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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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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12.11.15 06:57
최근연재일 :
2015.02.25 07:03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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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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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4
글자수 :
818,771

작성
13.03.23 01:28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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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회색시대-8.가라앉은.(2)

DUMMY

히르도 잠이 들자 진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폐저택은 지금 사람이 몇 없다. 자세히는 모르나 그날 이후로 다른 아지트로 가거나 외국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들은, 그들도 평생 도망자겠지. 진은 인휘가 있는 방 앞에서 문득 멈추어 섰다. 선뜻 기척을 알리고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인휘 일리스비, 위대한 화가, 하지만 다정한 아버지. 늘 그렇게 기억했다. 어린 시절 지켜본 아버지는 늘 웃고 있었고, 그림을 그릴 적에 작업실에 쉬이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혹여나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붓을 놓으시고 빙그레 웃어주셨다. 추억이 빚어낸 착각만은 아니었으리라. 그때와 지금은 다르니까.


진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문을 열었다. 인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선을 긋고 있었다. 선은 그림일까. 아닐까.


이젤 앞에 앉은 인휘는 붓을 물고 있었다. 이젤 위에는 목판이 있었다. 까맣게 한 줄, 까맣게 한 줄, 까맣게 한 줄, 어느 선도 똑바르지 않은 채 밑으로 처지고, 물감은 흩어져있다. 인휘의 입 가에는 침이 흐르고 표정은 일그러져있다. 눈은 빛나지만 고통이 묻어난다. 짜증 역시. 인휘는 뱉어내듯 붓을 책상에 내두었다. 진은 귀를 의심했다. 시발,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기에. 순간 진의 기척을 느꼈는지 인휘가 고개를 들었고 시선이 맞았다. 인휘는 짜증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진은 조심스레 다가왔다.


“목판 닦아올게요, 잠시 쉬세요.”


진이 이젤 위의 까맣게 칠해진 목판을 집어 밖으로 나가려하지만 턱, 하고 발 밑에서 뭐가 걸린다. 인휘의 발이었다. 진은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미간을 좁히고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 낯설다.


“진아.”

“예, 아버지.”

“그림을 배워보지 않으련?”


진은 목판을 손에 쥔 채 대답하지 못했다. 그림을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할 때마다 늘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그릴 수 없는데 내가 어찌,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아버지가 그리고 있는 지금은 무엇을 말해야 하나. 아니, 아버지는 여전히 못 그리고 계시니까, 그러나 그걸 어찌 말해야 하나. 말 없이 고개를 저을 수 밖에.


“너는…….”


진을 부르는 목소리가 차갑다.


“너는 손이 있으면서도 안 그리니?”


진은 목판을 손에 쥔 채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손이 있으면 무얼 할까요, 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닿질 않는 것을요.


“네 팔을 네 마음대로 쓸 수 있으면서 왜 안 그리는 건데!”


인휘가 발로 이젤을 밀며 외쳤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이젤은 넘어졌다. 진은 침묵했다. 인휘 역시 넘어져있는 이젤을 보기만 했다. 진은 무릎을 굽혀 이젤을 잡아 세웠다. 덜그럭 덜그럭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린다.


“……미안하다.”

“괜찮아요, 아버지.”


인휘는 책상에 잠시 얼굴을 묻었다. 이빨은 아프고 턱이 떨린다.


“이제 열흘 밖에 안 되는데 왜 이리 초조한지 모르겠어, 나한테 내야 할 화를 왜 너한테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진은 가만이 아버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나무 한 그루의 기억을 되새기며 인내하려 해도 보아왔던 것, 해왔던 것, 해냈던 것도 함께 떠올라 제 마음대로 그어지지 않는 선 하나 하나에 화가 나버린다. 첫날 붓을 받아와 입으로 집어 목판에 선 하나 긋는 것 조차도 못해 붓을 계속 떨어트렸다. 그때마다 진은 그 붓을 주어 아버지 입에 물렸다.


-내가 하마.


그러기를 두 어 시간, 아마도 백 번은 넘게 그리 했던 것 같았다. 결국 인휘가 제가 집겠다고 했고 진은 한 걸음 물러 섰으나 속으로는 몹시 당황했다. 아버지, 어찌 하시려구요. 나가 있거라, 그리 말씀하셨다. 진은 문을 닫고 나서는 척, 걱정스러운 마음 반 호기심 반으로 문을 살며시 열어 훔쳐보았다. 붓은 얼마 안가 다시 떨어졌다. 인휘는 바닥에 엎드렸고 볼을 바닥에 대고 제 입으로 주어 올리려 애썼다. 툭, 툭, 그러나 어설피 입에 물린 붓은 다시 떨어지고 다시 떨어졌다. 진은 잊은 것이 있는 척 다시 들어가야 하나, 하고 발 하나를 들이 밀었다. 그러나 물러섰다. 아버지는 울고 계셨다.

붓을 앞에 두고 울고 계셨다. 모르는 척 해야 했다. 아니 기실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세상에 미쳤다가 아들 고집에 다시 겨우 세상에 나왔으나 붓 하나 제대로 집지 못하는 심정을 다 어찌 알 수 있을까. 그러하니, 제게 내시는 짜증스러운 말 한마디에 마음 아픈 것은 그 말 때문이 아니라, 미처 다 알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 때문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곧 허리를 피고 손목으로 눈물을 닦아내던 모습만이 발을 돌려 그 앞을 떠났을 때도 눈에 아른거렸다.


천천히요, 아무도 아버지를 몰아새우지 않아요, 아버지 이제 붓을 많이 떨어트리시지도 않잖아요, 그런 위로도 해 줄 수 없었다. 아는 것이 없으니 아는 척 할 수 없는게다. 진은 아버지의 턱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 조금 쉬었다 하세요.”

“아니, 아니다, 쉴 틈이 없지.”


인휘는 인휘대로 아들에게 낸 성이 부끄러웠는지 얼른 붓을 다시 입에 물려 했지만 오랜 시간 입을 사용한 탓인지 쉬이 붓이 물려지지 않았다. 또다시 짜증이 솟구치려 했다.


“아버지…….”


진이 붓을 잠시 옆으로 밀어냈다.


“저, 어릴 적에도 아버지 그림 그리시다가 손…...이 힘들면 쉬셨던 것으로 기억해요.”


진의 말에 인휘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아들을 보았다. 열흘, 단지 열흘을 노력했다. 그러고서는 손 없는 자신을 십 년 봉양한 아들에게 너는 손이 있으면서도 왜 그리질 않느냐고 악을 썼다. 그런데도 그때마다 그저 괜찮아요, 하고 마는 아들에게 부끄럽다. 이 아들에게 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다고 잘난 척 하듯 말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세상에 지지 않는 꽃이 피어나기에 그래서 그림을 그리고자 했는데 꽃은 될 수 없나보다. 하기야, 화가란 그림에 담지 그림이 되는 법은 아니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 조금 쉬어야겠다.”


인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붓과 이젤을 구할 수 있겠느냐는 제 말에 이곳의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신났는지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그렇다며 당장에 구해다 주었다. 손으로 그림을 그릴 적에도 그리 오랜시간이 걸렸는데, 생전 먹고 말하는 것 말고는 써본 적 없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려니 당연히 힘들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이리 힘들 줄은 몰랐다. 거기에 그 기대감 가득한 눈에 짓눌렸나 보다.


“마음이 그림의 다는 아니지만 마음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법이지.”

“예?”


인휘가 하는 말을 순간 이해하지 못한 진이 그리 되 묻자 인휘가 조용히 답했다.


“내가 처음에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을 때 스승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교만하지 말라고, 처음 마음을, 첫 시작 때 가진 마음을 잊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란다. 아마도 내가 교만했나 보다. 예전 처럼 쉽사리 슥슥 그릴 줄 알았나보다. 사람들의 찬사가 그리웠나보다, 내 그림이 그리웠나보다.”


처음은 진의 물음에 대한 답이었으나, 뒤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기도처럼 작게 속삭이는 말에 진은 조심스레 다시 목판을 들었다. 쉬고 나신 후에 이젤 앞에 깨끗한 목판이 있어야 겠지. 이리 까맣기만 한 목판이 있으면 더 마음이 가라앉을 듯하다. 아버지는 몰라도 자신은 그럴 것 같았다.


“진아.”


인휘의 목소리가 나가려던 진을 붙잡았다.


“예, 아버지.”


진이 냉큼 답하며 돌아보지만 인휘는 잠시 머뭇거렸다. 진은 아버지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내가 아까 그리 말했지만……. 정말로 나는 신경 쓸 것 없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그리려무나.”

“예, 아버지.”


그리 예, 하고 답했지만 기실 모르겠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아닌지를. 두근거렸다. 아버지가 사람들이 광장에서 탈출하는 장면을 보고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하신 말씀에, 두근거렸다. 아버지가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말씀하셔서 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그리신다면 저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 애초에 그림을 꿈꾼 적이 있었을까.


진은 양동이에 목판을 넣고 박박 밀어가며 물감을 지워냈다. 연습용으로 옅게 만든 것이라 그런지 금세 물에 물감이 풀려 까맣게 물이 변했다. 까만 색, 까만 제복. 붉은 석류, 파란 하늘, 하얀 꽃……. 색을 꿈꾸었다. 그 꿈에 이끌려 여기까지 와 아버지 마저도 이 세상에 던져놓았다. 색을 꿈꾼다는 것은 그림을 꿈꾼다는 뜻일까.


가능성이라고 했다. 하늘에 띄어진 그 모든 그림들은 가능성이라고 했다. 제게도 그 가능성이 있을까. 진은 깨끗한 물로 목판을 다시 씻어냈다. 간간이 나뭇결이 보이는 것 배고는 깨끗하다. 빈 목판, 하얀 종이, 하얀 캔버스, 무엇이든 그릴 수 있고 채울 수 있는 공간들. 진은 손 끝을 더러워진 물에 담궜다.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이 공간에 무엇을 그릴 수 있고 무엇을 그리고 싶은 가.


스윽, 하고 손끝으로 목판 위에 선 하나를 그렸다. 젖은 물기에 젖은 물로 그리니 검은 물이 질질 흘려내려가지만 신경쓰지 않고 슥슥 다시 선을 그었다. 험하게 치는 파도 위에 흔들리는 배, 어깨를 맞댄 소녀들, 아이 앞에서 기도하는 부부, 기도하던 사제, 아이를 안고 있던 엄마, 피를 흘리면서도 허리를 피고 걷던 여자,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하늘을 보던 사람, 제 몸 아끼지 않고 심문관을 밀쳐내던 죄수, 상처가 많던 여자의 몸, 엎드려 입으로 붓을 쥐려던 남자. 상념이 목판에 흐르기에 진은 다시 그것을 물로 씻어냈다.


모르겠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게 된다면, 그리고 싶은 것은 넘치게 있을 듯했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이겠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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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3.03.23 10:55
    No. 1

    진의 그림이 인휘와 진 자신, 검은제복의 그 친구까지 품을 수 있기를...
    그림으로 치유되길...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9 rainstre..
    작성일
    13.03.24 22:03
    No. 2

    아..정말 오랜만에 와서 다 보고 갑니다.
    많은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어서 참 즐거웠어요 ㅎㅎ 소름도 끼치고 먹먹해지기도 하고.
    언제나 마법같이 좋은 글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고3이라서 늘 문피아를 기웃거리지는 못해요. 다음에 올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겠네요..Girdap님 글 아니면 문피아 생각이 안나겠는데..너무 좋다보니 이거 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적안왕
    작성일
    15.03.22 13:21
    No. 3

    잘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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