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이 세상을 점령하고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옛 인류는 멸망했다. 정확히 언제 멸망했는지, 왜 멸망했는지, 어떤 방법으로 멸망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옛 인류가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는 엄청난 크기의 폐허와 지금은 어떻게 만드는지도 완전히 잊어버린 무기들만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해줄 뿐이다.
우리는 벙커에서 살아왔다. 왜 벙커가 있는지는 모른다. 벙커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도 모른다. 벙커의 존재 이유에 대한 가장 신빙성 있는 주장은, 베를린이라고 불렸던 도시에 있는 벙커.BEN-11의 한 학자가 주장한, '옛 인류는 스스로 멸망할 것을 알고 있었고, 불가피한 멸망을 막기 위해 그 어떤 물리적 충격에도 견딜 수 있는 벙커를 지었다.'라는 주장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이 벙커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이 벙커의 문을 열었을 것이다.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벙커의 문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몬스터들이었다. 옛 인류에게는 방해물조차 되지 못했던 몬스터들은 인간보다 강력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약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이런 책을 펴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비록 옛 인류의 멸망에도 남아있는 일부 무기들 덕분의 일이지만, 앞으로 인간은 옛 인류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몇 억년이 걸리던,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다. 그게 현 인간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가 남아있다. 옛 인류는 도대체 왜 멸망한 것인가. 몬스터들을 간단히 제압하여 도로를 잇고,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거대한 도시를 만들고, 한 번의 사격으로 건물이 무너지는 무기들을 만들었던 옛 인류가 왜 사라져야 했던가.
그 어떤 가설을 내세워도 증명하지 못 한다. 다만,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의 존재 의의도 그곳에 있다. 유추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야 한다. 이 책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접해 가장 합리적인 유추를 해내기 위한 책이다.
옛 인류가 가졌던 기술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 불미한 후손들이 옛 인류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애도라고 할 수 있고, 최소한의 예의라고 할 수 있다. 옛 인류의 멸망 이유를 파헤치는 것. 그것은 우리 인간의 의무일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옛 인류에 대해 어떤 유추를 할 수 있는가?
-글을 읽는 옛 인류의 후손들에게 보내는 편지.
From. 폴 웨인라이트…
「세계를 바꾼 변화에 대한 고찰」의 서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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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으나, SF와 판타지를 결합한 저만의 세계관이라는 자부심 아래 힘껏 글을 쓰고 있습니다.
비록 필력이 달리는 작가지만 다독, 다작, 다상량의 3대 원칙을 굳게 믿으며 언젠가는 나아질 것으로 믿습니다.
이 글을 읽고 한 분이라도 재미있다 생각하시면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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