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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의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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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먹은인삼
작품등록일 :
2015.06.28 16:41
최근연재일 :
2015.07.01 19:30
연재수 :
13 회
조회수 :
14,163
추천수 :
125
글자수 :
96,650

작성
15.06.28 16:52
조회
829
추천
6
글자
20쪽

9. 그 남자가 광고모델을 찾는 이유

DUMMY

9. 그 남자가 광고모델을 찾는 이유


PS그룹 본사 입구는 해외파 축구선수로 유명한 미남선수의 등장에 일대가 혼란에 빠졌다.

“꺄악! 민우 오빠!”

“이쪽이에요! 이쪽! 사인 좀 해주세요!”

소녀팬들을 막는 경호원들이 양쪽으로 늘어선 가운데 박민우를 맞이하기 위한 회사의 중역들이 앞다퉈 달려나갔다.

차에서 내린 박민우는 양옆을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상당히 시끄럽군요. 조용히 계약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툭 내뱉는 박민우의 말에 중역진에서 가장 앞에 서있던 윤가람 상무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홍보부에 그렇게 비밀로 해달라고 했는데 계약건이 새어나간 통에 말입니다.”

“이런 식이면 재미없습니다.”

“섭섭지 않게 대우해드릴 테니 기분 푸십시오.”

윤 상무의 손이 빌딩을 향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박민우 선수.”


세련된 외형을 가진 PS빌딩의 상층부에는 아래쪽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큰 유리창 하나가 있었다.

창가에 서서 소란스러운 입구를 내려다보고 있던 유준은 중역들에게 둘러싸여 거만한 걸음걸이로 걸어 들어오고 있는 한 축구선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프리미어리그 소속의 잘 나가는 미드필더이자 이번 신제품 홍보를 위한 광고모델로 중역들이 앞다퉈 추천한 선수였다. 환호하고 있는 팬들을 무시한 채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박민우를 보던 유준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감이 안 좋아.’

적어도 레오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팬에게 확실한 서비스를 보였다. 그것이 너무 투철해 놀랄 정도였으니까.

“이사님, 미팅시간 다됐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유준은 창가에서 눈을 돌렸다. 벽에 걸려있는 양복 상의를 걸치고 깃을 정리하는데 공 실장이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물었다.

“회의장에 여성 실무자들은 내보내라고 지시 할까요?”

“됐어.”

“땀 뻘뻘 흘리실 거면서.”

“일 할 때는 안 그래.”

“아침의 매장 점검은 일이 아니었나보죠? 아주 그 아가씨한테 눈을 못 떼시던데.”

깐죽거리던 공 실장은 상관의 표정을 힐끗힐끗 살피다가 ‘준비하고 나오세요!’라고 외치며 얼른 문을 닫았다.

한마디 대꾸하려던 유준은 적절한 타이밍에 치고 빠져버리는 공 실장의 작태에 혀를 차고 말았다. 눈치가 백단이라 틈을 보이지 않는 것도 쉽지가 않다.

유준은 대표이사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공 실장이 따라붙으며 아침부터 살펴본 회사의 분위기를 전했다.

“윤 상무님 작정하셨더만요. 이참에 공 한번 세우겠다고 전무님들 죄다 설득시켜버린 통에 저희가 유럽에서 어렵게 섭외한 데이빗 선수만 팽당하고 말이죠. 이사님이 강하게 나가셨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레오 때문에 입지가 좁아지셨더라도 신제품만큼은 이사님 손에서 성공시키셔야죠.”

공 실장이 떠들건 말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유준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공 실장을 나가라고 손짓했다.

“왜요?”

“박민우에 대해서 몇 가지 조사 좀 하고 내려와.”

“미팅 직전이잖습니까.”

“내가 공 실장 일 시키는데 이래라 저래라 부탁할 입장이야? 대신 대표이사 해 그럼. 나야 실컷 놀고 좋지.”

가라앉은 유준의 눈빛에 공 실장은 하하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무슨 조사를 하면 됩니까?”

“사생활.”

“네에? 개인정보 관련된 건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냥 연예부 기자 몇 명한테 전화만 돌려봐. 분명히 뭔가 나올 거야.”

“갑자기 그건 왜…….”

“평소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거든.”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닫혀갔다. 유준은 미팅실이 있는 5층의 버튼을 누르고 공 실장을 향해 지나가는 듯 말했다.

“참, 데이빗은 내가 깠으니까 괜히 중역들 욕할 거 없어.”

공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고생해서 성사시킨 계약을 왜…….”

냉정하게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가 버렸다. 공 실장은 훅 하고 한숨을 쉬었다. 윤 상무 으스대는 것 좀 보기 싫어서라도 이사님이 전면적으로 나서 줬으면 싶었으나 요즘은 도통 뭔 생각이신지 알 수가 없었다.


회의장 안은 홍보부와 영업부의 실무진들로 가득했다. 한가운데 자리한 원형 탁자에는 윤 상무를 비롯해 PS그룹의 중추적인 결정을 내리는 계열사의 이사들까지 전부 모여앉아 있었다.

대부분이 상석에 앉아있는 박민우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걸 지켜보는 윤 상무의 입가에도 희희낙락한 미소가 걸렸다. 국민적인 인기를 등에 업은 스타를 모셔왔다는 것에 자부심 넘치는 표정이었다.

박민우는 비어있는 상석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자리는 누구 겁니까? 왜 시작 안하죠?”

윤 상무가 나직이 말했다.

“대표이사님이 오시는 중이니 잠깐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시간개념이 좀 없으신가 보군요.”

윤 상무는 헛기침을 하며 대답하지 못했다.

박민우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대표라 해도 이 자리의 갑은 자신이었다. 자신을 붙잡지 못해 안달 나 있는 기업이 어디 한둘인가? 실력 좋아 얼굴 반반해.

그는 회의장 안에 쭉 둘러앉아 선망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여자들을 훑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착 고르기만 해도 쓱 넘어올 게 눈에 선했다.

달칵.

그 순간 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나타났다. 휘파람을 불고 있던 박민우는 자신에게 몰린 시선이 갑자기 문쪽으로 집중되는 것을 느끼고 뭔가 하여 고개를 돌렸다.

‘응?’

운동선수치고는 무지 잘 생긴 편인 자신을 한순간에 오징어로 만들어 버릴 정도의 미남자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박민우는 윤 상무를 향해 나직이 물었다.

“뭡니까? 저 말고도 배우랑 계약하기로 했어요?”

윤 상무는 대답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남자는 짧게 목례를 하며 앉으라는 손짓을 보였다.

“박민우 선수시죠? 반갑습니다. 민유준 이사입니다.”

유준이 박민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박민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어나 악수를 받았다.

다시 자리에 앉은 박민우는 슬쩍 주변을 돌아봤다. 한번 돌아간 여자들의 관심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회의장 안에 여자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를 오로지 자신의 인기 덕분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상당히 불편한 심정으로 민유준을 살폈다.

저런 얼굴에 한 회사의 CEO라니.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박민우였다.

“바로 시작하죠.”

유준은 자리에 앉자마자 홍보부의 서야 팀장을 콜했다.

회의장의 불빛이 어두워지며 벽의 스크린에 신제품 이미지가 떠올랐다. 뒤이어 서 팀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번 프로젝트는 박민우 선수가 국가대표 A매치 첫 골을 넣은 순간, 프리미어리그 베스트 선수 30위에 들었을 때와 리그컵 MVP가 됐던 순간을 모티브로, 세 가지 컬러를 담은 스포츠 웨어를 선보이는 스페셜 라인입니다.”

광고 계획과 제품 이미지 설명이 이어진 후에 발표가 끝났다. 윤 상무는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박수를 쳤고, 살짝 기가 죽어있던 박민우도 사람들의 박수소리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단지 유준만 말없이 스크린에 시선을 두고 있을 뿐이었다. 윤 상무는 유준의 어두운 분위기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사님, 이 프로젝트가 맘에 안 드시는 겁니까?”

유준은 윤 상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안 좋긴요. 제품 잘 나왔고, 광고 구성도 좋고. 마케팅만 충분하면 주력 라인이 될 수도 있을 프로젝트로 보입니다.”

윤 상무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러나 뒤이어진 유준의 한마디에 윤 상무는 물론이고 회의장 안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하지만 말이죠. 기껏 만들어 축구복 몇 장 팔아먹고 말 프로젝트가 되진 않을까 걱정이 드는군요.”

윤 상무가 살짝 화가 올라 반문했다.

“축구복 몇 장이라니요?”

유준은 상대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눈동자로 윤 상무를 바라봤다.

“제가 왜 여기 계신 박민우 선수보다 인지도가 수십 배는 높은 데이빗 선수와 계약 직전까지 갔다가 쳐냈는지 아십니까?”

데이빗이라는 말에 박민우는 움찔 놀랐다. 유럽축구의 3대 리그를 통틀어 베스트 11에 꼽히는 미드필더인 데이빗과 자신은 몸값만 열배 이상 차이가 났다.

“기업의 이미지 때문입니다. 데이빗은 선수 커리어에 대한 열정은 충만하지만, 한국에 대한 애정은 전혀 없습니다. 한국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죠. 이런 사람이 향후 주력 상품이 될 제품 광고를 맡는다? 그 사람이 언론에서 흘릴 잘못된 말 한마디 때문에 기업 이미지가 크게 실추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만둔 겁니다.”

박민우가 발끈했다.

“이보쇼, 이사님. 제가 한국에 대한 애정이 없다 이거요? 말이면 단줄 아나. 이런 식이면 라이벌 회사로 가는 수가 있어.”

윤 상무도, 발표를 했던 서 팀장도 박민우의 말에 놀라 유준을 탓하는 눈빛으로 변했다.

유준은 표정의 변화 없이 막 회의장으로 들어선 공 실장에게 시선을 던졌다. 공 실장이 한달음에 달려와 유준에게 귓속말을 했다.

유준은 고개를 끄덕인 후 윤 상무에게 물었다.

“윤 상무님. 박민우 선수와의 계약은 어디까지 되어 있습니까?”

“가계약 상태입니다.”

“그럼 위약금을 물어드리고 당장 파기하십시오.”

“이사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윤 상무가 확 열이 오른 상태로 외쳤다.

“제가 공 세우는 게 그리 눈꼴 사나웠으면 미리 말씀하시지! 박민우 선수가 다른 회사에 가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목소리 낮춰요. 이유를 설명해 줄 테니.”

유준은 침착하게 손을 들어 윤 상무를 진정시켰다.

“공 실장. 준비됐습니까?”

스크린과 이어진 노트북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공 실장이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이어진 스크린 속의 사진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말소리가 멎었다.

천 쪼가리만 걸친 두 여자를 어깨에 끼고 흥청망청 술을 들이켜는 박민우의 사진에 클럽에서 속옷 바람으로 광란의 춤을 추고 있는 사진들이 이어졌다.

“SNS에 올라와 있는 걸 기사화 준비 중이더군요. 저기 속옷만 입고 있는 지인 분이 올리신 듯합니다. 날짜를 보니 이 다음날 국대 평가전에 나가셨던데. 박민우 선수 체력 진짜 좋으시네요.”

유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윤 상무가 사색이 된 얼굴로 박민우를 쏘아 보았다.

“윤 상무님. 저희 회사 광고 계약서 3조 2항을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 그건…….”

“기억이 잘 안 나시는가 보군요. 3조 2항. 사생활이 문란하여 회사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경우 징벌적인 배상을 청구하고 계약을 파기한다.”

유준이 이 말을 끝내자 흠모하듯 그를 쳐다보고 있던 여자 실무진들의 눈빛이 더욱 진해졌다. 유준은 그 눈길을 느끼고 입을 가리며 짧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스크린에서 놀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박민우을 돌아봤다.

“저희가 박민우 선수에게 원하는 건 한국에 대한 애정이 아닙니다. PS그룹의 이미지를 실추시키지 않는, 스포츠 스타다운 태도지요.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 누릴 궁리보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고민부터 하시길.”

유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사의 중역들과 실무진들을 향해 말했다.

“주가 떨어지는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광고 모델 선정부터 재고하세요.”

말투는 무척 공손했으나 듣고 있는 이들에겐 그것이 얼음장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유준이 나가고 나서도 회의장 안은 찬바람이 지나간 듯 썰렁했다.


엘리베이터 안. 공 실장은 연신 큭큭 거리며 윤 상무를 한 방 먹인 자랑스러운 이사님을 바라봤다. 여 사원들의 추파로 이마에 식은땀이 한 가득인 수줍음쟁이의 모습도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손수건으로 땀을 닦던 유준이 고개를 돌렸다.

“뭘 그리봐?”

“아닙니다. 크흐흐.”

유준은 ‘싱겁긴’하고 중얼거리며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달하길 기다렸다.

“참, 공 실장이 알아봐 줄게 있어.”

“네네, 말씀만 하십시오.”

“레오가 코치한다는 제자와 출전하는 대회에 대해서 알아봐.”

“그건 왜요?”

유준은 확신을 갖고 말했다.

“레오가 아무나 가르칠 리 없거든.”

게다가 그 아가씨. 스포츠계를 들락거리며 숱한 스타들을 만나본 그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스스로 반짝일 능력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티가 난다. 그리고 그는 그런 사람을 발견하는 능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


집에 온 은채는 테니스용품들을 쭉 꺼내 보았다. 한 아름 안겨줄 때는 정신없이 받았는데 방에 풀어 놓으니 웬걸. 생일 날 잔뜩 선물을 받은 것처럼 양과 종류가 상당했다.

탄력 있는 롱팬츠를 만져서 쭉 땡겼다가 놓아보고, 선캡을 머리에 쓰고 신발의 끈을 묶었다. 그리고 라켓을 들어보았다. 이런 걸 손에 착 감긴다 라고 하는 걸까?

“우와.”

테니스 동아리에서 휘둘렀던 남자용 라켓과는 무게부터 촉감까지 달랐다. 하긴, 겉모양부터 이쪽이 훨씬 귀티나지만.

은채는 짐짓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전문가처럼 한쪽 눈을 찡긋하고 라켓을 들어서 살폈다. 그리고 ‘음~ 명품이군요. 제 가격은~’이라고 중얼거렸다가 피식 웃었다.

라켓을 쥐어서일까. 휘둘렀을때는 어떻게 다를지 살짝 호기심이 생겼다.

‘한번 휘둘러 봐?’

레오가 잔뜩 안겨 준 테니스용품들을 그대로 둔 채 은채는 마당에 나가보았다. 마침 해도 저물고 바람도 선선하니 딱 좋은 시간이다.

잠시 눈을 감은 은채는 낮에 쳤던 랠리를 떠올렸다. 집중한 그녀의 손목에서 에메랄드빛이 살포시 스쳤고 은채의 눈에 날아오는 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밀어치듯이 포핸드로.’

착, 발을 딛고 받아치던 모습 그대로 은채가 움직였다. 라켓은 부드럽고 빠른 선을 그렸다. 그 궤적은 놀랍도록 날렵하고 상쾌한 바람을 머금고 있었다.


지환은 지친 얼굴로 집 앞에 섰다. 신학기의 시작인데다 담임으로서의 업무가 잔뜩 쌓인 터라 이번 주는 온통 정신이 없었다. 그나마 모레부터 휴일이라 한숨 돌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보금자리의 대문을 열던 지환은 멈칫하고 말았다. 딸아이가 마당 한가운데 서서 폴짝거리며 운동 중이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엔 훌라후프 갖고 저러더니 이번엔 라켓을 들고 허공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어? 아빠 왔구나.”

은채는 허공을 가르던 포핸드 스윙을 멈춘 채 물었다.

“어때 보여?”

“벌레 잡냐?”

“뭐어! 이래봬도 프로한테 칭찬받은 몸이라고. 잘 봐봐.”

발끈한 은채가 라켓을 반대쪽으로 돌려 바람을 쉭하고 가르는 백핸드 스윙을 해 보였다.

“어때? 느낌 딱 오지?”

“음…….”

지환은 아무리 봐도 제멋대로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기충전한 딸의 기세를 꺾고 싶진 않았기에 적당히 둘러댔다.

“아빠는 봐도 잘 몰라.”

“제대로 배우고 나면 깜짝 놀랄 거야. 아빠 딸 생각보다 운동 잘하더라고.”

“그래? 잠자리채 들고 벌레 수집하는 동작 같은걸 배우는 건 아니지?”

무심코 속마음이 드러나자 은채가 도끼눈을 뜨고 흘겨봤다. 지환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너 칭찬했다는 애가 누구라고 했지? 레 머시기였는데.”

“그것도 못 외웠어? 레오나르 장!”

“외국선수야?”

“엄마가 프랑스인이래. 생긴 건 딱 외국사람인데 한국말을 엄청 잘해. 아빠도 보면 신기할 거야.”

스포츠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지환이었기에 이름만으로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다. 전화로 들었을 때는 단순히 테니스에 취미를 붙여 선영이와 동아리 활동을 하겠거니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런 건 아닌 듯 보였다.

“그놈 사기꾼 아니야?”

“아빠도 참. 놈은 무슨 놈이야. 우리 대학 출신에 정말 유명한 테니스 선수라고 했잖아. 원래 가르치던 제자가 다쳐서 내가 대신 제자가 된 거야. 훈련 때 쓸 라켓이랑 옷도 잔뜩 받았어.”

지환의 입장에선 딸과 만나려는 사내는 일단 다 놈이었다. 물론 이걸 굳이 은채에게 밝힐 필요는 없었다.

은채는 집 안을 가리켰다.

“밥 차려놨어.”

“너는 안 들어가?”

“첫 훈련 대비해서 몸 좀 더 풀고 들어갈게.”

은채가 다시 허공에 헛손질을 시작하자 지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를 끝마치고 식탁에 앉은 지환은 수저를 들다가 문득 생각나 휴대폰을 켰다. 그리고 인터넷 창을 열었다.

‘테니스 선수 레오나르 장’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고 기사를 쭉 훑던 그는 프랑스 오픈 우승이니 세계랭킹 30위 돌파라느니 하는 헤드라인을 지나 ‘레오의 열애’라는 기사에 관심이 꼽혔다.

- 레오, 배우 한 모씨와의 연인 관계 부정. “그저 친한 오빠일 뿐입니다.”

- 테니스가 취미라는 모 아이돌 이상형으로 레오를 꼽아. 레오, “저도 아이돌 음악 자주 듣습니다.”

- 모델 이 모씨의 공개 고백에 미소로 화답하는 레오. “인연이 되면 만날 수도 있죠.”

지환은 수저를 탁하고 내려놨다.

“뭐야 이 녀석.”

연애기사 대부분 명확하게 사귄다 어쩐다를 밝히고 있진 않지만 생긴 것만 보면 딱 바람둥이였다. 귀하고 예쁜 딸한테 저런 놈팡이가 붙어있게 되다니!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이미 훈련을 허락한 마당이니까. 뜯어말리기는 그렇고 이상한 낌새라도 보이면 당장 이놈을 쫓아가 다리몽둥이를 분지를 수밖에.

지환은 화면 속 레오의 얼굴을 숟가락과 함께 꼭꼭 씹었다.


그날 밤.

은채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혜미와 선영이 있는 대화방에 접속했다.

“얘들아~ 뭐해?”

혜미 - “아고고, 야근 끝나고 이제 집에 왔어. 피곤해. 잘끄야.”

선영 - “팩 중. 15분 잠수.”

“그렇구나…….”

은채는 훗 하고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 자판에 닿은 손가락을 경쾌하게 놀렸다.

“나, 레오한테 테니스 배우게 됐어. ^-^V 그럼, 푹들 쉬어~”

입력을 누르자마자 대화방에 불이라도 난 듯 메시지가 이어졌다.

혜미 - “돼에박!!!!!!!!!!”

선영 - “어머, 그 테스트에서 정말 너를 뽑은 거야?”

혜미 - “나도 배울 거야! 나도 나도 나도!”

선영 - “혜미야, 진정해.”

은채는 방 한쪽에 고이 진열된 라켓에 눈을 돌렸다.

“레슨 받는 것도 당분간 비밀인데 너희니까 특별히 얘기해 주는 거야.”

혜미 - “부럽다. 그날 나도 쳐볼걸.”

선영 - “너는 은채처럼 못 쳤을 걸?”

혜미 - “몸치는 좀 빠지셔!”

“싸우지들 마.”

선영 - “테니스 본격적으로 해볼 마음은 있는 거야?”

“아직 모르겠어. 그 사람 말은 가능성이 있다는데.”

혜미 - “그럼 믿어! 레오의 말은 진리야!”

선영 - “혜미 너 무슨 종교 활동하니?”

은채는 피식 웃었다.

“하는 짓은 바람둥이 같은데 테니스 이야기할 때만큼은 진지해 보이더라.”

혜미 - “바람둥이? 접때도 비슷한 소리 하더니. 열애설은 좀 났어도 실제로 사귀는 사진 같은 거 한 번도 뜬 적 없어.”

약속을 떠올린 은채는 앗! 하고 놀라 재빨리 손가락을 놀렸다.

“인기가 엄청 많잖아. 그냥 그럴 거 같다고.”

혜미 - “그나저나 훈련 어디서 해? 멀리서라도 구경 좀 하자.”

선영 - “그래, 구경만 하자.”

은채는 혜미가 별 의심 없이 넘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용 연습장 같은 데서 훈련한다고 아무한테나 말하면 안 된대.”

혜미 - “우리가 남이야! 어서 불어!”

선영 - “그래. 그 정도는 알려 줄 수 있잖아.”

늦은 시간이었지만 끊이지 않는 수다 때문일까? 은채의 눈이 점점 더 초롱초롱해졌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늦게 잠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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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공지> 소개란 그대로의 내용 +1 15.07.01 2,205 8 1쪽
12 10. 다이아몬드 원석 15.06.28 1,127 11 18쪽
11 10. 다이아몬드 원석 15.06.28 876 11 16쪽
» 9. 그 남자가 광고모델을 찾는 이유 15.06.28 830 6 20쪽
9 8. 계약하지 않겠어? 15.06.28 665 10 19쪽
8 7. 샌드위치 왔어요~ 15.06.28 804 5 19쪽
7 6. 위기의 남자 15.06.28 634 7 20쪽
6 5. 밀착 훈련과 은밀한 거래 15.06.28 935 10 20쪽
5 4. 나른한 목요일의 오후 15.06.28 628 9 19쪽
4 3. 이상하게 잘 들려 15.06.28 755 10 18쪽
3 2. 봄과 수다 15.06.28 1,161 10 19쪽
2 1. 파리에서의 인연 15.06.28 1,247 10 10쪽
1 1. 파리에서의 인연 +1 15.06.28 2,297 1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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