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44 (2)
요즘 나는 기묘한 일을 겪고 있다.
이 글은 그것을 기록하기 위한 글이다.
다만.
글을 적기 이전에 되짚고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모든 기묘한 일에 시작이 언제였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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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사라졌다. 동시에 석이 가구점의 간판이 점멸하듯 깜빡거리더니 이내 환한 불이 들어왔다.
하늘은 어느새 보랏빛이었다.
고요한 거리.
저녁이 시작되려는 듯 가로등도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하는 그 순간. 딸랑,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제가 가지고 들어갈게요!”
석이 가구점 앞. 검은색 머리에 소년이 이마 앞으로 내려온 머리를 쓸어넘기며 슬리퍼를 끌었다.
키가 큰 소년은 교복 위로 흙과 물감이 이리저리 묻은 앞치마를 매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꾸깃 구겨넣은 소년이 움직일 때마다 입김이 얼굴을 가렸다. 추운 날씨였다.
소년은 이윽고 목적지 앞에 섰다.
우편함 앞이었다.
성인남자보다 큰 손이 우편함을 쓸었다. 오늘따라 든 것이 많았다.
“뭐가 이리 많아.”
소년, 강석이 떨떠름한 얼굴로 우편물을 꺼냈다. 전기세. 수도세. 도시가스비. 종이들이 줄줄이 나왔다. 그러다 턱, 하고 뭔가 걸렸다.
울퉁불퉁한데. 강석이 두툼한 뭔가를 꺼냈다. 테이프로 이리저리 감겨진 편지였다.
“뭐야?”
강석은 편지를 이리저리 돌렸다.
【나는 확신한다. 정확한 원인과 규명은 내릴 수 없지만, 그 날이 이 기묘한 일이 시작된 지점이었다.】
# 20XX년 3월 30일.
오늘 가구점 우편함을 열어보니 난생 처음 보는 상자가 있었다. 손바닥만한 작은 상자는 빛을 뿜어댔다. 밤인데도 밝았고, 차가운 내 손을 녹일 만큼 따뜻했다.
상자에는 [오향맛살]이라는 태그가 붙어있었다. 정갈하게 쓰인 글씨를 매만지며 상자를 열어보니 작은 고체 물감 하나가 들어 있었다. 주황색이었다. 꼭 맛살 같았다.
# 20XX년 3월 31일.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가구점 우편함에 상자가 들어있었다. 오늘은 종이 상자였다. 병원 진단서로 꼼꼼히 감싼 종이 상자에는 [진단서]라는 태그가 붙어있었다.
정갈하게 쓰인 태그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이제 태그가 두개다.
상자 안에는 샤프심이 들어있었다. 마침 샤프심이 떨어져가고 있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 20XX년 4월 11일.
오늘. 또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꼭 10일만이었다. 이로써 태그가 세개였다. 기다랗고 얇은 노랑박스에 연결된 태그를 떼어내며 나는 골몰했다.
가구점 창고에서 적당한 상자나 깡통을 구해야 할 것 같다. 이 기묘한 일에 대한 증거로 태그들을 모아봐야지. 태그를 챙기는데 [쪼님]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노랑박스에는 4B연필 한 자루가 들어있었다. 많아도 많아도 모자른 것이 연필이지. 이 기묘한 일의 원인이 뭔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 20XX년 4월 13일.
꼭 이틀만이다. 오늘 [황녀]라고 적힌 작은 금색 봉투에 고무줄 하나가 들려 있었다. 두껍고 쭉쭉 늘어나는 것이 상당히 고급진 노란 고무줄이었다.
마침 프리즈마 색연필을 묶어놓은 고무줄이 끊어지기 일보직전이었는데 잘 되었다. 이걸로 교체하면 될 것 같았다.
# 20XX년 4월 23일.
이 기묘한 일에 대하여 보름 넘게 고민하던 문제가 드디어 풀린 것 같다. 나는 고급스러운 상자에 적힌 [무적푸딩]이라는 황금태그를 바라보며 확신했다. 이건 나에게 좋은 일이었다.
상자 안에는 고체물감 12색 세트와 함께 고체물감용 워터브러쉬 소중대 3세트가 들려있었다.
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발견하시곤, “무슨 좋은 일 있니? 기분이 좋아보이는 구나.”라고 말씀하셨다. 기분이 좋아보였나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20XX년 4월 23일.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편함에서 작은 편지지를 발견했다. 수신인은 나였다. 발신인을 적는 곳에는 [akswjs2724]이라고 적혀있었다.
편지지를 조심히 뜯어 보니 거기에는 검은 고무줄 하나가 들려있었다.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이건 기묘한 일이다. 기묘한 일은 하루에 한번만 일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법칙이었다.
어찌되었든 퉁퉁 튕기는 촉감이 마음에 들었다. 요즘 몽땅 4B 연필이 많아져서 이걸 어떻게 정리할까 고민이었는데 이걸로 한다스는 묶어놔야겠다.
# 20XX년 4월 27일.
나흘만에 편지가 또 도착했다. 편지 봉투에는 [akswjs2724]라고 적혀 있었다. 기시감이 드는 이름이길래 바로 상자를 살펴보니 4월 23일에 왔던 편지지에도 [akswjs2724]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같은 발신인에게 두번을 받았다.
기묘한 일의 새로운 법칙이었다.
한 사람당 한 번만 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놀라하면서 편지를 열어보니, 이번에도 검은 고무줄 하나가 들려있었다. 묶는데 쓰면 짱짱해서 마음에 들었는데 또 와서 기뻤다.
고무줄에 묶이지 못한 몽땅연필이 많았는데 잘 되었다.
# 20XX년 4월 27일.
늦은 밤. 가구점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다가, 산책이라도 할겸 밖으로 나오니 우편함이 열려 있었다. 누군가 급하게 뭔가를 넣어놓고 간 흔적이었다.
다가가 살펴보니 맥X 커피믹스 스틱 하나가 들어있었다. 스틱을 꺼내니 끝에 실로 꽁꽁 묶어놓은 태그가 딸려나왔다. 브라운 빛깔의 태그에는 [더취커피]라고 쓰여있었다. 더치커피 특유의 향이 나는 것 같았다.
간밤에 작업하기 힘들었는데···간만에 커피믹스를 타 먹었다. 달달하고 맛있었다.
# 20XX년 4월 28일.
새벽녘. 집으로 돌아가려고 보니까 우편함이 또 열려있었다. 다 닫히지 못한 우편함 바깥으로 상자가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뭐지. 어제 오늘 무슨 날인가.
천천히 다가가보니 검은색의 하얀색 리본이 묶인 고급스러운 상자가 우편함에 꽂혀있었다. 같이 딸린 태그에는 [무향(武香)]이라고 적혀있었다.
상자를 집으로 돌아와 조심히 열어보니 고급스러운 드로잉북이 모습을 드러냈다. A4사이즈 정도 되어보이는데 210g 짜리 두꺼운 종이였다. 질도 좋고, 양도 많았다. 요즘 드로잉북이 떨어졌는데 어떻게 이렇게 딱 맞게 선물을 주지.
기분이 매우 좋았다.
# 20XX년 4월 30일.
우편함이 열려있었다. 이틀만이었다. 이로써 벌써 10번째. 기묘한 일은 나에게 법칙이 되가고 있었다.
오늘은 상자였다. 짙은 회색 상자에는 [정보의고래]라고 적힌 고래 태그가 걸려있었다. 태그를 떼고 상자를 열어보니 상자에는 연필 뒤에 끼워 쓰는 기다란 깍지가 두개 들어있었다.
오. 생각해보니 요즘 몽땅연필이 많아졌는데 이 깎지를 끼워서 남은 연필심도 마저 쓸 수 있게 해야겠다.
흰색과 검은색 깍지 두개를 내려다보다 상자를 다시 꼭 닫았다. 기분이 좋아졌다.
# 20XX년 5월 1일.
오늘도다. 우편함에 또 선물이 들어있었다.
오늘은 편지봉투였다. [lawkay]라는 특이한 이름이 멋스러운 필기체로 적혀있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종이를 화판에 고정시킬 때 쓰는 집게 두개가 들어있었다.
형광 분홍과 형광 연두색이었다. 요즘 안 그래도 집게가 녹슬어서 뺏다 겼다 하기가 힘들었는데 잘 되었다. 화구가방에 넣어놓은 집게를 이걸로 교체해야겠다.
집게 사기는 돈이 아까웠는데 정말 잘 된 일이었다.
# 20XX년 5월 4일.
비가 올 것처럼 날씨가 흐릿하여 얼른 자전거를 타고 가구점으로 들어가려는데 우편함이 열려 있었다.
본능적으로 새로운 기묘한 일이 일어났음을 눈치채고 우편함에 손을 넣었다. 데구루루 색연필 한 자루가 굴러왔다. 끝에는 리본으로 매듭져진 주황색 태그가 묶여 있었다. 태그에는 [호박캔디]라고 적혀있었다.
프리즈마 애니메이션 색연필 오렌지였다. 스케치하기에도 용이하고, 색연필임에도 불구하고 지우개가 꽤 먹는 편인데다 번지지도 않아 오일파스텔이나 수채화를 그릴때 즐겨 사용하는 연필이었다. 안그래도 사용중인 프리즈마 색연필은 거의 다 써가는 중이었는데···어떻게 이렇게 타이밍이 좋을 수가 있지?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 20XX년 5월 7일.
우편함이 또 열려있었다.
다시 나흘만이었다.
우편함에 손을 넣자 뭔가 묵직한 상자가 꺼내어졌다. 세로가 길고 가로가 짧은 상자에는 네잎클로버 모양의 태그가 달려있었다. 태그에는 [g8061_seacret77]이라는 글씨가 멋드러진 황금빛 물감으로 적혀있었다. 비밀77? 뭔가 행운의 심볼같은 태그였다.
태그상자에 넣어놓기 위해 따로 챙기며 상자를 열어보았다. 픽사티브가 들어있었다. 소묘를 그린 뒤 연필이 번지지 않게 위에 뿌려 고정하는 정착액이었다.
안 그래도 소묘 수업 때문에 쓸 일이 많았는데 잘 된 일이었다. 나는 소중하게 픽사티브가 든 상자를 챙겨넣었다.
# 20XX년 5월 7일.
그러고 가려고 했는데 우편함 깊숙한 곳에서 돌돌 말린 편지지 같은 것이 보였다. 손을 넣어 꺼내보니 편지지가 아니라 머메이드지였다.
붉은색과 초록색.
카네이션이 연상되는 머메이드지였다.
머메이드지를 감싼 고무줄에는 태그가 달려있었다. [하나산]이라고 적힌 태그를 보니 이것 역시 기묘한 일임을 깨달았다. 선물만 챙기지 말고 편지도 쓰라는 뜻인가.
강석이 상자에 이어 머메이드지도 챙겼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서 집으로 가서 어버이날에 부모님께 드릴 편지지도 같이 만들어야겠다.
#20XX년 5월 8일.
기묘한 일이 또 일어났다.
하루에 두번이나 일어났는데 이틀연속으로 일어나다니. 얼떨떨한 기분으로 우편함을 열었다.
우편함에는 박카스 하나가 들어있었다. 태그에는 [숙련자]라고 적혀있었다. 무언가 고수의 느낌이 났다.
오늘은 어버이날인데 내가 선물을 받아버렸다. 박카스를 손에 꼭 쥐고 누구에게인지 모를 감사의 인사를 하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돌렸다.
#20XX년 5월 8일.
그때였다.
텅, 소리와 함께 우편함에 뭔가가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우편함을 열어봤다.
작은 우드보관함이 들어있었다. 우드보관함에는 [모우당]이라는 태그가 붙어있었다. 뭔가 연필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우드보관함을 열어보니 소묘를 할때나 쓰이는 떡지우개가 들어있었다. 안 그래도 커터칼로 조각조각을 내도 빠르게 쓰는 탓에 새 떡지우개가 필요했는데 잘된 일이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20XX년 5월 9일.
기묘한 일이 또 일어났다. 3일 연속으로 일어나는 건 또 처음이었다.
기묘한 일의 새로운 법칙이라 할 수 있었다. 기묘한 일은 3일 이상 연속으로 일어날 수 있다. 일단 최고기록은 3일이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우편함에서 상자를 꺼내었다.
흰색 바탕에 민트색부터 파란색, 그리고 보라색에서 분홍색으로 가까워지는 그라데이션이 있는 상자였다. 태그에는 검은색으로 [우티]라고 쓰여져 있었다.
상자 안에는 신한 SWC A 호리즌 블루(A913/304) 15ml 낱색 물감 하나가 들어있었다. 상자에 민트색과 얼핏 닮아있는 청록색이었다.
마침 떨어져가고 있었는데···!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20XX년 5월 11일.
작업을 하다가 산책이라도 할 겸 자전거를 끌고 나가는데 우편함이 열려 있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익숙해졌다는 사실에 스스로 반성하며 우편함으로 다가갔다.
구름이 그려진 하늘색 긴 상자가 들어있었다. 하늘색 태그에는 [유러너스]라고 적혀있었다. 혹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천공의 신에 영어 이름인 그것일까. 무언가 반가움을 느끼며 상자를 열었다.
스테들러 마스 전문가용 4B연필이 들어있었다. 파란색 연필껍질은 하늘을 연상케 했다. 요즘 톰보만 집에 굴러다닌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이걸로 가구 디자인이 생각나며 스케치를 해야겠다.
#20XX년 5월 12일.
기묘한 일이 이번에도 이틀 연속으로 찾아왔다. 우편함을 열어보니 이번에도 긴 상자가 들어있었다. 연필 하나 겨우 들어갈 것 같은 얇다란 상자는 새파란색이었다.
바다 한가운데를 떠올리게 하는 상자에는 푸른색 판다모양의 태그가 달려있었다. 태그에는 [퍼런판다]라고 적혀있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프리즈마 애니메이션 색연필 라인 중에 가장 인기가 많은 20044 블루가 들어있었다.
인체 해부학 스케치로 이만한 게 없어서 안 그래도 갖고 싶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20XX년 5월 12일.
상자를 챙겨서 가려고 보니까 우편함 안에 상자가 하나 더 있었다. 이번에도 똑같은 새파란색 상자, 푸른색 판다 모양에다가 [퍼런판다]라고 적힌 태그까지. 같은 발신인이었다.
그렇다면···이건, 새로운 법칙이었다. 같은 발신인에게 같은 날 두 번 받을 수 있다. 놀라하면서 상자를 열어보니 이번에도 프리즈마 애니메이션 색연필 20044 블루가 한 자루 들어있었다.
이게 유성 색연필임에도 지우개로 잘 지워지는 편이라 정말 좋은 제품이라, 하나 더 얻으니 솔직히 신났다.
#20XX년 5월 12일.
상자 두 개를 챙겨서 다시 가려는데 텅, 하고 소리가 들렸다. 설마.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편함을 열었다. 아까까지 분명히 비어있던 우편함에 상자 하나가 더 들어있었다.
천천히 꺼내보니 이번에도 새파란색 상자에 푸른색 판다 모양의 태그가 달려있었다. 태그에는 [퍼런판다]라고 적힌 채였다.
같은 발신인이었다.
잠깐, 그렇다면 이 또한 새로운 법칙이었다. 같은 발신인에게 세 번이상 받을 수 있고 그게 같은 날일 수 있다.
선물을 열어보니 이번에도 프리즈마 애니메이션 색연필 20044 블루가 한 자루 들어있었다. 이로서 세 자루였다. 이걸로 그린 스케치 위로 잉크펜이나 연필을 올리면 잘 올라가서 애용하는 건데 이렇게 한 번에 세 자루나 생기다니. 기분이 매우 좋았다.
#20XX년 5월 13일.
다음 날이었다. 작업실에 들어가려는데 이번에도 우편함이 열려있었다. 무의식중에 우편함을 쳐다보니 커다란 서류봉투가 들어있었다. 단추에 끈을 감아 잠구는 방식의 서류봉투였다.
봉투가 더 비쌀 것 같은데.
고급스러워 보이는 서류봉투를 만지작 거리자 무언가 두툼했다.
단춧구멍에 감긴 끈의 끝에는 [szstorage]라고 적힌 태그가 달려있었다. 고급스러운 가죽에 각인으로 새겨진 영어를 쓸어넘긴 뒤. 끈을 풀어 봉투를 열어젖혔다.
두툼한 것에서 반쯤 예상했지만, 크로키북이었다. 드로잉북하고는 달리 좀 더 얇았지만 상당히 많은 장수가 들어있는지 두꺼웠다. 서류봉투도, 크로키북도 크래프트지가 떠오르는 브라운 계열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20XX년 5월 13일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작업실에서 나왔다. 이상한 촉에 우편함을 바라보니 우편함이 또 열려있었다. 이틀 연속에 이틀 연속으로 두번 이상. 기묘한 일은 생각보다 요즘 자주 일어나고 있다.
당황하여 우편함으로 다가가니 진회색 작은 상자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검은색 흰색 체크문양이 박힌 태그에는 [qaz789q]라고 적혀있었다.
상자를 살짝 열어보니 곡선 정밀 핀셋이 들어있었다. 실리콘 작업이나 레진 작업을 한 다음 조립을 할 때면 이 핀셋이 정말 큰 도움이 되곤 하는데. 뾰족한 게 정교한 작업이 가능할 것 같았다. 잘된 일이었다.
#20XX년 5월 13일
가려는데 상자가 하나 더 들어 있었다.
이로써 이틀 연속에 하루에 반복해서 연속 세 번째네. 슬쩍 고개를 숙이니 반지나 겨우 들어갈 사이즈의 작은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상자. 붉은 태그. 그리고 붉은 태그에 적혀있는 [숙련자]라는 붓글씨. 숙련자, 라는 이름으로 기묘한 일이 일어난 건 이로써 두번째였다. 상자를 열어보니 사쿠라 코이 워터칼라 고체물감 낱색이 들어있었다.
Crimson lake. 상자를 닮은 붉은 빛이었다. 마침 떨어져가는 색상이네. 내일 가려고 했던 화방에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잘된 일이었다.
#20XX년 5월 14일
다음날이었다.
화방에 들리지 않아도 되서 곧바로 나온 가구점. 작업실로 향하는 내 발길을 붙든 건, 우편함이었다. 묘하게 끌리는 기분에 다가가 우편함을 열어보니 고급스러운 가죽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급스러운 가죽 상자에 달려있는 가죽 태그가 익숙했다. 불에 탄 것처럼 각인된 이름은 [szstorage]. 바로 어제 받았던 태그와 같은 이름이었다. 나는 태그를 유심히 바라보다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뭔가 가죽을 열고있자니 겸허한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았다.
상자를 열어보니 사쿠라 피그마 마이크론 시리즈 0.25mm 8색세트가 들어있었다. 세계 최초의 피그먼트 잉크 펜으로 일러스트나 제도에서 사랑받고 있는 그 펜이었다.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이라니. 감사한 마음을 담아 사쿠라 피그마 세트를 손으로 쓸었다.
#20XX년 5월 14일
만족하고 돌아가려는데 마치 누군가 부르듯 텅, 하는 소리가 거리에 울렸다. 설마. 우편함을 돌아보니 분명 닫아두었던 것이 다시 열려있었다.
천천히 다가가 우편함 안을 바라보니 푸른색 상자가 들어있었다. 푸른색 상자에는 라오스 우표가 붙어있는 태그가 달려있었는데 그곳에는 [하러스]라고 적혀있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까렌다쉬 스위스컬러 수채색연필 12색이 들어있었다. 색감 발색이 훌륭하고 수채 색연필로서는 역사가 오래된 그 색연필이었다. 파란색과 대비되게 선명한 붉은색 케이스를 쓸었다. 열이 많은 곳에 있었던 것처럼 케이스가 뜨뜻했다.
요근래 인체소묘를 색연필로 그린다고 창고에 남아나는 색연필이 없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20XX년 5월 15일
청명한 날씨.
오늘은 스승의 날이었다.
내가 그것을 발견한 것은, 집에서 자전거를 끌고 나와 학교로 등교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이제 막 공동현관을 나가려는데 우리집 우편함에 커다란 뭔가가 들어가지도 못하고 박혀있는 것이 보였다.
두손 가득 어머니 백명희가 쥐어주신 선물을 한 손으로 옮기며 상자를 우편함에서 꺼냈다. 두께가 두껍진 않았다. 뭐지?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려는데 종이가 회전했다.
태그였다.
기묘한 일이었다. 이로써 기묘한 일이 5일째 연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뭔가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느낌에 태그를 슬쩍 보니 파스텔 느낌의 머메이드지 위로 [주형이]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곧장 상자를 열었다. 잘 포장된 종이가 지문에 비벼지며 신문을 접는 소리가 났다.
상자를 열어보니 ‘폴 루벤스의 조르조 모란디 오일파스텔 48색’이 들어있었다. 조르조 모란디라는 이탈리아 화가의 작품에서 따온 48가지 색상으로 구성된 오일파스텔이었다.
일반적인 오일파스텔보다 텍스쳐가 크림같아 빨리 쓰는 경향이 없잖아 있지만, 유화 물감처럼 임파스토 느낌을 낼 수 있는 두텁고 꾸덕한 질감의 오일파스텔이었다. 갖고 싶었던 것이었다. 깜짝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20XX년 5월 15일
선물을 챙겨 이제 진짜 나가려는데 우편함 안쪽에 뭔가 하나가 더 들어있었다.
볼펜이 들어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길고 얇은 붉은색 상자였다. 붉은 상자에는 붉은 태그가 달려있었다. 묘하게 익숙했다. 태그를 뒤집어보니 붓글씨로 [숙련자]라고 적혀있었다. 이로써 [숙련자]라는 발신인으로부터 세번째 우편물이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티티 미디움펜이 들어있었다. 컴퓨터 플러스 사인펜과도 같은 텍스쳐에 붉은 볼펜이었다. 뭔가 고수의 향기가 느껴졌다.
#20XX년 5월 18일
학교가 끝나고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우편함에 뭔가가 가득 들어있었다. 걸음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우편함 앞에 서보니 사흘만에 일어난 기묘한 일이었다. 우편함을 열어보려는데 길고 얇은 검은색 상자가 제일 먼저 잡혔다. 무의식중에 손이 갔다. 태그에는 [hyunki7890]이라 적혀있었다. 테트리스 같은 색감이 인상적인 태그였다. 상자를 열어보니 검은색 네임펜이 들어있었다.
안그래도 교과서에 이름을 적을 네임펜을 살까말까 하고 있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이걸로 이름을 적으면 될 것 같다.
#20XX년 5월 18일
내 걸음은 우편함에 멈춰선 채였다. 오늘은 뭔가 이상했다. 우편함에 뭔가가 가득했다. 심상치 않은 우편함 상황에 잠깐 망설이다가 손을 뻗었다. 노란색의 길고 얇은 상자가 손에 마구잡이로 잡혔다. 하나같이 노랗고, 유광이었다.
상자와 어울리는 노란색 태그가 달려있었다. [쪼님]이라고 적힌 태그를 바라보며, 상자를 열어젖히니 보인 것은 병아리 캐릭터였다.
뭐야?
병아리를 쭉 땡겨보았다. 볼펜이 딸려왔다. 캐릭터 볼펜인 모양이었다. 슥슥, 상자에 낙서를 해보니 선명했다. 강채영이나 줘야겠다. 그러고 상자를 챙기려는데 같은 색깔의 상자가 네 개나 손에 들려있음을 깨달았다.
······이거 설마?
#20XX년 5월 18일
나는 곧장 노랗고 길고 광이 나는 상자를 열어젖혔다. 이번에 병아리 모양의 캐릭터 볼펜이 들어있었다. 이번에도 태그에는 [쪼님]이라고 적혀있었다.
침을 나도 모르게 꿀꺽 삼켰다.
아직 상자가 세 개나 남아있었다.
#20XX년 5월 18일
상자를 다시 또 열어보려는데 이번에도 [쪼님]이라는 태그가 적혀있음을 깨달았다. 같은 날, 같은 발신인이 연속 세번째였다. 이 기묘한 일이 왜 일어났을까 되짚으며 상자를 열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병아리 모양의 캐릭터 볼펜이 들어있었다.
아직 상자가 두 개나,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20XX년 5월 18일
침을 나도 모르게 삼킨 상태로 상자를 열어젖혔다.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동일한 캐릭터 볼펜이 또 들어있었다.
태그는 이번에도 [쪼님]이었다. 뭔가 병아리라도 그려줘야 하는 것 아닌지 궁금해졌다. 좋아하는 캐릭터인가.
나의 시선이 천천히 마지막 상자로 향했다.
#20XX년 5월 18일
설마 이것도 같은 건 아니겠지. 만약에 맞다면, 같은 날짜에 같은 발신인이 같은 선물을 연속 5번이나 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 된다.
기묘한 일에 대한 역사적인 발견이었다.
태그에 적힌 [쪼님]의 정체를 상상하며 상자를 열었다. 이번에도 노란색 병아리 캐릭터가 달린 볼펜이 튀어나왔다.
다섯자루 모두 강채영에게 넘겨버릴 생각이었지만, 뭔가 행운의 심볼 같아 한 자루는 제가 챙겼다. 기분이 좋았다.
#20XX년 5월 18일
가구점에 들어간 뒤. 잠깐 바깥바람을 쐬러 나왔을 때였다. 우편함에서 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미 기묘한 일이 일어난 거 아니었나?
의아함에 우편함을 슬쩍 열어보았다. 손바닥만한 너비의 팔뚝만한 크기의 상자가 들어있었다.
묘하게 고양이 털이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뭐지? 고양이 털을 털어내며 태그를 붙잡았다. 연한 상아색 같기도 하고, 연한 주황색 같기도 했다. 태그에는 정갈한 글씨로 [묘네즈]라고 적혀있었다.
상자 안에는 ‘몬타나 골드라인 리부머 스프레이 보조제’가 들어있었다.
벽화가 그려진 벽 위에 다시 그림을 그리거나, 또는 도색이 된 것을 다시 리폼할 때 이전에 스프레이를 벗겨내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이런 신기한 화학용품이라니.
이게 있다면 작업이 수월해질 터였다.
잘된 일이었다.
#20XX년 5월 18일
이번에는 진짜로 가구점에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우편함 안쪽에 뭔가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에도 또? 강석이 놀란 얼굴을 했다. 특유의 표정이 없는 무표정이었다. 눈으로는 우편함을 안쪽을 살폈다.
금귤 껍데기와 비슷한 색감의 상자가 보였다. 손을 뻗어 상자를 잡았다.
상자보다 눈이 가는 건, 태그였다.
게임골드를 동전화 시키면 이렇게 싶을까 싶은 모형의 태그가 딸려나왔다. 태그에는 [류승민]이라 박혀있었다.
뭔가 모험을 떠나야 할 것 같은 태그였다.
독특하네.
태그를 튕겼다.
다른 태그들에 비해 두껍고, 뭔가 질감도 달랐다, 금박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태그를 만지며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앞서 받았던 것과 같은 브랜드의 ‘몬타나 골드라인 아세톤 스프레이 보조제’가 들어있었다. 방금 받은 선물과 같은 라인의 상품이었다.
태그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스프레이 형태의 보조제를 꺼내보았다. 일단 그립감부터 만족스러웠다.
당장에라도 써보고 싶어서 근질근질 거리는 것도 같았다. 나는 등올 돌렸다. 지금 당장 아무거에나 실험을 해봐야할 것 같았다.
#20XX년 5월 18일
그때였다.
너무 급하게 몸을 돌리다 우편함을 쳐버렸다. 그와 동시에 둔탁하게 안쪽에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우편함에 뭔가가 더 있단 뜻이었다.
손을 뻗어 넣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상자가 걸려나왔다.
이번에도 동전모양의 태그가 달려있었다. 태그에 적힌 이름은 [류승민]. 같은 발신인이었다.
뭔가 아까 스프레이 보조제가 들어있던 상자보단 높지 않고 옆으로 긴 것 같았다. 이게 뭘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상자를 열었다.
AnB 브랜드의 고급 제도용 빗이었다.
은행나무가 무르익었을 때의 생각인 고급 제도용 빗은 손빗자루나 지우개털이로 사용하는데 용이했다.
요근래 색연필이나 소묘를 많이 하고 있는데 이게 또 섬세한 편은 아닌지라, 손으로 털기가 퍽이나 난감했었는데. 마음에 들었다.
#20XX년 5월 18일
이제 진짜 진짜 가야만 했다.
몸을 돌려 걸어가려는데 등 뒤에서 ‘텅’소리가 들렸다. 농구공이 골대를 통과하는 소리처러 경쾌했다. 설마···이게 몇 번째? 놀라서 우편함으로 다가갔다.
벌써 오늘만 열번째로 일어나는 기묘한 일이었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밀려오는 당혹스러움을 잊지 않으며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의 겉 표면에는 버드나무가 흐드러지게 그려져 있었다.
크래프트지 위로 연두와 초록색 사이에 고급스러운 색감이었다. 마치 햇시래기 색감에 가까웠다. 상자를 열자 같이 달려있던 초록리본이 스륵, 풀렸다. 갈색빛 도는 태그에는 [버들마루]라고 적혀있었다.
태그를 보며 상자를 열어젖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상자에는 성인 남자 주먹만한 잉크가 있었다. 어두운 시래기 빛을 담은 잉크였다. 어째선지 시가 떠오르는 잉크였다.
#20XX년 5월 18일
이제 진짜 진짜 진짜 진짜 가야지, 하고 상자를 열어보려는데 뭔가가 툭하고 떨어졌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졌다. 창그랑, 소리가 맑았다. 투명한 비닐이었다.
기묘한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이니 비닐 안으로 투명한 글라스펜이 들어있는 게 선명하게 시야에 잡혔다. 비닐을 감싼 파란 리본에는 [불량엄마]라는 태그가 달려있었다.
불량엄마?
뭔가 재밌는 이름이었다. 글라스펜을 이리저리 굴렸다. 방금 도착한 시래기빛 잉크를 글라스펜에 찍어 소네트를 하나 써보고 싶어졌다.
#20XX년 5월 19일
다음날이었다.
무려 11번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묘한 일을 경험했으니 이제 한동안 잠잠하지 않을까 싶었다. 내 오만이었다.
하교를 하고 가구점으로 가는데 우편함이 열려있었다. 천천히 우편함에 다가가니 이번에도 꽤나 커다란 상자가 우편함에 들어있었다. 뭔가, 그런 게 느껴졌다. 많은 사람이 저가 미술을 계속하길 바라는 마음 같은 게. 말도 안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 태그를 쓸었다.
[료동]이라고 적혀있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푸른색 곽에 ‘윈저앤뉴튼 고트만 고체물감 8색 포켓박스’가 들어있었다. 작은 포켓박스 안에 8개의 고체물감이 들어있는 화구였다.
요즘 야외에서 작업할 일이 많아 워터브러쉬를 챙기고 다닐까 싶었는데 이걸 같이 가져가면 되겠다 싶었다. 잘된 일이었다.
#20XX년 5월 19일
이제 몸을 돌리려는데 상자가 눈에 하나 더 잡혔다. 기묘한 일이 요즘 지나치게 후했다. 이렇게나 기묘하고 기이할 수가.
조심스럽게 우편함 깊숙이 손을 넣었다. 상자가 만져졌다. 검은색 상자에는 중간중간 오돌토돌하고 꺼끌꺼끌한 입체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이 꼭 호랑이를 연상케했다. 검은색 머메이드지를 호랑이 모양으로 자른 태그에는 [북호랑이]라고 적혀있었다.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길고 얇은 상자를 열어보니 루벤스 수채화 붓 777시리즈 붓이 네 자루 들어있었다. 그 묘한 갈색이 호랑이 털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붓이 네 자루나 생기다니, 감사한 일이었다.
- 석이는 기묘한 일을 겪고 있다 To be contu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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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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