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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손 님의 서재

빌런의 제국이 시작되었다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현대판타지

느린손
작품등록일 :
2024.02.25 08:41
최근연재일 :
2024.05.07 07:47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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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4.04.2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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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적군

DUMMY

3분 전.


“Пиздец(망할)!”


오만상을 쓰며 지프에서 내리는 붉은 군대 지휘관을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러시아 제국 부사관에서 소비에트 연방 대원수까지.


리스베트가 묘하게 웃으며 읖조렸다.


그녀의 특이한 유머감각에 익숙한 터라, 무시하고 작전계획을 떠올리고 있는데.


-웹소설 제목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예요.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


‘지금은 안 돼.’


데이비스를 의식하며 복화술로 윽박질러봤지만 소용없었다.


-할힌골 전투에서 집단군사령관으로 참전, 욱일승천하던 일본군을 박살내고 대장으로 진급.


보드카로 절여진 눈깔에서 레이저를 쏘며 다가오는 지휘관을 의식하면서 주코프의 이력을 들어야 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나치의 최정예 제6군을 섬멸.


우크라이나 탈환에 이어 바르라티온 작전으로 나치 중부집단군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히고, 마침내 베를린 의사당 옥상에 붉은 깃발을 꽂아버렸다.


-국가영웅 칭호를 4번이나 받은 유일한 인물이자, 조지아의 인간 백정에 맞설 수 있는 극소수의 장군 중 한 명.


2차대전 승전 기념 열병식에서 스탈린을 대신해서 백마를 타고 사열을 받을 것은 유명한 일화다.


-붉은 군대 최고의 명장이자 국가영웅이죠. 이해했어요?


‘그걸로 뭘 어쩌라는 거야?’


그 사이 지척에 멈춰선 지휘관이 권총집에 손을 얹고 우리를 노려봤다.


불곰에게 군복을 입혀서 소령 계급장을 달아놓은 것처럼 생겨먹은 자였다.


“왜 길을 막았나?”


그의 시선이 데이비스에게 향했다. 리스베트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저 자는 게오르기 주코프 대원수의 유일한 혼외자예요. ‘세르게이 벨로프’라는 가명으로 참전했죠. 이 사실은 붉은 군대의 최고 기밀 중에 하나예요.


순간, 머릿속에서 번개가 튀었다.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다!


-나라면 작계를 수정하겠어요.


뇌보다 혓바닥이 먼저 움직였다.


“미국 정부를 대표해서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세르게이 벨로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이비스도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다행히 내 러시아어는 아직 녹슬지 않았다.



***



잠시 후, 가까운 국수집.


“붉은 군대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나는 데이비스에게 양해를 구하고 세르게이와 독대했다.


“다소 늦은 감은 없지 않지만 폭풍처럼 관동군을 쓸어버렸더군요. 조선인으로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먼 길 오시느라 출출하실 텐데, 한 잔 하시죠?”


그는 파전과 막걸리엔 손도 안 대고 상체를 기울이며 으르렁댔다.


“내 정체는 어떻게 알았소?”


가명으로 참전한 이유는 뻔하다.

아버지의 후광 없이 전공을 세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어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붉은 군대의 별이 되리라!


‘본대에서 한참 벗어나서 경성까지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도 전리품을 선점하기 위해서겠지. 사령관은 정체를 알 테니 눈감아줬을 테고.’


그런데 미군 장교도 아니고 조선인 병사한테 딱 걸렸으니.


‘내가 콩으로 보드카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지.’


나는 느긋하게 파전을 한 점 집어먹고 막걸리로 입을 헹궜다.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죠. 걱정 마십시오. 제 입은 천금보다 무겁습니다.”

“내가 온다는 건 어떻게 알았소?”

“광복군 장교로서 그 정도는 기본이죠. 몸은 경성에 있지만 38선 이북의 전황은 손바박보듯 파악하고 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와 미국 정부를 대신해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세르게이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


“나는 장교로서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오. 무슨 제안을 가져왔소?”


나는 웃음기를 지우고 본론을 시작했다.


“붉은 군대가 조선을 해방시켜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해방군으로서의 모습만 보여준 것은 아니더군요.”

“무슨 뜻이오?”

“유럽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저질렀던 개같은 짓거리를, 38선 이북에서도 똑같이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심리전을 걸기 위한 도발용 멘트.

하지만 세르게이는 반응은 보기 좋게 예상을 빗나갔다.


“약탈과 강간을 말하는 거라면 부정할 생각은 없소. 근데 그거 아시오?”


문 밖에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데이비스를 가리키며 냉소했다.


“독일에서 미군도 우리와 다를 바 없었소.”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미군의 만행.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이다.


1945년을 전후해 점령지 독일에서 연합국 군인에게 성폭행당한 독일 여성의 수는 최소한 86만 명에 달한다.


길거리에서 납치되어 성폭행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집 안에 침입해 남자들을 쫓아낸 뒤 또는 심지어 가족이 있는 가운데 성폭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연합국 군인은 독일 여성을 일종의 전리품으로 간주했다.


데이비스가 이 자리에 없어서 천만다행이다.


“알고 있습니다. 도긴개긴이죠.”


나는 상체를 기울이며 은근하게 말했다.


“독일이 유린당한 건 히틀러를 지도자로 뽑은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붉은 군대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소련이 동부전선에서 패배했다면 유럽은 아직도 나치의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당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유감이군.”


세르게이의 눈빛에서 적개심이 사라졌다. 그는 담뱃불을 붙이고 점잖게 물었다.


“그래서 내 부대를 막아선 이유가 뭐요?”


회귀자의 메리트를 써먹을 때가 왔다.


“조선은 38도선을 따라 분단될 겁니다.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군이 점령하는 거죠.”

“웃기는 소리. 붉은 군대는 계속 남하할 거요. 이 속도라면 일주일 안에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수 있지.”


틀린 말은 아니다. 스탈린이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


하지만 늘 그렇듯 전쟁은 노인들의 게임이고, 전장에서 피흘리는 젊은이들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 내려진다.


“주코프 원수한테 확인해보십시오. 조만간 철수 명령이 떨어질 겁니다. 그동안 붉은 군대가 저지른 약탈과 강간은 반공의 명분이 되겠군요.”


그 말의 의미를 되씹듯 담배 연기를 뻑뻑 내뿜으며 침묵하는 세르게이.


‘경우의 수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빠개질 거다.’


내 말이 맞다면 전리품을 챙기러 왔다가 숙청의 빌미만 남기게 된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 지도를 펼치고 용산을 가리켰다.


“여기서 12km만 가면 일본군 2만명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소. 제국 육군 산하 제17방면군. 사령관은 고즈키 요시오 중장. 난징에서 학살자로 악명을 떨쳤지. 죽어 마땅한 놈이오. 부하들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한 짓은 놈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두 번째 충격.

세르게이는 호부견자가 아니었다. 전리품만 챙기러 온 것도 아니었다. 적의 적은 절친이 될 수 있다.


“나는 제17방면군을 박멸해버리고 싶습니다.”


러시아어에 ‘살멸’이란 단어가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 방금 38도선 이남은 미국이 점령한다고······.”

“현시점에서 미군은 조선에서 960km나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오키나와.”

“그렇습니다. 경성까지 도달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3주는 걸리죠. 이제 구미가 당깁니까?”

“······.”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밖은 푹푹 찌는데 살얼음판을 건너는 기분이었다.


“구미는 당기지만 역부족이오. 전투가 벌어지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소. 아니, 패배가 확실하다고 봐야겠지.”


말과는 달리 입맛을 다시는 세르게이였다.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앞에 두고 고민하는 불곰이 겹쳐서 보이는 건 왜일까?


본능적으로 아는 거다.

단독으로 2만의 적을 섬멸하면 주코프가 좋아할 거라는 걸.

요시오의 이름까지 외는 걸 보면, 대비를 하고 있었을 수도.


-주코프는 잔혹성으로 악명이 높아요. 투항자의 가족을 색출해서 처형했고, 인간 백정조차 냉혹하다고 말할 정도였어요.


투항자의 가족을 처형하는 건 나치와 일제도 하지 않았던 짓.


감이 왔다.

아버지 대원수의 인정에 목마른 사생아.

포로들에게 가혹하기로 악명 높은 붉은 군대.

승부수를 걸 타이밍이다.


“미군이 도울 겁니다. 이미 조선총독부에서 무장해제 명령도 떨어졌습니다.”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고민하는 세르게이.

커다란 눈알을 굴리면서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었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고즈키 요시오도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완벽한 작전계획도 있습니다.”

“위험부담이 너무 크군. 제안은 거절하겠소.”


세르게이가 그 말을 남기고 벌떡 일어섰다.

세 번째 충격.

곰이 아니라 여우였다.


‘협상할 줄 아는 놈이야.’


나는 세르게이의 뒤통수에 대고 히든카드를 날렸다.


“조선총독과 총감을 넘겨드리겠습니다.”


멈칫한 세르게이가 냉소를 머금고 돌아섰다.


“그들은 인질이 아닐 텐데? 미군이 입성할 때까지 직위를 유지하면서 치안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인질 맞습니다. 경성의 치안은 내 손에 있거든요.”

“당신이 치안 책임자라고?”

“그렇습니다. 경성을 시작으로 38선 이남의 치안은, 내가 이끄는 애국치안대가 장악할 겁니다.”


나를 바라보는 세르게이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정보력만 있는 줄 애송이라고 과소평가했다가 진면목을 알고 나니, 생각이 많아진 거다.


“두 사람을 데려간다면 전후 협상에서 쓸모가 있을 겁니다.”

“그 말, 믿어도 되겠소?”

“거짓이라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고민하던 세르게이가 조용히 자리로 돌아왔다.


“작전계획을 들어보고 결정하겠소.”



***



같은 시각, 경성역.


일본어 명판이 달린 웅장한 열차가 증기를 뿜어내며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본 열차는 경성역에서 10분간 정차하겠습니다.”


괴뢰만주국의 수도 신징(新京)에서 출발한 특별열차가 신의주, 평양, 개성을 거쳐 경성에 도달한 것이다.


일제가 자랑하는 남만주철도의 상징, 아시아(アジア) 757 열차. 종착역은 부산이었다.


열차의 중간에 자리잡은 귀빈실은 승객들로 가득했는데,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승객 전원이 괴뢰국에서 탈출하는 일본인들이었기 때문.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고 귀국길에 오른 승객들은 암울한 표정으로 구름 한 점 없는 경성의 하늘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나라 잃은 낯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객차 맨 끝 창가 자리.

고급 양복에 중절모를 눌러쓴 중년 사내는 입꼬리를 올리며 밝은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수갑으로 손목에 연결한 서류가방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이대로 부산까지만 가면 대본영이 코앞이다. 나의 연구가 빛을 발할 날도 얼마 안 남았군.’


노고를 인정받아 천황을 알현하는 상상에 도취되어 있을 때였다.


“표를 보여주십시오!”


승무원의 검표가 시작되자 주섬주섬 열차료를 꺼내는 승객들.


지갑에서 표를 꺼내던 사내는 예상하지 못한 광경에 멈칫했다.


“······?!”


승무원의 뒤쪽.

소총을 멘 조선인 청년 대여섯 명이 승객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사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그리고 조선인 청년들과 반대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뚝. 뚝. 뚝.


비오듯 떨어지는 식은땀을 훔칠 여유 따윈 없었다.

그렇게, 무사히 문까지 도달해서 손잡이를 당기는 순간.


벌컥!


문이 열림과 동시에, 차가운 감촉이 이마 한 가운데에 느껴졌다.


총구를 사내의 마빡에 갖다댄 이용진이 히죽, 웃었다.


“이시이 시로 중장! 너를 전범으로 체포한다!”


원래 역사에서 무사히 일본으로 도주했던 731 부대의 수괴, 이시이 시로가 생포되는 순간이었다.



***



몇 시간 후, 고즈키 요시오의 집무실.


“당장 출동해서 총독부를 수복해야 합니다!”

“정무총감은 무장해제를 명령할 권한이 없습니다!”

“대본영에서 항복명령서가 올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

“사령관님,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단숨에 버러지 같은 조센징들을 쓸어버리겠습니다!”


사기충천한 부하들을 보며 고즈키 요시오가 흐뭇해하고 때였다.


“사령관님, 큰일났습니다!”


경비대 소위가 얼빠진 얼굴로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부관의 물음에 소위가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소, 소련군이 몰려왔습니다.”

“뭣이?!”


창가로 달려간 요시오가 망원경에 눈을 갖다댔다.


“이, 이럴 수가!”


병영 입구에 운집한 붉은 군대의 기갑부대.


보란 듯이 탱크 데산트를 시전하고 있는 전차 보병의 손에, 낫과 망치가 그려진 적기(赤旗)가 펄럭이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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