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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의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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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먹은인삼
작품등록일 :
2015.06.28 16:41
최근연재일 :
2015.07.01 19:30
연재수 :
13 회
조회수 :
14,162
추천수 :
125
글자수 :
96,650

작성
15.06.28 16:53
조회
1,126
추천
11
글자
18쪽

10. 다이아몬드 원석

DUMMY

강렬한 탑스핀이 걸려있는 공이 네트를 넘어 바닥에 닿았다가 은채의 정면으로 치솟았다. 은채는 그 속도에 움찔 놀라면서도 받아치기 위해 라켓을 움직였다.

휘익!

“어라?”

헛손질을 하고 만 은채는 뻘쭘해진 표정으로 뒤로 날아간 공을 바라봤다.

“저런 건 어떻게 쳐요?”

레오는 세 번째 서브를 준비하며 말했다.

“준비부족. 공이 튀어 오르자마자 앞으로 움직여 타격했어야 했어.”

은채는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을 치켜떴다. 즐겁게 주고받고 싶었는데 레오가 자꾸 그럴 수 없게 공을 주고 있는 것이다.

“첫 연습이잖아요! 살살 쳐줘야죠!”

“아주 살살 친 거야.”

“거짓말!”

레오가 연아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는 무언의 시선에 연아가 짧게 웃으며 말했다.

“코치님 말이 맞아요, 언니. 대회에 나오는 프로들의 공은 이것보다 빨라요.”

“으으.”

은채는 팔을 휘두르며 레오에게 도전적인 눈빛으로 말했다.

“해봐요 그럼!”

레오는 이후에도 절대 봐주지 않는 샷으로 은채의 기분을 들었다 놨다 했다. 카트에 담겨있던 공이 순차적으로 사라져갔다. 한 개의 카트가 비워질 무렵까지 은채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랠리를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마냥 속상하지는 않았다. 막연하게 어려운 게 아니라 아슬아슬했고 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실제로 레오의 공을 몇 번 넘기기도 했다. 그 기쁨에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이어나가지를 못했지만 말이다.

한편, 반사적으로 카트안의 공을 집다가 휑한 느낌에 손을 허우적거리던 레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은채의 재능에 놀라 훈련 페이스를 오버할 뻔 했다.

“잠시 휴식.”

“벌써요?”

벤치에 걸어갔던 레오가 수건을 손에 쥐고 은채의 앞으로 다가왔다.

“휴식도 훈련의 일부야. 습관을 잘못 들이면 체력 밸런스가 흐트러진다고.”

“아직 쌩쌩한데.”

“가서 앉아.”

레오가 아쉬워서 발걸음을 떼지 않는 은채의 머리에 수건을 덮었다.

“어푸푸! 왜 이래요!”

은채는 수건을 홱 끌어내리고 레오를 째려봤다. 레오는 반항하는 은채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아야!”

“잔말 말고 쉬어. 10분 뒤에 시작할거니까 기운빼지 말고.”


라켓을 쥐락펴락 아쉬움을 가득 담고 벤치에 다가온 은채에게 연아가 물병을 내밀었다.

“언니, 여기요.”

“땡큐~”

은채는 물을 한 모금 들이키며 연아 옆에 앉았다.

“쉬엄쉬엄해요. 거의 한 시간 동안 계속 움직이셨어요.”

“한 시간이나?”

연아의 말에 새삼 정신없이 쳤음이 실감 됐다. 레오가 보여준 그야말로 한 점의 굴곡도 없이 매끄러운 샷들은 아직도 두 눈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잘하긴 진짜 잘하는구나.”

“코치님이요?”

“응. 한 번도 반격 못했어. 난 이렇게 숨이 찬데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으!”

분한 듯 레오를 흘겨보고 있는 은채의 모습에 연아는 내심 웃음이 나왔다. 레오는 단순한 프로가 아니었다. 세계 최정상의 선수만이 참가하는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한, 격이 다른 프로선수였다. 아무리 봐주면서 친다고 해도 1포인트를 따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훈련은 어때요? 힘들지 않아요?”

“응? 힘들게 뭐가 있어.”

은채는 연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많이 못 때려서 짜증이 좀 난 거뿐이야. 좀 있다 되갚아줘야지. 잘 봐봐.”

연아는 라켓을 꼭 쥐고 있는 은채의 손을 바라봤다. 어떻게든 한 점을 따내기 위해 고심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테니스를 가볍게 생각하고, 고작 2시간의 레슨만 받고 돌아가려 들지 모른다는 레오의 고민은 별 문제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체육센터 옥상의 난간에는 큼지막한 망원경이 달린 카메라를 조작하는 이가 있었다. 굵은 안경테를 끼고 있는 이 남자는 카메라 화면에 찍혀있는 한 아가씨의 사진을 확대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미모가 남달라. 신제품을 저 몸에 맞는 핏으로 갖춰 입으면 화면으로 봐도 때깔 나겠어.”

늘씬한 몸에 생기 있는 얼굴. 광고모델로 활용할만한 스포츠 선수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머릿속에 꽉 차있는 그였지만 이 정도의 매력을 가진 여인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게다가 실력은 레오가 확실하게 키워주고 있다. 깜짝 우승이라도 하면? 말 그대로 대박 중에 초대박일 것이다.

“역시 이사님. 보는 눈이 달라.”

그렇게 감탄하고 있는 남자의 등 뒤로 마스크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녀 역시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앞서 촬영하고 있던 남자를 보며 놀란 눈치였다.

사진에 푹 빠져있는 남자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온 그녀는 힐끔 화면을 살피고 놀란 눈이 됐다.

“어어? 당신 왜 은채 사진을 다리만 확대해서 찍어!”

“으잇!”

남자는 난데없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카메라를 떨어뜨릴 뻔했다. 겨우 수습한 뒤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누구야 당신?”

“거기 찍힌 사람 친구거든요? 당신은 뭔데요?”

남자는 천천히 여자의 모습을 살폈다. 얼굴 절반을 가리는 큰 잠자리 선글라스부터 마치 어딘가를 숨어들려는 듯한 패션의 여자는 모습 그 차체로 의심쩍었다.

“그냥 풍경이 좋아서 사진 찍으러 나온 사람입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 마시고요. 말해요. 왜 사진을 찍은 건데요?”

남자는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여자의 이상한 행색을 가리켰다.

“그러는 그쪽이야 말로, 친구면 직접 찾아가지 왜 카메라를 들고 여기 있는 겁니까?”

“그야 은채가 무조건 비밀이라고…….”

서로 간에 할 말이 없어진 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못 본 척 등을 돌렸다.



휴식시간이 끝나자마자 레오에게 반격하겠다는 은채의 도전이 열정적으로 이어졌다. 어느새 공을 쳐 주던 레오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갔다.

그만큼 첫 연습임에도 은채는 놀라운 체력을 보이고 있었다. 덕분에 레오는 연습 강도를 현역 선수 수준으로 잡고 진행 중이었다.

“넌 너무 마이페이스야. 상대를 봐. 네가 잘 받아칠 수 있는 스윙이 아니라 상대방이 못 받아치는 스윙을 해야지.”

레오는 은채의 무서운 적응력에 감탄하면서도 자세와 움직임에 관한 조언을 잊지 않았다.

카트 한 개분의 공을 다 치고 다시 한 개분을 더 칠 무렵, 지칠 것 같지 않던 은채의 동작이 느려졌다. 레오는 서브를 준비하다 은채의 반응을 느끼고 물었다.

“힘들어?”

“살짝요.”

은채는 서브를 받기 위한 자세를 잡고 싱긋 웃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조금만 버텨봐. 체력의 한계치도 봐야 하니까. 한 경기에서 3세트를 풀로 뛰게 되면 녹초가 되거든.”

레오는 카트 안에 남은 공 다섯 개를 가리켰다.

“이 중에 한 포인트라도 따내면 내가 근사한 점심을 대접하지.”

“봐주면서 하나요?”

“당연한 소리. 난 오늘 한 번도 전력을 다한 적 없어. 좀 더 수준을 낮춰준 적은 있어도.”

이 말에 지쳐가던 은채의 눈에서 투지가 활활 타올랐다.

“콜!”

가볍게 몸을 풀며 전의를 가다듬는 은채였다. 아직 여력이 충분한 모습에 레오는 내심 환호하고 싶을 정도였다.

실제 경기로 따져도 풀세트 접전에 이를 만큼 운동량이 많았다. 그런데도 투지를 보이는 상태라니. 기초 체력이라는 제일 어려운 고비를 보너스로 넘긴 기분이었다.

‘점점 마음에 드는데.’

한 달 내내 기초 체력 훈련만 해도 부족할지 모른다는 걱정에서 해방이었다.

레오는 서브를 준비하며 공을 바닥에 통통 튕겼다. 허공으로 토스하고 라켓을 휘두르려는 그때, 테니스장 안으로 불쑥 들어선 이가 있었다.

“이연아 선수.”

낯선 목소리가 찾은 것은 벤치에 앉아있던 연아였으나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레오였다. 안색이 변한 레오가 라켓과 공을 내려놓고 은채에게 눈짓했다.

“움직여. 엄 부장이 쫓아왔어.”

“네?”

은채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레오는 재빠르게 연아에게 달려가 휠체어를 밀었다. 입구로 고개를 돌린 은채는 쌀쌀맞은 표정의 엄 부장과 눈이 마주쳐 그녀도 모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엄 부장은 딱딱한 눈으로 인사를 받았다. 레오가 반대편 문으로 도망치려 함에도 전혀 조급한 기색 없이 말했다.

“차는 직원이 이미 회수했습니다.”

이 말에 레오가 우뚝 멈춰 섰다. 레오는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띤 채 시선을 돌렸다.

“대처가 빠르군요.”

“실수에서 배우는 법이니까요.”

엄 부장이 가까이 다가섰다.

“돌아갈 시간입니다, 이연아 선수.”

“아니, 연아는 계속 여기 있을 겁니다. 눈으로 보는 것도 훈련이니까.”

“오늘은 이연아씨의 훈련이 아니라 정은채씨와의 훈련 일정만 잡힌 날 아니었습니까?”

레오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리다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던 은채와 눈이 마주쳤다. ‘어서 안 와?’라는 눈짓을 보내자 은채는 안절부절 엄 부장의 눈치를 살폈다.

이쪽을 힐끔, 저쪽을 힐끔 보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쪼르르 달려와 레오 옆에 선 것이다. 은채를 지켜보고 있던 엄 부장은 감정이 메마른 건 아닌가 싶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비 프로를 대회에 출전시키려는 의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에이전트의 이미지가 손상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미지 손상?”

레오가 발끈해 엄 부장을 노려봤다.

“스콧 에이전트의 한국 지부장씩이나 되는 분이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실패할까봐 겁먹은 거야? 선수를 코치하는 권한 만큼은 이쪽이 우선이라는 걸 알아 둬.”

“테니스 선수로서의 당신은 분명히 존경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코치로서의 당신은 전혀 입증된 바가 없군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고 드리는 우려라고 생각해 주시길.”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음바람이 휘몰아친 듯 변했다. 엄 부장은 레오를 무시한 채로 연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연아 선수. 기분전환은 충분히 하셨습니까?”

연아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에 잡아놓은 물리치료 일정을 진행하려면 지금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어딜.”

레오는 연아를 뺏기지 않겠다는 듯 휠체어 손잡이를 굳게 붙잡았다.

“괜한 짓 마십시오, 레오나르씨. 이 이상의 즉흥적인 행동은 본사에 보고를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찬 기운이 풀풀 풍기는 엄 부장의 말에 연아가 레오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코치님. 전 충분히 놀았어요.”

“연아야.”

“그만 돌아갈게요.”

엄 부장과의 관계가 악화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제자의 기특한 마음에 레오는 끙하고 한숨을 참았다. 굳어있던 표정을 푼 레오는 연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갑갑하면 언제든 전화해.”

“네, 코치님.”

엄 부장이 휠체어를 밀기 위해 다가왔다. 레오는 꾹 힘을 주고 있던 휠체어의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이윽고 떠나게 된 연아가 손을 흔들었다.

“은채 언니, 다음에 또 봐요.”

“잘 가. 내가 병문안 꼭 갈게.”


두 사람이 떠나고, 레오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엄 부장에게 한 방 먹은 느낌이 들어 짜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뭐? 근거 없는 자신감?’

레오는 테니스장 입구까지 연아를 배웅하러 간 은채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저 놀라운 원석이 어떻게 모두를 놀라게 해 줄지 벌써부터 기대감이 들었다.

돌아온 은채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아까 하던 내기 계속해야죠.”

“아니, 훈련은 여기까지만 해. 오후에 갈 곳이 있어.”

“근사한 점심은요?”

불타던 승부욕이 전혀 사라지지 않은 은채를 보며 레오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만 열을 냈지 정작 본인은 엄 부장에게 무시당한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어차피 사주려고 했어.”

“그럼 얼른 가요!”

“기다려.”

레오는 금방이라도 뛰어가려는 은채의 뒷덜미를 붙잡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근육 뭉치기 전에 수습하고 가야지.”

“근육이 뭉쳐요?”

레오는 은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해하지 마.”

그리고 안마하듯 손가락을 지그시 눌렀다. 라켓을 신나게 휘두르느라 압박을 받은 은채의 근육을 천천히 풀어주었다.

“아!”

“아픈 거야 좋은 거야?”

은채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요!”

“가만있어. 통증이 있는 거면 좀 더 풀어야 해.”

움직이려는 은채를 붙잡은 레오는 그녀를 벤치에 앉혔다. 어깨에서 팔로, 발목에서 종아리로 차근차근 마사지를 시작했다. 잔뜩 달아올랐던 그녀의 뺨에 은은한 홍조가 어렸다.

“이걸 안 하면 어떻게 되는 데요?”

“내일 꼼짝도 못할걸?”

처음에는 당황하던 은채도 몸이 점점 편안해지는 느낌에 그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딱.

잠시 후, 레오가 은채의 이마를 손끝으로 튕기자 그녀가 놀라서 눈을 떴다.

“자냐?”

“아, 아니요.”

“처음이니까 해주는 거야. 다음번에는 스트레칭을 가르쳐 줄 테니까 네가 알아서 풀어.”

은채는 한결 개운해진 느낌으로 일어섰다.

“이런 재주도 있었군요.”

레오는 테니스 가방을 정리하고 어깨에 메며 말했다.

“코트에 서면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니까. 이제 가자.”

“갈 곳이라는 게 어디죠?”

“한호 교수님 댁. 대회 출전자가 너로 바뀌었다는 걸 알려 드려야 해.”

밖으로 나서던 레오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

“엄 부장이 차를 가져가 버렸어.”

“버스 타고 가면 되죠. 아침에 들어오다 정류장 봤어요.”

“버스?”

천하의 레오가 버스를 탈쏘냐. 에이전트의 직원이 차를 끌고 갔다고 했으니 전화만 하면 돌아올 것이다. 몸을 뒤적이며 휴대폰을 찾던 레오는 자신의 짐을 전부 차에 놓아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교통카드 없어요? 제걸 찍으면 되니까…….”

은채는 걱정 말라고 말하려다 코끼리 동상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에 짧은 신음을 흘렸다. 잠자리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상당히 수상한 복장의 여자였으나 은채는 한눈에 누군지 알아챘다.

“혜미 너어!”

“혜미?”

레오가 은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붉은 스카프를 머리에 두른 여인이 화들짝 놀라 도망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은채가 그 여인보다 수배는 빠른 달리기로 따라붙어 팔을 낚아채는 장면을 목격했다.


“미안!”

혜미가 은채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비밀이라고 몇 번을 말했어. 나한테 미안해할게 아니라 이 사람한테 미안해해야지.”

“죄송해요!”

혜미가 레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재차 사과했다. 레오는 카메라 안의 사진을 살펴보며 약간의 감탄이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옥상에서도 찍었군요.”

“뷰가 괜찮아서요. 웬 이상한 남자만 아니었어도 여기까지 내려와서 안 찍었는데.”

혜미의 한탄에 레오의 눈빛이 변했다.

“이상한 남자? 자세히 좀 말해 주겠어요?”

“생긴 건 멀쩡한데 은채 사진을 막 찍고 있더라고요. 그 이상은 몰라요.”

레오는 체육센터의 옥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귀국 소식이야 여러 곳에 퍼졌을 테지만 기자가 이곳까지 냄새를 맡고 찾아오기엔 너무 일렀다. 대체 누구지?

“그래, 혜미씨. 이 사진은 어디다 쓰려고 하신 거죠?”

“어디긴요? 잘 나온 건 저만 몰래 소장하고 몇 개는 블로그에 올릴… 게 아니라 그냥 보고 지울 거였어요.”

“아, 혜미씨 블로그를 운용하신다고 했죠?”

“네? 네.”

당황한 혜미와는 다르게 레오는 별로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레오는 카메라를 돌려주며 말했다.

“에이전트에서 보도자료를 뿌리면 어차피 알려질 일입니다. 미리 올린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지요. 어때요? 은채양과 제가 훈련하는 사진을 꾸준하게 올려 보는 건?”

어차피 부딪혀야 할 기자들이라면 귀찮게 꼬이는 것보다 한 명에게 전담하는 편이 낫다.

“지, 지금 레오나르 장의 훈련 스토리 포스팅을 제안하시는 거예요?”

“단. 사진은 은채양이 테니스를 치는 모습 위주로 올릴 것. 다른 매체에는 절대 유출하지 않을 것. 이게 조건입니다.”

“그거야 문제없죠! 요즘은 독점마크 달면 사진 한 장도 함부로 못 퍼가요.”

뜻밖의 제안에 혜미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기분으로 레오를 바라봤다. 레오는 옆에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는 은채에게 말했다.

“언론이 주목하면 대회가 흥행하고, 흥행한 대회에서 우승하면 상위의 대회에 출전하기가 편해지거든.”

“상위의 대회요? 저 딱 한 달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요?”

“걱정 마. 대회 끝나고 네 마음대로 해도 돼.”

레오는 빙긋 웃었다. 연아가 몰래 전해준 말이 떠올라서였다.

- 은채 언니 테니스에 푹 빠졌어요. 코치님이 그냥 하자고 하면 언제든 할 것 같아요.

갑작스레 계를 타 기뻐하는 혜미와 그런 친구의 손을 붙들고 축하해주는 은채를 지켜보던 레오는 정작 걱정해야 할 문제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동수단이 없다. 버스를 타고 자신의 차를 놓아둔 시내로 진입했다가는 피곤한 것은 둘째 치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제 시간에 나오지도 못할 것이다.

“혜미 너 뭐 타고 왔어?”

“내 애마.”

“잘됐다. 우리 좀 태워줘.”

레오는 자연스레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쫑긋했다. 은채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때요? 타고 가실 거죠?”

개인차를 빌려 타면 그나마 나을 것이란 생각에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백팔십도로 변해야 했다.


“짜잔! 꽃카를 소개합니다!”

혜미가 자신의 애마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TV에 나오는 각종 남자 스타들의 얼굴이 큼지막한 스티커가 되어 붙어있는 경차.

레오는 문짝에 붙어있는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골을 짓눌렀다. 이걸 타느니 버스를 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었다.

“어서 타세요.”

“으음.”

레오는 고개를 휘저으며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창문 아래로 상체를 최대한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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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다이아몬드 원석 15.06.28 1,127 11 18쪽
11 10. 다이아몬드 원석 15.06.28 876 11 16쪽
10 9. 그 남자가 광고모델을 찾는 이유 15.06.28 829 6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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