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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씨 님의 서재입니다.

색깔 없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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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씨
작품등록일 :
2016.01.01 21:48
최근연재일 :
2016.04.25 00:15
연재수 :
5 회
조회수 :
724
추천수 :
0
글자수 :
15,458

작성
16.04.22 17:54
조회
107
추천
0
글자
6쪽

[음지] - 1

DUMMY

마치 어떤 위험을 알리기 위해 그런 독특한 빛을 내고 있는 것 같아서 그 형광체에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식물군락이 급속히 변하는 건 생육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지형의 변화는 확실히 눈에 뜨였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나타나는 경사지가 계속되었고 거기에 산자락이 만드는 굴곡이 더해져 땅 위에는 명암이 모자이크처럼 펼쳐졌다. 냇물에서 멀어진 뒤에는 점점 마르고 굳은 땅이 되어 걷기에 좋았다.


하늘은 이제 완연한 녹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광활한 흑토 밭에 씨 뿌린 녹옥 같이 흩어진 초록색 광체들이 무수히 하늘을 수놓았다. 물론 노란빛이 뒤덮을 때보다는 모든 게 어두침침하긴 했지만. 나는 넋을 놓고 하늘을 보다가 한쪽 발을 그만 허공에 빠트려서 비탈 아래로 굴렀다. 내 몸은 어딘가에 등짝을 찍히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등골에 돌이 박힌 듯이 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탓에 잠시 누운 채로 있었다. 눈알만 부지런히 굴리고 있는데 한쪽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작은 점들이 보였다. 빛은 비탈에 걸쳐 있는 커다란 바위의 그림자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이제 지금껏 지나쳐 온 형광체에 대해 알아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기다시피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아른거렸던 빛이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위가 있는 모퉁이를 지나 흙더미가 무너진 내리막길을 따라가다 보면 협곡에 이르게 되고 그 좁고 어두운 통로를 따라 형광체들이 무수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버섯이었다. 버섯들이 무섭게 느껴지는 건 색깔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 막 자라고 있는 것도 손바닥만 했으며 큰 것은 사람만큼 육중한 몸집이었다. 통로가 좁아 거대한 녀석 옆을 스쳐 지날 때는 마음을 졸여야 할 정도였다. 한동안 내 눈동자는 보랏빛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멍하니 걷다가 언젠가부터 그 버섯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조금 나아지는 느낌이었으나 버섯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멈출 수는 없었다. 진주를 품은 듯한 깊은 속살의 희부연 빛깔이 떠올랐으며 갓 아래 드리운 프릴 모양의 주름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을 제비꽃 향기를 맡고 싶어졌다. 그것이 내 지친 심신을 위로하는 동시에 야릇함과 동경심에 젖은 기억의 순간 속으로 나를 이끌어 줄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쭈글쭈글하게 말라비틀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신비감을 간직한 채로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람 머리만한 버섯을 뜯어 딱딱한 부분을 자르고 먹기 시작했다. 식감은 나쁘지 않았다. 형광물질이 묻어 손과 얼굴에서 옅은 보랏빛이 아른거렸다. 달큼한 향초 냄새가 날 것 같았다. 한때 매일같이 내 몸에서 풍기던, 각진 유리병에 담긴 그 라벤더 향수처럼.



냄새를 맡을 수 없는 몸, 그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나의 헐떡이는 숨결과 튀어 오르는 가슴, 겁에 질리는 이 순간마저 결국에는 증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갑자기 온갖 냄새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볏짚 타는 냄새, 오전의 축축한 흙내, 여름밤의 풋내, 식당가의 기름내, 담벼락의 지린내······. 향기는 언제나 나보다 깊은 구석까지 파고들어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그 암흑뿐인 미답 속에서 온갖 것들을 퍼 올렸다. 까닭 없는 행복감이나 희미해진 기억, 언젠가 품었던 열망 혹은 쭈뼛한 전율과 쾌감 등 언제 무엇이 나올지 나로서도 모를 지경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조각칼 같아서 나에겐 너무 정밀하고 정교했다. 맺거나 끊거나, 그리거나 말거나, 기억하거나 혹은 완전히 잊어야 했다. 후각은 그런 외부의 지배로부터 나를 해방시켰으며 날카로운 선들을 모두 추상화시켰다. 후각이 퇴화하면서 아니, 내가 콧속을 먼지 거르개로 이용하면서부터 나는 차츰 냄새에 둔해졌다. 흙과 나무들, 기다림과 볕 아래의 자리는 매캐한 연기와 신경질적인 휘발성 물질들로 채워졌다. 나이가 들수록 두 개의 구멍은 드나드는 공기가 불쾌한지,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 나쁜 체취를 풍길지 검역하는 거추장스런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운 좋게 맛있는 냄새를 만나는 날조차 나는 맡는 대신 사진을 찍고, 옷에 밸까봐 전전긍긍했으며 머릿속으로는 오전에 떠맡은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난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후각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가루처럼 퍽퍽하게 휘날리다가 어딘가에 쌓여 진부하고 케케묵은 채 살았을 것이다.



두세 시간 정도 걸었을까. 거무튀튀한 얼룩이 섞인 벌판이 계속해서 펼쳐졌다. 불모지에 가까운 땅이어서 가끔 줄기가 울룩불룩한 나무나 누렇게 뜬 잔디만 듬성듬성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런 거라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잎과 가지로 엮은 이불을 덮고, 바람을 막는 기둥 아래서 자며 간간히 버텼다. 바람 소리가 울음소리나 중얼거리는 소리처럼 들려서 깊이 잠들 수가 없었다.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다. 발밑에 버걱대며 흙모래가 깔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나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한번 눕힌 몸은 돌덩이 같이 바닥에 붙어 움쩍도 하지 않았다. 잠깐 졸았을 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 뭔가 아른거리는 듯했다. 벌레 떼 같아 보이기도 하고 그림자 같기도 한 그것이 빠르게 몇 번 내 앞을 스쳐지나갔다. 나는 죽은 듯이 꼼짝 않고 있었다.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게 때론 공포를 더 증폭시킬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는 나뭇잎 덮개 밑에 웅크린 채 그 괴이한 물체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것이 천천히 걷기 시작하자 점점 사람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고 긴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그것은 어떤 나무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달음박질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것의 울퉁불퉁하고 불분명한 윤곽이 한참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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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음지] - 2 16.04.25 100 0 6쪽
» [음지] - 1 16.04.22 108 0 6쪽
3 [두려움의 샘] - 3 16.01.12 199 0 9쪽
2 [두려움의 샘] - 2 16.01.05 139 0 7쪽
1 [두려움의 샘] - 1 16.01.01 179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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