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런 말씀을 드릴만한 깜냥이 되지 않기에...
글을 쓰는 것이 조금... 아니 많이 조심스럽습니다.
읽으시는 와중에 비위가 상하시거나 기분이 언짢으시다면 제 필력이 모자라 그러는 거라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것에 있어 누구를 비난하거나 탓하거나 혹은 내가 잘났다는 것을 말하고자함이 아님을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이 글에서 잠시 비평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일단 제 개인적인 것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문학비평으로 등단을 한 것은 아니지만, 여타의 매체와 커뮤니티 등에 문학(특히 카프카와 보르헤스를 중심으로 합니다.)과 영화(페데리코 펠리니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히치콕 등을 중심으로 합니다.)와 철학(푸코와 들뢰즈, 라캉을 중심으로 합니다.)에 대한 칼럼이나 비평 등을 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피아에 연재 되는 글과는 조금 괴리가 있을지도 모르니 이점도 조금 유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꽤 길어질 것 같네요....^^;;
우선 비평에 대한 글부터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비평이라는 단어를 네이버에서 검색을 해 보시면, “문학에서 비평(批評)이라 함은 문학작품은 정의하고 그 가치를 분석하며 판단하는 것이다. 비평은 작품과 작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며, 그 기준은 과거의 문학작품과 전통에서 가져온다. 비평의 기준은 시대마다 다를 수밖에 없으며, 비평의 준거틀 자체가 비평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라고 정의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보셔야 할 것은 “가치”와 “분석”과 “판단”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성향 및 프레임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푸코는 “나는 지도와 달력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라고 하기도 했죠. 즉, 공간과 시간, 그리고 더불어 개인의 성향이 개입되지 않은 작품은 없으며, 또한 그러한 비평 역시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공간이라면 이곳 ‘문피아’가 될 터이고, 시간이라면 ‘현재’가 되고, 개인이라면 비평가와 작가가 되겠죠.
그런데 비평이 이런 것이라면 소위 “지 꼴린 대로” 지껄여도 아무 상관 없다는 말이 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의 정의에서 “비평의 준거틀 자체가 비평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라는 장치가 들어가 있습니다.
즉, 어떤 작품을 비평하는 비평가는 자신의 비평이 비평 받을 각오도 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또한 그 비평을 비평하는 사람 역시 자신의 비평이 비평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지요. 결국 무한 순환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타당한” 비평이라면, 비평을 받는 쪽이나 비평을 하는 쪽이나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타당성은 보통 객관성이나 논리성, 합리성 등으로 보장 받죠.
그렇기 때문에 흔히 비평을 함에 있어서 “그것은 객관적이지 않다.”, “합리적이지 않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합리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아주 예전, 포스트모더니즘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절대성이 보장받았던 시기도 있지만, “지금”이라는 현재성에서는 그러한 “절대성”이야 말로 비평의 대상인 것이죠.
그런데 이런 비평이 그나마 자신의 글 내부에서 ‘객관성’과 ‘합리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장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글의 한계에 있죠. 한계가 존재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글은 이런저런 한에서 이런저런 것을 평한다.” 라고 언급을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자신의 비평에 논리적 정합성을 보장해 줍니다. 그것이 개인의 감상이라면 개인의 감상이라는 한계를 정하는 것이죠. 신념과 개인의 취향은 논리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평을 하시는 분은 자신의 비평의 한계가, 그리고 그 한계로 만들어지는 경계를 명확히 해야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여기에서 기본적인 매너는 전제가 되어야 겠죠. 인신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것 말이죠.
그리고 두 번째로 비평의 대상자입니다.
저도 졸필이나마 책을 한 권(소설은 아닙니다. 양판소는 더욱 아니구요.) 시장에 내보냈고, 기관의 내부용 책도 꽤 냈습니다. 그런데 여태까지 엄청 까입니다. 칭찬을 해주시는 분도 계시지만, 까는 분은 더욱 많죠. 그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자존감이 송두리 채 무너져버리는 느낌이죠.
아시겠지만, 자신감은 생존 이후의 단계인 반면, 자존감은 생존의 단계입니다. 자존감이 사라진다는 것은 존재가 부정 된다는 것입니다.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죠.
하지만, “완벽한 문장은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이라는 하루키의 말처럼 세상에 완벽한 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글도 비판의 요소는 차고 넘칩니다. 하물며 인터넷에 연재되는 글임에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인터넷 연재용 글이 하등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출판용으로 만들어지는 책들과는 그 디테일이 차이가 많이 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철학에 관심이 많아 그쪽 교수님과 집필을 같이 하기도 합니다. 일 년에 한 권씩 내는 사람은 엄청난 다작가에 속하죠. 요즘 인기 몰이를 하는 강신주씨가 그렇습니다. 강신주씨는 꽤 많은 문제가 있다고 말이 많죠. 물론, 그 문제점 역시 학계의 시선일 뿐이지만요. 그렇게 오랜 시간을 공들여 내는 책들도 막상 출판이 되어 나오면 오점 투성이입니다. 마음 먹고 까려면 까이지 않는 글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죠. 그렇게 디테일을 신경 쓴 책들도 그런 마당에 빠른 시간 안에 써내는 글이 문제점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이 점을 먼저 인정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비평 받는 부분이 전부 잘못된 것은 아니겠죠. 하지만, 비평을 요청한 입장이라면, 먼저 받아들일 준비를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이 자신의 자존감을 깡그리 무너트리고 괴롭혀도, 그것이 “타당한” 것이라면 그런 비평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조언이 됩니다.
작가는, 글로써 말할 뿐입니다.
독자가 그 글을 읽고 글의 내부에서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그 독자가 작가가 “염두에 둔 영역에 속하는 잠재 독자”라면, 그것은 글의 문제입니다.
글로써 표현하지 못한 것을 글의 외부에서 왈가왈부 한다면, 그것은 변명일 뿐이며 부족한 필력을 객기로 합리화하는 추태로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염두에 둔 영역에 속하는 잠재 독자”라는 부분을 염두 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이에게 이해를 받길 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초등학생용 동화를 쓰는데 어른이 “왜 이렇게 유치해?”라는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작가가 일정 수준의 이상의 독자를 타겟으로 한 글이라면, 그에 이르지 못하는 독자의 “왜 이렇게 난해해?”라는 말은 마음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를 이해시키고 만족시킬 수 있는 글은 세상에 없으니까요.
심지어 어린왕자마저도 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그런 글조차도 말이죠. 그러니 자신의 타겟을 명확히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군자는 소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법이다.”라고 생각하시면서요. 그게 오래 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말이 무척 길어졌습니다.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어떤 분이 제 글에 너무나 고마운 비평을 달아주신 것에 대한 보답과, 문피아에 그런 비평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에 의해서입니다.
혹시나 언짢으신 부분이 있으셨다면 정중히 사과 드립니다.
소설을 써야하는데 이상한 글을 쓰느라 시간을 많이 지체 했군요.
내일부터는 다시 소설에 매진해야 하겠습니다.
모두들 건필하시고 좋은 밤 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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