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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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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12.11.15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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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5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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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03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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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회색시대-4.따뜻한.(6)

DUMMY

진은 목공소 안에서 그 나으리가 주문한 딸을 위한 책상의 도안을 작업하고 있었다. 하얀 꽃, 작은 꽃, 바람에 흔들리는 꽃 잎, 그리고 나비.


-돌아가서 소위 주문품은 만들어야겠지만, 우리에게 오고 나서는 원하는 것을 마음껏 만들게.


나비를 그리려다 손을 멈추며 그 나으리가 했던 말이 떠올렸다. 원하는 것을 마음껏 만들 수 있는 세상, 그들은 어찌하려는 것일까, 그런 것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왜 아버지의 손목이 잘리기 전에는 하지 않았을까. 진은 나비의 모양새를 교묘히 바꾸어 바람 같은 흐름 하나를 그려냈다.


-다만 어느 날 갑자기 좀 거친 방법으로 이동할 수도 있으니 그걸 유념하게나.


그 ‘거친 방법’이란 것을 묻지 않았다. 어떤 방식이고, 어느 날일까, 그 어느 날을 알려줄까, 혹여 그 ‘거친 방법’이란 것 때문에 아버지가 더 안 좋아지시지 않을까.


-부친께서도 최고의 치료를 받으실 수 있을 걸세.


치료라, 어떤 치료이며, 아니다, 지금은 집중하자. 진은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중에 모든 것을 마음껏 만드는 세상도 중요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스승님께서 말씀 하셨던 것처럼. 진은 숨을 들이키고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도안에 집중했다. 그 작은 소녀를 보았을 때 느낀 것들, 보인 것들. 복잡하지 않고 깨끗하고 순수한 그 어떤 것들.


“아, 다들! 재료 들어올 시간이다! ”


한창 작업을 마무리 할 때 즈음 뤽스바가 외치고 진은 도안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목재가 들어오는 시간, 사람 손 하나 하나가 다 아쉬운 법이라 모든 공원들이 함께 일한다. 진은 도안이 망가지지 않게 정리 해놓고 얼른 뒷문 쪽으로 나갔다. 소가 이끄는 수레에 덜 다듬어진 목재가 많이도 쌓여있고 공원들은 모두 달려가 하나씩 혹은 둘이 하나씩 어깨에 들쳐 메고 옮기기 시작했다.


“어어, 이건 한 명으로는 안 될 텐데?”


일꾼 하나가 목재 앞에서 주춤거리는 진을 보고 그리 말했다. 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늦게 나온 탓인지 모두들 짝을 지어 일하거나 이미 저 혼자 들 만한 것들은 들고 있었다. 진이 머리를 긁적이며 조금 작은 놈 하나를 집어 올릴까, 하고 생각하던 차에, 뒤에서 몰이 나타났다.


“어이, 둘이 가져가면 되겠네.”


일꾼이 척척 몰과 진의 어깨에 목재를 얹혔다. 몰은 진을 한번 슬쩍 돌아보더니 말 없이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진도 그에 맞추어갔다. 몰은 진보다도 나이가 적었지만, 진은 왠지 그가 조금 어려웠다. 지난 번 심문소에서 나올 때뿐만 아니라 자신을 향해 곱게 눈을 뜨는 적이 없었으니까. 모두가 자신을 좋아하고 아낄 것이라는 생각 따위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이 차도 목공소 내에서는 가장 적은 터이고, 수준도 비슷한 터라 부딪히는 일이 가장 많은데, 그런 이가 자신을 껄끄러워하면 편하지는 않는 것이 당연한 일.


“여기다 놓으면 되겠네요.”


덜컹, 하며 앞섰던 몰이 목재를 내려놓고 진은 얼른 박자에 맞추어 자신도 내려놓았다. 몰은 눈도 안 마주치고 슬쩍 그를 피해 지나갔다. 진은 짧게 한숨을 쉬며 뒤 따라갔다.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진은 목재 옮기는 일을 지휘하는 뤽스바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스승님 때문이겠지. 불쌍한 아비 모시고 살고, 그 아비로부터 물려받은 작은 재주를 귀히 여겨주시는 덕에 말이다. 실상 몰이 아니더라도 달갑지 않은 눈으로 보는 이들은 있으니까.


-그러니 언제든지 그 곳을 떠날 준비를 하게.


그 집을, 이곳을 떠난다면 어떤 기분일까, 자신은 또한 그들은.


“어이, 어서와서 같이 들어.”


몰이 커다란 목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진은 얼른 그리로 달려갔다. 이번에도 몰이 앞에 섰다. 몰의 등을 보는 진은 혼자 웃고 말았다. 적어도 저녀석은 좋아 하겠지. 다만 사라져도, 이곳에 누구도 피해가 안 갔으면 좋겠다, 저 녀석이라도. 스승님은 더더욱.


짐을 다 내려놓고 뒷정리나 할 참으로 수레가 서있는 뒷문으로 다시 나갔지만 수레를 끌고 온 일꾼은 가지 않고 있었다. 조금 불안한 듯 골목 쪽을 힐끗힐끗 보았다. 뤽스바가 금액까지 다 냈는데 안 나가는 일꾼에게 무슨 일인지 묻자 일꾼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큰 길에 일이 난 모양이유, 나 여기서 좀 있다가 가야 할 것 같은데?”

.

.

.

.

“우리는 색을 다시 찾기 원한다!”


한 사내가 외치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 말고는 누구도 그가 도망간 자리에 다가가지 않으려 했다. 다만 두려운 눈으로 한 번 힐끗, 다만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 번 힐끗, 그리 바라보다 모두들 문 안으로 숨어들었다. 심문관 몇은 사내를 쫓아갔고, 심문관 몇은 그가 자리에 남긴 것을 보며 한탄 어린 한숨을 쉬었다.


“이런, 젠장할.”


혹은 욕을 하거나. 그는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옛날이라면, 이것은 그림으로 불릴 만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낙서 수준으로 사람 얼굴을 그려놨다. 그나마도 검은 제복의 모습에 얼굴에 색을 칠하다가 말았으니, 그림도 낙서도 아닌 것이 흉측하기만 했다.


“일스 경정님, 여기뿐만이 아니라는 보고가 왔습니다. 수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잡힌 놈들도 많지만…….”

“썩을. 몇 주 잠잠한 이유가 여기 있었어! 제기랄! 모두 불러! 다 잡아 들여! 그리고 여기 빨리 지워!”

“예! 경정님!”


일스는 주변을 둘러보다 소리를 빽 질렀다.


“카르 경위는 어디 갔어?”


바닥에 묻은 안료를 열심히 지우려 애쓰던 심문관 하나가 얼른 대답했다.


“비번이라 집에 있을 것입니다.”

“비번인 놈들까지 싹 다 불러! 비상상황이야! ”


일스의 외침에 막내가 얼른 자리를 떠났다. 떠나며 뒤를 힐끗 보았다. 바닥에 그려진 그림이 눈에 박힌다. 다 칠하지 못한 얼굴이 건만 뻘겋게 칠해진 입술만은 완성되었다. 그래서 더 기괴하고 흉측하다. 왜 교황청에서 이것을 금지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카르와 다른 선배들의 집을 찾아가며 보는 그 소요 속에서 본 것들은 조금씩 달랐다. 참으로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것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다 만 사람, 그리다 만 동물, 그리다 만 꽃, 그리다 만 태양, 그리다만…… 모두가 그리다 만 것들. 회색 돌바닥, 회색 돌담이 형형색색으로 칠이 되어있었다. 흉했다. 어울리지도 않고 이상했다. 금지되어있는 것들이라 끔찍했다. 금지된 안료들은 대체 어디서 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가 뱃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경위님! 카르 경위님!”


카르의 집에 도착해 문을 두드리자 경위 대신 주근깨 가득한 소녀가 문을 열었다. 검은 제복을 금세 알아본 듯했다.


“어? 저, 심문소에서 오셨어요?”

“아, 옛! 경위님을…….”


막내가 마저 다 말 하기도 전에 소녀는 뒤를 돌아 외쳤다.


“오빠! 심문소에서 오셨나봐!”


카르는 밥을 먹던 중이었는지 수저를 내려놓고 달려왔다. 막내는 얼른 경례를 올렸다.


“무슨 일이지?”

“예, 옛! 저,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지금 전 수도가 비상 사태 입니다. 일스 경정님이 비번이라도 모두 나오라고.”

“소요?”

“옛! 이단자들이 지금 시내 곳곳에서 금지된 짓을 하며 소동을 피우고 있습니다.”


카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금지된 짓, 소동, 이란 단어가 포함하는 것은 너무도 많아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금지된 짓이면 어떤 것?”


막내는 오늘 본 끔찍한 것들 때문에,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워 이제까지와 달리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죽였다.


“그, 그게, 길 바닥에 그, 그림을 그리고……담 벼락에 색을 칠하고……”


막내의 짧은 설명에 카르는 제법 놀랐다. 이런 소요라니. 처음 있는 일인 듯했다.


“알았어. 옷 갈아입고 바로 출동하지. 어서 가봐.”

“예! 옛.”

막내가 뒤 돌아 다른 비번인 사람들을 찾으러 가고, 카르는 제복 윗도리를 입기 시작했다. 나르는 카르의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무슨 큰 일 났어?”

“응, 시내에 제법 큰 소동이 있나봐. 나르, 넌 오늘 집에 돌아가지 말고 오빠 집에서 기다려. 소동이 가라 앉거나 하면 오빠가 바래다 줄게.”

“하지만 애들은……”


나르가 집에 남아있을 다른 동생들을 걱정하자 카르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내가 가는 길에 들려서 애들한테도 걱정하지 말고 집에서 기다리라고 할 테니까. 공장이나 다른 곳에 간 애들도 아마 사람들이 밖으로 안 내보냈을 거야.”

“응. 오빠, 알았어. 조심해.”


나르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카르는 도로로 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요라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잡았다, 이 년!”


다른 지구 심문관 하나가 도망가던 계집 하나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꺄악, 하는 새된 소리와 함께 여자는 쓰러졌다. 심문관은 여자를 묶으려 했지만 여자의 반항이 거셌다. 심문관은 여자의 배를 걷어 찼다. 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반항은 멈추는 듯했다. 뒤로 묶이는 여자의 손은 흔히 보는 살색 빛이 아니었다. 빨간 색, 흰 색, 노란 색, 안료로 가득 물들여 있었다.


“예술 해방 만…….악!”


여자가 힘껏 외치려 했지만 심문관의 발길질에 멈추고 말았다. 카르는 길에 서서 그것을 잠시 지켜보았다. 회색 눈은 아니었다. 카르는 눈을 돌려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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