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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씨 님의 서재입니다.

색깔 없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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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씨
작품등록일 :
2016.01.01 21:48
최근연재일 :
2016.04.25 00:15
연재수 :
5 회
조회수 :
726
추천수 :
0
글자수 :
15,458

작성
16.01.01 22:18
조회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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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자
7쪽

[두려움의 샘] - 1

DUMMY

축축하고 비좁은 길이 틀림없었다. 분명 비가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양쪽으로 흙더미들이 쌓여 있는 좁다란 길일 것이다. 무언가에 부딪혀 울리는 듯한 두통이 사라졌다가 다시 계속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심지어 눈앞의 내 손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지독한 어둠 속에 있었고 이런 것들이 그저 악몽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한 잠을 깨기 위한 모든 방법, 상체 뒤집기, 숨을 참았다가 몰아 내쉬기, 이를 갈거나 입술을 깨무는 등의 노력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나는 악몽이나 가위눌리는 고통에 꽤 익숙한 편이었다. 지독한 꿈이라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레 꿈에 몰입하다 보면 잠이란 어느새 깨기 마련이다. 그래도 숨이라도 마음껏 쉴 수 있는 것이 어딘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오래전 언젠가의 악몽을 추억하다가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물론 그 뒤에 일어난 일, 약간은 의식적이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 순진한 웃음이 몰고 온 공포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적막함은 정적 속에, 마른 침샘은 황량한 모래 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렇게 내뱉은 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코와 입으로 거친 바람들이 뒤섞이며 들락거리고 있었지만 그 색색거리는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성대가 만들어 낸 음성을 단지 진동에 가까운 일그러짐으로 느끼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마치 손발과 여타 감각기관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주변에서 쉴 새 없이 내뱉는 한기 때문에 손발이 곧 돌처럼 굳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육체적인 고통을 느낄 수는 없었다. 전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있었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아마도 여섯 살 정도에 키는 지금의 허리에도 채 미치지 못했을 꼬마의 해묵은 기억이었다.





솜뭉치 같은 양 떼가 우글거리던 삼촌의 목장은 침엽수로 뒤덮인 산자락 아래 있었다. 우리 가족은 매년 방학이 되면 그곳에 갔다. 나는 목장에 도착하면 관리인인 양 축사와 창고를 들락거리고 직원 숙소로 가서 바구니에 남은 간식도 찾아 먹었다. 그러다 점심시간이 되면 일꾼들과 삼촌네 가족들이 한데 모여 음식을 먹었다. 그들이 흙 묻은 옷을 치워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식탁 끝자락에서 먼저 식사를 끝내고 조용히 별장으로 사라지곤 했다. 목장 옆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푸성귀들이 자란 샛길이 하나 있는데 그 끝에 땔감 더미가 쌓인 뜰과 통나무 별장이 있었다. 나는 삼촌이 일부러 별장을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숲 속에 숨겨 놓았다고 생각했다. 멋지게 자란, 거대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그 별장은 그때까지 내가 아는 집들 중에서는 가장 훌륭한 집이었다. 여름엔 새들의 울음소리와 풀숲을 뒤척이는 맑은 바람소리들이 뒤엉켜 집 주변을 한 바퀴 쌩 돌고 사라졌고 겨울엔 나무 사이로 박힌 듯 깜빡거리는 창가의 불빛에 시린 눈발도 녹아내리듯 잠잠해지고 이내 다소곳이 내려앉는 그런 집이었다.


별장 뒤쪽에는 과일 몇 개가 들어갈 만한 나무통이 있었다. 삼촌이 말하길 먹다 남은 음식을 그곳에 두면 산토끼나 다람쥐들이 그걸 물고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통에 과일을 넣어 두고 집 안에서 그곳을 지켜보곤 했다. 신기하게도 어느 날엔가 정말 토끼가 나타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대로 뛰쳐나가 도망치는 토끼를 뒤쫓았다. 대개 불운한 일들이 그렇게 일어나듯이 나는 눈앞에 있는 그것에만 홀려 있었다. 그렇게 토끼의 뒤꽁무니만 쫓다가 전혀 익숙하지 않은 곳에 와 있음을 깨달을 무렵,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가파른 언덕 아래로 미끄러져 굴러떨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흙이 무너져 내리면서 땅이 꺼져 버렸다. 바닥에 쌓인 눈과 흙과 함께 쏟아져 내린 눈더미 사이에 깔려 나는 납작하게 갇혀 버렸고 곧 내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까지 나는 죽는다는 것은커녕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세상엔 즐거움, 따분함, 기대감이나 실망 외에도 한 줄기 숨 쉬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검고 웅장한 나무들보다도 더 거대하고 어두운 공포라는 것이 존재함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다행히 나는 부모님과 삼촌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내가 이미 그 녀석에 대해 알아 버린 이상, 그 녀석이 나에 대해 알아차린 이상, 한시도 두려움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없었다. 그 뒤로 나는 어딘가 음지에 맺혀 있을 이슬이나 쪼개진 돌 틈에 자라는 이끼 따위를 생각하면서 그것들이 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어느샌가 그는 나를 지배했고 언제나 나보다 한 걸음 앞서 있었다. 두려움이 꼭 나쁜 것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림물감처럼 내 삶 전체를 물들여 버렸다. 그것은 마치 뒤섞이는 다른 물감의 본래의 빛깔을 잃게 만드는 어둡고 음침한 쥣빛 물감 같았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땀에 불은 발가락이 얼어붙으면서 발끝이 뭉그러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갈수록 돌부리와 나무뿌리가 자주 나타났기 때문에 말려든 발가락을 억지로 펴고 발바닥을 쳐들며 걸어야 했다. 손으로는 부지런히 앞쪽을 더듬으면서 종종 마주치는 나무기둥을 찾아냈다. 단단한 나무껍질 사이에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한 움푹한 틈이 있었기 때문에 중심을 잡기에 좋았다. 돌이나 덤불에 바지가 쓸리면 그 자리에 조금씩 물이 스몄다. 나는 점점 습지로 향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항상 어물거리기 좋아하던 내가 어쨌든 주저 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이것으로 대단할 것도 없는, 그저 현실도피일 뿐이었던 내 삶이 이제야 정당한 평가를 받는지도 모른다. 평소의 나는 핫이불에 둘러싸여 기름이나 태우고 식음에 겨워 온갖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뻔뻔한 과객에 불과했던 셈인가. 그저 안락한 구멍 속에 있었기 때문에 모순이니 야만이니 구멍 밖에 대고 지껄여댄 게 아닐까.


가시가 박혔는지 왼쪽 새끼손가락 밑이 아려왔다. 질척한 땅이 그 끈적끈적한 입을 놀리면서 호로록호로록 나의 붉은 체온을 삼키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머릿속은 마치 깨진 유리 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것처럼 조각난 기억의 형태로 뒤죽박죽이었다. 다른 감각은 점점 무뎌지는데 손목 언저리의 맥박만은 사납게 날뛰었다. 한 번, 두 번 다시 한 번, 두 번, 세 번…… 그것은 뱃전에 내동댕이치는 굵은 밧줄 같았다.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벌레 떼와 불쑥불쑥 들이미는 얼굴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내 머리 속에서 멋대로 만들어 내는 그들 무리가 지나갈 때까지 나는 진흙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기로 했다. 아주 멀리 떨어져 나가 작은 점으로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이리저리 얼굴을 굴려 보았다. 다행히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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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음지] - 1 16.04.22 108 0 6쪽
3 [두려움의 샘] - 3 16.01.12 200 0 9쪽
2 [두려움의 샘] - 2 16.01.05 139 0 7쪽
» [두려움의 샘] - 1 16.01.01 180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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