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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본의 서재

세계의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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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본
작품등록일 :
2020.01.20 21:43
최근연재일 :
2021.06.22 22:00
연재수 :
25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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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83
추천수 :
12
글자수 :
1,725,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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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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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Episode 13. 굶주린 이리-티가의 산책(3)

DUMMY

오후 3시를 한참 넘긴 시간, 임시 휴교가 끝난 혜성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오랜만에 하교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쉬었음에도 학생들에게 있어 하교란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생기가 넘쳤고, 그들이 지나는 운동장은 마치 미소로 핀 꽃밭과도 같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꽃이 있었다. 학생들은 대체로 옅은 색을 가진 꽃잔디와 같았지만, 유독 강렬한 색을 가진 사람 셋과 오컬트 하나가 있었다.


그들은 아미와 소인, 소민, 그리고 블러드리아였다. 혜성 고등학교의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블러드리아는 자신에게 향한 시선을 확인하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블러드리아라고 했지?”

가까이에서 그녀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아미가 입을 열었다.


“네, 네! 아미 선배님.”

깜짝 놀란 블러드리아는 몸을 움찔거렸다. 여전히 긴장한 듯한 그녀의 모습에 아미는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네가 다녀야 할 학교잖아?”

“그, 그렇죠.”

블러드리아는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걸어도 돼.”

“아, 네.”

그럼에도 블러드리아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이미 가득한 긴장을 다시 삼키며 심호흡했다.


“리아, 괜찮아?”

소민의 시선은 그 누구보다도 걱정이 가득했다. 소인도 그녀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단지···”

“단지?”

소인과 소민이 동시에 말했고, 아미는 눈을 빛내며 블러드리아를 응시했다.


“아직도 안 믿겨서 그래.”

그 순간, 세 사람은 걸음을 멈췄다. 블러드리아는 몇 걸음 앞으로 가고 나서야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난 또 뭐라고.”

소인은 피식거리며 블러드리아에게 다가갔다.


“누가 괴롭힌 줄 알았잖아.”

“괴, 괴롭히지는 않았어. 단지 애들이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 것 같았어.”

블러드리아는 질문 공세가 끊이지 않았던 쉬는 시간을 상기했다. 폭포수와도 같았던 수많은 질문. 처음 겪는 상황의 연속에서 블러들리아는 쉽게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전학생이잖아. 더군다나 세상 그 어디에서도 만나본 적 없는 특별한 전학생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다들 말 걸고 싶겠지.”

소민 역시 그녀에게 다가와 미소를 지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블러드리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나도 궁금한 게 많은데, 괜찮을까?”

블러드리아의 앞으로 다가간 아미는 장난스럽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블러드리아는 그녀가 부담스럽게 느껴졌지만, 특유의 예쁜 미소 덕분일까, 그런 그녀가 차츰 익숙해지는 느낌이었다.


“네, 네. 아미 선배님.”

“너무 딱딱하게 말할 필요는 없어.”

아미는 미소를 지었고, 블러드리아는 긴장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구나 처음은 어려운 거야. 그리고 방금도 말했지만, 앞으로 네가 다녀야 할 학교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

“그, 그렇겠죠?”

“물론이지! 만약에 누가 힘들게 한다면 나한테 연락해.”

자신만만한 아미의 모습. 블러드리아는 아직 그녀가 어색했지만, 묘하게 믿음직스러운 모습에 긴장되었던 마음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아미 선배···”

블러드리아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아미를 우러러보았다. 아미는 그런 블러드리아에게 팔짱을 꼈다. 조금이지만 그녀들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 같았다.


“아미 선배, 그래서 리아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뭐예요?”

소민이 입을 열었고, 아미는 그 상태로 블러드리아를 바라보았다.


“힘들지 않았나 싶어서.”

“힘들다뇨?”

영문을 모르는 소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늘의 왕국 일로 부재중인 동안 블러드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나도 한동안 병원에 있었잖아. 가끔 소인이한테 놀러 갔거든? 그런데 갈 때마다 블러드리아가 있었어.”

“그랬었죠.”

소인은 그때를 생각하며 아미와 블러드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잘 모르는 애라서 인사 정도만 했는데, 나중에 소인이한테 들어보니까, 입원한 큰 형님? 맞지?”

아미의 물음에 소인과 블러드리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민은 그녀가 말한 ‘큰 형님’이 자신의 오빠인 거인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까, 큰형님도 간호하고, 소인도 간호하면서 혼자서 학교 갈 준비를 마쳤다는 거잖아?”

“선배, 그거 블러드리아, 혼자 한 건 아니고, 저도 도와준 거예요.”

소인이 손을 들었고, 블러드리아는 그를 보며 잠깐이지만 얼굴을 붉혔다.


“그래도 기특하더라고. 힘든 상황에서도 열심히 살면서 노력하는 게 보기 좋았어.”

“그, 그랬었군요.”

소민은 어두운 눈빛으로 블러드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블러드리아는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소민이가 무사히 돌아온 게 제일 기뻐.”

“다, 당연하지!”

소민은 한껏 우쭐대며 도도한 척 거들먹댔고, 잠깐 드리웠던 어두움은 금세 사라져버렸다.


“네가 포우, 별거 아니더라고!”

“뭐?”

소민의 자만에 소인은 순간적으로 귀를 의심했다.


“네가 포우라고?”

아는 이야기가 들리자마자 그들에게 다가오는 루나.


“보름 선배?”

“···누나라고 부르랬지.”

루나는 한껏 서운함을 표출했고, 소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보름이구나.”

“오! 아미가 날 기억해줬어!”

루나는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모았다. 그녀가 아미를 보는 시선은 경이로움 그 자체를 품고 있었다.


“아, 오랜만이야, 나 기억하지?”

이어 루나의 관심은 블러드리아에게 향했다.


“아, 네. 강변에서 뵌 분이죠?”

“맞아. 나는 루나라고 해. 반가워!”

루나는 반가움 가득한 손을 흔들었고, 블러드리아는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블러드리아라는 애가 전학 왔다길래 혹시나 했는데, 역시 너였구나.”

“아, 네. 잘 부탁드려요.”

이미 눈에 익은 사람이어서일까, 블러드리아는 마냥 긴장하지 않았다. 물론 거리감 없이 다가오는 루나의 행동에 그녀는 다시금 긴장해버렸다.


“그래서 보름아, 네가 포우를 알고 있니?”

“응! 그거 우리 자기가 쓰러뜨렸대.”

“자기?”

아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혁 씨가 쓰러뜨렸다는 말씀이죠?”

“응!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멋지게 쓰러뜨렸을 거야!”

감격에 젖은 루나의 표정. 소인은 그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강혁 씨가 그렇게 말했어요?”

눈을 깜빡거리는 소민. 곧,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응! 덕분에 자랑할 게 생겼어.”

“내가 쓰러뜨렸는데.”

소민은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소인은 정색하며 소민을 노려보았고, 당황한 소민은 콧바람을 세게 쉬며 눈을 크게 떴다.


“아냐, 진짜야!”

“야, 하다못해 진혁이 형이 쓰러뜨렸다고 하면 믿겠다. 거짓말도 믿을 걸 해야지.”

“이게 진짜, 누나를 못 믿어?”

새삼 억울해 보이는 소민. 소인은 그녀에게 입 모양으로 조롱 섞인 긍정의 의미를 표했다.


“저기···”

아미가 손을 들었고, 모두의 시선은 그녀에게로 향했다.


“네가 포우는 우리 시영 씨가 쓰러뜨렸다는데?”

아미는 루나와 소인, 소민을 흘겨보았다. 세 사람은 시영의 이야기에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럼, 누가 쓰러뜨린 거죠?”

블러드리아가 입을 열자, 소민, 루나, 아미가 손을 들어 자기가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을 외쳤다.


“···결과적으로 진혁이 형은 아니라는 거네?”

“해방기도 안 쓰는 사람이 네가 포우를 쓰러뜨릴 수 있을 리 없잖아.”

소민은 짜증스럽게 말했고, 소인은 피식거렸다.


“야, 아무리 그래도 네가 쓰러뜨렸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아니 진짜 하···”

소민은 진심으로 억울해 보였다. 설상가상 강혁과 시영은 누군가 그들을 지지해주었지만, 막상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소민이를 믿어.”

조심스럽게 입을 연 블러드리아. 소민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로 향했다.


“소민이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

이내 그녀는 미소를 지었고, 감동한 소민은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훌륭한 우정이로군요.”

그런 그들에게 누군가 손뼉을 두드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교복처럼 깔끔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낯선 사람. 그들은 모두 그를 처음 보았지만,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만은 모두가 똑같았다.


“누구세요?”

소민이 대표로 입을 열자,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티가라고 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소민 씨.”

“절 아세요?”

소민은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깜빡거렸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소인 씨와 더불어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티가의 미소. 소민은 그가 미심쩍었지만, 일단은 손을 잡고 악수했다.


“그리고 아미 씨? 개인적으로 팬입니다.”

이어 아미에게 내민 손. 아미는 익숙한 듯 형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손을 잡았다.


“옆에 계신 분은 강혁 씨의 지인인가요?”

“우리 자기를 아세요?”

루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점심에 만나 뵈었습니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습니다.”

티가는 한숨을 쉬었고, 루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점심에는 좀 바쁘죠. 그런데 우리 자기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죠?”

“그냥 강혁 씨에 대해서 알고 싶었습니다.”

아쉬운 듯 한숨을 쉬는 티가. 루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눴고, 그것은 강혁의 이야기였다.


이어 티가는 아미와 쌍둥이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블러드리아는 그에 대해 물었고, 티가 역시 자신에 대해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역시, 부자셨군요.”

소민은 그를 보며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아하하, 거짓말은 아니지만, 기왕이면 부자라는 것보다, 티가라는 사람으로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티가는 미소 지은 채 모두를 바라보았다. 그는 낯설었지만, 친절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인 덕분에 모든 사람이 그를 나쁘지 않게 생각했다.


어느덧 이야기는 마무리되었고, 각자 자신들의 길로 걷기 시작했다. 티가는 그들이 모두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순조롭군.”

그렇게 티가도 자리를 떠났다. 그는 혜성에서의 짧은 산책에 만족을 느끼며 이미 체크인을 마친 호텔로 돌아갔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던 중, 블러드리아가 입을 열었다. 한참을 생각한 듯 굳어버린 블러드리아의 표정.


“뭐가?”

“그 티가라는 사람 말이야.”

블러드리아는 소인과 소민을 번갈아 보았다.


“이상한 건 없었잖아? 유마 교수님의 후원자면서 해방기에 대해 알고 있고, 우리 오빠가 입원한 것도 알고 있을 정도로 우리한테 관심이 많아 보이던데?”

소민은 소인을 바라보았고, 소인 역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굳이, 거인 오빠가 입원한 사실까지 알 필요가 있을까?”

“나쁜 사람 같지 않아 보였어.”

소인은 블러드리아를 보며 콧바람을 내쉬었다.


“우리 형 다친 것도 걱정해주면서 힘내라고 하는 사람이잖아? 더군다나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그렇게까지 격려해주는 사람이었어.”

“나는 그게 이상해서 그래. 그리고 그 사람 뭔가 느낌이 안 좋아.”

블러드리아의 표정은 심각했고, 쌍둥이는 서로를 바라보며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긴장 많이 해서 그런 것 같아.”

이내 블러드리아를 바라보며 입을 연 소인.


“집에 가서 푹 쉬자.”

소민은 미소를 지었고, 블러드리아는 그녀를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비유하자면, 나랑 비슷한 사람 같아.”

용기를 낸 블러드리아의 한 마디. 소민과 소인은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거렸다.


“리아같은 사람이면 좋은 사람이라는 거잖아?”

“오늘 밥은 내가 만들게. 블러드리아도 꽤 농담 잘하네?”

“얘들아···”

순간, 블러드리아는 그 어떤 말을 꺼내도 이들이 가진 생각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랬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블러드리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같은 시각 엔트로 돌아간 루나는 가게에 걸린 팻말을 확인하고는 묘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재료 소진이라니? 내가 아침에 확인 다 했는데?”

그녀의 눈동자는 가게 구석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는 강혁을 비추고 있었다.


“자기야, 무슨 일 있어?”

즉시 인상을 찌푸린 루나는 강혁에게로 다가갔다. 강혁은 루나를 발견하자마자 긴장되었던 표정이 풀렸다.


“루나, 별일 없었지?”

심각함을 말하던 그의 눈동자에 루나가 들어온 순간, 안정을 되찾은 것처럼 평온해졌다. 루나는 그의 갑작스러운 심리 변화에 도통 적응하기 힘들었다.


“무슨 일인데?”

“아냐, 별일 없어.”

침착하게 미소 짓는 강혁. 루나는 그를 흘겨보았고, 그럴수록 강혁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특별히 믿어줄게. 그런데 진짜 재료 소진이야?”

“···사실 오늘 온 손님 중에서 두 명 정도 특이한 사람을 만났었거든?”

“두 명밖에 안 되네?”

루나는 피식거리며 가방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한 명은 불고기를 많이 먹은 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은 나에게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어.”

“어머, 전자는 고마운 손님인데, 후자는 몹쓸 사람이네?”

루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강혁을 어루만지듯 바라보았다. 마치 자기 물건에 누가 손을 댄 것처럼 언짢은 미소를 짓는 루나.


“여행 다녀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조금 예민해졌나 봐. 격투가 시절 날 알아보던 사람도 많았었는데, 괜히 쓸데없이 걱정돼서.”

“그래, 힘들만하지.”

루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강혁은 그녀의 손길 덕분에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오늘 하루는 같이 있자. 참, 심야 식당도 안 할거지?”

“응. 오늘은 쉬려고.”

“그래, 잘 생각했어.”

가방을 든 루나는 강혁을 데리고 2층으로 향했다. 가방을 놓고 다시 내려온 루나는 가게 문을 잠그고 다시 올라왔다.


“쉬면서 수다나 떨자.”

“그, 그래.”

강혁은 미소를 지었고, 루나는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으며 하늘의 왕국을 생각한 루나는 문득 티가를 떠올렸다.


“오늘 네가 포우 이야기를 하다가, 티가라는 사람을 만났어.”

그 순간, 파도치듯 주먹을 쥔 강혁. 한순간 느껴진 기백에 놀란 루나는 강혁을 바라보았다.


“티가?”

“으, 응. 티가.”

루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그에게서 무언가 느껴졌지만, 막상 달라진 건 없었다.


“별일 없었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는 강혁. 공교롭게도 루나는 그의 그런 모습을 너무나도 잘 느낄 수 있었다.


“응. 그냥 자기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별 이야기 안 했어.”

“다행이다.”

강혁은 안심했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루나는 처음 보는 강혁의 모습에 의문만을 느꼈다.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은 바다 같은 남자가 강혁이었다. 그나마 동요하던 것도 최근 자기 정체성으로 고뇌하던 때였다. 대부분 잘 넘기던 그가 이렇게까지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루나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은 시각, 아미는 오랜만에 이끌림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다친 덕분에 당분간 휴식을 취하라는 소속사 사장의 명령이 있었다. 부탁이나 다름없는 명령이었고, 의외로 그녀에겐 전화위복인 상황이었다.


그것은 아마 시영의 구체를 만졌을 때부터였다.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고 완전히 나아버렸기에 굳이 휴식을 취할 필요는 없었다. 아미는 공식적으로 부상이었기에 학교에서도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었다.


하지만 집에서 할 일은 없었다. 만약 시영이 있었더라면 아미는 그를 찾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그가 며칠간 하늘의 왕국에서 지냈었기에 아미는 혼자서 심심하게 작곡에만 전념했었다.


그리고 시영이 돌아왔음이 확인된 지금, 아미는 오랜만에 그를 찾아내었다. 시영은 공원 정자에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시. 영. 씨?”

이름 하나하나에 악센트를 넣으며 시영에게 다가간 아미. 마음에서부터 느껴지는 이끌림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시영의 집중은 끊겨버렸다. 그 덕분에 그의 주위를 회전하던 구체는 사라져버렸다.


“아미 씨?”

시영은 오랜만에 보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오랜만에 보는 그의 미소에 아미도 미소를 지었다.


“소식은 들었어요.”

“소식이라뇨?”

시영은 자연스럽게 옆에 앉은 아미를 바라보았다.


“강도를 잡았다면서요? 세계의 환상이 사람을 구했다. 같은 제목의 기사가 엄청 많아요!”

아미는 스마트폰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화면에서는 세계의 환상의 기사가 있었다. 하나같이 읽음으로 표시된 기사에 당황하는 시영.


“아, 벌써 들켜버렸네요.”

시영은 머쓱한 듯 입꼬리를 올렸지만, 그 입꼬리가 내려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점점 어두워지는 표정. 그런 그를 바라보는 아미의 시선.


“힘들죠?”

“네? 아, 아녜요.”

시영은 손을 저었지만, 아미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거짓말 못 하시네요. 얼굴에 힘들다고 드러나 있어요.”

아미는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가볍게 찔렀다.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대충 힘든 건, 알고 있어요. 여러 일이 많았잖아요?”

아미는 아찔했던 그때를 생각했다. 당장 기억나는 것만 해도 괴도 사건, 네가 포우.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위험한 때였다.


“저도 힘들지만, 시영 씨가 더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괜찮아요.”

시영은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그조차 자기감정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아미는 그를 안타깝게 여겼다. 애초에 누군가를 속이지도 못하는 그가 자기를 속이려는 어리석음은 그녀에게 있어 슬픔으로 다가왔다.


“···힘든데도 세계의 환상으로 변신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변신할 때마다 기억을 잃는다면서요?”

“그렇죠.”

시영은 한숨을 쉬었다.


“기사에는 시영 씨가 했던 일도 적혀 있었어요. 용감한 검은 모자의 청년이 시민을 구하려고 했지만, 잔해에 깔려버렸다.”

아미는 기사 중 시영의 행적이 적힌 것을 읽었다. 시영은 긴장을 삼키며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세계의 환상이 모두를 구했다.”

단편적인 사실만을 적은 기사.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사의 내용은 거짓을 말했고, 일종의 환각이나 다름없는 진실로 포장되어 있었다.


“시영 씨는 기억을 걸고 사람들을 구했는데, 이따위로 적고···”

“아녜요. 의도한 거예요.”

“예?”

의외의 발언에 당황한 아미. 막상 그가 진심이 표정으로 드러났기에 그녀의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 도시는 지금 어려운 상황이에요. 부패 경찰도 있고, 여러 가지 풀리지 않은 문제 때문에라도 절대 평화롭다고는 말 못 해요.”

“그건 그렇죠.”

아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강도를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하지만 굳이 세계의 환상으로 변한 이유는 별거 없어요.”

스스로 피식거린 시영은 곧 말을 이어갔다.


“세계의 환상, 그 존재가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하잖아요? 도시의 문제가 산재해있지만, 세계의 환상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잃지 않게 해주죠. 사람들에겐 시영이라는 사람보다 세계의 환상이 강도를 잡는 게 훨씬 의미가 각별할 거예요.”

시영은 세계의 환상에게 열광하던 모든 사람을 떠올리며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게 기억까지 걸고 해야 했을 일일까요?”

“덕분에 사람들이 미소를 지을 수 있었잖아요. 그거면 충분해요.”

시영은 아미를 바라보며 해맑게 미소 지었다. 그의 표정은 티 없이 해맑았지만, 아미는 그 깨끗함이 결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미소가 저만을 향하면 좋을 텐데요.”

“예?”

“아녜요.”

아미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시영은 그녀가 애매하게 속삭인 탓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저는 시영 씨에게 언제나 미소를 지을 수 있어요.”

“감사해요. 하지만 아미 씨의 미소는 저만의 것이 아니잖아요?”

“예?”

아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그게 무슨···”

“페어리의 리더이자, 모두의 아이돌이잖아요. 그 예쁜 미소는 저만의 것이 아니에요.”

“아, 아녜요, 시영 씨.”

아미는 반박하려 했지만, 그저 해맑게 웃는 시영의 표정에 지그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항상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아녜요. 굳이 그걸로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요.”

아미는 언짢았지만, 최대한 심호흡하여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


“그런데 어디 있다가 오신 거예요? 몸은 괜찮으세요?”

“몸은 괜찮아요.”

아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학교 갔어요.”

“아, 오늘부터 다시 등교 시작했었죠?”

“수업 듣고, 소인이네랑 같이 오다가 티가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티가?”

시영은 한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티가.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결코 낯설지 않은 이름. 하지만 한없이 낯설기만 한 그 이름.


그는 반사적으로 액셀 메모리 스크롤을 꺼냈다. 뜬금없는 물건에 아미는 의문을 표했고, 시영은 스크롤을 바라보며 티가라는 이름을 계속 되뇌었다.


“방금, 티가라고 했어?”

그 순간, 그들을 향한 낯선 목소리. 시영과 아미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고, 그들의 눈동자로 들어온 아란은 마침내 찾은 시영에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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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Episode 14. 깨어난 용-정의의 이름으로(2) 21.06.22 31 0 12쪽
252 Episode 14. 깨어난 용-정의의 이름으로(1) 21.06.21 25 0 16쪽
251 Episode 14. 깨어난 용-미르(3) 21.06.19 21 0 14쪽
250 Episode 14. 깨어난 용-미르(2) 21.06.18 21 0 13쪽
249 Episode 14. 깨어난 용-미르(1) 21.06.17 19 0 15쪽
248 Episode 13. 굶주린 이리-아랑(3) 21.06.13 20 0 17쪽
247 Episode 13. 굶주린 이리-아랑(2) 21.06.12 21 0 18쪽
246 Episode 13. 굶주린 이리-아랑(1) 21.06.11 24 0 11쪽
245 Episode 13. 굶주린 이리-무엇을 믿어야 하는가?(2) 21.06.09 23 0 20쪽
244 Episode 13. 굶주린 이리-무엇을 믿어야 하는가?(1) 21.06.08 25 0 13쪽
243 Episode 13. 굶주린 이리-목소리(2) 21.06.06 25 0 13쪽
242 Episode 13. 굶주린 이리-목소리(1) 21.06.05 29 0 21쪽
241 Episode 13. 굶주린 이리-배틀로얄(3) 21.06.04 29 0 22쪽
240 Episode 13. 굶주린 이리-배틀로얄(2) 21.06.03 32 0 15쪽
239 Episode 13. 굶주린 이리-배틀로얄(1) 21.06.01 32 0 21쪽
» Episode 13. 굶주린 이리-티가의 산책(3) 21.05.31 27 0 22쪽
237 Episode 13. 굶주린 이리-티가의 산책(2) 21.05.30 25 0 16쪽
236 Episode 13. 굶주린 이리-티가의 산책(1) 21.05.30 23 0 14쪽
235 Episode 13. 굶주린 이리-마술사들의 갈등(3) 21.05.29 27 0 13쪽
234 Episode 13. 굶주린 이리-마술사들의 갈등(2) 21.05.27 24 0 13쪽
233 Episode 13. 굶주린 이리-마술사들의 갈등(1) 21.05.26 25 0 14쪽
232 Episode 13. 굶주린 이리-생명의 냄새(3) +2 21.05.23 49 1 15쪽
231 Episode 13. 굶주린 이리-생명의 냄새(2) 21.05.22 27 0 13쪽
230 Episode 13. 굶주린 이리-생명의 냄새(1) 21.05.20 23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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