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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님의 서재입니다.

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니알아서.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4
최근연재일 :
2021.06.22 12:00
연재수 :
5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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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22,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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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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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호질 4 - 가슴에 별을 품는다는 것(1)

DUMMY

0.


옛날이야기.


누구에게나 가장 오랜 기억이 있다.


기억에도 없을 유년기.


지성도 없고, 경험도 없고.

아무것도 모른 채 스스로 서지도 못하는 나약한 육체에 갇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그저 볼품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였던 우리들 모두에게도 세상에 새긴 첫 발자취와도 같은 기억이 있다.


어떤 의미도 없이 태어나 세상에 던져져 지성 없이 세상을 네 발로 기어 다니던 짐승과 다름없던 우리들은.

자신 내면의 야수와 만나, 승리한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이 대지에 두 발로 서게 된 후.

운이 좋은 누구에겐 추억이고, 운이 없는 누구에겐 고통일 최초의 경험과 마주하게 된다.


그렇기에 나, 언샤는 자신이 제법 운이 좋은 편인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자신의 첫 기억은 고통이 아닌 기쁨이었고, 누구에게나 자랑스레 말할 수 있는 추억담이었으니.



"······저 별들을 봐. 우리들의 선조가 건너온 곳, 우리들의 진정한 고향. 끝없이 흐르는 은하수와, 태양 길을 따라 흐르는 황도(黃道)를 따라 이어져있는 저 열두 개의 별자리들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보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라고 하는 말이 있다.


외면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고, 그 본질을 보라는 교훈적인 말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제서야 네 살 정도였을까.

아직 어렸었던 나는 열 살 터울 정도인 형이 동생인 나에게 말해주는 현학적인 말의 본질을 이해하기엔 너무나도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그 당시의 나는 쏟아지는 별빛의 아름다움을, 끝도 없이 드넓은 우주의 광활함을 이해하기엔 너무나도 어렸고.

그 행동 방식 역시 인간보단 아직 짐승에 가까운 시기였다.


그런지라, 하늘을 올려다 별을 보라는 말보단 당장 자신과 형이 누워 있는 황궁 주변 언덕의 따스한 풀밭과, 주변의 공간을 가득 채운 듯 끝도 없이 울려 퍼지는 귀뚜라미 소리와.


아주 크고도 따뜻한 형의 손길, 그리고 한참 동안 내가 입에 물고 있었기에 침범벅이 된 형의 길고 푹신푹신한 꼬리에 더 깊게 관심이 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당시 형이 해준 뜻깊은 말은, 말 그대로 소 귀에 경 읽기나 다름없었지만.


그럼에도 이십 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내가 인생의 첫 추억으로서 형이 들려준 이야기와, 하늘에서 별이 쏟아져 세상을 뒤덮을 것만 같았던 그날 밤을 기억하고 있다는 건.


그건 그만큼이나 나와 형이 함께했던 시간이 소중했었다는 뜻일 거라고.


적어도 나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언샤, 내 꼬리는 장난감 실타래가 아니니까 물어뜯는 건 그만두고. 이젠 저 하늘의 별들을 봐주지 않겠니. 하늘에 박힌 저 별들은 언뜻 무질서해 보이지만, 별들의 나열에는 하나하나 깊은 의미가 있단다. 사실 저 별들의 정체는 저 머나먼 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수많은 태양, 즉 단순한 항성들의 나열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들은 저 우주가 이뤄낸 신비로운 우연에 이름을 붙였고, 그걸 '별자리'라고 부르고 있거든."


아직 글자도 읽을 줄 모르는 어린 동생에게 그런 어려운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설명하는 형은 참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지만.


그래도 그런 형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인간들 중 참으로 드물게도 선천적인 선함, 선성(善性)을 갖고 있는 사람이란 건 확실했고.


그래서 어린 나는 어려운 이야기만 계속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를 사랑해 주며 아주 착하고 친절한 형을 좋아했다.


아니면, 형이 해주는 말보다는 그냥 단순히 아름다운 주홍빛 털에 검은 줄무늬가 가득해 꼭 비단과도 같던 형의 꼬리를 좋아했거나.


형은 동생인 내가 자신의 꼬리를 침범벅이 만든 데에 이어 거의 털 뭉치 장난감처럼 손톱과 어금니로 계속 긁어 넝마처럼 만들어버리곤 했음에도.

딱히 나에게 화를 내지도, 나무라지도 않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우리 인간들은 그런 별자리들 중에서도 태양이 지나가는 길, 황도에 존재하는 12개의 별자리들을 아주 중요시 여기는데, 그건 저 열두 개의 별자리들이 신들이 창조한 우리 인간들의 형상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해."


형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에게 저 무질서해 보이는 은하수 속 별들 사이에서 가장 빛나는 별들을 찾아.

그 별들을 중심으로 어떻게 별들의 모양을 잇고, 어떻게 저 밤하늘에 수많은 동물들의 형상이 숨어 있게 됐는지를 설명해 줬다.


"먼저, 우리가 있는 대륙은 이 행성의 북반구니까. 다른 별자리를 찾기 위해선 먼저 북극성 혹은 '셰샤'라고 불리는 저 가장 빛나는 별을 찾아야 해. 보여? 수십 개의 별이 한 방향에 모여 있어서, 마치 한 개의 거대한 별처럼 보이는 저게 바로 '셰샤'야. 옛날엔 원숭이 자리의 '루카'라는 알파성이 북극성이었는데,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 우리 눈에 보이는 별들의 위치가 바뀌었고, 그래서 지금은 저 '셰샤'라는 별이 북극성이 되었다고 해."


이윽고 형은, 북극성 주변의 용자리에 이어, 가장 첫 번째 별자리인 원숭이 자리와 두 번째인 호랑이 자리 등 태양길에 있는 열두 개의 별자리를 찾는 법을 알려주고 나선.

그 별자리의 알파성과 밤하늘에 숨어있는 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짚어줬다.


알파성이란 한 별자리에서 가장 빛나는 별로.

마치 성신과 같이 으뜸인 별이라 했다.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여러 별자리를 짚어주는 형은.

적어도 나에겐 저 수많은 별들의 빛조차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스스로 더 찬란히 빛나는 태양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가 계속해서 나에게 가르쳐주려 하는.

이 행성의 신화도, 위대한 신들의 이야기도.

무의미할 정도로.


"······그러고는 우주에서 온 열 두명의 나선성신들은 그들이 가진 12가지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창조주인 신의 육체와 창조물인 짐승들에게서 각각 그 생명의 본질인 정수를 뽑아 한데 뭉쳐 빚었고. 그 결과 태어난 게 바로 우리 12 인간종(ζῳδιακός κύκλος)이야. 신이자, 동시에 짐승. 짐승이자, 동시에 신. 어느 쪽도 아닌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이 세상에 창조된 거야."


형은 그렇게 별자리에 이어서.

우주의 천신과 스스로의 존재를 달리했다는 나선성신들이

왜 이곳 지구에 찾아오게 되었는지.

이 지구가 어떻게 나선성신에 의해 11일에 걸쳐 만들어졌는지.

창조의 마지막 12번째 날 어떻게 인간들이 만들어졌는지도 설명해 주었고.


"아, 그 얘기는 나도 알아. 파르다 누나가 얘기해 준 적 있는걸. 우리들은 열두 종족 중 하나인 아슬란족이고, 우리 말고도 인간은 열한 종류나 더 있다고. 궁의 관리들 중에도 많잖아. 다른 종족인 사람들."


나는 그러한 허무맹랑한 창조 신화보다는 사람들 얘기에 더 흥미가 돋았기에, 거기에만 열심히 대답하곤 했다.


"그래. 맞아. 아슬란족. 우리들은 열두 덕목 중 두 번째로 위대한 용기의 가치를 널리 알린, 용맹한 호랑이신 아슬란의 자식들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형은 마치 개호주처럼 검은 얼룩 줄무늬와 털로 가득 덮인 나의 긴 꼬리나 귀를 애정을 담은 손짓으로 계속 쓰다듬어 줬다.


"나선성신들 덕분에 우리 아슬란족은 이렇게 호랑이나 사자, 삵, 스라소니, 표범 같은 여러 고양잇과 동물들과 닮았으면서도 동시에 신과 같은 지성과 지혜, 그리고 용기를 가진 존재인 열두 인간종 중 하나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된 거고."


"신님들 덕분이네!"


"그래, 우리가 이렇게 누워서 별들 얘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위대한 신들 덕분이지."


"그럼 그 신님들은 지금은 어디 계셔?"


"왜? 만나고 싶어?"


"응! 만나고 싶어!"


"왜 만나고 싶어?"


"신님들을 만나서, 우리들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할 거야!"


"오, 그거 참 기특한 생각이네. 나도 같이 가서 그렇게 말하고 싶은걸."


"열두 분이나 되니까, 전부 만나서 고맙다고 말하려면 오래오래 걸리겠지?"


"응. 그리고 아마, 그냥 오랜 시간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어쩌면 수천 년이 걸릴지도 몰라."


"뭐어? 왜에?"


내가 형에게 그런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질문을 하자.

형은 또다시, 손끝으로 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들을 가리켰다.


"신들은 저 별들 너머에 있거든."


"신님은 하늘나라에 사는 거야?"


"아니, 하늘이 아니라. 우주야. 하늘보다도 더 먼 곳. 무한한 저 너머의 공간. 신이지만 신이 아닌 우리 인간들이 이 지구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벗어나 도달하기엔, 너무나도 멀고 먼 저곳 어딘가에. 끝없이 자유로울 성신들이 있어."


형은 신이란 존재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우주라는 드넓은 물리적 공간 속에 있음을 알려줬다.


이는 평범한 어른들이 으레 그렇게 하듯 그저 어린아이의 덧없는 꿈을 달래기 위해서.

어린아이가 가질 세상에 대한 인식을 단순 명료하고 알기 쉬운 것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었겠지만.


형의 그 단순 명쾌한 말은 오히려 역으로 어린아이의 끝없는 호기심을 자극할 뿐이었다.


"우주라는 곳은 걸어서 갈 수 없는 거야?"


"응. 걸어서는 갈 수 없어. 하늘을 날아서, 그것도 그냥 나는 게 아니라 엄청나게 빨리 하늘을 날아야만 갈 수 있어."


"높이 뛰는 걸론 안 돼? 나 높이 뛰기는 엄청 자신 있어!"


"하하. 우리 언샤가 엄청나게 잘 뛰는 건 알고 있지만, 뛰는 걸론 어림도 없어."


"그럼 연을 타고는 못 가?"


"연으로는 못 가. 사람이 연에 매달리는 건 위험하기도 하고."


"그럼, 그럼. 다른 인간종인 사람들에게 부탁해보자.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동물을 닮았다면, 새를 닮아서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거 아냐. 그 사람들에게 우주로 태워달라고 하는 거야."


"물론 네 말대로 하늘을 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 지혜의 신 제프티의 자식들인 토트족들이 바로 새의 정수를 받은 사람들이야. 그들은 바람을 타고 정말 드높은 창공 저 너머까지 날 수 있고, 아마 우리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저 별들을 볼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아무리 토트족이라도 우주에는 갈 수 없어. 우주엔 바람이 불지 않거든."


"그럼, 그럼, 그럼. 승전식 때마다 궁에서 폭죽을 터뜨리는 것처럼, 의자에 폭죽을 달자. 거대한 폭죽을 달고 그걸 터뜨려서 우주까지 날아가는 거야."


"이야, 내 동생은 상상력이 참 풍부하구나. 이건 책에서 읽은 이야기인데, 그건 옛날 옛적에 이미 해본 사람이 있다고 해. 어느 나라의 유명한 관리도 너처럼 우주에 가고 싶어 했거든. 그 관리는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 의자 밑에 폭죽을 잔뜩 설치하고 동시에 불을 붙여 터뜨렸어. 잠시 후, 폭죽이 터진 자리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고, 세상 어디를 뒤져도 그 관리를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해."


"와, 대단해. 그 관리는 우주까지 날아갔을까?"


"그래, 분명 우주까지 날아갔겠지. 그는 그 의자를 타고 우주로 날아가, 저 하늘의 무수한 별자리 중 하나가 되었다고 전해지거든."


"그럼 우주에서 신님들도 만났을까?"


"그건 알 수 없어. 우주는 넓어도 너무 넓어서. 우주에 나간다고 해서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거든."


"우주는 얼마나 넓어?"


"저 별들이 하늘을 가득 채우지 못할 만큼. 우주에 무량대수와 같은 무수히 많은 별들이 있어도 그 빛이 이 지구까지 미처 도달하지 못할 만큼. 밤하늘이 무한한 별로 가득해져 새하얗게 변해버리지 못할 만큼. 우리에게 무한한 시간이 있더라도 우리가 찾는 한 명의 신을 미처 만나지 못할 수도 있을 만큼."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형의 두 눈은, 그가 동경하는 별과 같이 스스로 빛나고 있었다.


"으으······. 겨우 인사하러 가려는 것뿐인데. 우주란 곳은 너무 가기 힘들고, 기껏 노력해서 나가도 신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니. 너무 재미없는 세상이야."


"재미없다······라니. 그것도 재밌는 발상이네. 겨우 네 나이 때 이 세상을 놓고 재미없는 곳이라고 한 건 어쩌면 네가 세상에서 처음일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걱정 말렴, 이 세상은 네 생각보단 훨씬 재밌는 곳이니까."


"그럼 재밌는 얘기해줘! 만날 수도 없는 신님들 얘기 재미없어!"


어리고, 자기중심적이었던 나는 지금까지 꾹 참고 들었던 신에 대한 이야기가 자신의 삶과 크게 상관없는 별세계 이야기라는 걸 알자마자.

그들에 대한 이야기에 크게 싫증을 느꼈고, 그 결과는 별 의미도 없는 생떼로 이어졌다.


어른에게는 아이의 그런 변덕은 참으로 지칠만한 것이겠지만.


결국 나보다 나이가 열 살가량 많을 뿐 아직은 같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형에겐 동생의 겨우 그 정도 변덕은 일상과도 같은 것인 모양이었다.


형은 나의 그런 갑작스런 요구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되려 기뻐할 뿐이었다.


"오, 아주 좋지. 재밌는 얘기라. 그럼 직접 만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럼 이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아까 전 신님들 얘기를 좀 더 이어서 해야겠는데······."


"······. 신님들 재미없어! 신님들은 내가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도 안 들어주는 나쁜 분들이야!"


"그래, 그래. 나쁘신 분들이지. 그래도 또 그렇게까지 나쁜 분들은 아니니까, 조금만 더 들어보라구."


"······. 응. 알았어. 궁금하진 않지만 들어줄게."


그때의 내 태도는 아주 상전이 따로 없는 수준이었지만.


형은 자신의 귀여운 동생을 오냐오냐하며 키우기로 작정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화라는 걸 낼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린아이의 단순한 치기에 휩쓸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인지.


형은 호랑이를 닮은 그 얼굴로 여유롭게 웃으며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까, 나선신들이 인간을 창조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야기한 건 기억하고 있지? 열두 가지의 위대한 가치를 퍼뜨리기 위해, 우리 인간을 만들고 인간들에게 수많은 지식과 문화를 물려주었다는 얘기."


"응. 옛날 사람들은 좋았겠네. 신님들이 좋은 걸 많이 알려주셔서. 하지만 지금은 없잖아. 우릴 버리고 우주로 가버린 나쁜 신님들이야."


"윽. 그건 맞는 말이네. 오래 살다 보니 머리가 굳어버린 어른들과 달리 어린애는 편견이 없으니 의외로 핵심을 찌르는 말을 많이 하는걸."


"나쁜 신님들. 착한 사람들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이는 나찰들만큼 나빠."


"그래도 나찰들만큼 나쁘진 않아. 왜냐하면, 신들은 우리들에게 많은 걸 가르쳐준 후, 다시 열두 가지의 위대한 가치들을 우주에 더 널리 퍼뜨리기 위해 우주로 떠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열두 가지 가치 중 첫 번째인 사랑의 이름 그대로 우리 인간들을 사랑했고, 마지막 가치인 연민에 따라 신이 없이 남겨질 우리들을 동정하고, 신들 없이 살아갈 우리들을 걱정했거든."


"웃겨. 말로만 걱정하는 건 누가 못해!"


"그래. 그래서 신들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줬지. 그렇기에 신들은 이곳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후손인 종족들에게 각각 신의 권능을 일부 나눠줬거든. 그렇게 각 종족엔 어버이 신과 같은 권능을 가진 인간이 태어나게 되었고, 그게 바로 화신(化神, Avatar)이야. 평범한 인간이었지만, 어느 날 신내림을 받아 신적인 권능을 갖게 된 존재."


"화신? 나 들어본 적 있어. 전에 궁녀 누나들이 우리 아빠는 화신이라고 했어. 와, 우리 아빠,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그래. 대단한 사람이지. 우리들의 아버지, 판테라 황상(皇上)은."


그렇게 대답하는 형의 눈빛은, 웬일로 웃음이 가득하지 않고 씁쓸해 보였다.


그건 그날 밤의 기억 속에서.

유일하게 형의 표정에서 근심의 그늘이 떠나가지 않았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래. 각 종족에는, 우리 아버지 판테라처럼. 각각 한 명의 화신이 있어. 첫 번째 종족인, 루카족을 제외하면 말이지."


"응? 루카족에겐 왜 화신이 없어? 그리고 왜 우리가 두 번째 종족이고 루카족이 첫 번째야?"


"루카족은 사랑의 여신이자, 열두 신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주신인 루카신의 자식들이거든. 루카족은 원숭이의 정수를 받은 원숭이를 닮은 종족인데. 놀라울 정도로 인구가 많아서 말이야. 화신이 없는데도 첫 번째 종족이라고 불릴 정도로 드넓은 권세를 자랑하고 있어. 그 강대한 우량카이(Ūriyānkqat) 제국의 수그리바 황제도 루카족이거든."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야? 화신은 그렇게 위대한 신님들의 권능을 쓸 수 있는데. 화신이 없는 종족이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어?"


"전설에 따르면, 다른 모든 신들은 우리들을 모두 가르치고, 우리들이 충분히 아름다운 존재임을 알게 되자 깊게 만족하고 더 넓은 세상에 아름다움을 퍼뜨리기 위해 다시 기나긴 여정을 떠났다고 해. 하지만 주신인 사랑의 신 루카만은 우주로 떠나지 않고, 이 지구에 남았다고 해."


"응? 왜 그런 거야? 왜 이런 재미없는 세상에 남은 거야?"


"동생아, 이 세상은 재미없지 않단다. 아주 재미있는 곳이지. 아무튼 주신 루카는 열두 신 중 가장 강력하며, 사랑의 신이자, 의술의 신이며, 부부의 수호신이자,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졌다는 전지전능한 신인데."


"관심없어. 지루해."


"맞아. 사실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지. 중요한 건 루카는 사랑의 여신답게 자신의 창조물인 우리들을 너무나도 사랑했다는 게 중요한 거야."


"그게 왜 중요해?"


"왜냐하면, 루카 여신은 우릴 너무 사랑한 나머지 선한 나선성신들 이외에 우주 도처에 존재하고 있는 다른 악신들이 감히 이 지구를 넘볼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차가운 비를 맞아 떨게 될 우리 중생들을 지킬 자비와 구도의 우산이 되어주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 이곳에 남았기 때문이야."


"오, 그럼 그 루카라는 신님은 아직 지구에 남아 계신 거구나!"


"그래. 그런 셈이지. 그게 아무도 감히 루카신의 자식들인 루카족에게 이길 생각을 못 하는 이유 중 하나기도 하고. 첫째 가는 종족인 루카족을 건드리면 아무리 루카신이라도 화를 낸다는 말도 있을 정도니."


"에이, 역시 나쁜 신님인 거 같아."


"그렇지는 않아. 실제로 루카신이 나타나 루카족을 지켜줬다는 기록은 전혀 없으니까. 아마 루카족 사람들이 멋대로 지어낸 전설 아닐까?"


"음, 그래. 형이 그렇게 말하면 형 말이 맞겠지. 그럼 루카신님만큼은 우리 모두를 지켜주기 위해 지구에 남았으니까, 착한 신님인 걸로 하자."


"그래, 그래, 루카는 훌륭한 신이야."


"그럼 다른 신들은 못 만나더라도, 그 루카신님은 만날 수 있겠네. 그럼 루카신님께 우리들을 이 세상에 만들어줘서, 우리 인간들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러 가자!"


"그래. 나중에 말야. 나도 크고, 너도 커서. 둘 다 어른이 되고 나면. 여행을 떠나자. 이 지긋지긋한 황궁을 떠나서,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우릴 만든 여신님을 찾아서 고맙다고 인사하러."


그날 밤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태어나 처음 들은 신화, 태어나 처음 본 별자리.

태어나 처음 나와본 황궁 밖의 세상. 태어나 처음으로 가진 추억.


나눌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고, 이을 수도 없는 기억.



두 사람은 별하늘을 올려다보며 약속했다.

언젠가 여행을 떠나자고, 언젠가 여신님을 만나자고.


지긋지긋한 황궁과 황자로서의 삶에 얽매인 의무에서 벗어나 훌쩍 떠나버리자고.


물론, 두 사람이 고대하던 순간.

두 사람이 모두 어른이 되는 날 따윈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십 년 후, 형이 24세.

갓 성인이 됐을 무렵.

형은 아버지에게 사사(賜死) 받았으니.


히르카니아 황태자.


그게 형의 이름이자, 형의 이름에 얹힌 무게였다.


황제의 장자이자, 황태자이며, 차기 제위 계승자이자, 다음 황제가 될 사람.


세상 사람들은 형을 일컬어 천재라고 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고, 무예와 학문의 깨달음이 모두 범인과 궤를 달리했으며.

만물의 이치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그러면서도 어떤 존재에게도 선입견을 갖지 않는 존재 그 자체로 완성된 인간.


인간임에도 가장 신에 가까운 존재.


관리도, 정승도, 궁녀도, 누이도, 모두들 그의 동생인 나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 황태자의 동생인 나는, 그저 형이 가는 길을 따라 천재인 그를 잘 보필하기만 하면 된다고.

비단길처럼 아름다운 인생길이 끝없이 깔려있으니, 그저 그 길에서 벗어날 생각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그저 얌전히, 형처럼 착한 사람으로만 커달라고.


그런 형이 아버지에게 사사(賜死) 받았다.

황제에게서 죽음을 명 받았다.


사약이 내려왔다.


태자궁에 정승이 들어왔다.

정승은 히르카니아 황태자를 죽이라는 어명과 황제의 옥새 자국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 가까운 판결문을 읽었다.


정승은 이는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내려주신 명예로운 죽음이니, 황태자 전하께서는 네 번의 절을 올리고 감사히 죽으라 했다.


형은 거절했다.


형은 무엇 하나 잘못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일한 잘못이 있다면 그건 재능이 넘쳐났다는 것 뿐.


평범한 황실이었다면.

평범하게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면 미래영겁 성군이라 칭송 받을, 전륜성왕이 될 재목이었을 뿐.


그러나 화신의 아들에겐, 그것이 바로 죄였다.


사사를 거절한 형은 황상을 직접 만나기 전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며, 무릎을 꿇고 부동(不動)하였고.


정승은 그 자리를 떠나 그대로 형이 있던 태자궁에 불을 질렀다.


태자궁은 삼일 낮 삼일 밤 동안 꺼질 기세도 없이 불타올랐다.


나는 불타는 태자궁을 보며.

형의 이름을 끝없이 부르며 우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흘째.

잿더미만이 남은 태자궁의 폐허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탄화된 시신이 한 구 발견되었다.


황제는 그 시신을 부관참시하여 굶주린 나찰(羅刹)들에게 먹이로 던져줬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다음 황태자가 되었다.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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