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훈서로 님의 서재입니다.

평범한 모험가의 모험계 공략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훈서로
작품등록일 :
2024.04.03 22:56
최근연재일 :
2024.05.19 17:50
연재수 :
9 회
조회수 :
222
추천수 :
9
글자수 :
78,767

작성
24.04.16 00:18
조회
33
추천
1
글자
21쪽

남부 3구의 모험

DUMMY

극형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높은 형벌일수록 종말계 침공지역이나 고위험도 모험군에 들어간다고 하니 그렇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관리자, 무슨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봐.”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온 입문 요정을 재촉해 보지만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 당신은 지금 모든 형벌을 건너뛰고 잔여 시간이 모두 소진되었어요. 그 원인은 아직 알 수 없고요.

“모르는 게 어딨어. 네가 말했잖아.”

- 저는 관리자로서 드러난 현상과 앞으로 닥쳐올 일을 설명해드린 것뿐이에요.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내일까지 18장을 모두 채우셔야 한다는 이야기뿐이고요.


도돌이표 대화는 시간 낭비다.


‘바로 모험을 하러 간다.’


정도운은 급히 시간을 체크했다. 그 계획은 시작과 동시에 무산되었다.

이미 자정이 지났다.


‘제길···.’


도시의 모든 모험이 기능 임시 정지. 소등될 시간이다.

그는 침착하게 이 상황을 반추해보았다.


‘내일까지면 일단 하루는 시간이 있어. 하지만 18장이라···?’


지금이 16장.

18장까지는 두 단계를 건너뛰어야 한다.


‘두 단계라.’


그리 생각하니 벌써부터 좌절할 건 아닌 게 잘하면 가능할 것도 같다. 물론 잘하면 말이다. 침착하게 보면 패닉에 빠지기엔 이른 것이다.

다만 그 도전이 실패하면 지구 같은 곳으로 보내질 수도 있다고 하니···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날 밤, 그는 악몽을 꾸었다.



다음날.

동이 트기도 전부터 일어나 있던 정도운은 앞마당 그루터기에서 운기하던 것을 멈추었다. 입문 영역 무공을 수련하자 약간의 성취가 있었고, 그것이 모험기(冒險記), 경험치의 습득으로 이어졌다.

막간을 이용해 최대한 감각을 끌어올리려는 의도였는데, 본의 아니게 성취와 이득이 있었다.


해가 뜨기 시작할 무렵 정도운은 나침반을 보았다.

전 도시의 영내 모험이 가동되어 지도에 불빛이 들어왔다.

채비를 하여 도시로 진입한다.

시작은 조용했다.

마치 새벽 장을 도는 기분으로 거리를 가로지르며 저마다 어딘가로 이동하는 모험가들이 보였다.


‘아침 일찍 움직이는 모험가가 이렇게 많은 건가?’


정도운은 그들 틈에 섞여 거리에 진입했다.


- 모험의 서 잔여 시간을 모두 소진하였습니다.

- 벌금이 부과됩니다.

- 모험의 서 잔여 시간을 모두 소진하였습니다.

- 이동할 수 있는 영역이 줄어듭니다.

- 모험의 서 잔여 시간을 모두 소진하였습니다.

- ·········


전날 부과된 페널티는 총 15종.

대부분 벌금과 이동 영역 감소의 반복이었다.

그의 소지금에서 은화가 꽤 나갔고, 이동 가능한 영역은 극단적으로 줄어 현재는 거주지를 기점으로 한 남부 3구 전반으로 축소되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자력으로 다른 지역으로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3구와 이어진 영외(營外)도 가능했지만 여긴 지금 수준으로는 논외였다.


- 이쪽이에요.


입문 요정이 그가 점찍어둔 입문 모험으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어제까지는 그리 기대하지 않았는데 요정이 길잡이 역할도 해줄 수 있다는 건 좋은 소식이었다.


머잖아 목적지에 당도했다.

정도운은 몸을 풀 것도 없이 입문 모험들을 순서대로 공략해나가기 시작했다.


전날 했던 무언가 치고 부수는 간단한 단련 과목부터 해서, 활력을 이용한 장애물 코스 통과하기, 떨어지는 공격 피하기, 함정 파훼, 단거리 질주, 암벽 등반 등 비교적 단순하게 몸을 쓰는 모험들이 주였다.


“후···.”


정신없이 공략을 거듭하니 오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중간중간 보기보다 까다로운 모험도 있었지만, 정도운은 무공을 활용하여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결과는 열 개 이상의 모험이 전부 만점.

그에 관한 경험치는 순조롭게 쌓여, 정오 무렵에는 거의 17장을 앞두고 있었다.


‘빠르다. 이 속도라면 정말 걱정할 것 없을지도······.’


그리고, 슬슬 본격적으로 모험가들이 거리에 대거 합류하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점점 줄이 길어지고 거리가 문전성시였지만, 아침에 많이 벌어놓아서 이대로 종일 돌면 그래도 가능하다는 계산이 섰다.

되었다.

이제 남은 시간도, 이대로만 가면 된다.

그런 생각이 들 즈음, 나침반 위에서 길을 안내하던 요정이 말했다.


- 모험기를 모험의 서에 쌓는 것. 그것은 이야기를 이어가는 거예요.

“이야기?”

- 네, 지금까지 주로 몸을 다루는 모험을 하셨잖아요. 이렇게 연결성이 있는 입문 모험들로 이야기를 이어주면, 그 경험치 습득의 효율은 점차 배가 되죠. 입문 모험가가 빠르게 개척 모험가로 오르기 위해선 그게 중요해요.


요정이 재잘거렸다.

관련성 있는 입문 모험들을 이어붙여 이야기를 만든다.

그리고 하나의 이야기가 길어지고 완성될수록 전혀 상관없는 내용의 모험들을 치를 때보다 더 빠르게 성장한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모험가가 모험의 이야기를 쌓아 위로 나아가는 존재임을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얘는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어쩐지 모험기가 빠르게 쌓이더라니. 원래 다들 그렇게 하고 있는 건가?”

- 음···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군요.


요정도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까지는 자세히 모르는 듯했다.

그때였다.


“모험가님. 저기 어떤 분들이 불러요.”


번화가의 한 길거리.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 중간에 어느 소년이 정도운을 불러 세웠다.


“나를?”

“네. 이쪽으로 오시래요.”


뭔가 싶어서 따라가니 햇빛조차 안 드는 으슥한 골목에 몇몇 사내들이 연초를 피우고 있었다. 골목까지 안내한 소년은 오자마자 눈치를 보더니 그들에게 사탕 하나를 받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날 부른 게 너희들인가?”

“형씨, 아까부터 이 근처 거리 돌아다녔지? 오며 가며 보니 돈주머니가 꽤 두둑한 것 같더라고?”


그런 건가.

정도운은 대충 분위기를 파악했다. 선두의 사내가 이죽거리며 다가왔다.


“그걸 불쌍한 우리에게도 적선 좀 해달라 이거지.”


그렇게 말하면서 양손을 포개고 으드득거린다.


‘도합 여섯 명. 전원 모험가로군.’


일견하기로 보이는 무기는 없다.

하지만 간단한 날붙이 정도는 모험가라면, 이 세계에 오면서 기본으로 지급되는 아공간 모험 배낭에서 언제든지 꺼낼 수 있다.

그게 모험가라는 존재니까.


‘무기를 안 꺼내는 걸 보니 죽일 셈은 아니군. 하긴 애꿎은 사람을 죽이면 치안관이 올 테니까.’


더불어 이들은 전원이 입문 계급. 수준도 높지 않다.

입문 모험가인 건 입문 모험이 배치된 길거리를 가로지르고 있으니까도 그렇지만, 손목으로 착용된 나침반 문양을 보면 안다.

정도운은 귀찮다는 듯 손을 털었다.


“지금 제가 좀 바빠요. 가던 길 가는 게 서로의 신상에도 좋을 겁니다.”

“돈도 많으신 분이 왜 이렇게 인정머리가 없을까? 우리가 어려운 얘기해? 좋은 거 좀 나눠 갖자고.”

“마지막 경고입니다. 덤비면 다칠 거예요.”

“크크큭. 얘들아 들었냐?”


주변에서 큼직한 웃음이 터진다.

어느새 덩치들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얘들아, 안전 불감증인 모험가분께 교육 좀 시켜드리자.”

“크흐, 좋죠.”


그 말과 함께 사내가 눈짓을 하자 양옆으로 두 덩치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퍼억!

정도운은 눈앞의 사내에게 파고들어 턱주가리를 손바닥으로 올려 쳤다.


“컥!”


사내의 고개가 위로 젖혀지는 순간, 정도운은 앞으로 파고든 동작을 연결해서 배후에서 그를 잡으려는 덩치의 안면을 뒤돌려차기로 날려버렸다.


“케헥.”


핏물이 흩날리며 덩치의 이빨이 우수수 날아간다.


“X발! 덮쳐!”


그즈음 모두가 덤벼들었고, 정도운은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덩치의 힘을 역이용해 메치기로 뒤늦게 달려드는 놈에게 던져주었다.


“끄익!”


덩치의 온몸을 떠안은 놈이 그대로 그 무게에 깔려 전투 불능이 된다.


“빌어먹을, 연장 꺼내!”


나머지 두 놈 중 하나가 눈치 빠르게 날붙이를 꺼내 들지만, 보자마자 정도운의 주먹이 재차 안면을 강타했다.

반대편에서 또 다른 놈이 주먹을 뻗어온다.

정도운은 앞선 놈을 가격한 동시에 물 흐르듯 회피했다.

회피와 동시에 타격.

퍽!

얼굴에서 코피가 폭발한 마지막 사내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훌훌 날아가 쓰레기더미에 파묻혔다.

어두운 골목길에는 쓰러져 끙끙거리는 여섯 사내의 앓는 소리만이 흘렀다.

그는 차가운 눈길로 놈들을 슥 훑어보았다.


‘결국 마지막까지 제대로 활력을 다루는 놈조차 없었군.’


저 멀리, 그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던 소년이 입을 쩍 벌린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정도운은 툭툭 털고 소년에게 경고한 뒤 골목을 빠져나왔다.



***



- 어라?


길거리를 나와보니 모험가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개인이나 파티 할 것 없이 무수한 자들이 바쁘게 뛰어다닌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정오 이후로 돌아다니는 모험가가 늘긴 했지만, 원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정도운이 인상을 굳히고 물었다.


“무슨 일이지?”

- 그, 글쎄요? 저도 잘······


그때였다.


“제길, 오늘까진 시간 있다며!”

“길드 회전엔 아무나 참가하나? 홍련당 놈들이 오늘 돌아오는 줄 난들 알았겠냐고!”

“아무튼 서둘러! 놈들이 오기 전에 최대한 모험을 돌아놔야 해!”


홍련당.

위로 정통파의 거대 길드와 연결돼 있는 하부 조직이지만, 이곳 남부 3구에서는 거리를 지배하는 조직이자 절대적인 패권 세력.


단순히 들리는 소문만으로도 범반급의 강력한 모험가를 다수 보유한 모험단이었다.


“······놈들이 돌아온다고?”


정도운은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 이쪽이에요!


서둘러 다음 루트로 예정된 거리에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모험가들로 붐벼서 줄을 설 엄두조차 나지 않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아니, 갑자기 이게 뭔···.’


허탈하지만 현실이다.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줄이, 아니 사람이 너무 많아. 만약 3구 모든 거리가 이렇다면 계획은 어그러졌다고 봐야 한다.’


아직 17장을 목전에 둔 상태.

문제는 중간에 홍련당이라는 놈들이 돌아와도 게임 오버다. 하필 그의 이동 영역은 극단적으로 축소되어 그들의 지배 구인 3구를 벗어날 수 없으니, 행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대로 갔을 때 맞닥뜨리는 건 필연이었다.

이를 악물었다.


‘생각해라, 정도운. 이제 어떡하지?’


서둘러야 하는데.

그때 입문 요정이 모험의 서에서 나와 빙그르르 어깨에 안착했다.


- 모험가님, 시간 내에 18장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방법이 있다고? 그게 뭐지?”

- 제가 알아본바 이곳 남부 3구에는 다른 입문 모험들보다 경험치가 압도적인 세 군데의 모험이 존재해요. 마침 지금까지 모험가님이 한 입문 모험들과도 이야기적인 연관성이 있고요. 원래라면 시기가 일러서 다소 난도가 과하게 점핑이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니까요.


다른 곳보다 압도적인 경험치를 가진 모험?


“어디야. 일단 안내해.”

- 네!



***



모험가들의 도시 크리오페아의 거리에는 구역마다 구훈(區訓), 혹은 교훈(敎訓)이라고 부르는 거리의 교시이자 별칭이 있었다.

교시의 문장은 그 구의 거리에 개념의 힘을 불어넣는다.


남부 3구.

정부로부터 하사된 교시 구호는, “놀이는 여럿이 어울려 즐긴다.”


그 문장에서 탄생된 모험은.


‘[놀이]의 입문 등급 모험.’


북쪽의 놀이, 승자 독식의 무작위 상자.

동쪽의 놀이, 미로 탐험과 사냥.

서쪽의 놀이, 동화 와전.


다른 입문 모험보다 압도적인 경험치를 주는 진짜배기 입문 모험. 그것이 [놀이]의 개념이 탄생시킨 세 가지 모험이었다.


‘삼대 명물 모험이라··· 그런 게 있었을 줄이야.’


- 모험가님은 몸을 쓰는 이야기를 잔뜩 쌓아오셨잖아요. 여기다 방점으로 [놀이]의 모험을 공략하시면 화룡점정으로 빠앙! 하고 충분한 이야기의 연관성이 만들어지죠. 그렇게 되면 여태껏 쌓은 내용과 이어져 모험기가 크게 증폭될 거예요.

“그 말은······.”

- 네, 만약 이번에도 최고 점수를 받으시면, 최소로 잡아도 17장의 반 이상은 단번에 넘길 거예요.


모험 한 방에 17장의 반.

확실히 압도적인 경험치를 주는 게 맞았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정도운은 요정을 따라 북적이는 광장 앞에 도착했다.

누가 툭 치고 지나간다.


“?”


후드를 깊게 눌러쓴 누군가가 인파 너머로 멀어졌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광장 안으로 많은 인파가 보였다.

저게 다 모험가라니. 고작 이틀 차지만 입문 모험이 모험가 수에 비해 품귀 현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봐도 놀라울 정도였다.


“여기가···.”

- 네, 삼대 명물 모험 중 하나인 북쪽의 놀이가 치러지는 장소입니다.


북쪽의 놀이.

그 이름, 승자 독식의 무작위 상자였다.


우웅, 우웅.

어느 정도 들어가자, 무언가 투명한 결계 같은 것이 더 이상 모험가들의 접근을 막았다.

거대한 결계의 입구는 따로 줄을 서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끼야아악!”


줄을 서려고 돌아서는 순간, 뾰족한 비명 소리가 울린다.


‘여자?’


광장의 결계 속에 사람이 있었다. 지금 모험이 진행 중인 공간이다.


아마도 모두 탈락하고 남은 최후의 생존자인 듯, 다른 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험에 탈락한 여성 모험가가 다리가 잘린 채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열심히 바닥을 기어 이동해 보지만, 두 다리가 없는지라 멀리 가지 못했다.

얼마 후.

푸화악.

나중 가서는 인파에 가려 정확히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다가와 여자 모험가를 무참히 살해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현실감 없는 인간의 육편이 허공을 날아다닌다.


‘죽은 거야? 도심 한복판에서 모험을 하다가?’


이 와중이지만, 도심 한복판에서 저런 끔찍한 쇼가 펼쳐지고 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역시 이곳의 일상은 그가 알던 것과는 다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을 뿐.

정도운은 일단 줄을 섰다.


‘어차피 내겐 선택지가 없다.’


옆에서 요정이 일러주었다.


- 방금 진행된 모험에서 사망자는 세 명이에요. 나머지는 무사히 탈출한 모양이에요.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 금방 일어난 모험의 현황 정도는 알아볼 수 있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줄이 성큼 줄어들고, 광장의 하얀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덩달아 앞에서 모험을 진행하고 있는 광장 내의 상황도 시야에 들어올 무렵이었다.


웅성웅성.


“이거 놔!”

“이런 좀도둑 같은 년, 어디서 새치기야? 여기 너만 기다리는 줄 알아?”


고등학생이나 되어 보이는 붉은 머리칼의 여자 모험가가 대열에서 질질 끌려 나온다. 여자는 끌려 나오면서도 악을 썼다.


“이익, 제발, 너희는 인정머리도 없어? 불쌍한 사람한테 한 번쯤 양보해줄 수 있는 거잖아!”


그 말에 모험가 무리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개소리도 제철이군. 네년이 어디 자리 맡겨놓았나? 안 그래도 기분 잡치는데 잘 됐다. 이리 나와.”

“아, 안 돼!”


아무래도 새치기를 당한 무리는 제대로 열받은 모양이었다. 한 명한테 자리를 맡기고는 네 명이서 그녀를 질질 끌고 넓은 공간으로 가기 시작했다.


정도운은 비교적 뒤편에서 그 모습이 훤히 보였다.


‘나처럼 잔여 시간이 촉박한 사람인가.’


썩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다. 그도 동일한 처지였으니까.


‘하긴 누굴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나도 내 앞가림 걱정이나 해야 하는······.’

“저, 저기!”


그런데 끌려가던 붉은 머리 여자와 타이밍 좋게 눈이 마주친다.

그녀가 이때다 싶어 사내들을 뿌리치고 정도운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제, 제발. 저도 같이 데려가 주세요. 파티, 파티를 이루면 제가 이곳 모험 깨는 데 도움을 드릴게요. 저 진짜 억울하다니까요! 제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니라고요!”

“으음···.”


정도운은 곤란한 얼굴로 시선을 둘 곳을 찾았다.


“이러지 말고 그냥 줄을 서시죠. 어차피 그렇게 오래 기다리진 않았어요.”

“아, 안 돼요. 시간이 없다니까요! 최소한 이번 대열에는 들어가야 시간이 맞는다고요···!”

“이년이 이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리 와!”

“아악! 이거 놔!”


악을 쓰더니, 다시 눈앞에서 질질 끌려간다.


“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끼어들면 뒤에 사람이 그만큼 한 명분 손해 보는 게 아닌가?

그건 명분 없는 위선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진작부터 뒷줄에 선 많은 이들이 그걸 용납해줄지부터 미지수다.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누군가를 돕기 위해선 명분이 필요했다.


그 순간, 여자의 머리채를 끌고 가던 사내가 돌연 허리춤에서 날붙이를 꺼내 들었다.


“···!”


일순 현장에서 그 속도에 반응한 것은 정도운뿐이었다.

터업.

정도운은 반사적으로 그 무기가 여자의 목을 노리고 휘둘러지는 것을 손을 내밀어 원천 봉쇄했다.


‘아무리 그래도 죽이는 건 아니지.’


사내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눈은 여전히 살기로 번들거렸다.


“···뭐야 네놈?”

“조금 진정하시죠.”

“아, 그래?”

“네, 아무래도 조금 흥분하신···.”


아까의 골목길과는 상황이 다르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상황이고, 정도운은 아무리 막 나가는 자라도 설마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날붙이를 휘두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 도시의 모험가들이 대체로 상상 이상으로 뒤가 없는 종자들임을 잠시 망각했다.

이곳은 약육강식(弱肉强食)과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도시.

활동하는 모험가들은 대부분 고향이 멸망당하고, 이곳에 와서도 매일같이 모험을 공략하며 모험의 서에 쫓기는 입장이다.

그야말로 눈 돌아가고 수틀리면 어디서든 칼부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과도 상통했다.


팟!


사내가 활력을 실어 억지로 그의 제지를 뿌리치고 무기를 휘둘렀다. 힘의 격발점을 막고 있던 정도운이 앞뒤 모험가를 뒤로 밀침과 동시에 허리를 숙여 피했다. 그 사이로 날붙이가 원을 그리며 허공을 가른다.

정도운의 머리카락이 몇 가닥 흩날렸다.


그의 앞뒤로 줄을 서고 있던 모험가들이 놀라며 물러섰고, 그 공간 사이에서 정도운은 붉은 머리 여자의 정수리를 잡고 내렸다.


“앗.”


사내가 재차 무기를 휘두르려는 것이 보인다.

직후 정도운의 주먹이 그의 가슴에 꽂혔다.


퍼억!


“커헉···!”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몸이 일순 붕 뜨더니 저 멀리 나동그라진다. 그리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었다. 의식을 잃은 것이다.


“어, 어······.”

“무, 무슨···.”


사내의 동료들도 그가 다짜고짜 대열 앞에서 무기를 휘두를 줄은 몰랐는지, 이어진 상황에 당황한 눈치였다. 정도운은 더 이상 싸울 의사가 없음을 양손을 들어 표시했다.


“방금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요. 이건 정당방위입니다.”


그리곤 붉은 머리 여자를 보며 정도운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침 잘됐네요. 그쪽도 줄에 들어오시려면 들어오시죠. 어차피 저분도 한동안 못 일어나실 거 같은데 저분 대신 자리가 났네요.”

“어, 어어.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이야, 훌륭하시네요? 인상 깊게 봤습니다.”


돌아보니, 웃는 얼굴의 신관복을 입은 남성이 그의 어깨를 짚고 있었다.


‘언제···?’


전혀 느끼지 못했다.

신관은 정도운을 흥미롭게 보더니 이윽고 인파를 헤치고 지나갔다.


“자, 여러분 여러분. 진정하세요.”


그 남자는, 광장에 구름처럼 몰린 모험가들을 마치 가벼운 장난감처럼 밀치며 나아가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정도운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겉으로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밀집된 모험가들 속에서 저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개척 계급 이상의 강자···!’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존재감이 마치 천적을 앞둔 것처럼 그를 옭아맨다.


‘강하다. 지금까지 본 누구보다도··· 같은 개척 모험가인데도 이 정도로 차이가 나는 건가?’


두근.

방금 저 남자가 어깨를 짚은 순간, 진정으로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심장이 요동친다.

그걸 다스리기 위해 몸 안의 기운을 순환시켰다. 그러자 별안간 모험의 서가 들썩거렸다.


- 모, 모험가님, 그거예요!

“···뭐?”

- 지금 입문 영역을 사용하신 거요. 그게 원인이에요. 모험가님의 능력이 당신의 잔여 시간을 소진시키고 있었어요.

“···!”


무공 수련이 원인이라니.

정도운이 눈을 부릅뜬 그 순간, 결계의 입구에서 누군가가 픽 하고 쓰러졌다.


“어이쿠, 많이 피곤하신가 보네. 저희 신전에서 몸을 푹 쉬셔야겠습니다.”


신관은 쓰러지는 모험가를 부축하듯 받아주었다.

어느덧 수십 명이 몰린 줄이 쥐 죽은 듯 조용해져 있었다. 순간이지만, 눈앞에서 목격한 모험가들은 쓰러진 남자가 우연히 정신을 잃은 게 아님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리고 정도운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그의 앞에서 쓰러진 남자는···


‘주, 죽었잖아.’


오싹!

그 짧은 사이에, 강인한 육체를 지닌 모험가가 죽었다.

사람들을 물려 입구 앞에 공간을 만든 가운데, 신관복의 남성이 뒤따라온 부하 사제에게 짐짓 의식을 잃은 모험가를 맡기며 말했다.


“자~ 형제자매 여러분. 현 시간부로, 이 앞으로는 저희 지고지순한 문물교의 이름으로 통제되어 더 이상 지나갈 수 없으세요. 부디 이해되었길 바라겠습니다.”


정도운의 구명줄이 막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평범한 모험가의 모험계 공략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 어둠이 덮친 요새 (2) 24.05.19 3 1 20쪽
8 어둠이 덮친 요새 (1) 24.05.15 10 1 21쪽
7 영외 마을 24.05.13 6 1 15쪽
6 성장 24.05.07 13 1 20쪽
5 늑대인간 술래잡기 (2) 24.05.04 12 1 20쪽
4 늑대인간 술래잡기 (1) 24.05.01 16 1 21쪽
» 남부 3구의 모험 24.04.16 34 1 21쪽
2 입문 모험가 정도운 24.04.04 50 1 23쪽
1 훈련소 24.04.03 79 1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