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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씨 님의 서재입니다.

색깔 없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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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씨
작품등록일 :
2016.01.01 21:48
최근연재일 :
2016.04.25 00:15
연재수 :
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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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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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자수 :
15,458

작성
16.01.12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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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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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두려움의 샘] - 3

DUMMY

희미한 불빛은 외딴 집의 창문을 통해 새어 나왔다. 껍질째 박아 놓은 투박한 통나무 외벽이 삼촌의 별장과 닮아 있었다. 창가로 가면 벽난로 앞에 앉아 고무줄 달린 새총이나 털실 인형을 조몰락거리고 있는 아이를 발견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룻바닥에 덩그러니 주저앉아 지글거리는 불빛과 그림자를 나부끼는 작은 뒷모습을. 아이가 뒤돌아보는 모습, 즉 순전히 내가 유리에 그려 넣은 허상에서 떨어져 나온 희끄무레한 물체가 창문에 비쳤다. 나는 소스라치며 한쪽으로 기울면서도 그것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퀭한 눈, 우뚝한 코, 붉고 가느다란 입술……, 그러나 그 모든 기관이 송장처럼 창백한 바탕 위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라고 생각 할 수는 없었다.


창문에 나타난 얼굴이 사라지고 현관문이 스르륵 열렸다. 유리 한 장 없이 그 소름끼치는 얼굴과 마주 서게 되자 도망치지 않은 것이 몹시 후회스러웠다. 그는 가루가 떨어져 나올 것 같이 뿌연 얼굴을 하고 나풀거리는 우중충한 빛깔의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 괴이한 덧옷은 얇은 옷감을 겹쳐 놓은 듯했고 구멍투성이였기 때문에 처음엔 그가 녹조류가 엉긴 그물을 걸치고 있는 줄 알았다. 그의 얼굴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입이 벌어져도 주변 근육은 옴짝하지 않았으며 눈꺼풀이 깜빡이는 것도 어쩐지 부자연스러워서 얼굴에 석고를 발라 놓은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내 머리카락이며 겉옷이며 젖은 것들 위에서 잠시 움직이더니 들어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그때까지도 섬뜩한 기분이었기 때문에 문틈에서 풍겨 나오는 몽글한 온기만 힐끔대고 있다가 뒷등을 떠미는 스산한 바람이 불자 안에서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그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 어쨌든 그것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그만큼 허물어져 가는 돌담처럼 자포 상태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집 안에 감돌고 있는 붉은 기운이었다. 마치 종말을 앞둔 화산과 그 아래 자락을 활강하는 용암처럼 벽난로에서 흘러나오는 화기가 어둠 속을 비집고 있었다. 마룻바닥과 암청색 맞벽은 아스라이 비치는 불김으로부터 적막을 지키는 엄숙한 성채 같았다. 희미한 불빛 사이로 반대편에 벽에 놓인 장식장이 보였다. 그 안에는 머리에 뿔을 달고 직립한 짐승, 커다란 날개를 달고 바닥을 기는 짐승과 같이 기이한 조각상들이 우뚝 서 있었고 맨 아래 칸에는 나무 식기와 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벽난로 앞에서 몸을 말리고 있는데 그가 잔에 뭔가 담아 와 내밀었다. 그의 입술이 말을 하려는 듯이 고무줄처럼 움직이다가 내가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곧 그만 두었다. 잔에 담긴 적갈색 액체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뜨거운 커피나 코코아, 아니면 버찌 열매를 섞어 만든 차 같았다. 나는 그가 준 음료를 마시면서 곧 두 가지를 깨달았다. 하나는 내가 미각 또한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끈거리고 왠지 역한 느낌이 있는 기분 나쁜 음료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썩 내키지 않아 반쯤 남기고 잔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열이 조금 오르는 듯하더니 머리가 핑 돌았다. 처음엔 감기 기운이라고 생각했는데 잠시 후 속에서 부글거리는 느낌이 들더니 위장이 뒤틀리는 통증이 왔다. 결국 나는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면서 그가 독약을 넣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천장에서 약 먹은 벌레처럼 바둥거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머리 쪽이 들려 있는 비스듬히 생긴 침대 위에 있었다. 아직 죽지 않은 모양이었다. 목덜미가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명치끝이 꽉 막힌 듯이 메스꺼웠다. 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돌아오기 전에 집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외투를 챙기고 현관으로 향하는데 눈에 걸리는 게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숲과 물가의 풍경이었다. 이 집은 처음부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지어진 것처럼 물가와 숲길을 가장 잘 내다볼 수 있는 위치에 지어진 것이다.

그의 집을 벗어나 꽤 오랜 시간을 걸었을 때까지도 나는 역류하는 액체를 억눌러 삼키려 애쓰고 있었다. 오히려 갈수록 상태는 악화되어 식은땀이 쏟아지고 나뭇가지에 걸린 하늘이 노랗게 보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정말 하늘의 빛깔이 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스름을 헤치고 여명이 번지듯이 노란 빛이 푸른색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푸른곰팡이 같은 광체는 청실처럼 늘어지며 소멸했고 어두운 구름들은 번쩍이는 금테두리를 두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숲길을 걷는 것은 한결 편해졌지만 탁 트인 시야는 또 그 나름대로 낯선 것들로 가득해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숲길을 옆으로 흐르는 냇물의 색깔에도 변화가 있는 듯했다.



나는 몸을 던졌던 물웅덩이로 갔다. 분명 그 자리가 맞는데 잔잔한 웅덩이 대신 기포와 함께 물이 솟는 샘이 있었다. 그때의 쪽빛이 아닌 암갈색으로 끓어오르는 듯한 용천이 혈관처럼 이어진 여러 갈래의 냇물에 벌컥벌컥 혈액을 공급하고 있었다. 가끔은 실지렁이 같은 가느다란 검은 띠가 뒤섞여 뒹굴기도 했고 자잘한 거품이 일었다가 사그라지기도 했다. 나는 갑자기 그 안에 온갖 더럽고 추악한 것들이 끓어올라 넘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인간과 동물의 배설물을 한데 모아 닥치는 대로 갈아 넣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추잡한 내 인생의 순간들과 자질구레한 집착, 애처로운 기억들, 무언가에 대한 경멸, 번개처럼 튀어나오는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비열한 표정들이 울부짖으며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빌어먹을 음료가 구역질과 함께 흙바닥으로 쏟아져 나왔다. 미각과 후각의 무감각이 도움이 되기도 한단 생각에 끌끌거리며 트림 섞인 웃음을 뱉었다. 거무죽죽한 액체와 벌레의 사체 같은 건더기들이 함께 딸려 나와 땅에 스미는 걸 보고 있으려니 입안에 남아 있는 잔여물들의 깔깔함이 무섭도록 나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온갖 종류의 더러운 것들에 대한 분노와 경멸. 그것들은 결국 내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그런 더러움들이란 지금의 두려움에 비하면 사소한 것일 뿐이었다. 어떤 거부할 수 없는 힘 앞에 겉과 속이 뒤집혀 세상에 다시 던져지게 되면 한없이 천잡스럽고 너절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땅을 짚은 내 손을 적시는 그 묽은 액체는 땅속에 완전히 스밀 때가지 천천히 일렁이며 일그러진 표정의 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물살이 잦아들면서 샘물은 다시 옅어지는 듯했다. 어쨌든 나는 걸어온 방향으로 계속 걷기로 했다. 땅에서 아지랑이가 올라오고 콧마루가 간질간질하니 재채기가 쏟아져 나왔다. 나무 사이로 빛이 속속들이 파고들어 그늘졌던 기슭이나 구석의 짤막한 덤불에도 손길을 뻗었다. 찌꺼기를 쏟아낸 이후로 몸은 비할 데 없이 가벼워졌다. 빽빽한 삼림을 지나자 뻥 뚫린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개의 빛 덩어리들이 뿌리 모양으로 무수한 줄기들을 뻗어 서로 부딪칠 때마다 불꽃처럼 밝은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 탐스러운 빛들이 무한한 백야처럼 저마다 위용을 뽐내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히 걷다가 지치면 잘 만한 곳을 찾아 잠을 청해야 했다. 물은 큰 나뭇잎들에 고인 수분을 모아 아껴 마시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배를 채울 만한 식량은 찾지 못했다. 뱃가죽이 옴폭 패였다가 오줌통에 이르러서야 불룩 솟은 모양이 되었다. 하다못해 나무껍질이나 널린 풀도 뜯어 먹어 보았지만 복통만 유발할 뿐 도저히 먹을 만한 게 못 되었다. 굶주림에 더없이 지쳐갈 무렵, 나는 기묘한 빛을 내는 형광체들이 점점 주변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그것들은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개체 수가 증가했고 계곡의 습지나 죽은 나무에서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하늘이 샛노란 색에서 점차 빛을 잃고 녹색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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