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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가 망나니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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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해
작품등록일 :
2024.02.28 12:34
최근연재일 :
2024.03.27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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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580

작성
24.03.01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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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사직 (2)

DUMMY

루퍼스 시 경비대의 직위는 크게 네 가지로 부류로 나뉜다.


가장 낮은 것은 사병급. 경비대원을 비롯한 대다수의 인원이 여기에 속한다. 여느 치안조직이나 군대가 그렇듯 까라면 까야 하는 자리고, 실력 또한 제식 장비인 라이플을 적당히 다룰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애초에 군대의 힘이란 조직력에서 나오는 것이니 명령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는 이유였다.


두 번째는 부사관급. 열 명에서 스무 명 내외의 조원을 이끄는 경비조장과 이를 보조하는 부조장이 여기에 속한다. 사병급에서 연차가 쌓이거나, 실력이 특출난 자들이 진급하면 오를 수 있는 자리이며, 연금이 나오는 자리이기도 하다.


다만, 연차만 쌓여도 오를 수 있는 계급이라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부사관급 인력은 그리 넘쳐나지 않았다.


괴물과 괴현상이 판치는 루퍼스 시에서는 장기복무를 하며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비범한 일이어서였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라는 자연계의 법칙은 경비대에서도 잘 적용되고 있었다.


세 번째는 사관급. 여기서부터는 직위 뒤에 ‘관’자가 붙으며 장교 대우를 받는다. 20년 이상 장기복무에 성공해 승진한 자라면 보안관. 사무나 행정에 재주가 있는 자는 보급관이나 재무관과 같은 직책을 맡는다.


보안관을 제외하면 사무직의 성격이 강하고, 보안관이라 할지라도 현장에 직접 나서는 일은 드물다. 비전투직이라면 순찰에 동원되느니 얌전히 펜이나 놀리는 편이 낫고, 보안관을 맡을 정도로 연차가 쌓인 인물이라면 보통 40대 후반에서 50대 정도의 나이가 되기에 일선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영관급. 경비대의 부대장, 그리고 참모장과 휘하의 작전참모가 여기에 속한다. 장교 중에서도 고급인력이기에 숫자는 언제나 열 명 내외로 유지되고, 암살이나 납치 등에 휘말릴 경우 경비대 전체에 타격이 크기에 항상 호위가 뒤따른다.


그리고 경비대에서 이러한 계급체계를 벗어난 유일한 존재가 바로 경비대장 카를 헨더슨.


명목상으로는 영주이자 시장인 루퍼스 백작을 체포할 권한마저 지닌, 루퍼스 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물론 법 위에 군림하는 영주를 체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카를 또한 루퍼스 백작가의 후원을 받아 경비대장 자리와 기사 작위를 받은 몸이었으니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럼에도 경비대장이라는 직위와 그가 살아온 세월이 지닌 무게는 남달랐기에 수많은 이들이 경비대장을 대하기 어려워하곤 했다.


40년을 넘게 경비대에 말뚝을 박고 살아온 군인이자 기사가 권력까지 쥐고 있으니 심기를 건드리게 되면 골치 아픈 정도로 끝나지 않을 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백작가의 후배 기사이자 경비조장인 다인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경비대에 복무한 지 3년을 넘겼어도 경비대장 앞에선 핏덩어리나 다름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상대는 ‘루퍼스 백작’을 3명이나 섬겨본 대선배이자 노익장이었다.


“그래서, 사직서를 내러 왔다는 건가?”


“네, 대장님.”


경비대장의 말에 다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사직서를 그리 달가워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연금이나 퇴직금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다음 조장에게 인수인계만 마치고 나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고 싶습니다.”


“영주님의 의중인가?”


경비대장의 말에 다인은 고개를 저었다.


“개인적인 일입니다. 영주님의 승인이 필요하다면 따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그러면 기사 다인 경이 아니라 경비조장 다인으로서 온 거로군. 맞나?”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허락할 수 없다네.”


단호한 대답과 함께 집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늙은 기사이자 군인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다인은 상대가 진심이라는 것을 확신한 뒤 입을 열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유는 두 가지일세. 기사로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면 늘 그랬듯이 영주님이 명령을 내렸을 테고, 그런 게 아니라면 경비대에서 해야 할 일은 아직도 산더미일 테니까.”


“...일을 미뤄둔 적은 없습니다. 쌓아두는 편도 아니고요.”


말 그대로였다. 그는 경비조장의 자리에 오른 이후에도 게으름 따윈 피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린 나이에 경비조장이 되었기에 선배들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였고, 그런 와중에도 백작가의 기사로서 수행해야 할 명령이 생기면 쉬는 시간마저 아껴가면서 일했다.


그렇기에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는 경비대장의 말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고, 경비대장 카를은 그런 다인을 바라보며 차분히 대답했다.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공화파 반동분자 색출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사교도 근절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지. 게다가 신인류 운동이니 해저이주론이니 하는 것들은 또 어떻고?”


“저보다 능력 있는 선배님들도 많지 않습니까.”


“자네보다 강한 자는 별로 없지. 그리고 자네가 없는 만큼 피를 볼 테고. 그래도 괜찮나?”


“......”


다인은 늙은 지휘관의 교활함에 할 말을 잃었다. 상대가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노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서였다.


그 방향이 시민의 안전이라는 공공선을 향해있기에 망정이지. 사적인 이익을 향해있었다면 경비대장 카를은 진작에 최악의 ‘반동분자’로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그렇게 잠깐의 정적이 흐른 이후. 카를은 먼저 정적을 깨며 말을 이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게. 자네가 일을 왜 그만두려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적어도 자네가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그만두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네.”


그는 다인의 사직서를 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이 다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돌아올 집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겠나. 설령 이 도시를 사랑하진 못하더라도. 이 도시에 사랑하는 게 남아있다면 퇴직은 미뤄주길 바라네. 때가 되면 영주님이 직접 명령을 내릴 테니까.”


경비대장 카를. 다인이 그를 불편하게 여길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나이로는 노인이고, 계급으로는 까마득한 상관이며, 백작가의 가신으로서도 선배인데다가, 칼 쓰는 법이나 조금 익힌 그와는 달리 펜을 다루는 솜씨마저도 출중했다.


다만 무엇보다 가장 끔찍한 점은 그가 광인일지언정 악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는 10년 넘게 단 하루도 휴가를 쓰지 않으며 경비대에 헌신한 괴인이었고, 유혈사태로 인해 경비대에 인력 공백이 생길 경우엔 휴일을 반납한 뒤 직접 순찰을 돌기까지 하는 광인이었다.


건실하게 미친 또라이. 자칭 미치광이들을 때려잡는 망나니 경비대장. 괴인과 괴물이 미쳐 날뛰는 세상에서 40년이 넘도록 경비대장 노릇을 한 노괴.


그런 인물이 내뱉는 정론은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었고, 다인 역시 이를 부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애초에 저런 정론을 부정할 정도로 필사적인 사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급속도로 무거워진 명성이나 직위가 부담스럽다곤 해도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경비대를 그만두고 하려는 일 역시 당장 해내야 할 정도로 급박한 일인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경비대에서의 처우나 복지 역시 불만족스러운 수준인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그의 빠른 승진부터가 루퍼스 백작의 입김뿐만이 아니라 경비대장 카를의 신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사표를 반려한다는 것은 그만큼 조직 내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일이었으니. 그로서는 오히려 감사하다고 말을 해야 할 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기에 결국, 다인은 봉투도 뜯어지지 않은 사직서를 품에 넣었다.


루퍼스 백작에게 부탁해 그만두는 방법도 있기야 했지만, 항명에 가까운 짓을 하면서까지 그만두고 싶진 않아서였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실례될 건 없었으니 어서 나가 보게. 적어도 이직 욕심 때문에 그런 게 아니란 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다인은 경례를 마친 뒤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경비대 본부의 정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서자 눈 덮인 루퍼스 시의 풍경이 그를 맞이했다.


거리 곳곳에 설치된 증기기관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맥동하고 있었다.


굵직한 파이프 배관은 건물과 건물 사이를 넘나들며 온수를 공급하고 있었고, 도로를 따라 빼곡하게 들어선 건물들은 굴뚝을 통해 회백색 연기를 내뿜으며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가로등이 늘어선 도로를 따라, 수많은 시민들이 각자 길을 걷고 있었다.


두꺼운 가죽 외투를 두른 신사. 귀금속 따위로 화려하게 치장한 귀부인. 넝마를 대충 두른 채 허겁지겁 달려가는 꼬마 아이. 거리에 쌓인 눈을 치우는 종업원. 왼쪽 다리에 오토메일을 이식한 퇴역 군인. 행인에게 성냥을 팔러 나온 할머니. 신문을 팔러 나온 소년과 구두닦이를 하러 나선 소녀.


그는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루퍼스 시의 풍경을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 신문팔이 소년에게서 오늘치 신문을 하나 구매한 뒤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별일 없어 보여서 다행이네. 그래서 그만둬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거였는데... 일이 골치 아프게 됐어.’


루퍼스 시는 그럭저럭 살만한 곳이었다. 화폐가 가치를 유지하고, 주류나 신문 따위를 생산할 여력이 있는 것만 봐도 ‘지상에 몇 안 남은 대도시’라 부르기엔 충분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요즘 시대가 살만하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요즘 시대는 살만하기보단 암담한 쪽에 가까웠으니까.


설국의 수도가 심연으로 가라앉은 이후. 그날 이후 150년이 넘도록 온 세상의 시간은 밤에 멈춰있었다.


이른바 ‘극야’라고 부르는 이 현상으로 인해 태양은 떠오르지 않았고, 이상기후로 인해 혹한과 눈보라가 세상을 좀먹었으며, 이러한 환경에 적응한 기이한 동식물이 눈 덮인 설원을 오가며 괴담을 자아내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현상의 원흉인 심연은 지금도 설국 전역의 지하에서 똬리를 튼 채 사람들이 탐험가가 되길 유혹하고 있었다.


어서 지하로 내려오라고.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든. 더 많은 재물이나 보물을 원해서든. 아니면 지상에선 밝혀낼 수 없는 신비를 파헤치기 위해서든.


갈증을 느꼈다면 마땅히 우물을 파고 내려오는 것이 옳다고.


심연의 부름에 응답한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 탐험가가 되었고, 그들 중엔 막대한 부와 명성을 손에 넣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다만 150년에 걸친 인류의 원정이 실패한 이후엔 한탕주의자나 강도, 미치광이들 정도만이 남았을 뿐.


요즘 시대에 진정 탐험가라 부를만한 이는 그리 많지 않았고, 심연을 탐험하겠다고 나서는 자는 사기꾼 취급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다인은 곧바로 심연으로 내려가는 대신 루퍼스 백작의 제의를 받아 경비대에 들어왔다.


언젠가 심연의 끝자락까지 내려가 이 끝없는 겨울을 끝내려면 자금과 인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비대에서 활동하며 과분할 정도로 이름을 알린 이상, 개인으로서의 다인은 경비대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실적을 쌓아 루퍼스 백작의 신임을 얻은 이상 인맥은 확보한 셈이었고, 자금이라면 루퍼스 시에서 쌓은 명성을 통해 귀족과 사업가들에게서 투자금을 받으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러니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단 한 가지. 경비대장이 말했던 ‘돌아올 집’에 관한 부분뿐이었다.


‘왜 그만두려 했는지 아마 알고 계셨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돌아올 집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하지도 않으셨을 테니까.’


그는 멸망한 도시의 말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의 실향민으로서, 고향이 멸망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멸망한 소도시의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하나였다.


‘여기가 고향은 아니긴 해도, 같은 꼴이 되게 둘 순 없지. 그래서야 저승에서 스승님을 뵐 면목도 없을 테니까. 대장님도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거겠지.’


경비대장이 했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도시는 위태롭고, 경비대엔 일손이 모자란 게 현실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손이 모자라서 사표를 못 쓰게 하는 거라면, 일손이 필요 없는 환경을 만들면 그만이었으니까.


게다가 사표를 반려 당할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니.


다인은 결국 이럴 때를 대비해 구상해둔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조기 퇴직 계획’.


그 계획의 시작점은 3년간 경비대에서 활동하면서 얻은 이름에 있었다.


칼잡이 다인. 10대에 소드엑스퍼트가 된 천재 검사. 최연소 경비조장. 루퍼스 백작의 망나니. 걸어 다니는 괴담 덩어리. 성검의 주인. 괴인 사냥꾼.


유명세가 생겨남에 따라 그를 부르는 이름은 점차 늘어났고, 그런 이름 중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 또한 적지 않았다.


이를테면 공화주의자 다인.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면 반동분자로 낙인찍힐 이름이 그러했다.


그는 루퍼스 백작의 심복임과 동시에 공화주의자 집회의 3년 차 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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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직 (1) 24.02.29 2,245 50 12쪽
1 기사 괴담 +13 24.02.28 3,150 5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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