이다.


어쨌든 아도니스 원로는 ‘그’가 사라지며 가장 오래된 원로의 칭호를 새롭게 이어받았을 뿐, 사바나 최고 원로에 비하자면 격차가 너무 컸다.


“원하는 게 뭐지?”

“원한다면 주실 건가요?”


젠장, 원로에게 말대답이라니...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나보다.

하지만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 호랑이 등에 탄 형국이다.


‘제기랄, 기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간다.’


떨어지면 짓밟혀 죽든, 물어 뜯겨 죽든 그저 죽을 뿐이다.

하지만 다짐과 불안은 별개의 문제였다.


‘쫄린다...’


그 차가운 시선을 마주하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아니, 멎어가는 것 같기도 했다.

원로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긴장이 심화됐다.


언제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며있던 광원 선배도 이 순간만큼은 참을 수 없었는지 감히 자신의 왕을 향해 말대답을 하는 이 후안무치한 녀석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이거... 다시 밥을 혼자 먹게 생겼네. 같이 먹을 때 항상 내 것까지 계산해주는 좋은 선배였는데...’


다음 번 나를 굴리는 사람 중엔 이제 광원 선배도 껴있는 게 아닐까?


원로는 빙하처럼 푸른 눈으로 나를 훑듯이 살폈다.

언뜻 내 말의 저의를 파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알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그건 원로님의 뜻인가요, 아니면 그저 권능이 속삭인 것을 그대로 읊을 뿐인가요?”


때문에 이번엔 이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않을 게 분명하므로.


“무얼... 얼마나 알고 있지?”


언제나 냉정을 잃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냈다.

원체 표정변화가 적어 곧장 알아차리긴 힘들었지만, 권태로운 낯으로 한껏 말을 늘이던 그의 목소리가 조금 빨라졌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길잡이의 왕께선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하신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죠.”


그러면서 나는 앞으로 수없이 짓게 될 ‘흑막의 웃음’을 이날 처음 짓게 됐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세기말 악의 조직의 말단조직원이 되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 1장. 나는야 말단 조직원-8 22.11.05 139 9 14쪽
8 1장. 나는야 말단 조직원-7 +3 22.11.04 163 9 17쪽
7 1장. 나는야 말단 조직원-6 +2 22.11.03 181 7 10쪽
6 1장. 나는야 말단 조직원-5 +1 22.11.02 200 9 12쪽
5 1장. 나는야 말단 조직원-4 +1 22.11.01 262 14 16쪽
4 1장. 나는야 말단 조직원-3 +2 22.11.01 345 15 14쪽
3 1장. 나는야 말단 조직원-2 +4 22.11.01 482 18 13쪽
2 1장. 나는야 말단 조직원-1 +2 22.11.01 731 26 10쪽
1 0. Prologue. +8 22.11.01 716 49 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