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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님의 서재입니다.

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니알아서.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4
최근연재일 :
2021.06.22 12:00
연재수 :
5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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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2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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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호질 2 - 바보 황태자

DUMMY

2.


단 한 번의 포효에 천지가 뒤흔들린다.


단 한 번의 손짓에 일만의 군세가 세상에서 지워지고.


수십의 병사들의 육체가 검은 투기에 먹혀 하나로 뭉쳐져 자그마한 고기 경단이 되어 바닥에 쏟아진다.


수십의 병사들의 육체가 마치 풍선처럼 터져나가 붉은 연기를 뿜으며 증발해버린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그림에 그린 것 같은 지옥도.


아니, 제아무리 천재적인 화가도 그저 상상만으로 이와 같은 지옥도를 그려내지는 못했을 터이기에.

그림 속에서도 결코 존재할 수 없지만 현실에는 엄연히 존재하는 진정한 현세의 지옥.


아수라장, 아비규환, 인외마경.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하지 못할 학살극이 덤덤하고 무미건조하게.

마치 담묵 산수화의 일부인 듯 검고 흰 두 가지의 색조만으로 세상을 덧칠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동료의 시체를 붙잡고 오열하는 이도 있었으며.

황제의 앞에서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비는 이도 있었으며.

가족의 이름을 죽기 직전까지 계속 외치는 이도 있었으나.


잠시 후 그들 역시 모두 고깃덩이가 되어 바닥에 구를뿐이었다.


참으로 많은 인간 군상이 있었지만.

과정이나 방식만이 조금 다를 뿐.

그 결말은 모두 한결같았다.


그런 장면이 자그마치 한 시진, 120분 동안이나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싸구려 예술 극장에서 상연하는, 아무 의미도 없는 말장난을 끝없이 반복할 뿐인 쓰레기 각본을 연기하는 부조리 연극도.

이만큼이나 오랜 시간 동안 관객들에게 같은 장면을 보여주진 않을 터였다.


언샤는 어느 막사 앞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평원 남쪽 한구석에 천막으로 세워 놓은 임시 막사였으며.

막사 안에는 무관이라고 칭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애매한 계급인 하급 직업군인 갑사(甲士)들이 200여 명 모여 있었다.


그들 갑사는 계급이 비슷하다는 것 이외에는 외모, 체격과 같은 다른 모든 특징이 아주 판이했는데.

그건 그들이 12인간종 중 6종류나 되는 다양한 인종의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대륙에서, 한 종족이 한 지역에 같이 모여서 사는 건 매우 흔한 일이었고.

그와 반대로 수많은 종족이 한데 섞여 있는 건 매우 드문 광경이었다.


거기에 그들 갑사들은 종족은 제각기 달랐음에도 나이는 하나같이 아주 젊었다, 아니 어렸다.


기껏해야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중반까지의 나이 대였으니.


군인은 남성이 대부분인 게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남녀 비율은 거의 같았다.


대륙의 열두 인간종 중에는 남녀의 신체 능력차가 그리 크지 않은 아슬란족 같은 종족도 제법 있었으니 실리적인 측면만을 보자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지만.


일반적으로 금녀의 구역이라 믿어지는 전장에 그렇게 많은 여성 군인이 있다는 건.

이 대륙의 대부분의 인간이 받아들이기엔 낯선 광경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막사 분위기도 아주 자유로워, 군인이라기보단 차라리 축제에 놀러 나와 음주 가무를 즐기는 젊은 남녀 무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들 갑사들은 막사 안에서 이번 승전식 때 상여금을 받고 나면 뭘 살 것인지에 대해 얘기하거나.


고향에 돌아가면 마음에 둔 소꿉친구에게 고백할 것이라는 얘기를 나누거나.


이제 또 지루하게 1달 정도 기간 동안 말을 계속 타야 할 텐데 말을 계속 타다 보면 허리와 엉덩이가 아파 죽겠다고 불평하거나.


여기 군마는 거인종인 자신이 타기엔 너무 작고 왜소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말을 혹사하는 것에 불과한 것 같아서 차라리 자기 등에 말을 태우고 달리는 게 낫겠다는 소릴 하거나.


아니면 누구와 누구가 잠자리를 같이 가졌다 카더라는 식의 실없는 이야기나 나누고 있었다.


소위 무관이나 무신이라고 불리는 높으신 분은 막사 안에 있지도 않았다.

아니, 애초에 무관은 이곳 전장에 데려오지도 않았다.


세상엔 적재적소라는 게 있고, 적어도 이 전장에 지휘관이나 장군 같은 존재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어차피 쓰지도 않을 병력들의 군기나 기강이 어떻게 잡혀 있든 신경 쓸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그 갑사들 200명은 오로지 수백이 넘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면 전혀 근처에 다가오질 않는 습성이 있는 나찰들을 피하기 위한 용도로 끌고 나왔을 뿐.


그 젊은 갑사들 200명의 가치는 그것이 전부였으며.

그건 갑사들 본인들도 잘 아는 사실이었기에.

그들의 관심거리라고는 전쟁이 아닌 연애담이나 지루한 여행길에 대한 걱정, 그리고 고향에서 기다리는 가족들 밖에 없었다.


언샤는, 등 뒤에서 들리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바로 눈앞의 드넓은 평야에서 펼쳐지고 있는 대 학살극 간의 격차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괴리감에 크나큰 혐오감과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사람이 천명, 이천 명쯤 죽을 때마다.

등 뒤에선 행복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들 갑사들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비웃을 정도로 정신 나가고 잔혹한 이들이라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저들은 단지 전쟁에 무관심할 뿐이었다.


아슬란 황제가 즉위한지 23년, 그리고 갑사들의 나이도 평균을 내보면 딱 그 정도.

성인이 되는 나이인 24세에 달하지도 못했을 정도로 어린 이들도 아주 많았다.


즉 저들은 이 지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인 황제의 비호를 받은 덕에.

태어난 이례 단 한 번도 죽음의 위협이란 걸 느껴본 적이 없는 이들이었다.


군인임에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서 목숨을 거는 것이 군인임에도.


저들은 죽음을 모르며, 전장을 모른다.

그렇기에 전쟁터에서 웃을 수 있었다.


물론 언샤 자신도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그가 하는 것 역시 전장에 서서 목숨을 거는 게 아니라, 그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에 불과했으니.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은 같으니 본질적으로는 저 갑사들과 무엇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단지 관심이 있냐, 관심이 없냐 정도의 차이일 뿐.


이번에는 판테라 황제가 하늘에서 투석기로 던져져 날아온 바위를 공중에서 붙잡아, 운 좋게도 제법 먼 곳까지 도망치는데 성공한 병사들을 향해 집어던졌다.


바위는 투석기로 던져졌을 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평야를 헤집어 놓았다.


눈앞에서, 또다시 수백의 생명이 무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정확한 순간에 등 뒤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언샤는 이제는 더는 불쾌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건 마치 저들의 죽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언샤는 그들을 잠시라도 조용히 시키기 위해, 막사로 들어갔다.


"아, 황태자 전하, 잠시 안 보이신다더니 변소라도 다녀오셨슴까? 근데 좀 들어보십셔. 대박 사건이 터졌슴다. 그 쑥맥인 아무르랑 아모엔시스가 놀랍게도! 어젯밤 물레방앗간에서······."


호랑이를 닮은 아슬란족인 카스피가 막사에 들어온 언샤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친화력이 좋아 딱히 계급 구분이 없는 갑사들 사이에서도 곧잘 대장 노릇을 하곤 하는 20대 중반의 남성이었다.


"그런 얘기 할 기분 아니니 좀 조용해줘."


"아니, 재밌다니까요. 전하께서도 들으시면 분명 포복절도하실 수밖에······."


"지금 밖에서, 황제 폐하께서 전쟁을 하고 계신다. 아무리 적군이라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거든. 입을 다물라고까진 말 안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엄숙한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어."


언샤는 그렇게 나직이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전쟁은 무슨, 그런 건 그냥 일방적인 학살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걸 끔찍한 학살이라면서 진심 그대로 당당하게 말할 만한 용기도 없었다.


"아, 그렇슴까. 죄송함다. 자숙할게요."


카스피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른 갑사들에게도 조금만 조용해달라는 식으로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의 말소리는 줄어들었고.

그들은 소곤소곤 조용히 자신들이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언샤는 망연자실해 푹 숙인 자세로 터덜터덜 걸어나가며 구석의 아무 의자나 끌고 나와 그곳에 앉았지만.

아무리 작은 소리조차도 포착할 수 있는 아슬란족의 예민한 청각 때문에 그들이 작게 귓속말로 말하더라도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파악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 따윈 듣고 싶지도 않았지만.

예민한 감각은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를 계속해서 무분별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언샤 전하도 화내실 줄 아시는구나. 신기해라."


"저분은 항상 바보같이 웃는 줄로만 알았는데,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시는구나."


"근데 태자 전하는 덩치는 엄청 크신 거 같은데 왜 저리 구부정하게 다니신데? 좀 가슴을 펴면 엄청 멋지실 거 같은데."


"너 몰라? 어렸을 때 나찰 사냥 경연에서 낙마한 후로 저렇게 되었대."


"뭐 진짜? 그러고 보니 나도 태자께서 사냥 경연에 나갔던 얘기 들었었는데, 그게 진짜 너무 웃겨서. 아, 웃으면 안 되는 건 알지만······."


그들은 언샤에게 자신들의 대화가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별로 신경 쓰지도 않는지 항간에 떠돌아다니는 황실과 황태자에 대한 소문에 대해 즐겁게 담소 나눴다.


그러한 화제에 따라가지 못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알 실라 제국 사람 중 바보 황태자 언샤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대체 누가 있겠는가.


······딱히, 저들에게 따돌림당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저들은 그냥 순진하고 배려가 부족한 것뿐이지 악의라곤 없었다.


저들에게 바보 황태자 얘기는 그냥 세간에 떠도는 재밌는 이야깃거리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었다.


황제는 자비심 넘치시는 분이라, 겨우 황실에 대한 웃긴 소문이 퍼지는 정도로는 내색조차도 하지 않을 게 뻔했고.


만약 바보 황태자 본인이 화를 내봐야, 그래봐야 무슨 일이 있겠는가.

물벼룩이 한 번 뛰어도 바보 황태자 따위가 화를 내는 것보단 많은 일이 생길 것이 뻔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냥 별로 친하지 않은 관계에, 되도 않는 오해가 좀 섞였을 뿐인 것이다.


세 달이나 같이 지냈으나 어차피 그 세 달이 지나고 나면 더는 볼 일도 없는 사이.


사는 세상 자체가, 타고난 신분 자체가 다른 존재를 몇 달쯤 한 막사에 던져 놓는다고 해서 어찌 한데 섞일 이유가 있겠는가.


아까 전 카스피 정도면 정말 모험심이 있으며 편견이 없는 사람인 축에 속했다.


언샤가 그렇게 생각하며 빨리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푸념하고 있을 때쯤에, 막사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자 전하, 계십니까?"


젊은이만이 가득한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중후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그래, 있으니 들어오시오."


"예, 논할만한 공조차 없는 가장 미천한 자인, 이 고이(高伊)가, 드높은 천자의 자식인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언샤는 대체 어느 어전이라고 그렇게까지 호들갑을 떠는지 참으로 우스울 지경이었으나.

지킬 필요도 없는 것을 매번 지키는 자이니 저 자가 정승에 올랐겠거니 하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천막을 걷고 내부로 들어온 건 알 실라 제국의 유일한 삼정승인 좌의정 고이였다.


조정에서 늘 보던 집무용 당상관복 대신 흰 여행복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엔 상투를 틀었고 검은 갓을 썼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사용한 걸로 보이는 손때 탄 마편을 한 손에 그대로 들고 있었다.


고이는 말을 타고 먼 길을 달려왔는지 온몸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고 땀이 흥건했으나.

그럼에도 사람을 압도하는 특유의 분위기는 전혀 변치 않았다.


좌의정 고이가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어떠한 질서와 규율도 없어 보이던 갑사들이 일사불란히 움직여 오와 열을 맞췄을 정도였으니.


방금 전까지 그렇게 소란스럽던 막사 내부가 맞나 싶을 정도로 고요한 침묵이 가득했다.


갑사들은 하나같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진의를 파헤치자면, 그저 괜히 섣불리 행동했다가 좌의정의 눈에 찍히기 싫은 것에 불과했겠지만.


철의 재상 고이.


황제의 왼팔이자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알 실라 제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권력을 쥐고 있는 자.


젊은 시절엔 그저 재미로 아홉 번이나 과거에 응시해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고.

자신을 담기엔 너무나도 작은 그릇인 알 실라를 떠나 우량카이 제국의 제후인 에미르(Emir)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음에도.

결국엔 고국을 그리워해 다시 알 실라로 돌아온 걸어 다니는 전설 그 자체인 문관.


팔순을 넘은 나이에도 전혀 노쇠하지 않은 강건한 육체에, 만물을 꿰뚫어보는 듯 깊게 파인 두 눈동자는 타오르는 불꽃과 같았다.


"최대한 발을 서둘러 하루라도 빨리 도착하고자 했으나, 늙고 병든 몸이라 그리하지 못한 불충을 부디 용서해 주소서."


"좌상, 그래서 이곳엔 어쩐 일로 오셨소?"


"황상께서 신에게 내린 어명을 실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천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이 나라의 안녕을 걱정하는 자, 미래를 근심하는 자, 혹여나 황제의 용력에 대해 아주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는 자. 그대들은 관리와 백성을 모두 가리지 않고, 자신 내면의 의심암귀와 싸우는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고 그저 눈을 뜨고 짐이 펼칠 전장을 바라볼지어다. 그곳에 이 대륙에 미래영겁 끝도 없이 펼쳐질 영원한 태평성대의 모습이 있을지니, 단 일견(一見), 단 한 번 보는 것으로 그대의 근심 걱정은 모두 씻은 듯 사라지게 될 것이다'


"황상께서 그런 명을 내리셨다고?"


"예. 그렇습니다. 물론 천자의 공력을 의심하는 인면수심인 자가 이 땅에 존재할리는 없으며, 그렇기에 이것을 보려 하는 자는 거의 없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신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황제의 뜻에 깊게 감명받아 잠시 국정을 내려놓고 이곳에서 펼쳐지는 황제의 위업을 목도하러 찾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정보다 더 빠르게 전쟁이 시작되어, 일정에 맞춰 이곳에 도착하는 것만으로 벅찬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모든 게 끝나기 전에 도착하여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게 정 1품의 품계를 갖고 있으며 아무리 황제에 가장 가까운 고관대작이라지만.

그럼에도 전장에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을 문관인 좌의정 고이가 몇 날 며칠을 말을 타고 이곳에 찾아온 이유였다.


그리고 그건, 언샤가 황태자가 된 이후로 지난 십 년간 계속 해온 일과 그리 다르지도 않았다.


계속, 지켜보는 것.


그저 황제의 위업과 그가 가는 길을 계속해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

그게 황태자의 유일한 과업이었으니.


"전하, 같이 밖으로 나가시지요. 신과 함께 지난 이십 년간 이어져 온 지긋지긋한 전쟁의 마지막을 함께 지켜보도록 합시다."


"······보고 싶지 않소."


그렇기에 언샤는 그러한 과업과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청토록 하겠습니다. 신과 함께, 같이 지켜보도록 합시다."


"보고 싶지 않소. 아무 의미도 없는 학살극이라면 이미 질릴 만큼 봐왔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더욱더 지켜보셔야 합니다."


"그건, 그것이 황상의 명이기 때문인가? 십 년 전 그날처럼, 황상의 명이라면 그대는 무엇이든 하는 것인가?"


"······. 신하의 본분은. 천자가 가실 길을 올바르게 닦고, 황자가 잘못된 길에 들지 않도록 이끌며, 상제께서 올바른 치세를 펼칠 수 있도록 하는 이정표가 되는 것. 그러나 미천한 신은, 이 셋 중 어떤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저, 마지막 한 번이라도 신이 무엇을 해왔는가, 어떤 업보를 쌓아왔는가. 그저 그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을 뿐입니다."


"그럼 보지 마시게. 그곳엔 고통밖에 없으니. 어떤 가치도 없으니. 그대가 찾는 왕도는 이곳에 없소."


"보셔야 합니다, 보셔야 합니다. 지켜보십시오. 십만의 생명이 덧없이 꺼져가는 모습을, 제국의 이름 아래 이 대륙에서 대체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눈으로 직접 보고, 목도하고,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고, 행동하십시오. 그게 신이 아뢰고 싶은 말씀의 전부입니다."


고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언샤에게 황족에 대한 인사인 배사(拜辭)를 올리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노인네였다.


승상의 손에 직접 태자궁이 불타오른 그 치욕스런 날로부터 십 년이나 지나서.

······십 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야 저런 말을 하는 것인가.


지난 십 년간 자신이 대체 어떤 굴욕을 삼키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런데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 한다는 말이 저딴 헛소리라니.


언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향했다.


좌의정이 나간 지 몇 초가 채 지나지 않았으나, 주변의 젊은 갑사들은 다시 방금 전처럼 소란스레 떠들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황태자인 언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또한 아무래도 좋았다.

언샤 역시 이제 그따위 것들엔 아무 관심도 없어졌으니.


언샤는 막사 밖으로 나섰다.

막사 앞에는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무관들과, 그리고 전장과는 별로 인연이 없는 문관들이 나란히 서서.

방금 전까지 펼쳐지고 있던 대학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소문으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자는 별로 없는, 화신의 권능이자 동시에 알 실라 제국의 모든 힘이란 게 대체 어떠한 것인지를.

그 마지막 부분이나마 직접 눈으로 목도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게 끝이 났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학살극도 결국 끝이 났다.


판테라 황제가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불쌍한 이들에게 최소한의 자비라도 베풀기 위해.

허공에서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검은 투기를 만들어 그곳으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존재를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투기는 회전하며 점차 커졌고, 곧 평야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가 되었다.


판테라는 거기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지 검은 투기 바로 옆에 서서도 아주 태연했다.


그 다음 순간 평야에 있던 모든 것이 하늘과 땅을 뒤덮은 거대한 검은 구멍에 엄청난 속도로 빨려 들어갔다.


그들 모두가 아주 얇고 긴 가닥처럼 길게 펴지며 압축되더니 이윽고 마치 그곳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옛말은 분명 거짓임이 틀림없었다.


황제가 처음부터 그런 막대한 권능을 쓰지 않은 건.

단순히 이를 지켜보고 있을 쿠룬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 과시하기 위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검은 구멍이 사라진 평야 전체는 대체 언제 자신에게 구멍이 났었냐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적적했다.


현실을 아득히 초월한 그 광경에 주변 관리들이 하나같이 웅성거렸다.


드넓은 평야에 가득했던 십만 대군의 흔적은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들은 이 세상에 피 한 방울 남기지 못했다.


평야에는 오로지 판테라 황제와, 그리고 그의 손에 머리채를 잡혀 끌려다니는 수그리바만이 있었다.


판테라 황제는 수그리바의 머리를 끈 채, 천천히 동쪽에 있는 성벽을 향해 인간이라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언샤는 그를 따라 자신의 말을 타고 동쪽으로.

우량카이의 수도 쿠룬으로 향했다.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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