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금찬옥(1)
“아니 일어서 가는데...”
“네.”
기범이 무슨 사연이 있을까 하고 궁금해 집중했다.
“그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고개 숙이고 가더라.”
“네.”
기범은 종환의 다음 나올 말을 기다렸다.
“...”
“...”
종환은 말없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었다.
“사장님 말씀 안 해주시나요?”
“뭘?”
“고개 숙여서요?”
기범은 종환이 아까 하다 만 것 같은 말을 이어 해주길 바랐다.
“뭐가 고개 숙여서요야?”
“아니 뭐 그 사람 어땠는지 말해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다 말했잖아. 그 나이 지긋한 사람이 나보다 고개 더 숙이고 가더라, 그건 좀 머리가 얼얼하던데.”
“예?”
기범이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몰라 물었다.
“나도 급하게 고개 더 숙인다고 그거 더 놀랐네.”
“그게 다예요?”
“그럼?”
“...”
뭔가를 잔뜩 기대했던 기범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 기범에게 종환이 말했다.
“기범아.”
“예?”
“넌 그럴 수 있냐?”
“뭐 어렵다고요.”
아무렇지 않듯이 대답했던 기범이었다. 그러다 가만 생각해 본 기범이 대답했다.
“대단하네요...”
그다음에 한마디를 더했다.
“아주 여유가 넘치시나 봐요.”
그 말에 종환이 대꾸했다.
“뭔 여유가 넘쳐 그냥 날 애들 보듯이 하는 거지.”
“사장님 그래서 생각하신 건 잘 되셨어요?”
아직까지도 기범은 종환이 왜 그 사람을 만나려 했는지 몰랐다.
“뭐 어지간히.”
“다행이네요.”
그 중간 사이 다리를 놓는다고 나름 고생을 했던 기범이 뿌듯해 말했다.
“근데 어떤 거 하신 거예요?”
기범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지간히 이야기가 된 건 방금 알았지만, 무엇이 어떻게 이야기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 기범이었다.
종환의 대답은 심플했다.
“그 양반이 카지노 하시는 양반이시니. 노름하자고 하고 왔지.”
“노름이요?”
불법적인 말에 기범 눈이 크게 커졌다.
“사장님 뭐 하시게요? 도박하시게요?”
“아니.”
“그러면요?”
“배팅을 하나 하라고 했어. 그 양반께서 절대 안 된다고 자신하는 일이 있다기에, 크게 한번 걸라고 했다.”
기범은 종환이 어떤 말을 하는지 몰랐다. 허나 노름이라고 하고 상대방이 크게 걸었다고 하니, 지레 걱정이 된 기범이 서둘러 물었다.
적어도 지금 회사 자금 운용에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걸어요? 사장님은 뭘 거셨는데요?”
기범이 걱정스레 물었다.
“없어.”
“예?”
“아무것도 안 걸고 왔다고.”
기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상대는 왜 걸었대요?”
이제껏 여태 나눈 대화 분위기를 보면 분명 종환은 그날 무언가를 얻어 왔었다. 이는 종환 옆에 꽤 오래 있었던 기범이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신했거든.”
깜짝 놀란 기범이 답했다. 맨 처음은 기범은 종환이 자신의 확신을 말하는 줄로 알았다.
“네? 확신이요?”
“그 회장님도 앞으로의 일로, 승부를 다 보기 전엔 이길 때 도취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아시겠지.”
종환은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어떻게 보니 소위 완벽하게 작전을 쳐버린 그런 꼴이 되었다.
뭐 그렇다고 상대에게 피해를 주거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게 아닌 싸게 싸게 도움 좀 받자는 거였다.
종환이 기범 앞에서 기분 좋고 아주 음흉하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누가 이기는지 보시라지요’
***
도원도 그랬지만 종환도 그 도원 회장과 내적 친밀감이 꽤나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종환은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기범아 그러고 보니까 그 도원 회장님 만난 날 잘 들어갔냐?”
“뭐 잘 들어가고 뭐 할 게 뭐 있습니까.”
“보니까 차도 회사에 갖다 놓고 다시 퇴근했던데.”
“사장님 회사 들렀다가 퇴근하셨습니까?”
서로는 서로의 그 시대의 열의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그때는 참 누구든 다 자기희생적으로 일하곤 했었다.
“잠깐 들렸지, 기범아.”
“예”
“미원 연락 좀 해봐라.”
“예 미원이요?”
종종 나오는 종환이 뜬금없이 진행시키는 일이었다.
“응”
“아 예...”
일단 대답부터 하고 잠시 생각해 본 기범이 물었다.
“뭐라고요?”
“어?”
종환도 그런 생각은 제대로 안 해봤는지 바로 대답을 못 주었다. 일단 정확한 생각보다는 말과 몸이 먼저 움직이는 종환이었다.
이제야 잠깐 생각한 종환이 답했다.
“밥 먹자고 해.”
“밥이요?”
“저번에 그 호텔 회장님 만나러 갔을 때 호텔 밥 맛있더라.”
“어...”
종환이 단순히 말해주는 게 호텔 밥이 맛있었다는 소리였던지라, 잠깐 기범이 아무 생각을 못 해 말이 멈췄다.
“거 본사는 여기 서울에 있다며?”
“예.”
“자리 못 만들겠냐?”
“한번 저번에 명함 받은 데 물어는 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범은 생각했다.
‘이게 되려나?’
***
종환이 오랜만에 사무실 한 켠에서 타자기를 쳤다.
이동식 책상 위에 올려둔, 꽤 오래 쓴 타자기가 종환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글자를 뱉어내고 있었다.
맛나: 개운함 vs 다시다: 천연
타자기 옆에는 기범이 스크랩 해 둔 잡지광고와 비디오테이프 몇 개가 놓여있었다.
2개의 각각의 비디오테이프에는 기범이 자기 동생들을 시켜 녹화한 맛나와 다시다의 tv 광고가 잔뜩 들어있었다.
기범이 정갈하게 정리해 건넸던 그 자료들이 책상 위에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다는 건 종환이 그것을 몇 번이나 들춰봤다는 거였다.
‘이거 이름부터 완전히 졌네.’
하나는 맛있다라는 글자에서 온 맛나였고, 또 하나는 음식재료 다시마에서 따온 다시다였다.
타자기를 치던 종환이 이내 손을 떼더니 옆 종이에 볼펜으로 무언갈 차례로 적었다.
‘정리해서 보내줄 것도 없이 너무 명확하잖아.’
종환이 적고 있는 건 간단했다.
시장, 1910년부터.
소비자, 용도를 모르지 않음.
→소비자 선택, 최소한 나쁘지 않은 것.(필수)
그렇게 딱 세 줄만 적어본 종환이, 타자기에 나오던 종이를 힘으로 뽑더니 그 종이 위에 글자에 동그라미를 딱 쳤다.
맛나: 개운함 vs 다시다: 천연
두 상품의 이름과 특색을 단순히 양옆으로 붙여 놓기만 한 바로 그 글자 위였다.
종환이 다른 일을 보고 있는 기범을 불렀다.
“기범아.”
“예? 뭐 더 필요하세요?”
“아니 잘 봤고.”
말을 잠깐 쉬었던 종환이 물었다.
“미원에 연락 해 봤냐?”
“아...”
어려운 숙제를 받았던 기범이 말끝을 흐렸다.
“아직 입니다.”
다짜고짜 내용을 전하는 거라면 시간을 들일 일도 없는 거였지만, 기범은 일이 되게 하려 했고 되레 그렇다 보니 도무지 그 연락해 볼 방법은 아예 없다고까지 믿었다.
아직이라는 기범의 말에 종환이 다짜고짜 전화를 들었다. 그리고 손에는 방금 서랍에서 꺼낸 미원 관계자의 명함이 들려있었다.
“아예 황사장입니다.”
-누구요?
“아 전번에 서울에서 내려왔던 황사장입니다. 직원 한 명이랑.”
-아 그랜저. 아 예예.
“통화 잠깐 가능하십니까?”
-아 예 잠시만요.
잠깐 전화를 세워놨던 관계자가 뭘 정리했다가 다시 말을 받았다.
-아 예. 말씀하십시오.
“거 다름이 아니라,”
종환이 대략 한 10여 분 말을 이었다. 전화를 받은 관계자는 몇 마디를 첨언하기를 했지만 대부분 듣는 모양새였다.
많은 이야기 중 자세한 내부 이야기까지도 하며 말을 받기도 했지만 전적으로 종환이 하는 말이 틀리다고는 하지 못했다.
“안 그렇습니까?”
-...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
“예?”
-아 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니까 다시 또 말하지만 국물 맛 좋아지는 거 대한민국 국민 다 알아요. 모르는 사람 없고. 그렇지만”
몇 번 나왔던 같은 말이 또 한 번 다시 반복되려 하자 관계자가 말을 끊었다.
-아 황사장님, 사실 제가 거기 관계자는 아니잖아요? 아시다시피.
“아예.”
-저야 뭐 공장일 하는 거고. 황사장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저희 쪽은 생산이랑 그쪽 상품이랑 뭐 팔고 하는 거랑은 완전 따로 돕니다.
“아 그러시죠?”
-예예.
“본사도 서울에 있으시고?”
-예 잠시만요.
잠깐 수화기에서 뭔가를 뒤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관계자가 말했다.
-제가 본사에 이야기 해놓겠습니다. 지금 메모 되십니까?
“아예 준비됐습니다.”
종환이 그 소리와 함께 옆 눕혀놨던 펜을 들었다.
-그 번호 하나 불러 드리겠습니다. 공이 다시 육둘 다시 다섯넷삼삼.
“공이 다시 육둘 다시 오사삼삼이요?”
-예 그쪽으로 내일 오전이나 오후쯤 한번 전화주셔서 번거롭지만 설명 한 번만 더 좀 해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잘 좀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아 그럼요. 사장님.
종환의 수첩에는 이번에 남겨진 짤막한 번호가 쓰여 있었다.
02-62-5433
그리고 옆 기범은 안 듣는 척하면서도 귀를 활짝 열어 계속 종환의 통화를 가만히 듣기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화가 결국 끝났을 때 생각했다.
‘우리 사장님 대단하시네.’
***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사무실에서 기범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막 다시 들어온 황사장이 물었다.
“뭔 노래냐?”
“그 길에서 꿈을 꾸며 걸어가리라, 서울이요.”
노래를 한 소절을 마저 부른 기범이 대답했다.
“어?”
“서울이요. 노래 제목이 서울이에요.”
“왜 안하던 노래를 해. 사무실에서.”
“화장실은 다녀오셨어요?
“그래.”
“가시죠.”
“벌써 나가게?”
“사장님이 사무실에서 아무것도 못 하게 해서 지금 나가야겠습니다.”
“그래 그면.”
둘은 차를 타고 서울 원도심 번화가로 나갔다.
“여기 백화점 앞이야?”
“예. 여기서 조금만 더 가서 명동성당 바로 앞입니다.”
종환과 기범이 탄 차가 명동 코스모스 백화점 앞을 막 지나고 있었다.
“기범아 여기서 세워라, 어딘지 대충 알겠다.”
종환이 평소와 같지 않게 훨씬 두둑해진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는 거기서 만 원짜리를 한 움큼 뺐다. 그랬다가 또 한 번에 본의 아니게 너무 많이 뽑아냈는지 도로 반절을 집어넣었다.
“이거 오늘 차 운전 수고비로 줄 테니까. 저 앞 백화점 가서 뭐라도 사.”
“백화점에서 저 살 거 없습니다. 사장님”
“얌마. 쓰고 놀라는 게 아니라. 예전 백화점은 문만 열고 하면 돌도 갖다 놔도 팔렸다며. 아직도 그런지 뭐든 좀 사면서 알아보라고.”
종환이 말을 이었다.
“사업할 거 보라고. 저번에 만난 카지노 하는 회장님처럼 정부 허가제가 필요한 것도 좋고.”
종환이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도 다 돈도 거 힘 있는 양반한테 다 찔러넣고 했잖아? 금액이 안 크더라도. 어? 어쨌든 성의는 보인 거 아냐”
“예”
종환이 쓸데없이 부언했다.
“사서. 뭐 백화점에 파는 술이라도 사서 들어가. 비싼 술 먹으면 그게 또 술이 맛이 들지도 모른다고 그게.”
도수는 30도에 한 병에 겨우 700원짜리 소주만 맨날 늦게까지 사 멕인 종환이 미안했는지 말했다.
“둘이 만나서 사업 이야기 좀 하고 들어갈 테니까, 사서 들어가. 마셔보고 어떤지. 뭐든지”
“이번에 올 때는 어떻게 오시게요?”
“내 다 알아서 오지.”
종환이 차 문을 닫고 내렸다. 종환은 좀 걸으면 될 거였다.
“자 가 볼까나”
<취금찬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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