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릴레이 보드 제작(1)
틱-
틱-
틱-
고요한 시퀀스 작업실 안.
니퍼 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 없이 울려 퍼졌다.
도현이 1.25 스퀘어 전선을 자르는 소리였다.
"이제 거의 다 했나."
도현은 고개를 들어 시스템 창을 확인 했다.
[110V 솔레노이드 릴레이 보드 재료.]
1. 15CM 단선 케이블 65개.
2. 35CM 단선 케이블 32개.
3. 2.5M 5 피스 케이블 5개.
.
.
.
13. 110V 5A 릴레이 19개.
14. 10A CP 2개.
처음 알았다.
[시퀀스] 스킬로 전기 회로의 재료를 파악할 수 있다는 건.
'덕분에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겠어.'
접점과 접점을 연결할 때, 일일이 길이를 재면서 하는 과정이 은근히 시간이 오래 잡아 먹는다.
버려지는 전선도 은근히 많았고.
하지만 시스템 창이 알려준 대로 선을 준비하니, 시간도 재료 값도 훨씬 아낄 수 있었다.
'할 수 있어.'
2주만에 릴레이 보드 100개.
김원식과 전현우는 절대 불가능 하다고 했지만 도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에 10대 씩만 만들면 돼.'
2주.
평일만 따지면 10일이다. 하루에 10대씩만 만들면 된다는 뜻.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재료만 준비 된다면 불가능 한 것도 아니었다.
[시퀀스]
- LV.2
- 전기 배선 속도가 50%증가 합니다.
- 시퀀스 회로 구성 능력이 상승합니다.
도현에겐 시스템 창이라는 사기적인 능력이 있었으니까.
'시퀀스 팀원들만 잘 따라와 준다면야.'
아무리 스킬이 있다지만,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건 30대가 한계였다.
그렇다는 건 나머지 70대는 시퀀스 팀에서 해줘야 한다는 건데.
'잘 따라올까?'
아마 아닐 확률이 높았다.
시퀀스 팀.
흔히 말하는 전기쟁이들은 업계 내에서도 콧대가 높기로 유명 했으니까.
절레절레-
상념이 깊어지기 전에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가능한지, 불가능 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해보는 거다. 그리고 안 되면 되게 만들면 그만이다.
'쉽게 생각하자.'
도현은 과거 초절전 회로 작업을 했을 때를 떠올렸다.
2주만에 50대의 PLC, HMI 작업을 마쳤던 그 때를.
이것도 마찬가지다. 퀘스트를 깬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전과 다른 점이라면.
'...파티 퀘스트네.'
총 10명의 파티원들과 함께 퀘스트를 깨야 했고.
그가 파티장이라는 점이었다.
@
"15CM 단선 케이블이 6500개나 필요 하다고?"
시퀀스 팀 공태인 차장이 두 눈을 부릅떴다.
6500개. 그 어마어마한 물량에 진절머리가 나고 만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35CM 3200개, CP 200개, 릴레이 1900개.."
"아, 아니 CP랑 릴레이는 알겠어. 근데 전선은.."
"당연히 우리가 다 할 수는 없겠죠."
"그럼 어떻게 해?"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왜 미래 차가 하청 업체를 많이 두는 지 알겠네.'
그게 합리적이었으니까.
수백, 수천 가지의 재료를 모두 생산하는 것 보다는, 가장 마진이 많이 남는 완성차 조립만 하는 게 이득이었으니까.
"전선 제조는 하청에 맡기고, 우리는 릴레이 보드만 만들 겁니다."
도현 역시 마진이 가장 큰 릴레이 보드만 작업 하기로 결정 했다. 사실 마진이니 뭐니 따져서 결론에 도달 했다기 보다는, 시간이 턱 없이 부족 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야, 이 과장. 근데 그거 확실해?"
그때.
고장 수리를 갔다가 돌아온 하원식 과장이 다가와 물었다.
잔뜩 찌푸린 인상. 불신 어린 눈빛. 누가 봐도 도현을 의심하고 있는 듯 했는데.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도현은 담담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뭐가 말입니까?"
"15CM 전선 6500개니 뭐니 하는 거, 정확하게 계산해보고 하는 소리냐고. 그냥 대충 뱉어본 소리 아니야?"
"......"
"그리고 릴레이 사양 낮추라고 한 것도 이 과장이지? 솔 밸브 용량이 얼만데, 고작 5A 짜리로 해도 되겠어?"
"......"
"허 참... 상부에서 시키니까 하긴 하겠는데, 타 부서 지원 왔으면 고분고분하게 일만 하다가 가는 게 도리 아닌가?"
도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지원 온 거면 조용히 시키는 것만 하고 가면 된다. 그게 자존심도 몸도 안 상하는 지름길이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았지.'
역설적으로 그게 바로 도현이 움직이는 이유였다.
시키는 것만 하고 살면.
남들 시선에만 맞춰서 움직이면 바뀌는 게 없으니까.
'예의를 지켰는데도 저런 반응이면..'
최대한 예의를 차렸다. 그는 프로그래밍 부서였고, 이건 시퀀스 팀 소관 작업이니까. 하지만 저런 식으로 나온다면 굳이 참을 이유가 없다.
"하원식 과장 님. 지금 저희가 만들 릴레이 보드에 연결할 솔 밸브 코일 정격 사양이 얼만 지 아십니까?"
"....그, 그것까지는 모르지."
"3/5 WAY 밸브. 스풀 타입으로서 코일 정격은 3.5A입니다. 정격 전류에서 상한으로 20%를 여유를 둬도, 5A 릴레이면 충분히 커버 가능하다는 겁니다."
"......."
"마찬가지로, 15cm 전선 6500개도 어제 밤 잠을 설쳐 가며 주판을 두들겨서 산출한 결과고요. 하원식 과장 님은 혹시 릴레이 보드 관련해서 준비하신 거 있습니까?"
그 말에 하원식은 합죽이라도 된 듯 입을 다물었다.
틱틱-
도현은 그런 하원식은 쳐다보지도 않고, 니퍼 질을 이어 가며 말을 이었다.
도현의 앞에는 어느새 전선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사장님께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번 릴레이 보드 건, 이 과장이 맡아 보라고. 이건 공 차장 님도, 그리고 윤 부장 님도 이미 인정한 부분입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설마 사장 까지 들먹일 줄은 몰랐는지.
하원식은 당황한 목소리였다.
"그럼 뭡니까?"
"아이고 이 과장. 오늘 왜 이렇게 예민해?"
하원식이 말끝을 흐렸다.
대화 몇 번 나눠보고, 견적이 안 나오자 꼬리를 내린 것이다.
니가 예민하게 만들었잖아-
도현 역시 목구멍 까지 차오른 단말마를 꿀꺽 삼켰다.
여기서 더 싸우면 분위기가 흐려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재료가 다 모이기도 했고.'
탁-!
쉬지 않고 춤을 추던 니퍼가 멈춰 섬과 동시에.
[110V 솔레노이드 릴레이 보드 재료.]
1. 15CM 단선 케이블 120/120
2. 35CM 단선 케이블 117/117
3. 2.5M 단선 케이블 7/7
.
.
.
13. 110V 5A 릴레이 19/19
14. 10A CP 2/2
[회로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모두 모았습니다!]
[제작을 시작 하시겠습니까?]
재료가 모두 모였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니퍼 질을 한 건, 릴레이 보드 하나 분의 전선을 제작하기 위해서였는데.
"공 차장 님. 설명 시작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자, 다들 여기로 모여 봐!"
그 말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시퀀스 팀 직원들이 어기적거리며 모여들었다.
"아, 바쁜데.."
"그냥 대충 만들면 되는 거 아니야?"
"어차피 이번 달 안에 100개는 꿈도 못 꾸는데.."
그들의 입에서 흘러 나온 건 명백한 비아냥거림.
순간 뇌리에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지만.
절레절레-
도현은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털어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전의가 꺾여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걸 위해서 보드 시연을 준비한 것이기도 하고.'
도현은 일부러 목청을 키웠다.
"안녕하십니까. 프로그래밍 부서 과장 이도현입니다."
"아, 네."
"빨리빨리 시작 합시다."
예상대로 처참한 반응. 하지만 도현은 되려 웃으며 말했다.
"이번 달 안에 릴레이 보드 100개를 만들어야 한다는 건, 전달 받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
이제는 아예 반응도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모습이 절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는 듯 했는데.
"그 기간을 한 달이 아니라 2주로 줄여 보려고 합니다."
"...... 뭐라고요?"
"아니 그게 무슨.."
"이 과장,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야 반응이 좀 오네.'
비록 비난에 가까운 반응이었지만.
시퀀스 팀 대리, 김민혁이 물었다.
"아니 한 달 내내 메달려도 불가능한 걸 2주 만에 어떻게 합니까?"
그 말에 몇몇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이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 했는데.
도현은 준비해 온 가장 큰 패를 꺼냈다.
"인당 200."
"...... 네?"
"100대 초품 제작을 완료하고, 납품까지 성공적으로 진행 했을 때 받기로 한 인센티브 입니다."
"......."
"만약 미래 차에서 계약까지 승인 한다면, 추후에도 월 50대씩 고정적으로 보드를 제작, 납품 하기로 했습니다. 인당 월 50만원에 달하는 추가 인센티브 역시 약속 받았고요."
일시금 200.
거기에 월 50만원의 고정적인 추가 인센티브까지.
평범한 직장인들에게는 절대 작지 않은 돈이었는데.
- 절대 안 돼!
- 그럼 그냥 포기 하겠습니다. 저, 이거 말고도 할 일 많습니다.
- ....... 일시금 200에 월50. 더 이상은 나도 적자야.
김원식이 절대 안된다는 걸 끝까지 우겨서 쟁취해 낸 돈이기도 했다.
'어차피 혼자서는 못 하니까.'
예상대로 사람들의 표정에 묘한 기대감이 어리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100대는.."
"아니 한 달이면 또 몰라, 2주는 힘들지."
"시퀀스에 대해 잘 모르는 거 같은데.."
하지만 반응은 여전히 차가웠다.
2주만에 100대.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처지는 물량에 벌써 겁을 집어 먹은 것이다.
"할 수 있습니다."
도현이 그들의 말을 끊었다.
시퀀스 팀 직원들의 불안을 부식시키듯, 확신에 찬 목소리로.
"시연회, 시작 하겠습니다."
도현은 보여줄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별 거 아니라는 걸.
너희들도 할 수 있다는 걸.
과거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필요한 건 해낼 수 있다는 한 줄기의 희망이었으니까.
@
"이 과장이 할 수 있을까?"
김원식이 불안한 듯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2주만에 릴레이 보드 100개.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도현에 관한 일이라면 무조건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전현우였지만, 이번 만큼은 확답을 하지 못했다.
'인원도, 시간도 너무 부족해..'
고작 일곱 명이다.
도현과 춘식을 포함해도 아홉 명.
게다가 온전히 릴레이 보드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하루 종일 고장 수리를 하고 난 뒤, 남는 시간에 3시간 정도만 작업이 가능한 상황.
"만약 못한다고 해도, 자재 값을 20만원이나 줄였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김원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릴레이 사양 다운.
CP 개수 감소.
전선 길이 감소.
이 세 가지만 했을 뿐인데 자재 값이 30%나 줄었다. 이것만 해도 이미 엄청난 성과였다.
"자재 사양이랑 회로도 수정 하고 나서 동작 테스트 해 봤어?"
"네. 19개 릴레이 모두 정상 작동 합니다."
"그래?"
"대우 측 옥내 배선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 봤는데, 태어나서 이렇게 잘 짠 회로는 처음 본답니다. 누가 짠 거냐고 물어 보던데요?"
".... 설마 알려준 건 아니지?"
"설마요."
굳이 알리지 않아도 알아서 소문이 날 겁니다-
뒷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낭중치주.
그 역시 윤 차장과 같은 생각이었다.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 스타일일 뿐.
'인센 30% 값어치는 하네.'
김원식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가, 이내 다시금 인상을 굳혔다.
"미래 차 납품 일정까지 몇 일이나 남았지?"
"한 달 남았습니다만.. 품질 체크와 시공 일정까지 생각하면 대략 3주 남았다고 생각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도현이 약속한 2주에서 약 일주일 정도 더 시간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김원식의 표정을 여전히 어두웠다.
"될 거 같아?"
"솔직히 말씀 드리면 힘들 것 같습니다."
"이번 건은 절대 놓치면 안돼."
".... 형님이 보기에도 그렇습니까?"
"당연하지! 미래 차에서 쓰고 있는 고성능 솔 밸브만 수 만 개가 넘어. 우리가 릴레이 보드 납품 권을 독점 하기만 한다면..."
김원식은 뒷말을 뱉지 않았지만, 전현우는 알아 듣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박이지. Z엔진 프로젝트 만큼은 아니지만..'
솔레노이드 밸브 보호용 릴레이 보드.
혹자는 그냥 솔레노이드 밸브를 통째로 바꾸면 되지 않냐고, 뭐하러 귀찮게 릴레이 보드를 다냐고 물을 수 있지만, 그건 잘못 된 접근이다.
하나에 50만원이나 하는 솔 밸브를, 고작 2만원 짜리 릴레이로 보호할 수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일 년에 교체하는 솔 밸브만 수천 개야..'
단순 계산으로만 연간 수십 억을 아낄 수 있다.
미래 차 입장에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인 셈.
"혹시 모르니까 준비 시켜 놔."
"준비라고 한다면... 타 업체 지원 말씀 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혼자 못 삼킬 것 같으면, 반갈이라도 쳐야 할 거 아니야?"
학 테크나 YM 같은 경쟁 업체와 기술 제휴를 맺자는 뜻이었다. 전현우는 뭐라 말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반 갈이 아니라 통째로 빼앗길 수도 있는데..'
추측이 아니라, 거의 확실 했다.
인맥적으로, 기술적으로 20세기보다 월등하다고 평가 받는 두 업체였기 때문이다. 욕심 많은 두 업체가 먹음직한 먹이를 나눠 먹으려고 할리 없었다. 분명 납품을 독점하기 위해 수를 써올게 분명 했다.
'욕 할 수도 없지. 우리도 똑같이 성장 했으니까.'
강자 독식.
이 바닥에서 통용되는 유일한 진리다.
'기도를 하는 수 밖에 없군.'
지금으로선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도현을 응원할 수 밖에 없었다.
@
시퀀스 팀 김민혁 대리는 올해 4년차였다.
지방대긴 하지만, 나름 전기 공학과 출신으로 일에 대한 프라이드 하나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는데.
탁-
탁-
신들린 듯 공구를 다루는 도현을 보자, 일순 마음이 꺾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저게 말이 돼?'
춤을 추듯 현란한 니퍼 질.
김민혁은 눈을 부릅 뜰 수 밖에 없었다.
'현란 하기만 한 게 아니야.'
니퍼의 용도는 크게 두 가지다. 무언가를 자르거나, 전선의 피복을 벗기거나.
보통 피복을 벗기는 건 와이어 스트리퍼(피복 벗기는 전용 도구)를 사용 했지만, 소위 말하는 전기 쟁이들은 니퍼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한다.
틱-!
지금의 도현 처럼.
"벌써 다 했어?"
"아직 15분 밖에 안 지났는데.."
15분.
도현이 약 200여 개의 전선의 피복을 모두 벗기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약 1.5CM 간격으로 일정하게 벗겨진 피복을 보자, 사람들은 감탄을 숨길 수 없었다.
"기계로 벗긴 거 아니야?"
"사람 손으로 저렇게 빨리 벗기는 게 가능 하다고?"
"미쳤네. 미쳤어."
전선 작업을 모두 마친 도현은 공압 드릴을 들었다.
그리곤 끝 부분에 M5(너트 내경 지름 5M)용 드릴을 물리고 망설임 없이 드릴링 작업을 시작 했는데.
"저게 저렇게 쉽게 뚫리는 게 아닌데."
공태인은 멍하니 중얼거리는 김민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잘 봐 둬라. 드릴링 작업을 할 땐 저렇게 다리를 넓게 벌리는 게 유리해. 힘이 분산 되는 걸 막을 수 있고, 수직으로 힘을 가하는데 유리 하거든."
"....."
"그리고 10T이하의 얇은 판넬에 탭(나사 산을 내는 과정)을 낼 때는, 수동 탭 드릴이 유리해. 전동은 나사 산이 뭉개질 확률이 높아."
김민혁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그 사이 타공을 마치고 릴레이 보드를 체결 하고 있었다.
탁-탁-탁-탁-
릴레이 보드 고정 나사를 체결하고, 19개의 릴레이를 다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1분.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 졌지만, 도현은 아랑곳 하지 않고 다음 작업을 시작했다.
".... 드디어 전선 체결을 하려는 건가."
시퀀스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전선 배선 작업이었다. 가장 시간을 많이 잡아 먹는 작업 이기도 했다.
드륵-!
드륵-!
드륵-!
도현 역시 전과는 달리 신중하게 나사를 풀었다.
'전원이 1번 8번... A 접점이 13번 14번..'
총 14개의 접점이 있는 릴레이.
하지만 정작 쓰는 접점은 4개 뿐이다.
도현은 전선은 건들지도 않고, 사용 할 접점들만 주구장창 풀었다. 그건 분명 일반적인 배선 방식이 아니었는데.
드르륵-!
곧 모든 접점을 푼 도현은 그제서야 전선을 체결하기 시작 했다.
다른 전선은 건들지 않고, 제일 짧은 15CM 전선들만.
드르륵-
곧 15CM 전선을 모두 소모한 도현.
그는 35CM 전선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아까 했던 것처럼, 35CM 전선만 체결을 하기 시작 했다.
"..... 뭐 하는 거지."
지켜보던 공태인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순서대로가 아닌, 전선 길이 별로 배선 하는 도현의 방식에 의문을 느낀 것인데.
"... 설마."
곧 도현이 뭘 하고 있는지 깨달은 공태인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캐스케이드 방식이 아니야?"
도현이 케스케이드 회로 작성 법(전기 회로도의 왼쪽 윗부분부터 차근차근 배선하는 것.)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회로도를 보고 하는 게 아닌, 전선 길이 별로 묶어서 작업을 하고 있다는 건 한 가지 사실을 의미 했다.
"배선 과정을 통째로 분리 하다니.."
1부터 10까지 순서대로 이뤄져야 할 전기 배선의 순서를 자기 마음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1,4,7번 배선]을 먼저 하고, [2,3,5번 배선]을 나중에 하면 회로 배선 속도가 훨씬 빨라지고 전선 사용량도 줄어든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명확했는데.
"회로도를 머리 속에 통째로 넣은 게 아니고서야.."
실시간으로 머리 속에서 회로도를 창작하며 배선을 해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
"근데 왜 저걸 굳이.."
공태인의 표정에 의아함이 어렸다.
자신이라면 저렇게 할 수 있어도 하지 않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회로도를 보고 작업하면 편하지 않은가. 시간이야 조금 더 걸리겠지만 정신력 소모가 너무 심한 작업이었다.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굳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남다른 기술을 뽐낸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고서야 설명하기 힘들었으니까.
"....아니, 잠깐만."
그때.
순간적으로 한 가지 가설이 공태인의 머리 속을 스쳐갔다.
"... 서, 설마 배선 분업을 하려는 건가?"
배선 분업.
공장 처럼 시퀀스 회로를 찍어내는 방식을 뜻했다.
A는 릴레이 접점 부분만 배선 하고.
B는 릴레이 전원 부분만 배선 하고.
한 사람이 하나의 전기회로를 통째로 작업하는 것보다 생산성을 몇 배나 증가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었다.
"배선 과정 분리를 해야 하는데.."
수십 개가 넘는 배선 과정을, 가장 비슷하고 가까운 것들 끼리 묶어 내야 하는 것이다.
이건 어지간한 레벨에서는, 심지어 공태인조차 엄두도 못 낼 고난이도 작업이었지만.
"이미 하고 있잖아...."
도현은 이미 하고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치 보란 듯이.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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