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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손 님의 서재

빌런의 제국이 시작되었다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현대판타지

느린손
작품등록일 :
2024.02.25 08:41
최근연재일 :
2024.05.07 07:47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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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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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1
글자수 :
191,593

작성
24.03.03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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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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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글자
12쪽

상륙

DUMMY

“중건, 받아!”


데이비스가 던져준 구명조끼를 입고 갑판으로 나갔을 땐, 대피가 한창이었다.


선체는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고 선장은 바다를 향해 손짓하며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서둘러! 곧 침몰한다고!”


선장의 외침에 기타 보트(Gig Boat)로 뛰어드는 대원원들.


“잭! 어서!”


하지만 데이비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난간에 몸을 반쯤 걸친 채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절래절래 젓는다.


나는 그 이유를 조금 늦게 알았다.

길이 6m에 너비 1.8m.

최대 12명을 태울 수 있는 탈출용 보트에 남은 자리는 둘.

그 중에 하나는 방금 뛰어내린 선장의 몫이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기관총까지 바다에 던져버릴 정도였다.

문득 데이비스가 해병대 출신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차마 전우를 두고 떠날 순 없다는 건가?’


나는 고개를 돌려 항구까지의 거리를 가늠해봤다.

그리고 고집을 부리는 데이비스에게 말했다.


“중위님이 타십시오. 전 헤엄쳐서 가겠습니다.”

“그건 무리야. 어림잡아도 10마일(16km)은 넘을 것 같은데. 그리고 여긴 바다야. 훈련과 실전을 착각하다간 시체도 못 찾는 수가 있다고.”


광복군은 수중훈련도 받았다.

황하와 장강에서 기본 수영, 스쿠버 다이빙, 잠수함 침투, 폭파 기술까지.

수심은 비슷하지만 바다 수영은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전생에서 내가 받은 훈련은 어나더 레벨.

네이비씰하고 붙어서 이긴 적도 있다.

내 실력과 운을 믿는 수밖에.


“10마일이 아니라 100마일이라도 갈 겁니다. 행운을 빌어주십시오.”

“안 돼, 중건!”


풍덩!


기겁한 데이비스가 난간에 매달려 애타게 강중건을 찾고 있을 때였다.


콰콰콰콰콰쾅!


폭음과 함께 집채만 한 파도가 덮쳐왔다.

하필이면 강중건이 향한 방향에서 기뢰가 폭발한 것이었다.


“잭! 그만 포기해! 또 터지면 전부 끝장이야!”


선장이 옳았다.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건 무의미했다.


“빌어먹을!”


결국 보트의 마지막 한 자리를 차지한 데이비스.


“출발해!”


선장의 명령에 휘발유 모터에서 나오는 연기가 퍼져와 물안개와 섞이며 보트가 항구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고기밥 될 뻔했군.”

“망할 쪽바리 새끼들!”

“어쨌든 살았으니 신께 감사하자고.”


침몰하는 선체를 응시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대원들.

그것도 잠시.

사방을 살피는 데이비스를 보고 강중건 찾기에 동참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우웩!”


구토하는 대원이 속출하는 거센 파도.

기뢰가 도사리고 있는 얕은 수심.

조금 전 폭발에 휘말렸다면 시체조차 찾을 수 없으리라.


“잭, 헛된 기대는 품지 않는 게 좋아.”


선장이 데이비스에게 담배를 건네며 위로했다.


“자넨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전쟁에 사상자가 한둘인가? 임무만 생각하자고.”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바다를 향해 있었다.

강중건은 광복군 최고의 요원.

오키나와의 미군이 상륙하기 전에 급파된 특공대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중요한 임무를 해줘야 했다.

그런데 상륙도 하기 전에 어이없이 잃다니!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네······중건.’


파도에 섞인 눈물이 거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콰콰콰콰쾅!


바다에 뛰어들자마자 폭음이 들렸고 거대한 폭발파가 덮쳐왔다.

뒤에서.

이것은 추진력으로 작용했고, 체감상 공짜로 수백 미터를 나아갈 수 있었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생각을 하면서도 팔다리를 부지런히 놀렸다.

아직도 소실점으로 보이는 육지를 향해서.

구명보트는 이미 소리쳐도 들리지 않는 거리까지 멀어졌다.


‘훈련 때처럼만 하면 된다. 패닉에 빠지지 말고.’


그렇게 한참을 수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거리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는 걸.


‘파도가 엿먹이는군.’


인천 앞바다는 수심이 얕은 대신 파도가 높다.

맥아더의 참모들이 상륙작전을 반대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잠수를 시도해봤지만 도돌이표다.


‘몇 시간만 일찍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만조 때였다면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것이다. 맥아더가 새벽을 택한 이유였다.

사방을 둘러봐도 의지할 부유물 하나 없는 망망대해.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 감각에 문제가 생겼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시야도 점점 흐릿해졌다.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몸부림치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렇게 끝인가? 아니지. 죽을 때 죽더라도······.’


마지막 힘을 짜내서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였다.


‘이 소리는 뭐지?’


멀리서 환청처럼 뱃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첨벙!


하늘에서 구명환이 떨어졌다. 밧줄이 감긴 붉은색 튜브.

헛것인가 싶어 멀뚱히 보고 있는데.


“꽉 붙들어요!”


고함 소리가 먹먹한 귀청을 때렸다. 퍼뜩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니.


“정신 차려요!”


낯선 청년이 망선(網船)을 몰고 나타났다. 그물을 이용해서 물고기를 잡는 어선.

구명환은 청년이 던져준 것이었고 나는 시키는대로 구명환을 붙들었다.

순간.


“엇!”


내 몸이 엄청난 힘에 딸려 올라갔다.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처럼.

그물을 당길 때 쓰는 양망기에 밧줄을 걸어서 구조한 것이었다.


털썩.


나는 갑판에 대 자로 뻗었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입에서 단내, 아니 짠내가 났다.


‘······살았다.’


안도감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사내도 구명환을 정리하며 웃었다.


“기뢰가 터졌는데도 살다니 명줄이 긴 모양이오.”

“객사할 팔자는 아닌가 봅니다. 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사내가 대수롭지 않게 손사래를 쳤다.


“동포끼리 당연히 돕고 살아야 하는 거요. 헌데 군인이오?”

“광복군입니다. 중국에서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었습니다.”

“애국자시구만. 내가 반갑소.”

“혹시 다른 배는 못 보셨습니까?”

“미군 구명정은 아까 지나갔소. 같이 온 거요?”

“예. 중국 서안에서 침투훈련을 받고······.”


꼬르르르륵.


뱃속에서 아우성을 쳤다. 사내가 이해한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나도 힘을 썼더니 시장기가 도는데, 나머지 이야기는 속부터 채우고 합시다. 괜찮겠소?”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잘 수 있을 때 자둬라.


데이비스의 가르침.


“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사내는 뚝딱 한상을 차려냈다.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많이 드시오.”


고봉밥에 김치. 방금 잡은 생선구이에 매운탕.

진수성찬이었다.

나는 게 눈 감추듯 생선 대가리까지 씹어먹었다. 사내도 어지간히 시장했는지 국물 한 방울 안 남았다.


꺼어어어억.


우리는 기분 좋게 배를 채우고 호랑이 담배를 나눠 피웠다.


후~~~.


필터도 없고 독했지만 중국에서 피웠던 연초에 비하면 감지덕지였다.

우습게도 담배 한 개비에 과거로 왔다는 실감이 났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항구 쪽을 향했다.

손에 잡힐 것 같은 육지를 보고 있으려니.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꼼짝없이 물고기밥이 되는가 싶었는데······물고기로 배를 채우고 끽연을 즐기고 있다니!’


그때 사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는 박노진이고 무오년 오(午 : 말)띠요.”


무오년이면 1918년생이고 나보다 2살 위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박노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이름과 나이를 알자마자 물밀듯이 주입되는 기억.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이 사람을, 안다.’



***



데이비스에게 양보한 건 신의 한 수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강중건이라고 합니다. 경신년 신(申 : 원숭이)띱니다.”

“방금 신띠라고 했소?”

“예.”


박노진은 감탄하며 엄지를 추켜 세웠다.


“그 나이에 참으로 대단하오. 헌데 독립운동은 언제부터 했소?”

“경성방직에서 생산부 조장으로 일하다가 4년 전에 투신했습니다.”


나는 데이비스도 모르는 과거를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봉오동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신 아버지.

혈혈단신으로 떠난 만주에서의 무장독립투쟁.

미군 OSS와의 합작훈련 ‘독수리 작전’.


“안정적인 직장을 내던지고 부친의 유지를 잇다니! 애국자를 도울 수 있어서 가문의 영광이오.”


나의 기구한 인생사를 경청하던 박노진은 경외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손을 붙들었다.


“과찬이십니다. 그나저나 박 형은 어쩌다 어부가 되셨습니까?”


박노진도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경성제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일하다가, 작년부터 어부로 전직했소.”


이 시대에 법조인과 어부의 신분은 천양지차.

게다가 박노진은 대대로 양반가문의 삼대독자였다.


“집안 어르신들의 반대가 심했을 것 같습니다.”

“말도 마시오. 부모님부터 나를 아는 모든 이가 결사반대했소.”

“듣고 보니 묻지 않을 수가 없군요. 어떻게 설득하셨습니까?”

“옛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 않소. 당장은 보잘 것 없지만 두고 보시오. 내 3년 안에 조선 최고의 어업회사를 차리고 말 테니!”


다른 사람이라면 허풍이라 치부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안다.


‘박노진은 법복보다 작업복이 어울리는 인간이다. 사업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랄까?’


탁월한 두뇌와 치밀한 계획, 그리고 실행력까지 갖춘 사기캐.

그래서 그의 미래는?


‘동양수산을 창립하고 대한민국 어업의 선구자가 된다. 지금은 이 배 한 척이 전부지만 몇 년 안에 선단을 거느리게 된다.’


어떻게?

미군정에서 금지시킨 밀무역으로.


해방의 기쁨도 잠시.

조선은 극심한 생필품 부족과 인플레이션 지옥에 빠졌다.

의약품, 연료, 식량 등 모든 것이 부족하고, 괜찮은 직업을 가진 이들도 생필품을 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밀무역이 성행할 수밖에 없는 최상의 조건이지. 박노진은 제국무역 초창기에 중요한 파트너였다.’


박노진에겐 한 가지 무기가 더 있었다.


제국대학의 인맥.


‘해방된 조국에서 행정을 담당한 핵심 인력은 제국대학 출신들이었지. 박노진을 통해서 그들을 뒷배로 얻는는 거다.’


이 혼돈의 시대에 인맥보다 든든한 자산은 없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다가 불쑥 말했다.


“저보다 두 살 위시니까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박노진은 흠칫 놀라는가 싶더니 환하게 웃었다.


“새벽부터 나았다가 물만 긷다(허탕치다) 복귀하나 했는데, 운수가 대통한 날이구만! 반갑네, 애국자 동생!”

“받아주셔서 영광입니다. 형님!”


항구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 미군 장교가 자네를 보면 뭐라고 할지 기대되는구만.”


그리고 마침내 상륙했을 때, 박노진의 예상은 빗나갔다.


“······주, 주, 주, 중건?!”


데이비스는 말을 잇지 못했고, 장비를 챙기던 대원들도 귀신을 본 것처럼 눈만 껌뻑거리는 상황.


“무사히 돌아와서 천만다행이군.”


기묘한 침묵을 깬 것은 선장이었다.


“자네가 없어서 시작부터 작전이 꼬일 뻔했어. 몸은 괜찮나?”

“멀쩡합니다. 대원들도 준비가 된 것 같은데 출발하시죠.”

“잭?”


지상에서의 작전 책임자는 데이비스였다. 그는 어느새 지휘관 모드로 돌아가 있었다.


“좋아. 바로 출발하지.”


데이비스는 내가 조수석에 타길 원했지만 짐칸에 자리를 잡았다.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 후.


두 대의 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서울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였다.


위이이이잉.


리스베트의 문자였다.

나는 곯아떨어진 대원들을 등지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미래의 내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숨은 쉬는데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요. 어쩌죠?


젠장, 혼수상태라니. 간병해줄 사람도 없는데.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장했다.


-하룻밤만 지켜봐줄 수 있겠어?


바로 답장이 왔다.


-OK. 빌드업 시나리오 짜면서 지켜볼게요.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다.

그녀의 실력이면 죽여주는 시나리오를 만들어낼 것이다.


-수고 좀 해줘. 서울에 도착하면 연락할게.


긴장이 풀리자 졸음이 몰려왔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체력을 비축해둬야 한다.’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가 될 테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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