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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動心) 님의 서재입니다.

감전 후 괴물 엔지니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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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動心)
작품등록일 :
2024.07.25 15:07
최근연재일 :
2024.09.19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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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3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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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36. 화낙 본사에서 나온 겁니까?

DUMMY

변웅석 실장.

그는 커다란 문을 앞에 두고 넥타이를 고쳐 멨다.

그리곤 그 답지 않게 손 거울을 꺼내 머리는 단정한 지, 코털이 삐져 나온 건 없는지 등등의 외관을 확인했다.

그가 만나러 가는 인물이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대답은 약 3초가 지난 뒤에야 들려 왔다.

"들어 와."

문을 여니 등을 돌린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은 한 남자가 보였다.

이기영 전무.

미래 자동차 엔진변속기 사업부의 수장인 그는 변웅석이 마른 침을 꿀떡 삼킬 때 쯤이 되어서야 의자를 돌려 아는 체를 해왔다.

"앉지."

변웅석은 이기영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이번 감사, 고생 했어."

"감사합니다."

변웅석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입사할 때 산, 20년이 넘은 수제 구두를 바라 보는 그의 두 눈에는 미미한 희열이 차올라 있었다.

고생 했어-

그의 상사는 그런 말을 잘 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 할 수 있어.'

문득 욕심이 나기 시작 했다.

반 쯤은 포기하고 있었던, 언감생심이었던 사업부장 자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번 감사를 기점으로 엔진-변속기 사업부 내부의 판도가 180도 뒤바뀌었다.

벌써 일부 직원들 사이에서는 이용석보다 변웅석이 사업부장에 어울린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찌라시에 불과할 수도 있는 그 소문이 변웅석의 가슴을 부풀게 했다.

"근데 나는 철저하게 변 실장 실력으로 커버를 하길 바랬는데.."

그때.

이기영이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살짝 식었다. 그 미묘한 차이를 캐치한 변웅석이 몸을 흠칫 떨었다.

"외부 용병을 고용 했네? 체급도 안 맞는 S급으로?"

S급 용병.

그게 누구를 뜻하는 지는 자명했다.

20세기 테크 이도현.

릴레이 보드, CNC 프로그램 수정을 통해 비용을 줄이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안전 감사 팀 독사를 박살내 버린 남자.

그에게는 충분히 S급이라는 표현을 붙일 수 있었다.

"본사에서 나온 안전 감사야. 류 부장은 그 안전 감사 팀의 얼굴이고."

"....."

"그런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르겠는 그 용병이란 놈한테 철저하게 개 박살 나버렸어. 이게 무슨 뜻인지 아나?"

변웅석은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사 팀의 그물 망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밤 잠을 설쳤고, 또 최근엔 해냈다는 성취감에 잠을 설쳤으니까.

류하성.

그리고 감사 팀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는 뜻이다.

"죄송합니다."

"우리 엔진 쪽 인물이 그랬으면, 정말 완벽 했을텐데..."

"........"

숙여진 변웅석의 고개의 각도가 더 깊어졌다.

이도현.

능력이 있다곤 하지만, 엄연히 따지면 외인(外人)인 그가 본사의 인물을 박살내도록 방치한 것에 대한 책망을 하고 있다고 느낀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 잘한 것도 있어."

변웅석의 눈빛이 빛났다.

"'안전 자문 업체'라는 명분을 세운 것 말입니까?"

"그것마저 없었더라면... 솔직히 나가리였지."

"......."

나가리.

그 한마디에 변웅석의 몸이 흠칫 굳었다.

이기영은 차 한 잔을 홀짝이더니 말을 이었다.

"이번에 올라온 감사 결과, 엔진 쪽 압승이다."

"저, 정말입니까?"

"너무 좋아 하지는 마. 생산량, UPH, 안전 작업까지, 니들은 숟가락만 얹은 거잖아?"

이번에도 변웅석의 뇌리에는 그 남자의 이름만 떠올랐다.

이도현 부장.

이기영 전무의 말은 틀린게 없었다.

엔진 사업부에서 한 거라곤, 20세기에서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얹은 것 뿐인 것이다.

"웅석아."

그때였다.

늘상 차갑던 이기영의 목소리가 살짝 풀어졌다. 호칭도 변 실장에서 웅석아로 친근하게 바뀌었다.

분명 장내의 분위기는 전보다 편해졌지만, 변웅석은 되려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대답 했다.

"네, 전무 님."

"작년 엔진 변속기 사업부 연 매출이 얼마였지?"

엔진 변속기 사업부는 계열사가 아니다.

따로 매출 보고서 같은 건 없다는 뜻.

하지만 차량 판매 단가에 따른 예상 매출액은 충분히 계산할 수 있다. 매번 개선 보고서를 올릴 때 얼마 만큼의 매출 증대 효과가 있는지 서입해야 했기에 변웅석은 막힘 없이 대답했다.

"3조 2천 723억 입니다."

"전기 차니, 유로 파이브니.. 회사에서는 10년 안에 그 매출이 반토막 날 거라고 예측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적어도 2040년 까지는 거뜬하다고."

".....네."

"다르게 말하면, 모두가 한직이라고 생각하는 이 엔.변 사업부장 자리는 3조라는 돈을 뽑아내는 자리라는 뜻이기도 해. 너, 감당 할 수 있겠냐?"

3조.

일반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큰 금액이다. 대기업 임원인 변웅석에게도 그 돈이 까마득하기는 마찬가지다.

"네."

하지만 변웅석은 전처럼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적어도 이 질문에 대해서 이기영이 원하는 대답이 뭔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산은 제가 아니라 밑 사람들이 하는 거지 않습니까? 사업부장 자리는 그 밑 사람들을 컨트롤하는 자리고요."

"그래. 이래야 변웅석이지.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이 부장이라는 놈, 니 편으로 만들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니 말 한마디에 헐레벌떡 뛰어올 수 있는 충견으로 만들어 보라고."

충견.

그 단어에 변웅석은 자신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굴 뻔 했다.

'할 수 있을까.'

얼마 전 도현과 나눈 대화를 통해, 그의 그릇을 짐작했기에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심정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이기영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왜? 자신 없어? 고작 서른 하나야. 실력이야 출중하지만, 사회에 나온 지 고작 7년 밖에 안된 애송이라고. 이 친구 하나 구워 삶지 못하면, 사업 부장 자리는 포기해야지."

그의 마지막 말은 협박임과 동시에 동아줄을 내미는 것이기도 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변웅석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뽀꿀람.

그는 달라진 도현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 부장 님. 새 옷 뽑아씀까?"

"어, 맞네. 도현아 너 머리도 했어?"

"허허, 이 부장. 이렇게 보니까 완전 연예인 같네."

깔끔한 슬랙스에 니트 차림.

새옷으로 쫙 빼 입고 출근한 도현의 모습이 낯설었던 것이다.

"집에 옷이 너무 없어서, 이번에 플렉스 좀 했습니다."

몇몇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부장이 패션 센스가 좀 그렇긴 했지."

"우리 아버지가 입고 다닐만한 옷을 아무렇지 않게.."

"그나마 이 부장이 입어서 봐줄만 했던 거지. 뽀꿀람, 너가 입었으면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을 거다."

뽀꿀람이 발작했다.

"무슨 소림까! 저, 푸르지x 현장에서 패쎠니쓰타로 꽤나 이름 날려씀다!"

"패쎠니쓰타? 푸흡! 니가 무슨 패쎤이야 임마."

"지금 입고 있는 조끼도 명품임다."

뽀꿀람은 그 말과 함께 몸을 돌려 조끼의 등 부분을 보여 주었다.

지방시.

지방시(청) 관할 작업을 할 때 지급하는 조끼였다.


미래 차를 뒤집어 놨어도, 도현의 일과는 변한 게 없었다.

낮에는 고장 수리 업무를 보고, 퇴근 후에는 2시간 동안 릴레이 보드 생산을 총괄한다.

다만 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이 부장-

이 부분이 이해가 안 가는데-

나 좀 도와주면 안 돼-

도현을 찾는 목소리가 부쩍 늘었다는 점이었다.

"네, 도와 드릴게요."

도현 역시 그런 사람들의 요청을 마다하지 않았다.

숙련도.

저레벨 회로도 있었고, 고레벨 작업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소중한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도현은 어린이 집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자신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이던 학부모, 김성호.

그 덕분에 그를 바라보는 학부모들의 시선이 180도 바뀌었다. 무시에서 존중으로. 존중에서 경외로.

시스템 창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나 혼자 사는 거면 상관 없지만...'

그의 체면은 곧 딸 아이에 대한 대우로 이어졌다.

도현이 레벨 업에 목을 멜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이 부서, 저 부서 돌아 다니며 일을 돕던 도현.

그는 점심 시간이 지나서야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잠에서 깬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핀 도현은 노트북을 폈다.

[Z엔진 크랑크 플랜지 G/R 공정 CNC.]

벌써 2주 째 메달리고 있는 프로그램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한적한 사무실. 평화로운 분위기였지만 도현의 표정은 전쟁터에 나온 장수처럼 비장 했다.

어느새 일에 대해서 누구보다 진심이 된 도현이었다.

'집중, 엔지니어의 주사위.'

가지고 있는 버프 스킬을 모두 켰다.

머리 속이 맑아지는 느낌.

온 몸에 차오르는 활력.

도현은 매서운 눈빛으로 노트를 노려 보았다.

[2. #12056(#1번 테이퍼 보정량) 결과 출력 데이터 형태 변환 이상.]

아직 해결하지 못한 마지막 성능 개선 사항, 테이퍼 보정량.

전현우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던, 고난이도의 연산 처리 블록이었다.

'이것만 해결하면 레벨 업을 할 것 같은데..'

느낌이 왔다.

한 번도 해결해본 적 없는 6레벨 프로그램의 성능을 100%까지 끌어 올리면, 엄청난 숙련도 증가가 있을거라는 느낌이.

흡사 초보자가 중간 난이도 던전에 들어가서 보스를 잡기 직전이랄까.

문제는 그 보스가, 상당히 까다로운 패턴을 자랑한다는 점이었다.


'테이퍼 가공... 까다롭네.'


쉴새 없이 돌아가는 원통형 소재를 사선 방향으로 깎아 내는 테이퍼 가공이란 게 있다.


철을 깎아 내리는 작업인 만큼, 툴의 끝 부분이 날카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뾰족할 수록 부러지기 쉽기 때문에, 팁(툴의 끝 부분)은 일정 부분 모따기(둥글게 만드는 것)가 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팁은 0.4mm 만큼.

어떤 팁은 0.8mm 만큼.

가공 부위마다 각각 다른 모따기가 들어간다.

그리고 그 미세한 차이는, 소재의 진분(원통이 수직 선상에서 얼마나 올바른지) 다이아(직경이 얼마나 올바른지) 등등의 Q.C 체크리스트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그 미세한 차이를 보정해 주는 값이 바로 도현이 보고 있는 테이퍼 보정량이다.

'문제는 이 보정량이 랜덤으로 바뀐다는 건데..'

테이퍼 보정량은 작업자가 일일이 수기로 계산할 수가 없기에, 메이커에서 만든 자동 테이퍼 보정량이라는 파라메터를 사용한다.

팁의 모따기 수치와, 목표 가공량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Offset 값을 보정하여 소재를 깎아 주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씩 그 보정량 값 출력에 문제가 생긴다는 게 문제였다.

100대 중 하나 꼴로 가공 불량이 나오고 있었고, 작업자는 그 하나의 불량품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이나 Q.C 부서를 들락거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단 부딪혀 보자.'

시스템 창도 알려 주지 않는다. 답을 알려 줄 선생님도 없다. 그럼 결론은 하나, 맨 땅에 헤딩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마음을 굳힌 도현은 곧 두꺼운 매뉴얼을 폈다.

Funac 35i user manual.

일본어로 된, 900 페이지가 넘는 매뉴얼이었다. 창고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놈을 도현이 꺼낸 것이다.

'해보자.'

두터운 매뉴얼을 보자, 시작도 하기 전에 마음이 꺾이는 기분이었지만.

도현은 망설임 없이 매뉴얼의 첫 장을 폈다.

지금 쏟는 시간과 노력이 무의미 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스템 창.

불현 듯 그의 인생에 찾아온 필터가 그의 노력을 성과와 이능으로 치환해 준다. 맨 땅에 헤딩이라도 마다 할 이유가 없다.

도현은 이 매뉴얼을 모두 뒤져서라도 성능 개선을 마무리하겠다고 다짐했다.




임광혁.

카드 빛 때문에 20세기로 돌아온 그는 꽤나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 임 과장님, 커피는요?"

"책상 위에 올려 놨어."

"...... 에잇! 내가 커피를 타오라고 했지, 흙탕물을 타오라고 했슴까?"

".... 아이스 믹스 커피 타오라고 했잖아. 뭐가 문젠데?"

"임 과장 님은 노가다의 기본이 안되어 있씀다. 누가 아이스 커피에 물을 이렇게 많이 붓슴까?"


뽀꿀람.

그는 임광혁에게 있어 천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노가다 팀장들도 인정하는 시퀀스 실력.

산전수전 다 겪은 강철 멘탈까지.

임광혁은 뽀꿀람의 '아이스 커피 강의'를 들으며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내가 프로그래밍 부서에만 있었어도..'

그의 전공은 PLC 프로그래밍이었다. 동시에 CNC 쪽도 나름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 했다. 프로그래밍 부서에 있었다면 이런 치욕을 당하지 않았을텐데. 팔자에도 없는 배선 작업을 하던 그는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프로그래밍 부서에 들렀다.

'내 노트북을 챙기자. 상부에 내 능력을 어필하는 거야.'

간단한 계획이었다.

프로그래밍 부서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그걸 상부에 보고한다.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다시금 프로그래밍 부서로 돌아간다.

나름 업력 10년 차인 그였기에 자신이 있었다.

".......어?"

도현이 일하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무슨 프로그램을 분석 하는거지?'

도현은 두꺼운 일본어 서적에 코를 파묻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텅 빈 에너지 음료 캔이 가득 했고, 노트북 화면 위에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어들로 가득했는데.

슬쩍 명령어들을 훔쳐 보던 임광혁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말았다.

'테이퍼 보정량 출력 연산? 지금 저걸 보고 있는 거야?'

도현이 파고들고 있는 게, CNC 최고 기술 집단 중 하나인 공기부에서도 쉽게 건들지 못하는 부분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냥 공부한 하는 거겠지.'

그렇게 위안을 삼을 수 밖에 없었다.

불안해서.

도망치듯 방문한 프로그래밍 사무실에, 내 자리가 남아 있지 않을까 봐. 나라는 사람이 지독히도 괴롭혔던 이도현이라는 남자가 잘나갈수록, 내 존재가 한 없이 작아지는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도현의 한 마디는, 그런 그의 기대감을 무심하게 박살 내어 놓았다.

"됐다."

믿을 수 없어서, 믿기 싫어서 두 눈을 비볐다.

노트북 위에 떠 있는 한 문장을, 혹시나 잘못 봤나 싶었기 때문이다.

[Simulation Complete!]

테스트 완료.

임광혁은 두 눈을 크게 뜰 수 밖에 없었다.

'.... 저걸 해결 했다고?'

공기부에서도 쉽게 건들지 못하는 문제를, 도현이 해낸 것이다.




Z엔진 Q.C 사무실.

파트장 백선범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방문하는 한 사람이 보이지 않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창식아, 오늘도 크랑크 파트장 안 왔어?"

"서기문 파트장 말입니까? 지금 일주일 째 코빼기도 안 비치고 있습니다."

"그래? 맨날 3-4대 씩 나오던 불량이 갑자기 안 나올 수가 있나?"

"글쎄 말입니다. SPC(자주검사 공정)에서 양품 확인 났으니까 안 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크흠.. 이러다가 떼 불량이라도 나는 거 아닌지 몰라."

떼 불량.

생산 작업자가 SPC에서 1차로 불량을 잡아 내지 못하고, 불량 소재가 그대로 후 공정으로 넘어가게 되는 상황을 뜻했다.

Q.C 팀에서 제일 싫어 하는 단어 이기도 했다.

"보전 팀이랑 공기부에서 따로 연락 받은 거 있어?"

"없습니다."

백선범은 의아한 표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연락이 없다는 건, 따로 조치는 하지 않았다는 건데.

하루에도 3-4번 씩 불량이 나던 장비가 갑자기 멀쩡해질 수가 있나? 그런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제길.. 이러다가 또 완성 엔진 몇 백대 씩 리콜 나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그렇겠습니까. SPC 측정기가 고장난 게 아니고서야.."

"그렇게 믿고 있다가 몇 번 리콜 난 적이 있어서 그래."

사고는 항상 '안일함'에서 비롯된다. 올해로 Q.C 업무만 30년 차인 백선범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게 불안하시면 소재 다섯 대만 보내 달라고 해보죠? 아, 마침 오늘 공기부에서 오기로 했지 않습니까. 같이 보면 되겠네요."

"그래야겠다."

오후 2시.

공기부 직원 두 명이 Z엔진 공장을 방문 했다. 그 중 한 사람의 얼굴을 알아 본 백선범이 기함을 터트렸다.

"도 부장님이 직접 오신 겁니까?"

도하영.

공작기계, 특히 크랑크 쪽 장비에 한해서는 날아다닌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 직접 행차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상부에서 하도 쪼아 대서요."

"아.."

백선범은 그럴만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량.

UPH 저하 만큼이나 무서운 단어 였기에, 부서장 차원에서 공기부에 직접 공조를 요청한 게 틀림 없었다.

"먼저 Q.C 검사 부터 볼 수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미리 검사 돌려 놨습니다. 창식아, 결과지 나왔어?"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되긴 했습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얼마 뒤, 창식은 Q.C 결과지를 가지고 돌아 왔다.

"음.... 양품이네요?"

결과지를 확인한 도하영이 두 눈에 이채를 띄고 물었다.


[DIA(직경)]

#1 Jounal : -0.008 (OK)

#2 Jounal : -0.005 (OK)

.

.

#5 PIN : -0.001 (OK)


[ANG(진분)]

#1 Jounal : -59.998 (OK)

#2 Jounal : -119.999 (OK)

.

.

#6 Jounal : -359.998 (OK)


다이아 값 부터 앵글 값까지.

완벽한 양품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양품 허용치(100분의 5, 0.05mm)보다 훨씬 완벽한 수준의.

도하영이 은근한 눈빛으로 물었다.

".... 혹시 제가 온다고 해서 특별히 양품을 준비 했다거나.."

"그럴리가 있습니까? 고장을 잡아 내달라고 불렀는데, 저희가 왜.."

"흠.. 그건 그렇죠."

그 말에 도하영은 의심을 눈초리를 거두고 나머지 결과지도 확인 했다.

"다섯 대 다 1/100 이하네요?"

"그렇네요."

"그렇네요? 혹시 정밀 검사 처음 넣어본 겁니까?"

"저희도 일주일 만에 정밀 검사 넣어본 거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OK 허용치에 겨우 들어 왔었습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잘 나오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0.05MM와 0.01MM.

일반인에겐 미세한 차이일 지 모르지만, Q.C 입장에서는 달랐다. 똑같은 양품이었지만, 그 안전성이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도하영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현장에 같이 가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근데.. 혹시 왜 가시는지 여쭤 봐도 됩니까?"

"파트장님도 아시다시피 이 정도 수치가 흔하게 나오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툴 세팅이라던지, 로케이터 세팅이라든지 뭐가 다른 게 있나 싶어서요."

Z엔진은 올해로 시업 20년차에 접어드는 구닥다리 공장이다. 그런 공장에서 이런 퀄리티의 양품이 나온다는 건, 분명 작업자만의 노하우가 있다는 뜻이었다. 바쁜 일정을 포기하고 현장에 방문한 것도, 그런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아니요. 딱히 작업 방식을 바꾸거나 한 적은 없는데요."


현장에서 작업중이던 조합원이 대답했다.

순간 도하영의 두 눈에 실망의 기색이 떠올랐다.

'역시 그냥 뽑기 운이 좋았던 건가..'

검사 결과가 좋게 나왔던 게, 작업자의 노하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뽑기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때, 작업자가 뭔가 기억이 난 듯 입을 열었다.

"아, 일주일 전에 CNC 프로그램을 수정하긴 했습니다."

"CNC 프로그램 수정이요? 저희는 그런 연락을 받은 적 없는데요?"

"아마 사업부 차원에서 진행 중인 작업이라 따로 연락을 안한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스펙 관련 수정사항이 아니면 Q.C 쪽에는 따로 연락을 안 하지 않습니까."

그때, 도하영이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

"그 프로그램이란 거, 한 번 볼 수 있겠습니까?"

냄새를 맡은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완벽한 스펙의 비밀이, CNC 프로그램에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는.

"여기 있습니다."

도하영은 보전 측에서 전달 받은 CNC 파일을 열었다. 그의 표정은 살짝 상기 되어 있었는데, 높은 수준의 CNC 프로그램을 보는 건 항상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굳어지는 표정에 백선범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호,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혹시나 CNC 프로그램에 변칙 작업의 정황이라도 있나 싶어서 물은 거였지만,

"......"

도하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그만큼 CNC 회로에 심취해 있었다.

"일본 화낙 본사에서 직접 나온 겁니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도하영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네? 본사라뇨.. 그 인간들이 그렇게 쉽게 오지 않는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

"테이퍼 보정량 출력 연산 값을 인위적으로 수정 했어요. 이거, 공기부에서도 쉽게 못하는 겁니다. 화낙 쪽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건들 수가 없는 명령어에요."

"그, 그렇습니까?"

백선범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도하영. 그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을 짠 사람, 누굽니까?"

도하영의 목소리는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긴장감.

도하영은 공기부 부장 자리에 오른 뒤 처음으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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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41. 꼭 필요한 사람. +19 24.09.18 15,238 439 17쪽
40 40. 앞으로는 참지 않으셔도 됩니다. +22 24.09.17 17,702 481 16쪽
39 39. 유능하다고 했지 않습니까. +21 24.09.16 18,614 573 18쪽
38 38. 누구 마음대로 인정 합니까. +25 24.09.15 19,730 505 20쪽
37 37. 닮았네. +31 24.09.14 21,066 525 19쪽
» 36. 화낙 본사에서 나온 겁니까? +20 24.09.13 21,961 568 22쪽
35 35.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일부수정) +41 24.09.12 22,889 550 18쪽
34 34. 종자가 다르지 않습니까, 이 부장은. +22 24.09.11 24,199 535 19쪽
33 33. 너도 아웃이라고 새끼야. +17 24.09.10 24,632 594 15쪽
32 32. 키워 봅시다. +17 24.09.09 24,130 590 13쪽
31 31. 걱정 하지 마십시오. +17 24.09.08 24,910 586 19쪽
30 30. 급한 사람이 가는 게 맞지 않씀까? +19 24.09.07 24,981 606 22쪽
29 29. 사고 임박. +14 24.09.06 25,084 555 19쪽
28 28. 안전제일주의. +13 24.09.05 25,847 588 19쪽
27 27. 플렉스 좀 했어요. +19 24.09.04 26,475 564 16쪽
26 26. 완벽한 패배. +18 24.09.03 26,887 584 22쪽
25 25. YM 송기오. +19 24.09.02 27,551 567 16쪽
24 24. 다함께 차차차.(일부 수정) +26 24.09.01 28,418 576 19쪽
23 23. 리더의 자질. +40 24.08.31 28,480 604 19쪽
22 22. 릴레이 보드 제작(2) +16 24.08.30 28,573 569 17쪽
21 21. 릴레이 보드 제작(1) +19 24.08.29 29,340 576 19쪽
20 20. 밥 그릇. +16 24.08.28 30,215 584 19쪽
19 19. 별 미친 놈을 다 봤나. +16 24.08.27 30,617 565 18쪽
18 18. 누군가의 빌런(2) +22 24.08.26 30,059 582 18쪽
17 17. 누군가의 빌런(1) +14 24.08.25 30,312 549 18쪽
16 16. 주사위. +20 24.08.24 31,133 546 20쪽
15 15. 이자까지 쳐서. +43 24.08.23 31,571 569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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