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날 돕나?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았을 테니까.
사람이 변해도 적당히 변해야지 적응할 텐데 너무 파격적으로 변하니까 놀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내가 봐도 이 몸은 군인이라기보다는 고고한 학자풍이었으니까.
광복군에 들어간 것도 본인의 의사가 아닌 독립운동 하시는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거였으니까.
“각하께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전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각하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라면 지금 시국이 얼마나 엉망이고 심각하다는 방증일 겁니다. 또한, 저를 믿고 각하의 생각을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자네 또한 나를 믿지 않나?”
박지호 대령은 각하의 말에 괜히 찔렸다.
솔직히 각하를 믿기보다는 공정하고 청렴결백하신 분이라 약간의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순간 이 동아줄을 무조건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머릿속을 지나쳐갔다.
CIA 한국 책임자하고 차를 마실 정도의 친분을 가지고 있다면 미국과도 가깝다는 것이고 미국의 뒷배가 있다는 것은 향후 각하의 행보에 큰 힘이 된다는 말과 같았다.
또한, 각하라면 믿고 인생을 걸고 도박을 해도 될 인물이었다.
“맞습니다. 각하는 제가 군부 내에서 가장 존경하고 제일 믿을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럼 서울로 올라올 거지?”
“각하 덕분에 오랜만에 마누라에게 큰소리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왜?”
“4년 전만 해도 부대 관사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냈었는데 자식들 교육 문제로 마누라하고 자식들은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마누라가 항상 저에게 융통성도 없고 꽉 막힌 사람이라며 당신도 뇌물을 먹이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후방으로 빠지라고 잔소리를 그동안 끊임없이 했었습니다.
이제야 마누라 소원을 들어주게 되었습니다.”
“서울 헌병대로 보내줄 테니 실컷 큰소리치게.”
“네? 헌병대로 말입니까?”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닙니다. 너무 좋아서 그럽니다. 감사합니다.”
헌병대가 힘 있고 꿀 보직이기는 하지.
“내가 왜 자네를 헌병대로 보내는지 알아?”
“군내의 부조리를 척결하라는 것이 아닙니까?”
내 의도를 바로 아네. 진짜 의도는 1년 후에 있는데. 눈치도 있고 마음에 들었다.
“알면 열심히 해. 문제가 생기면 내가 다 막아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박지호 대령이 가자 말 나온 김에 빨리 처리할 생각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육군 참모총장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던 송유찬이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놀란 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가 내 사무실에 찾아오고 웬일인가?”
“난 오면 안 되나?”
“아니지. 난 언제나 환영일세. 앉게.”
둘이 소파에 앉았다.
“무슨 일이 있나?”
“부탁 좀 하려고 하네.”
송유찬은 육군의 최고 지휘자인 참모총장이며 중장이고 난 소장이지만 영어 군사학교 동기라 서로 말을 편하게 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자네가 처음으로 내 사무실을 찾아오지 않나? 거기다 부탁도 하겠다니.”
“해는 동쪽에서 떴다네.”
“이 사람아! 누가 그걸 몰라서 묻나?”
“부탁 들어줄 건가?”
“말해보게. 자네 부탁이라면 웬만한 건 다 들어주겠네.”
“고맙네. 내가 예전에 데리고 있던 부하가 있는데 전방에서만 계속 돌고 있어 이번에 서울로 데려오려고 하네.”
“그 정도면 자네 힘으로도 가능하지 않나?”
가능은 하지. 하지만 내가 불렀다고 기록되는 것보다 참모총장이 불렀다고 기록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다.
“나보다는 참모총장의 힘이 더 세지 않나?”
“알겠네. 그 정도 부탁이야 아무것도 아니네.”
“고맙네. 그리고 또 하나 있는데.”
“말해보게.”
내가 쿠데타를 하려고 해도 현재 보직이 육군본부 정보 참모장이라 동원할 병력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내 계획은 중장으로 승진하여 대한민국 육군에서 제일 막강한 1군 사령관이 될 생각이었다.
그럼 병력 동원도 쉽고 1군을 막을 군대도 사실상 없기에 손쉽게 쿠데타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쿠데타를 할지 그동안 많이 고민했었다.
박종회가 61년 5월 16일에 쿠데타를 일으키니 그전에 할까도 생각했었지만, 정치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역사의 준엄한 평가와 심판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내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더라도 되도록 역사의 오점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쿠데타를 할 수밖에 없어 오점이 남겠지만 최소한의 오점만 남기고 역사에 길이 찬양되고 기록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래서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이지만 내가 직접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보다는 박종회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내가 쿠데타를 진압할 생각이었다.
즉 쿠데타 진압을 명분으로 삼은 또 다른 쿠데타지만 역사에는 쿠데타가 아닌 진압 후 정권 탈취로 기록되게 할 생각이었다.
정부야 그대로 무너질 테니 상부의 명령 없이 내 마음대로 병력을 동원한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미국은 그동안 친하게 지내서 책임에서 벗어나게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미국도 무능력한 장문 정권에 실망한 상태에서 친미 인사인 내가 정권을 잡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다.
혹시 모르니 쿠데타 진압 병력 출동 전에 미국에 통보는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진압 후 사회 혼란을 이유를 들어 바로 계엄을 선포하여 계엄 사령관이 된 후 비상국가위원회를 설치하여 군정을 3년 동안 실시하고 5년 연임제로 헌법을 고쳐 출마하여 대통령이 될 계획이었다.
집권 초기부터 빡세게 하면 13년이면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는데 충분할 것 같았다.
그렇기에 박종회처럼 유신헌법을 만들어 정권을 연장하여 비판받을 생각은 없었다.
내가 하지 못한 부분이나 부족한 부분은 능력 있는 후계자를 키워 후계자에서 완성되게 하면 된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듯이 내가 직접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서 역사의 준엄한 평가에서 조금은 벗어났으면 한다.
“나 진급 좀 했으면 하는데.”
“진급 욕심도 있었어?”
“원래는 없었지. 동기들은 다 중장인데 나만 소장이니 어디 가서 영어 군사학교 출신이라고 말하기가 창피해서.”
“그렇기는 하겠네. 사실 자네 진급이 많이 늦기는 했네. 미안하네. 동기인데 진작에 신경 썼어야 했는데.”
“아니네. 원래 난 진급에 별 관심이 없었으니까.”
“알겠네. 내가 책임지고 힘껏 힘 써보겠네.”
“고맙네.”
“고맙기는. 같은 동기 아닌가? 근데 진급하면 보직은 원하는 곳이 있나?”
먼저 물어주니 고맙네. 자꾸 부탁만 하는 것 같아서 부담이었는데.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에서만 돌았더니 이제는 야전에 나가고 싶네. 1군 사령관이 좋을 것 같은데 가능하겠나?”
“1군 사령관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이번 5월에 1군 사령관이 교체되어 이하림을 점찍었는데 대신 자네가 하면 되겠네.
5월이면 시간이 부족하니 먼저 승진부터 빨리해야겠어.”
1군 사령관이 5월에 교체가 되는 거였구나. 시기상으로도 딱 좋네.
이하림은 박종회에게 체포되고 미국으로 추방되니 차라리 1군 사령관이 되지 않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하늘이 날 돕나? 왠지 나에게 운이 따르는 것 같았다.
송유찬은 419 혁명이 일어나고 계엄 사령관이 되지만 5월 말에 젊은 장교들의 정군 운동으로 인해 사임하고 예편하게 된다.
다행히도 그전에 마무리가 될 것 같았다.
송유찬 뒤로 장두영이 참모총장이 되지만 내 입장에서는 장두영도 영어 군사학교 동기지만 나하고는 그다지 친한 편이 아니고 여러모로 송유찬이 더 나았다.
“부탁함세.”
“걱정하지 마시게. 내가 한다면 하는 놈이고 밀어붙이는 데는 날 따라올 자가 없다네.”
그러고 보면 송유찬도 참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제주 4.3 사건 때를 보면 죄 없는 민간인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자로서 그의 성향을 보면 419 계엄령 때 민간인을 향해 발포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라고 지시를 내릴 것 같았는데 실제 한 행동은 전혀 의외였다.
그러고 보면 장두영도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박종회가 쿠데타를 일으킨 사실을 알고 주모자들을 체포하라고 병력을 보냈으면서 한강 다리에서의 대응은 사실상 쿠데타 병력을 막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았다.
그전에도 박종회의 쿠데타 기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다 덮었고.
덮을 거면 아예 끝까지 방조하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왜 체포하라고 병력을 보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내 주변에는 왜 미스터리한 인물들이 많지? 미래에는 유아영, 위호문이 있었는데 과게에는 송유찬, 장두영이 있었다.
볼 일 다 봤으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를 믿고 가겠네.”
“왜 벌써 가게? 차도 안 마셨는데 차라도 한잔하고 가지.”
“다음에 함세.”
“자주 오게.”
“알겠네.”
***
찻집 안으로 들어가자 오늘도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종로라 임대로도 비쌀 텐데 이래서 먹고 살 수 있으려나? 내가 더 걱정되었다.
주인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선생님! 또 오셨네요?”
“네. 또 왔습니다. 손님이 너무 없네요. 이래서 장사하겠어요?”
“호호호. 저 걱정해주시는 거예요? 황송해서 어떡하나? 낮이라서 그래요. 오후 늦게부터 손님들이 조금씩 와서 그럭저럭 돼요.
편한 곳에 앉으세요.”
“네.”
저번에 앉았던 창가 자리에 앉았다.
김이 나는 보리차를 내려놓고 앞에 앉는 주인이었다.
“오늘도 하우스만을 만나러 온 거예요?”
“아닙니다. 오늘은 미국 대사관 쪽 사람을 만납니다.”
“그렇구나. 혹시 그 사람이 실버인가요?”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