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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늑삼

1894 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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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늑삼
작품등록일 :
2019.02.22 18:26
최근연재일 :
2019.09.26 14:17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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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글자수 :
667,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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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2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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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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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1)

DUMMY

무성할 수풀로 뒤덮힌 수간두옥 주변은 휘황찬란한 아침 햇살이 가득 번졌고, 커다란 키를 자랑하며 쭉쭉 치솟은 나무들은 때마침 불어온 아침 바람에 자신들의 몸을 내맡긴 채 기분 좋게 살랑거렸다. 이렇게 산속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언제나 그렇듯 맑고 상쾌했다.


"진혁 도련님, 거기에 뭐라고 쓰여져 있습니까요?"


임경달이 눈을 끔벅거리며 진혁의 손에 들려 있는 문서에 궁금함을 내비쳤다.


"그런데 춘장 어른, 이걸 대체 어디에서 구해 오신 겁니까?"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임경달에게 진혁이 손에 들려 있는 문서를 가리키며 반문을 했다.


"엊그제 싸움에서 나, 나리께··· 죽은 그 관군 우두머리 품에 있었던 거랍니다요. 근데 화전촌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이 소인과 똑같은 까막눈들이라서··· 그래서 이리 아침 댓바람부터 도련님께 달려와 본 겁니다요."


진혁이 건넨 질문에 임경달이 부끄럽다는 듯 자신의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귀동이 느닷없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끼어들었다.


"아버지! 그런 게 있으면 저한테 보여 주면 되지. 왜 식전바람부터 진혁 형님을 귀찮게 하세요?"


"엥? 이놈이 갑자기 미쳤나? 네 놈이야말로 아침부터 웬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네 놈이 무슨 글을 안다고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댓바람부터 해 대는 것이냐?"


임경달이 같잖은 표정을 지으며 마치 주제 파악 좀 하라는 듯 귀동에게 호통을 쳐 댔다. 하지만 이어진 귀동의 말에 임경달은 깜짝 놀라야만 했다.


"으이그, 아버지! 내 아버지 맞아요? 춘장 어르신한테 글을 배워 깨우친 지가 언젠데··· 에이, 아버지가 또 춘장 어르신 생각나게 만드네······."


"뭐, 뭐라고? 네 놈이 나리께 글을 배웠다고? 그래서 글, 글을 깨우쳤다고? 그게 사실이냐?"


임경달은 귀동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기쁨에 겨워 꿈인지 생시인지 하는 표정으로 말까지 더듬거렸다.


"어떻게 아버지가 되어서··· 아들에 대해 그리 몰라요? 쳇!"


단순히 말하는 투나 내용만 들어 보면 부자지간이 마치 아옹다옹하며 티격태격하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관심 있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 안엔 가족애에서 비롯된 따뜻함과 반가움 등 여러 상태감정이 가득 담겨 있는 걸 바로 느낄 수가 있었다.


"춘장 어른, 이건 아주 중요한 공문서입니다. 하나는 임금의 어령이 담긴 공문을 필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라 감영의 방백이 각 고을 수령에게 보내는 공문입니다."


진혁이 약간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귀동과 임경달 사이에 끼어들었다.


"예? 임, 임금이요? 한데, 진혁 도련님. 그 중요한 걸 어찌 그 관군 우두머리가 갖고 있었을까요? 혹시 그것도 알 수 있겠습니까요?"


진혁의 입에서 임금이라는 말이 거론되자 임경달이 또다시 해연히 놀라며 다시금 궁금함을 내비쳤다.


"임금의 어령이 담긴 공문은 원문이 아니고 필사한 건데, 아마 들고 다니며 각 고을 수령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용도가 아닐까 싶네요. 어쨌든 그 내용은 고부 민란을 진압하기 위해 홍계훈이라는 자를 양호 초토사로 임명해 경군을 신식 무기로 무장시켜 제물포에서 군함에 태워 전라 감영으로 내려 보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예? 아, 아이고 그럼 큰일이네, 큰일이여. 아이고 이걸 어쩌나······."


진혁이 어령에 담긴 내용을 설명하자 임경달이 중간에 화들짝 놀라며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춘장 어른,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 아버지. 왜 그러세요?"


임경달이 갑자기 낯빛을 굳히며 안절부절하자 진혁과 귀동이 동시에 나서 연유를 물었다.


"예? 예··· 진혁 도련님, 그건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요. 그리고··· 또 다른 내용은 뭡니까요?"


"예? 예, 나머지는 각 고을 수령들에게 전할 공문이네요. 내용은 감영에서 토벌군을 출병시켰으니 토벌군이 요청하는 건 다 지원해 주고, 뭐든 적극적으로 도와주라는··· 뭐,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춘장 어른, 방금 전에는 왜 그리 놀라신 겁니까?"


모든 설명을 마친 진혁이 잠시 전 임경달이 깜짝 놀란 걸 상기하고 그에 대해 말끝을 덧붙이며 물었다.


"예··· 아마 진혁 도련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요. 이번에 또다시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나서 지금은 부안 관아도 농민들에게 점령당한 거 말입니다요. 그런데 그게 사실은······."


"예, 그건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춘장 어른하고 무슨 관련이 있는 겁니까?"


"아버지, 뭔데 그리 어물어물하고 계세요? 뭐 숨기는 거 있어요?"


임경달이 진혁의 물음에 대답을 하다 말고 뒷말을 흐리며 난처해 하자 뭔가 이상한 걸 느낀 귀동이 대뜸 나서며 임경달을 다그쳤다.


"··· 사실은 그 농민들이 전라 감영으로 쳐들어가기 위해 태인현으로 오고 있는 중입니다요."


"그런데요? 그게 춘장 어른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까?"


임경달의 말에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금 반문을 하며 되물었다.


"예, 저희 화전촌 사람들과 인근 촌락의 사람들도 태인으로 가서 그 농민들과 합류하기로 했는데··· 도련님 말을 듣고 보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요. 어서 빨리 이 사실을 그 농민들에게 알려서 전라 감영으로 몰려가는 걸 막아야 할 것 같습니다요."


"예? 아, 아버지. 그, 그게 무슨 말이예요? 아버지와 아재들이 관군들과 싸우러 간다고요? 예? 맞아요, 아버지?"


임경달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쏟아져 나오자 이번엔 귀동이 깜짝 놀라 임경달을 다그치며 되물었다.


"허, 지금 도련님하고 얘기 중인데 웬 호들갑이냐? 귀동이 넌 잠시 빠져 있거라."


"춘, 춘장 어른이 싸우러 간다는 말입니까?"


놀라기는 진혁도 마찬가지였다.


"저기, 진혁 도련님. 그것보다··· 지금 그 농민들은 한양에서 출발한 군인들이 전라 감영으로 내려오는 걸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요. 농민들에게 어서 이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자칫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요."


진혁에게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애가 타는지 임경달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요? 춘장 어른께서 그리 다친 몸으로 부안까지 달려가기라도 하겠다는 말씀입니까?"


"예, 진혁 도련님. 당연히 그리해야 하지······."


"그건 안 됩니다, 춘장 어른. 춘장 어른의 말을 들어 보면 부안까지 가서 그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말인데, 그 다친 몸을 이끌고 어찌 거기까지 간단 말입니까? 더구나 중간 길목이나 다름없는 태인도 이미 관군들로 넘쳐난다고 하는데요."


진혁이 당면한 현실과 그에 따른 상황을 얘기해 주며 임경달을 단호하게 말렸다. 그러자 귀동도 극구 만류하며 차라리 자신이 가겠다고 나섰다.


"아버지, 안 돼요. 아버지는 절대 안 돼요. 그렇게 다친 몸으로 지금 어딜 간다는 말이예요? 차라리 아버지 대신 제가 갈게요. 제가 아재들이랑 같이 가면 될 거 아니예요."


"허, 네 놈이 오늘따라 왜 이리 자꾸 나서는 것이냐? 내 지금 진혁 도련님과······."


자신을 걱정하는 귀동을 호통으로 나무라던 임경달이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진혁의 개입 때문이었다.


"춘장 어른, 전봉준이라는 사람이 농민들을 이끌고 있다고 하셨죠?"


진혁의 눈빛이 어느 순간 일변하더니 갑자기 임경달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건넸다.


"예? 예······."


진혁이 느닷없이 전봉준을 언급하자 임경달이 해연히 놀라며 눈을 끔벅거렸다. 진혁에게서 뭔가 낯설고 별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걸 가지고 제가 그 농민들에게 가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진혁의 한마디는 임경달의 예상처럼 결코 예사로운 말이 아니었다.


"예? 진혁 도련님.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신지······."


"허억! 진, 진혁 형님!"


진혁의 무두무미한 한마디에 임경달과 귀동은 눈이 화등잔만 해지며 깜짝 놀랐다. 그런데 진혁의 난데없는 말에 깜짝 놀란 사람은 비단 그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곁에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송유석과 서진, 서연도 깜짝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렇잖아도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그 어떤 결심을 한 게 있었는데, 마침 잘되었습니다. 제가 춘장 어른 대신 이걸 가지고 가서 그 전봉준이라는 사람을 한번 만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진혁이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에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고, 그의 표정 또한 결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걸로 보아 이미 그 어떤 결심이 굳건히 세워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진혁이 일변된 모습을 보이자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그저 멍한 눈빛으로 진혁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진혁의 그 결심을 무시하고 부정하며 말리고자 하는 한마디가 또렷이 들려왔다.


"안 돼요, 도련님. 그런 결심을 왜 어르신의 죽음과 연관시키세요? 그건 도련님의 억지에 불과할 뿐이고, 도련님의 자가당착이예요. 도련님께서 만일 그러신다면 저도 이참에 결심할 거예요."


"예? 그, 그게 무슨 말인지······."


"저도 이제부턴 도련님과 절대 안 떨어질 거예요. 도련님이 어딜 가든 졸졸 따라다닐 거예요."


서진이었다. 서진이 밑도 끝도 없이 내뱉은 이 한마디는 그야말로 폭탄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만큼 놀라운 말임에도 불구하고 놀라는 사람은 진혁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예? 서, 서진 낭자. 지금 그게 무슨 말이예요?"


"말 그대로예요. 앞으론 도련님하고 쭉 같이 다닐 거예요."


서진의 말에 화들짝 놀라는 진혁과 달리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그런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이미 진혁과 서진의 관계를 알 만큼 아는 사람들이었고, 더욱이 이경륭과 서진이 나눈 밀담도 이젠 다 밝혀진 마당이라 그저 그러려니 하는 게 반응의 전부일 수밖에 없었다.


"잠, 잠깐만요. 저, 서진 낭자. 저 좀 잠깐··· 따, 따로 보실래요?"


진혁의 표정에 어리둥절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뿐만 아니라 현 상황의 아리송함에 지나치게 당황하고 있었는데, 그 증거로 마치 붉은 홍시처럼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평소와 달리 말까지 더듬거렸다.


사실 서진은 진혁의 느닷없는 말을 듣는 순간 사지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인데, 가뜩이나 아버지를 존경하고 추종했던 진혁이었다. 게다가 진혁의 착하디착한 심성을 감안해 보면 아버지의 죽음에 자식 된 도리를 얼마든지 결부시킬 수도 있었다.


'만약 그리되면······.'


어느 순간 진혁이 훌쩍 떠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서진은 방금 전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거고, 그 불길한 예감 때문에 여인으로서 창피함을 무릅쓰며 의연히 나선 것이다.




* * *




진혁과 서진은 이경륭의 장례를 치렀던 큰 바위 위에 서 있었다.


"··· 도련님."


서진이 어두운 얼굴로 진혁을 불렀다. 그러자 마치 자신을 불러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서진 낭자, 서진 낭자가 떠난 뒤부터 줄곧 생각했습니다. 서진 낭자를 편히 보내주자고요.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잘 되지 않더군요."


"······."


"비록 며칠에 불과했지만 서진 낭자를 포기하며 잊어야 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그리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네요. 나는 이렇게 선택의 여지조차 없는 처지지만 서진 낭자는 다릅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 시국이 웬만큼 안정되면 정읍 집으로 돌아가십시요."


진혁의 말이 끝나자 서진이 진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혁도 서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서진의 표정은 여러 차례에 거쳐 다채롭게 변했다. 처음에는 놀라움, 그다음에는 서운함,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함이 차례로 드러나다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마침내 서진이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말투만큼은 또박또박했다.


"도련님은··· 참으로 이기적인 분이시네요."


"······."


"저에겐 도련님의 말이 이기적으로밖에 안 들리네요. 제가 진정 무얼 원하는지 도련님께서는··· 알고 있지 않나요?"


사실 진혁은 서진의 말마따나 서진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혹시 있을지 모르는 자신의 죽음 옆에 서진을 매어 둘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진을 포기해야 하는 마음은 결단코 바뀔 수가 없었다.


"맞습니다. 서진 낭자 말대로 나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 후회해 본 적도 없었고, 뒤를 돌아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아왔습니다."


"······."


"하지만 서진 낭자를 포기해야 한다고 결정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계속 후회 중입니다. 물론 지금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


"나는 앞으로도 지금의 이 결정을 후회하며 살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 후회하며 살 겁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위자지도를 다하지 못한 저로서는 이 결정을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이런 걸 보면 서진 낭자 말대로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 분명합니다."


진혁이 연이어 자신의 내심을 쏟아 놓았다. 그럴 때마다 말끝이 가늘게 떨렸는데, 가혹한 말을 내뱉어야 하는 심중의 아픔이 그대로 표현되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서진은 깊게 가라앉은 진혁의 눈동자만 바라보았다. 그리 오래 보아 온 사람은 아니지만 진혁은 한순간의 감정 동요나 그저 그런 가벼운 생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릴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실상 서진도 진혁이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내린 결정이 결코 쉽지 않고, 절대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방금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다시 한 번 느낄 수가 있었다.


'가엾은 분······.'


지금 진혁은 자신을 떠나보내려 하고 있었다. 마음은 절대 그렇지 않으면서도 처해진 현실 때문에 억지로 자신을 밀어내려고 하는 것인데, 하지만 자신을 아껴주고픈 진혁의 마음도 고스란히 엿보였다. 이렇게 자신을 아껴주려는 사람이라 지금의 그 결정을 바꾸지 않을 게 분명했고, 오히려 더욱더 자신을 밀어내려 할 게 틀림없었다.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서진은 자신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실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자문이었다. 진혁은 떠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저렇게 아끼고 사랑해 주는 진혁의 품을 이젠 두 번 다시 떠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진혁이 서진을 사랑하고 있었듯이 서진도 진혁을 존경하고 사모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마음이 어느새 가슴에 가득 채워진 상태였는데, 그 마음은 진혁을 처음 봤을 때부터 시작해 어제도 존재했었고, 오늘도 변함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치 않고 영원하길 바랄 뿐이었다. 서진은 그렇게 진혁을 사랑하고 있었다.


어쨌든 서진에게 있어 진혁은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사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떠나라고 한다고 해서 떠날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떠나보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진혁이 저렇게 위자지도를 내세워 완강하게 버티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비록 마음에 없는 염불이지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서진은 다시 진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태산처럼 견고한 눈빛을 하고 있는 진혁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이면에 감춰져 있는 깊은 슬픔도 함께 보였는데, 그 슬픔엔 자신을 걱정하고 자신의 안위와 미래를 염려해 주는 진혁의 진짜 마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 모든 게 너무나도 훤히 들여다보여 서진은 가슴이 아려 올 수밖에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른 후 서진이 생각을 정리한 듯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련님은 스스로를 이기적인 분이라 하셨지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개의치 않겠어요. 저도 이제부턴 이기적으로 살 테니까요."


서진의 말에 진혁은 눈을 감았다. 다행 아닌 다행이었다. 어찌 되었든 서진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비록 서진의 냉담한 말에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며 아려 왔지만, 그건 이미 각오하고 있던 말이었다. 더욱이 자신이 자진해 만든 상황이었기에 서진의 단호한 말을 서운해 할 수도 없었고, 섭섭해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진혁이 야무지게 헛다리를 짚은 거였고, 더 나아가 저 멀리 삼천포까지 내려가는 명백한 착각이었다.


"도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낭순이랑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설마 그 위험천만한 싸움터에 낭순이를 데려갈 생각은 아니겠지요?"


"예? 그게 무, 무슨 말이예요, 서진 낭자?"


"무슨 말인지 몰라서 묻는 거예요?"


"예? 예······."


"조금이라도 다쳐서 돌아오면··· 그땐 밥 없는 줄 아세요. 이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서, 서진 낭자······."


"단, 아버님께 자식 된 도리를 어느 정도 했다고 판단되면··· 그땐 모든 걸 내려놓고 곧바로 저와 낭순이에게 돌아와야 해요. 아시겠죠?"


"··· 서진 낭자."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해서 보내 드릴게요. 그리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러니 저는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도련님이 돌아올 때까지 낭순이랑 집 잘 지키며 기다리고 있을게요.'


서진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도련님, 그거 아세요?"


"······?"


"남자는 먼저 사랑을 하고 그다음에 사랑을 받지만, 여자는 사랑을 먼저 받고 그다음에 사랑을 한대요."


"그, 그래요?"


"예, 그리고 여자의 사랑은 남자의 사랑과 달라서 커지기만 할 뿐 줄어들지는 않는다고 해요. 그런 만큼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여자는 그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든, 얼마큼 나쁜 버릇과 습관을 가지고 있든 끝내는 요서하고 포용한다고 해요."


"설, 설마하니요?"


"설마가 아닌 것 같아요. 아마 그래서 제가 방금 도련님의 그 고집을 순순히 수용했나 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도련님?"


"그, 그럴까요?"


"무슨 반응이 그리 뜨뜻미지근해요? 그리고 제 얘기를 듣고 뭐 다른 거··· 더 느껴지는 게 없으세요?"


"예? 뭐, 뭐가요?"


'바보, 숙맥, 맹추··· 내가 방금 자기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서진이 눈을 샐쭉하게 흘겼다.


"뭐가 더 느껴지는 게··· 진짜 없으세요?"


"글쎄요······."


"도련님, 오늘 아침밥··· 없다는 거 아시죠?"




* * *




진혁과 귀동은 임경달과 송유석을 비롯해 서진과 서연, 그리고 낭순이의 배웅을 받으며 칠보 산중의 수간두옥을 나서고 있었다. 진혁의 등에는 활과 화살이 싸여 있는 동개가 메어 있었고, 손엔 박달나무 창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귀동의 손에도 제법 짱짱한 창 한 자루가 들려 있었는데, 며칠 전 관군과의 싸움에서 노획한 무기였다.


그렇게 길을 나선 진혁과 귀동은 그로부터 한참 후 일단의 무리에 섞여 동진강 방죽 위를 걷고 있었다. 그 무리는 진혁과 귀동을 빼고 대략 스무 명 정도 되었는데, 귀동이 아재라고 부르는 김종삼을 비롯해 화전촌과 그 인근 촌락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농민군에 합류하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인데, 원래는 서른 명 정도가 농민군에 합류하려 했으나 엊그제 관군과의 싸움에서 네 명이 죽고, 임경달을 포함해 대여섯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숫자가 이리 스무 명 정도로 줄어든 거였다.


"귀동 아우···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어때, 응?"


진혁이 염려 가득한 눈빛으로 귀동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 진혁 형님, 이 동진강만 쭉 따라가면 부안이 나오는 거예요?"


진혁의 염려가 담긴 권유에 귀동은 한눈파는 짓을 하며 동문서답으로 엄벙뗑을 부렸다.


"으응? 응, 부안을 경유해 서해로 흐르는 이 동진강은 그 발원이 칠보 산중이야. 그러니까 이 동진강만 쭉 따라가면··· 우쒸, 자꾸 엉뚱한 데로 말 돌릴 거야? 말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해 봐. 어쩔 거야? 귀동 아우는 아직 어리단 말야."


"이 소제가 어리긴 뭐가 어려요? 제 또래들도 저리 다 함께 가는데요."


진혁이 권유에서 점차 닦달로 바뀌어 가자 귀동이 슬쩍 무리 뒤를 따르는 몇 사람을 가리켰다.


"응? 귀동 아우와 한패였던 그 녹림호걸들 말야?"


"아쒸, 진혁 형님!"


진혁과 귀동이 그렇게 방죽 위를 걸으며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김종삼이 슬며시 다가와 진혁에게 말을 건넸다.


"저, 도련님. 송 노인의 말을 들어 보면 며칠 전만 해도 태인현에 관군들이 쫙 깔렸다고 하던데 이리 계속 가도 되겠습니까요? 다른 길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요?"


"아재, 그에 대한 말씀을 드리기 전에··· 당분간 함께 지내야 될 것 같으니 다른 말씀부터 먼저 드리겠습니다. 우리 귀동 아우 부친이신 춘장 어른은 워낙 고집이 세어서 제가 그동안 그리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여태껏 꼬박꼬박 도련님이라 칭하며 극존칭을 해 왔는데요. 사실은 제 주제가 몰락할 대로 몰락한 양반밖에 안 되니 아재께서는 그리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러니 앞으론 호칭도 귀동 아우 대하듯 그리 부르고, 말씀도 편히 해 주십시요."


그렇잖아도 적당한 기회를 보고 있던 진혁은 김종삼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자 마침 잘되었다는 심정으로 자신의 평소 뜻을 전했다. 하지만 시대가 다소 변했다 해도 반상의 법도라는 거대한 벽이 여전히 가로막고 있는 만큼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이고,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요?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요, 도련님."


"그래요? 춘장 어른과 둘도 없는 친우라 아재 또한 고집이 세다, 그 말이죠? 그렇다면 저도 아재랑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겠습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라 진혁이 짐짓 정색을 하며 엄포를 놓았다.


"저, 도련님. 절대 그럴 수 없지만, 도련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하지만 그게 어디 하루아침에 되겠습니까요? 그러니 당분간은 이대로······."


진혁의 엄포에 김종삼이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당면한 상황을 일시적으로 모면하기 위한 허튼수작일 뿐이었다.


"어째 이것도 춘장 어른과 수법이 똑같네요. 춘장 어른도 처음에 그리하겠다고 말씀하시곤 일 년이 넘도록 안 고치시고 지금까지 쭉 이어 오던데··· 어쨌든 아재는 춘장 어른과 다를 거라 믿어 볼게요. 아, 그리고 저와 귀동 아우가 조금 앞서 나가 살펴보고 올게요. 그럼 굳이 먼 길로 돌아갈 필요 없잖아요."


평생을 살아오며 뿌리 깊게 박힌 근성이었다. 그런 만큼 하루아침에 개선될 리가 만무했고, 그 사실을 진혁도 이미 임경달을 통해 겪어 본 경험이 있었기에 더 이상 무리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멈췄다.


"그러면 도련님이나 귀동이가 너무 힘들지 않겠습니까요?"


"대신 우리는 아재들보다 훨씬 더 젊잖아요. 그러니 앞의 움직임을 살피는 건 우리에게 맡겨 주시고, 우선은 우리 뒤를 따르기만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요, 도련님."


"귀동 아우, 이쯤에서 한번 앞을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 말야."


"예, 진혁 형님. 어서 가시죠."


"잠깐, 먼저 이 우형에게 약속부터 하나 해."


"······?"


"언제 어디서나··· 항상 내 옆에 붙어 다닌다고."


사실 귀동도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진혁도 이미 알고 있었는데, 하지만 걱정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기에 귀동을 자신의 옆에 묶어 둬야만 했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가 있었다.


"헤헤, 그건 이 소제가 바라마지않는 건데요."


"쳇! 암튼 명심해, 알았지?"


"예,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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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노령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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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총장 : 앙천부지(仰天俯地。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굽어본다) 19.09.26 263 3 11쪽
77 제 18장 :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반한다) (3) 19.09.25 91 2 31쪽
76 제 18장 :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반한다) (2) 19.09.24 60 2 26쪽
75 제 18장 :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반한다) (1) 19.09.23 64 2 32쪽
74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4) 19.09.20 65 2 18쪽
73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3) 19.09.19 65 2 24쪽
72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2) 19.09.18 65 2 25쪽
71 제 17장 : 어궤조산(魚潰鳥散。물고기 떼처럼 헤어지고 새 떼처럼 흩어진다) (1) 19.09.17 92 2 23쪽
70 제 16장 : 안분지족(安分知足。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3) 19.09.13 80 3 20쪽
69 제 16장 : 안분지족(安分知足。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2) 19.09.12 66 2 24쪽
68 제 16장 : 안분지족(安分知足。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 (1) 19.09.11 78 2 32쪽
67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4) 19.09.10 77 2 16쪽
66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3) 19.09.09 64 2 23쪽
65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2) 19.09.05 66 3 21쪽
64 제 15장 : 만사무석(萬死無惜。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1) 19.09.04 71 3 24쪽
63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3) 19.09.03 73 2 29쪽
62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2) 19.09.02 62 3 22쪽
61 제 14장 : 혜분난비(蕙焚蘭悲。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 (1) 19.08.30 92 3 32쪽
60 제 13장 :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 (3) 19.08.29 96 2 30쪽
59 제 13장 :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 (2) 19.08.28 88 2 29쪽
58 제 13장 :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 (1) 19.08.27 92 3 27쪽
57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4) 19.08.26 79 2 20쪽
56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3) 19.08.23 71 2 15쪽
55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2) 19.08.22 73 2 26쪽
» 제 12장 : 불요불굴(不撓不屈。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 (1) 19.08.21 78 3 25쪽
53 제 11장 :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다) (3) 19.08.20 99 3 26쪽
52 제 11장 :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다) (2) 19.08.19 80 3 28쪽
51 제 11장 :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늘을 부르며 소리쳐 울다) (1) 19.08.16 95 3 25쪽
50 제 10장 : 공도동망(共倒同亡。넘어져도 같이 넘어지고 망해도 같이 망한다) (4) 19.08.15 84 3 18쪽
49 제 10장 : 공도동망(共倒同亡。넘어져도 같이 넘어지고 망해도 같이 망한다) (3) 19.08.14 94 3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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