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돼지글씨 님의 서재입니다.

로판의 개복치 악역 영애가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판타지

닉네임뭐지
작품등록일 :
2020.09.21 21:45
최근연재일 :
2020.10.04 16:22
연재수 :
14 회
조회수 :
2,473
추천수 :
59
글자수 :
85,924

작성
20.09.22 10:00
조회
302
추천
3
글자
13쪽

[Prologue] [모바일게임의 악역]

DUMMY

[Prologue]

[모바일게임의 악역]


오, 마이 갓.

신이시여, 이러시면 안 돼요.


그것이 내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고 제일 먼저 꺼낸 생각이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내가 중얼거린 말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 그럴 만하지.

좌중에 있는 사람들은 아버지와 함께 귀가한 아이를 보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에게 매달려, 최근 수도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사탕을 사달라고 애교를 떨어보려 했던 나도 저들과 마찬가지로 붙박이마냥 서 있었다.

내가 저들처럼 넋이 나간 이유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지만.


꿈인가?

그래, 꿈인 게 분명해.

그냥 꿈이라고 해줘.


이럴 리 없다.

눈을 감고 10초를 셌다.

다시 눈을 뜨고 나면 내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모두 꿈이 되어 사라져 있기를 바라며.

십, 구, 팔, 칠, 육, 오, 사─.


"─리아야?"


셋, 둘, 하나.

느닷없이 끼어든 소리에 세는 법을 잘못했다.

10초가 이리도 짧았던가.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뜬 나는 천정에 달린 조명에 눈이 부셔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던 아버지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리아야? 어디 아프니?"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차라리 이대로 콱 정신을 잃고 쓰러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사람이란 원래 강인한 법이다.

사람이 로맨스판타지 소설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정신을 잃고 픽픽 쓰러진다면 몸에 이상이 있는 게 분명하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병원에 데리고 가는 걸 추천한다.

만약 그 사람이 귀족이라면, 귀족 실격이다.

어렸을 적부터 혹독한 교육을 받고 자란 귀족이 그렇게 허약해서야 모범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아, 우리 어머니는 빼고.

여하튼 카시우스제국에서 명망 높은 백작가에 태어나,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나 코델리아 그레이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리아야? 코델리아?"


그래, 코델리아 그레이스.

그게 이 세계에서 내 이름이다.


"괜찮아요, 아버지."

"아, 아버지? 아빠가 아니라?"


코델리아 그레이스는 카시우스제국에서 유서 깊은 백작가의 장녀이다.

다만 코델리아는 그레이스 백작가의 앞에 따라붙는 '유서 깊다'라는 수식어와는 굉장히 거리가 멀었다.

부모님으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란 그녀는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돈다고 굳건히 믿던 캐릭터였다.

게다가 작위는 아버지가 받았을 뿐인데, 제가 카시우스제국의 건국에 일조한 귀족이라도 된 양, 자존심이 드높기도 했지.

어릴 때라면 귀엽게 넘어갔을지 몰라도, 끝끝내 치기 어린 시절의 망집을 포기하지 못했던 망나니.

그게 바로 코델리아 그레이스였다.


"지금이라도 떠올라서 망정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아버지는 몰라도 되는 게 있어요."


나는 전생을 자각하기 전에 그동안 부렸던 패악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인형놀이를 하겠다며 새로 들어온 하녀의 머리칼을 가위로 자르지를 않나.

하녀가 부모님에게 생일선물로 받았다는 머리핀을 너 따위한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빼앗지를 않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영애가 티파티에서 자랑하던 강아지를 달라 그러지 않나.

그러면서도 백작가의 이름으로 빼앗은 강아지를 돌보지 않고 그대로 방생해버리지를 않나.


···나, 진짜 못됐네.


최근에는 더했다.

내 약혼자 렌지로와 친해 보이던 영애를 남들이 보는 앞에서 때리고 말았다.

상대 영애의 가문이 힘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데뷔탕트에도 데뷔하지 못하고 사교계에서 매장되고 말았으리라.

그리고 나는 만인이 보는 앞에서 패악을 부린 나머지, 약혼자로부터 파혼을 선고받았다.


내가 눈치는 또 더럽게 없어 가지고···.


어머, 예쁜 말, 예쁜 말.

나는 지금 코델리아 그레이스다.

비록 코델리아 그레이스도 말투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나는 만인이 보는 앞에서 파혼을 요구 당했음에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렌지로의 약혼자 행세를 계속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이라도 머리를 박고 숨어버리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나를 얼마나 비웃어댔을까.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니지.


평소의 행실이나 언행이야 이제부터라도 개과천선하면 될 일이다.

아직 데뷔탕트에 나서지 않은 영애가 저지른 치기 어린 날의 허물이라 넘겨버리면 될 뿐이니.

비록 지울 수 없는 흠이 꼬리표처럼 따라붙겠지만.

약혼자에게 그런 식으로 파혼을 당했으니 다음 약혼을 기약하기도 어렵겠고.

문제는 그게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아버지가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아이에게 있었다.


"집 사람들 모두에게 소개하마."


그리고 이 세계에 있었다.

알맹이가 비어버린 유충처럼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있는 아이를 보고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부터 이 집에서 살아가게 될 아이다. 당신도, 리아도 그리고 집 사람들도 이 아이를 잘 돌봐줬으면 좋겠어."


먹물을 빨아들인 것처럼 어두우면서도, 캄캄한 밤에도 굴하지 않고 타오르는 듯한 머리칼.

성화의 여신 헤스티아의 머리칼을 물려받은 아이는 아버지를 똑 닮은 황색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아버지의 손에 붙들려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더군다나 길거리에서 생활한 것처럼 꾀죄죄한 옷을 입고 있기까지 했으니.


"이 아이의 이름은 바이론─."


아버지는 주변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바이론 그레이스다."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아버지가 난데없이 백작가에 데려온 아이에게 귀족의 성을 붙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의미에서 숨을 삼켰다.


"바이론···, 그레이스."


바이론 그레이스.

나는 아버지가 그를 저택으로 데려왔을 때부터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불현듯 떠오른 전생의 기억이 알려주었다.

내친 김에 그에 대한 내력까지도.


"그래, 리아야. 오늘부터 네 남동생이 될 아이란다."

"······."


아버지가 하는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바이론 그레이스는 불우한 가정사를 안고 있던 캐릭터였다.

나의 아버지, 현 그레이스 백작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무렵, 작은 아버지는 저택에서 일을 하던 하녀와 눈이 맞았다.

흔하디 흔한 로맨스소설에서나 나오는 신분을 초월한 사랑.

이 이야기가 필시 단순 로맨스소설이었다면 두 사람은 여러 난관을 극복한 끝에 사랑의 결실을 맺었겠지.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아니, 정정한다.

설정은 녹록치 않았다.

두 사람의 사랑을 인정받지 못한 작은 아버지는 하녀와 사랑의 도피를 행하고 만다.

어찌 보면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작은 아버지의 감동 러브 스토리!

실상은 가진 거 하나 없이 궁핍한 삶을 살게 된 작은 아버지의 인생에 불과했다.

사이다 없이 고구마를 잔뜩 집어삼킨 이야기가 따로 없었다.

신분상승을 노리고 작은 아버지에게 접근했다 덜컥 애를 임신해버린 하녀는 틈만 나면 자신의 삶을 한탄해댔다.

평민의 삶을 경험해본 적이 없던 작은 아버지가 벌어오는 급료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며, 그나마 하녀가 벌어오는 돈으로도 입에 풀칠하고 살기 어려웠다.

결국 하녀는 돈 많은 귀족남자를 꾀어내서 작은 아버지와 바이론을 버리고 떠났다.

할아버지를 뵐 낯이 없다는 이유로 홀로 바이론을 키우던 작은 아버지는 끝내 과로사로 쓰러지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바이론을 부탁한다는 편지를 맡기고 이 세상을 떠난다.

그가 이 저택에 들어왔다는 의미는 내가 기억하는 대로 바이론은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아버지를 여의었다는 뜻이다.


"잠깐만요, 당신.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잖아요. 어떻게···."

"···미안해. 나도 오늘 편지를 받고 달려 나간 거라···."

"편지요? 누구한테서 온···."


내가 바이론 그레이스의 과거를 이리도 자세히 알고 있는 이유는 명확했다.

그는 내가 전생에 즐겨했던 모바일게임 '그대와 세 가지 맹약'에 등장하는 공략 캐릭터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래, 내가 전생한 세계는 모바일게임 '그대와 세 가지 맹약'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러니 게임 속 바이론과 판박이인 그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안타깝게도 좋아했던 캐릭터를 직접 만난 감동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바이론 루트를 떠올리면 더더욱.


"어떻게 이런 일이···."

"거봐요! 지금 리아도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잖아요!"

"기다려봐, 당신! 나는 광명의 여신 루미니아에게 맹세코 절대로 바람을 핀 적이···!"

"맹세를 하려면 광명의 여신님이 아니라 가문의 수호신이자 성화의 여신인 헤스티아님에게 해야죠!"


바이론의 과거를 알다시피, 그는 가정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고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레이스 백작가에서는 백작부인과 그의 누이 되는 사람이 그를 아버지의 혼외자식이라 생각하기까지 했으니.

그가 얼마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을지 알 수 있는 대목이리라.

바이론 그레이스가 사랑을 믿지 않고, 여성을 증오하는 남자가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사람이 바로 여주인공 앨리시아였다.

주변의 모진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매사를 당차고 긍정적으로 여기던 그녀는 얼어붙은 그의 마음을 녹여버린다.


'사랑해. 그만큼 무서워.'


바이론이 점점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가면서 자신의 트라우마와 갈등하는 모습은 바이론 루트의 백미라 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는 바이론이 앨리시아의 마지막 맹약을 완수하고, 두 사람이 서로에게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하는 명장면까지.

잠을 자지도 못하고 밤을 지새우게 만들던 이야기였다.

결말은 또 어땠던가.

그래, 결말은 또 어떻고.


"왜, 하필이면···."


이런 유의 게임에서는 여주인공과 공략 캐릭터의 사랑을 방해하는 악역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 게임에서는 악역이 바로 바이론의 누이였다.

귀족에 대한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그녀는 평민태생인 앨리시아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댔다.

그렇게 스토리 진행 내내 고구마를 먹였던 그녀는 거의 모든 엔딩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바이론 엔딩에서도 그랬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물론, 유일하게 그녀가 죽지 않는 엔딩이 있기도 했다.

차대 그레이스 백작이 된 바이론은 어렸을 적 자신을 괴롭혀댔던 누이를 변방의 귀족에게 시집을 보내버린다.

그냥 귀족에게 보내면 사이다가 아니지.

살은 뒤룩뒤룩 찌고, 머리는 벗겨질 대로 벗겨진 웬 노친네에게 몇 번째인지도 모를 첩실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그냥 죽거나, 노친네의 첩실로 살거나.

그녀에게는 어느 쪽이든 좋지 않은 엔딩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게 나란 말이야···."


문제는 바이론의 누이 되는 사람이 바로 나 코델리아 그레이스라는 것.

거의 모든 엔딩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캐릭터가 바로 나였다.

아무리 눈을 씻고 쳐다봐도, 눈앞에서 불행한 기운을 팍팍 풍기고 있는 그는 바이론 그레이스가 틀림없었다.


오, 마이 갓.

신이시여, 이러시면 안 돼요.


음악이 절실하다.

헤드폰으로 귀를 틀어막고 안정을 취하고 싶다.

이 세상에 헤드폰이 없다는 사실이 어찌나 슬픈지 모르겠다.

슬퍼서 눈물이 다 나오네.


"봐요! 지금 리아가 울고 있잖아요!"

"리, 리아야!? 무슨 일이니? 아빠가 잘못했으니 제발 울지 마렴!"


전생 전에도 살기 참 팍팍했다.

넝쿨째 굴러온 고구마 같던 인생.

그런데 전생한 세계에서도 고구마 한 트럭처럼 팍팍한 세상이라니.


"···한 번, 죽어볼까?"

"리, 리아야!?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니!"

"그래, 얘! 네가 죽기는 왜 죽어! 죽을 사람은 네가 아니라 이 사람이지!"


한 번 전생했는데 두 번을 못할까.

게다가 이 세상에는 신도 있는 마당이니.


···미쳤어.

죽기는 뭘 죽어.


죽을 용기도 없다.

결국 나는 인정해야 했다.

내가 코델리아 그레이스라는 걸.

모바일게임의 악역이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로판의 개복치 악역 영애가 되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4 [Episode. 002] [꽃을 받을 자격(6)] +2 20.10.04 178 5 14쪽
13 [Episode. 002] [꽃을 받을 자격(5)] +2 20.10.03 134 4 14쪽
12 [Episode. 002] [꽃을 받을 자격(4)] +2 20.10.01 128 4 15쪽
11 [Episode. 002] [꽃을 받을 자격(3)] +3 20.09.30 170 5 12쪽
10 [Episode. 002] [꽃을 받을 자격(2)] +3 20.09.29 115 4 13쪽
9 [Episode. 002] [꽃을 받을 자격] +2 20.09.28 154 4 15쪽
8 [Episode. 001] [식사를 합시다(7)] 20.09.27 126 4 12쪽
7 [Episode. 001] [식사를 합시다(6)] 20.09.26 161 4 14쪽
6 [Episode. 001] [식사를 합시다(5)] 20.09.25 165 4 13쪽
5 [Episode. 001] [식사를 합시다(4)] +2 20.09.24 210 5 13쪽
4 [Episode. 001] [식사를 합시다(3)] +2 20.09.23 236 5 13쪽
3 [Episode. 001] [식사를 합시다(2)] 20.09.22 156 3 14쪽
2 [Episode. 001] [식사를 합시다] 20.09.22 238 5 14쪽
» [Prologue] [모바일게임의 악역] 20.09.22 303 3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