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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제국(RE)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완결

2inro
작품등록일 :
2019.05.21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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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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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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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기억의 파편(3)

DUMMY

백의제국 2.44 - 기억의 파편(3)




1915년 5월 22일 오후 3시 대한제국 수도 서울



황제는 또다시 자기 앞에 나타난 하야시 대사를 향해 지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또 온 이유는 뻔했다. 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를 멈춰달라는 것이었다. 하야시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고, 그때마다 황제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호통쳐야 했다.


‘슬슬 급해지나보네.’


그는 일본의 내부 사정이 어떤지 들은 바 있다. 석탄 공급이 멈춰버린 탓에 일본 해군은 모든 훈련 일정을 취소해야 했고, 석유 공급이 멈춰버린 탓에 일부 공장의 일일 생산량이 급감했다. 또한 일본에 판매되던 각종 제품이 다른 나라로 가다보니 유용한 한국제품에 익숙해져 있던 일본 국민의 생활에 불편한 점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돈 문제였다. 일본은 대체제를 찾기 위해 영국, 프랑스, 미국과 접촉했지만 그들은 일본이 원하는 제품의 가격을 값비싸게 불렀다. 그들이 시도한 가격 협상은 약간의 효과도 발휘할 수 없었다.


“짐이 누누이 말하고 있지 않소? 제재 중단을 원한다면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말이오. 만약 일본이 계속 적반하장식으로 나온다면 한 달 후에 배상금을 요구할 수 있음을 알아두시오. 그 액수가 궁금하다면 정리한 문서를 대사관으로 보낼 테니 시간날 때 참조하시오.”


배상금 이야기가 나오자 하야시의 얼굴이 굳었다. 이전에도 배상금 이야기가 몇 번 나오기는 했지만, 정확히 언제, 얼마만큼의 배상금을 요청할 것인지 이야기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말 갈 때까지 갈 생각인 듯했다. 하야시는 만약 융희제가 살아있었다면 덜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지만, 쓸데없는 망상이었기에 그만두었다.


“할 말 더 없으면 물러나보시오.”


황제는 기분 나쁘다는 감정이 그대로 섞인 어조로 하야시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하야시는 말없이 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등을 붙였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함께 자리에 서 있던 제국익문사 국장 혁이 그에게 공손히 물었다. 황제는 다시 한번 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혁은 그의 표정을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도 그 일로 마음이 편치 않으신지요?”


“그렇소.”


앞으로 쭉 걷던 황제는 뒤로 돌아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날, 짐이 비행선에서 깨어났을 때, 그대들이 어떤 삶을 살고 싶어하는지 정확히 들었소. 허나 최민아 소장이 그렇게 전사했고, 이민호 대장은 괴로워하고 있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짐의 잘못이라는 결론만 내려질 뿐이오.”


“폐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황제는 미래인이 정말 마음에 들었고, 항상 고마웠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고, 지금의 대한제국이 존재하니 말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들의 행복한 생을 보장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장쭤린을 격멸하여 가족의 원수를 처단하고, 만주에 대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마음에 전쟁을 계획했고, 그로 인해 한 명의 미래인이 깊고 깊은 절망에 빠졌다. 게다가 이민호는 다른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마지막까지 황금 문서를 지켜내던 사람이다. 그는 혁이 그렇게 말해도 민호에 대한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대는 언제 이 일을 그만 둘 생각이오?”


황제는 민호와 더불어 유일하게 고위직에 앉아있는 혁에게 물었다. 그는 황제에게 자신의 은퇴 계획을 이야기했다.


“이번 전쟁이 끝나는대로 물러날 생각입니다. 저희 가족의 미래에 더 집중하고 싶군요. 그래도 이왕이면 제가 물러나기 전에 왜놈들이 백기를 올리면 좋겠군요.”


황제는 가볍게 웃고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의 두 손에는 항상 고맙다는 감정이 실려있었다. 혁 역시 살짝 웃고는 고개를 돌려 북쪽을 바라보았다. 부디 민호 만큼은 사지 멀쩡히 살아돌아오길 기도했다.



1915년 5월 24일 오전 1시 중화민국 흑룡강성 다칭, 1군단 사령부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던 1군단장 홍범도는 누군가의 군화 소리가 들리자 움찔하며 잠에서 깼다. 군화 소리의 주인은 참모였다. 참모는 그에게 거수경례하고 새로 들어 온 소식을 전해주었다.


“치치하얼 역에서 일본 용병이 포착되었습니다. 중화기를 장쭤린에게 양도하고,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진짜 민간인과 함께 기차를 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해당 열차의 선로는 자무쓰 역으로 이어집니다.”


“확실한 정보인가?”


홍범도는 새로 들어온 소식 탓에 잠이 확 날아갔다. 참모는 육군 정보부에서 보낸 전문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일본 용병이 치치하얼에 도착 후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나왔다. 기차 출발 시각은 오전 11시이고, 1천에 이르는 일본인 전원이 탑승하고도 남을 만큼 길다고 언급되었다.


“선로는 하나 뿐인가?”


“네. 중간에 멈추는 곳 없이 자무쓰까지 이어집니다. 러시아가 북만주를 장악하기 위해 놓았던 철도 중 하나가 바로 이 철도입니다.”


홍범도는 잠시 고민했다. 치치하얼로 당장 부대를 보내자니 거리가 너무 멀다. 그렇다고 해서 군대를 동원해 민간인이 탑승한 기차를 부수자니, 황제가 중화민국에게 민간인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 해놓았기에 공격이 꺼려졌다.


“머리 좀 굴렸군.”


참모는 그와 함께 고민을 하다가 얼마 전 그들에 의해 실연을 당한 민호가 떠올랐다.


“백사 부대를 동원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기동력이나 화력이 제일 우세하니 그들을 보내 기차를 공격하는 것 입니다.”


홍범도는 팔짱을 끼고 백사 부대 투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약 이틀 후, 합류하지 못한 나머지 백사 부대가 다칭에 도착하고, 그들과 함께 장쭤린 부대의 발목을 비틀어버릴 예정이었다. 정비가 필요한 백사 부대가 용병을 잡으러 간다면, 계획에 작은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또한 과격해진 백사 부대가 민간인을 건들지 말라는 명령에 따르리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한 번 이야기해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참모는 홍범도의 표정을 읽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홍범도는 끄응 신음을 흘리다가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호는 사령석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사진 속 민아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날개를 달고 액자 밖으로 나와 환한 미소로 그의 품에 안길 듯이 생생해보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았다. 사진을 옆으로 넘기다보니 어느덧 동영상란으로 이동하게 됐다. 그는 맨 처음에 그녀와 함께 찍은 영상을 재생했다. 십수년 전, 그녀와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을 때 찍은 영상이었다. 영상 속 민아는 첨단 미래 기술에 무한한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다. 영상을 찍는다는 행위가 어색하게 느껴졌는지 몸동작이 부자연스러웠다.


‘이때는 그랬지.’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피식 웃었다. 그러다 다시금 눈시울이 뜨거워지려고 하자 그는 핸드폰을 끄고,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오후 12시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려있는 블러드액스를 챙겨 허리춤에 꽂았다. 반대쪽에는 권총을 꽂았고, 마지막으로 제복모를 착용했다. 그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사진 속 그녀에게 속삭였다.


“다녀올게.”


그는 사령실을 나오자마자 분노에 찬 표정으로 사령부를 나섰다. 그가 사령부 밖으로 나오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부하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부하들은 둥그런 원형으로 서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며칠 전에 잡혀온 일본인 용병 포로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은 검은색 제복을 입은 거구의 남성을 보고 겁에 질려 오줌을 지렸다. 주변에서 들리는 함성은 공포를 극대화시켰다. 민호는 그들의 앞에 멈춰서서 도끼를 뽑았다. 그리고 주저없이 왼쪽에 있던 포로의 오른팔을 도끼로 쳤다. 포로는 비명을 지르면서 앞으로 쓰러졌다. 민호는 포로에서 뿜어져나오는 피를 두 손에 묻히고는 그 손으로 얼굴에 피칠갑을 했다.


-우와아아아!


그러자 부하들이 더욱더 열광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민호는 다시금 도끼를 휘둘러 포로의 목을 잘라내고, 머리를 자신이 탑승할 지휘전차 양측면에 걸었다. 몇몇 부하들이 시체에 휘발유를 뿌린 뒤에 라이터를 던졌다. 화염이 치솟아오르자 그들은 다시 한번 더 환호했다.


“사냥 시간이다!”


민호가 소리치자 전차들이 울부짖으며 진격을 개시했다. 민호 역시 즉시 포탑 안으로 들어가 운전병에게 출격을 명령했다. 사람의 머리 두 개를 달고 있는 민호의 전차도 뒤이어 출발하자 멀리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홍범도는 활활 타오르고 있는 시체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후지오카 아츠시는 머리 위에 나타난 거대한 비행선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대한제국이 눈치채고 나타날 거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 앞에서 이렇게 만나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기차에 타고 있는 용병, 민간인 가릴 것 없이 기차를 쫓아오고 있는 비행선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저들이 뭐라하든 멈추지 마라!”


이미 기관실은 용병들이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차가 계속 달리거나 멈추는 건 그의 명령에 결정되었다. 용병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별 수가 없기에 그의 말에 따랐다.


-당장 열차를 멈추고 항복하라! 반복한다!


비행선에서 항복 권유 방송이 흘러나왔다. 일본어와 중국어로 번갈아가며 방송했다. 하지만 기차는 멈추지 않았다. 비행선이 경고 사격을 하기도 했지만, 기차는 멈추지 않았다. 민간인이 동요하자 용병들은 가져온 무기를 꺼내 민간인이 허튼 행동을 못하도록 위협했다.


“기차가 멈추지 않는답니다.”


무전기로 상황을 전해듣던 백사 부대 장교가 현장 소식을 전하자 민호는 손을 빙빙 돌렸다. 그러자 그들의 앞에 있던 선로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 항복 권유 방송을 해도 멈추지 않는다면 강제로 세우는 수 밖에 없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저 멀리에서 뿌연 연기를 뿜어대며 달리는 기차가 보였다. 기차가 미끄러지거나 뒤집힐 걸 대비해 적정 거리에서 대기 중인 전차들의 포탑이 기차를 따라 천천히 회전했다. 민호는 지휘 전차에서 쌍안경으로 기차를 보며 손에 힘을 주었다. 기차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의 심장 박동도 빨라졌다. 비극의 원흉인 후지오카 아츠시라는 놈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다.


“온다.”


기차는 앞에 널려있는 전차들과 끊어진 선로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곧 기차에 브레이크가 걸렸지만, 전속력으로 달리던 기차를 멈춰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쭉 미끄러지던 기차는 그대로 선로에서 이탈했고, 기관차 뒤에 달린 승객칸들이 지그재그 구부러졌다. 거친 땅은 천연 브레이크 역할을 해주어 기차를 금방 멈춰세웠다. 기차가 멈추자 전차가 그 주변으로 몰려갔다. 민호의 비무장 지휘전차 역시 맨 앞에 나타났다. 장교는 확성기를 쥐고 기차를 향해 소리쳤다.


“후지오카 아츠시를 비롯한 일본 용병은 즉시 항복하라!”


전차에게 포위된 기차 안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던 후지오카 아츠시는 부하에게 쌍안경을 가져오라고 손짓했다. 부하가 쌍안경을 가져오자 그는 확성기를 들고 소리치는 장교의 지휘 전차를 보았다. 다른 전차와 달리 포탑이 없고, 상부가 오픈된 형태였는데, 좌우에 사람 머리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얼굴에 피칠갑한 남자가 있었다. 도살자 이민호였다. 이민호는 도끼로 이곳을 겨누며 정확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등골이 서늘해지고,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섬뜩함을 느꼈다.


“살려주세요!”


그때 다른 칸에서 운 좋게 용병 손아귀에서 탈출에 성공한 민간인들이 중국어로 뭐라뭐라 소리 지르며 전차 부대를 향해 달려갔다. 몇몇 전차들이 그들을 안전한 뒤쪽으로 이끌었다. 일부 민간인이 탈출에 성공하자 기차 안에 남아있는 민간인도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자 용병들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며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놈들이 민간인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다른 전차에서 쌍안경으로 기차 내부를 살피던 전차병이 무전을 보냈다. 민호는 상황이 바라던대로 흘러가자 도끼를 잡은 손이 움찔거렸다. 옆에 함께 있던 장교는 그걸 보고 다시 확성기를 들었다.


“10분 주겠다!”


장교는 그렇게 말한 뒤 무전기 앞에 앉아있는 장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그는 활공 항공대를 향해 물러나라는 무전을 보냈고, 곧 기차 머리 위에 떠있던 비행선들이 물러났다. 만약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모조리 갈아버리겠다는 일종의 무언의 협박이었다. 백사 부대는 비밀을 잘 지키는 부대로도 유명하니,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10분이 지나도 그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쏴!”


손목 시계를 보고 있던 민호는 딱 10분이 지나자마자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전차의 동축 기관총이 수백 발의 총알을 쏟아내며 기차를 휩쓸었다. 기차의 측면은 금속으로 되어있었기에 뚫리지 않았지만, 창가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머리통은 펑펑 터져나갔다. 총알은 민간인, 용병을 평등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미 탈출한 민간인은 어떻게 합니까?”


장교는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탈출한 민간인에 대한 처리를 물었다. 민호는 고개를 돌려 패닉 상태에 빠진 민간인을 보았다.


“목격자는 없다.”


그 한마디에 부하들이 권총을 뽑아 그들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았다.


“각 칸마다 한 발씩 쏴.”


기총 사격으로 부족하다고 판단한 민호는 포격을 명령했고, 전차들이 각 승객칸에 한 발씩 쐈다. 그러자 승객칸이 폭발과 함께 크게 들썩였다. 이따금씩 사람 신체 조각이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튀기도 했다.


“사격 중지.”


기차가 벌집이 되자 사격이 중단되었다. 민호는 아직 기차 안에 생존자가 있음을 알고 있기에 권총을 뽑았다. 그때 기차에서 일본 용병들이 나왔다. 누군가는 총을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아니었다. 입은 옷도 제각각이었다. 민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하차하여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그들은 자기네 말로 뭐라뭐라 떠들어댔지만, 복수심에 휩싸인 민호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괴물 같은 놈! 죽어라!”


그때 뒤에서 한 용병이 나타나 그에게 소총을 겨누어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그의 등에 충돌했다. 하지만 그는 잠깐 주춤하기만 할 뿐이었다. 총알이 방탄복을 관통하지 못한 것이다. 용병은 당황하여 두 손을 벌벌 떨며 재장전을 했다. 민호는 재빨리 뒤로 돌아 그가 재장전을 마치기 전에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주었다.


‘그러고보니 이 장면도 꿈에 나왔었지.’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는 꿈 속의 주인공처럼 옷차림이 뒤죽박죽인 일본인을 쏴죽이고 있었다. 민호는 그제야 수개월 전부터 그를 괴롭혀오던 꿈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깨달았다. 상식적으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확한 예지몽이었다. 그는 속에서 올라오는 울분에 소리지르며 눈 앞에 있는 것들을 닥치는대로 쏴죽였다. 부하들은 그가 다치기라도 할까봐 그 주변으로 몰려가 함께 적을 죽였다.


“이민호!”


그때 한 남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음이 어눌하기는 했지만, 분명 민호를 부른 것이었다. 그는 총을 재장전하고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결의에 찬 표정을 한 키 작은 남자가 서 있었다. 기껏 해봐야 163~6cm 정도 할 듯했다. 생긴 거는 불만이 많아보이는 감자처럼 생겼다. 그의 허리춤에는 기다란 일본도가 걸려있었다.


“나는 후지오카 아츠시! 사무라이다!”


민호는 일본어를 몰랐지만, 후지오카 아츠시라는 이름은 알아들었다. 민호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권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대가 진정한 무사라면 정정당당하게 나와 명예롭게 겨루자! 만약 내가 이긴다면 부하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주고, 내가 진다면 그대가 원하는 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어떠한가?”


민호는 통역을 듣고 어이없어하다가 민아의 원수를 직접 쥐어패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는 권총을 내던지고 도끼를 뽑았다. 후지오카 아츠시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서서히 뽑았다. 민호는 상대가 무기를 뽑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재빨리 도끼를 던졌다. 제복 내부에 장착된 외골격 기계의 힘이 더해져 도끼는 굉장한 속도로 날아갔다. 후지오카 아츠시는 온 몸을 던져 간신히 도끼를 피했지만,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본 것은 코앞까지 달려온 민호의 주먹이었다.


-빠악!


가죽 장갑이 씌여진 민호의 주먹이 그의 왼쪽 관자놀이를 정확히 가격했다. 기계의 도움을 받은 사람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아츠시는 그대로 기절했다. 민호는 땅바닥에 가래침을 뱉고 도끼를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때 그는 아츠시의 바지 주머니에서 흘러나온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꺼내서 보아하니 민호와 민아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민아의 얼굴 일부는 불에 그을려있었다.


“저. 저 미친 놈이!”


그걸 본 부하들이 발끈하여 도끼를 뽑았다. 민호는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사진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부하 장교를 불렀다.


“생존자는 없다.”


민호는 그렇게 명령한 뒤 그의 뒷덜미를 잡고 지휘 전차로 질질 끌고갔다. 등 뒤에서 총성과 비명이 울려퍼졌다. 민호는 지휘 전차에 그를 싣고 의자에 털썩 앉고는 그가 가지고 있던 사진을 다시 보았다. 사진을 한참동안 말 없이 바라보던 그는 사진 속 그녀에게 키스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차를 보았다. 청소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얼른 끝내고 돌아와.”


그가 명령하자 부하들은 마지막으로 기차에 불을 지르고 전차로 돌아왔다. 부하들이 돌아오자 그는 복귀 명령을 내렸다. 전차들이 시동을 걸고 이동을 시작하자 그는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활활 타오르는 기차를 보았다. 저 안에서 화염에 녹아내리고 있을 용병 시체들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기쁘지 않았다. 통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 장면을 그녀와 함께 볼 수 없다는 현실에 외로운 감정이 심화될 뿐이었다


‘다 이 새끼 때문이다.’


그는 기절해있는 후지오카 아츠시를 내려다보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동원할 수 있는 상상력을 총동원해 이것을 가장 예술적인 방법으로 죽이겠노라고.


작가의말

독자 여러분 모두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 운전하시는 분들은 안전 운전하시고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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