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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해 님의 서재입니다.

백작가 망나니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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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해
작품등록일 :
2024.02.28 12:34
최근연재일 :
2024.03.27 12:20
연재수 :
2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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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580

작성
24.02.29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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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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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사직 (1)

DUMMY

칼잡이 다인의 스승.


브리타니아의 소드마스터 에드워드는 한때 검술을 원예에 빗대어 표현한 적이 있다.


초심자인 소드비기너는 ‘파종기’를 거치는 중이니 기초 체력과 기본기를 다져야 하고, 숙련자인 소드유저는 ‘발아기’를 거치는 중이니 기본기를 다지는 것에 더해 정신 또한 올곧게 가다듬어 무럭무럭 자라나야 한다는 식이었다.


그리고 전문가의 영역인 소드엑스퍼트. 육신과 기술, 정신이 모두 한계점에 이르러 오러를 싹 틔우는 경지.


에드워드는 이 시기를 ‘개화기’라 부르며, 이 경지에 오른 자는 마땅히 주군을 찾아 기사 작위를 받아야 한다고 강론했다.


키우는 작물에 따라 열매를 수확할 수도 있는 원예와 달리.


무릇 검술이란 밥을 벌어먹는 기술이 아닌, 밥을 빌어먹게 해주는 기술이라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검을 잘 쓴다고 해서 농사를 잘 지을 수는 없다. 짐승을 사냥하려면 활이나 총, 덫 따위를 다룰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며. 사무직을 맡으려면 고등 교육을 받은 펜잡이와 경쟁해야 한다.


따라서 검술이란 밀알 한 톨마저 싹 틔울 수 없는 기술이며, 검을 전문적으로 익힌 자가 굶어 죽지 않으려면 주군을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를 마다하고 방랑기사가 되는 선택지도 있기야 하겠지만.


말이 좋아 방랑기사지, 사실 방랑기사란 언제 강도나 도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무뢰배나 다름없는 게 현실이었다.


낭만과 야만이 공존하던 왕정 시절에도 방랑기사가 주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하물며 증기기관과 함께 산업 시대에 접어든 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칼잡이가 배를 채우려면 다음과 같은 방법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한 지역의 영주 자리를 찬탈하거나.


아니면 영주를 섬기는 기사나, 귀족이나 탐험가를 비롯한 유력 인사의 경호원이 되거나.


그도 아니면 뒷골목의 실세로 군림해 ‘보호세’를 걷는 것 정도.


이 중에서 한 지역의 영주 자리를 찬탈하는 것은 영주의 통치가 어지간히 허술한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총과 대포로 전쟁을 치르는 시대인 만큼, 아무리 ‘검의 전문가’라고 한들 개인이 군대를 이겨낼 순 없는 게 현실이었으니까.


또 다른 선택지. 뒷골목을 전전하며 보호세를 걷는 것은 찬탈 시도보단 안전했다.


어느 날 영주의 눈에 띄어 현상금이 걸리거나, 경쟁 세력과의 항쟁에서 패배하거나, 보호세를 내던 시민들이 그 돈으로 고용한 킬러에게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점이 ‘소소한’ 위험 요소일 뿐.


더럽고 치사한 일이긴 해도 자살행위에 가까운 찬탈 시도에 비하면 못 할 짓은 아니었다.


다만 소드마스터 에드워드의 마지막 제자이자, 17살에 소드엑스퍼트가 된 소년 검사 다인은 이런 일들이 그리 내키지 않았다.


다인이 정착한 대도시인 루퍼스 시의 영주는 설령 흉흉한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이를 제쳐두고 보더라도 영주인 루퍼스 백작은 분명 그의 은인이었다.


이를테면 그가 고향과 이웃을 비롯한 모든 것을 잃은 이후.


고향의 멸망으로부터 홀로 살아남아 루퍼스 시로 망명한 다인에게 루퍼스 백작은 최소한의 숙식을 제공하였으며, 차후에 갚으라는 말만 했을 뿐 이에 대한 비용을 독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마땅한 신분증도 없던 그에게 손수 추천장을 써준 적도 있으니.


그로서는 루퍼스 백작에게 칼을 겨누는 것은 검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차마 못 할 짓이었다.


뒷골목에서 칼잡이로서 생활하는 것 역시 비슷한 이유로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요즘 시대가 검술의 황혼기라 한들 소드마스터의 제자 출신이라는 양반이 뒷골목에서 깡패짓이나 하는 건 우스꽝스러운 짓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스승의 복수와 같은 대의명분 따위도 없었고, 도박이나 사채 따위에 빠져서 돈이 궁한 처지 역시 아니었다.


오히려 독거노인이었던 스승이 남겨준 유산 덕에 정 돈이 급하면 전당포에 유품을 맡기는 방법도 있었다.


이쪽은 설령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지라도 뒷골목에서 구르는 것보단 백배 나은 선택지였다.


그렇기에 스승의 장례식을 치르고, 조만간 18살이 되어 성인식을 치러야 했을 무렵.


탐험가 길드에 들어가 용병 노릇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에게 루퍼스 백작의 제의는 가뭄에 내린 단비와도 같았다.


“추천장은 내가 써 줄 테니 일단은 경비대에 입대하는 걸로 시작해. 거기서 실력을 증명하고, 실적을 쌓으면 너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도 아무도 할 말이 없을 테니까.”


과분한 제안이었다. 사실상 실적에 따라 심복으로 써주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었으니까.


게다가 대도시의 수장이 ‘직접’ 제의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아무리 그가 정치에는 무지한 편인 칼잡이 출신이라곤 해도, 서류로 제안하는 것과 직접 만나서 제안하는 것의 차이를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에 그는 자금과 명성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그러려면 루퍼스 백작의 밑에서 일하는 것이 제일이었다.


혹한과 극야와 함께 세계 각지의 왕정이 무너진 시대에 대도시의 영주는 임금과 다를바 없어서였다.


원하는 만큼 세금을 걷을 수 있고, 법령을 손수 공표할 수 있으며, 판결과 집행 또한 마음 가는 대로 처리할 수 있는 통치자.


루퍼스 시의 세력이 닿는 일대에서 영주는 살아 숨 쉬는 입법부이며, 행정부이며, 사법부였으니.


굳이 왕을 자칭하지 않더라도 영주의 권한은 절대적인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니 명분으로 보든, 실리로 보든.


옛 소드마스터의 격언에 따라 주군을 섬겨야 한다면 루퍼스 백작의 밑에서 일하는 것이 정답일 터였다.


그렇게 18살이 되어 성인식을 치른 직후.


다인은 곧바로 영주의 권유에 따라 루퍼스 시 경비대에 입대하였고, 밑바닥부터 군대 생활을 하며 무서운 속도로 실적을 쌓았다.


곡물 재배용으로 등록한 온실 농원에서 밀주용 과일을 재배한 밀주업자 일당을 일망타진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감히 세금을 내지 않고 술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살인적인 과징금을 대가로 치러야 했다. 그들이 과징금을 내지 못해 단체로 장기를 팔았다는 얘기가 돈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도시 외곽의 치안을 유지하던 ‘자칭’ 보험회사를 습격한 적도 있었다. 그는 이 보험사가 루퍼스 백작과 연관 있다는 증거를 찾아 불태운 뒤, 그들의 비자금을 찾아 관세청에 넘겼다. 루퍼스 백작으로부터 소소하게 포상금을 받은 것은 덤이었다.


소위 ‘해신 숭배자’라고 불리는 사이비 종교 집단과 혈투를 벌인 적도 있었다. 그들은 광신도답게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불법 총기를 난사하며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에테르라 불리는 기이한 수증기를 도시에 흩뿌려 생화학 테러를 시도했다.


그날 다인은 놈들이 쏘는 총알을 피하거나 검으로 튕겨내면서 홀로 일흔두 명의 해신 숭배자를 살해했다.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생존자 따위는 남겨두지 않았기에 시민들 사이에선 과잉진압이 아니었냐는 목소리가 암암리에 새어 나왔다.


그러자 루퍼스 백작은 그에게 3일간의 정직 처분을 내렸다. 시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정직이라는 이름의 휴가가 끝나고 난 이후.


루퍼스 백작은 그에게 기사 작위를 내림과 동시에 도시의 이름에서 따온 ‘루퍼스’라는 성씨를 하사했다.


실로 루퍼스 백작다운 쇼맨십이었고, 덕분에 시민들 사이에선 칼잡이 다인에 대한 소문이 성황리에 떠돌기 시작했다.


멸망한 도시 출신의 천재 칼잡이. 소드마스터의 마지막 제자. 루퍼스 백작이 키운 망나니. 19살엔 기사 작위를 받고, 20살엔 경비대의 부조장이 되었으며, 21살이 되던 해엔 경비조장이 된 괴물 신입.


그리고 21살이 된 지 4달이 된 지금.


성씨 하나 없던 고아에서 ‘다인 루퍼스’가 된 칼잡이 청년은 자신을 향한 시선에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싸구려 언론지에선 그가 루퍼스 백작의 애첩이 아니냐는 소문을 뿌려대곤 했다.


나이도 대여섯 살 차이 날 뿐이고, 성씨도 같으니, 사실상 결혼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 밀회를 즐기지 않겠냐는 말이 나돌았다.


이런 소문은 다인의 면전에서 루퍼스 백작을 모독한 주정뱅이 하나의 혓바닥을 칼로 베어낸 뒤에야 한결 수그러들었다.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어도 언제 어디서 루퍼스 백작의 망나니가 나타나 혀를 자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심심풀이용으로 떠들어댈 소문의 장르가 딱히 로맨스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다인 루퍼스’가 한 사람이 아니라 집단이고, 여러 사람이 이름을 돌려쓰고 있을 뿐이라는 음모론도 있었다.


비슷한 소문으론 그가 사람이 아니라 루퍼스 백작이 비밀리에 만들어낸 자동인형이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관이었던 것은 그의 스승이었던 소드마스터 에드워드가 제자의 몸에 빙의한 것 아니냐는 소문이었다.


검사로서의 성장 속도도 무서울 정도로 빨랐고, 그간 실적을 쌓으며 보여준 실력 또한 ‘소드엑스퍼트’라기엔 범상치 않은 면모가 있어서였다.


그는 검으로 총알을 튕겨내는 묘기를 보인 적도 있었다. 오러를 두른 건틀릿으로 건물을 부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심지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던가, 검을 뽑지도 않고 장정 대여섯을 미쳐버리게 하여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는 괴담마저 떠돌았다.


하나같이 기이한 이야기들뿐이었기에 이를 전부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소드엑스퍼트는 오러를 통해 신체를 강화하거나 검에 오러를 둘러 절삭력을 높이는 것에 집중하기 마련이니. 검술을 갈고닦는 과정에서 한두 개 정도를 익히게 되었다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저토록 괴담에 가까운 기술을 모두 익혔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저런 이야기를 믿느니 죽은 소드마스터가 무덤에서 뛰쳐나와 제자의 몸을 차지했다는 얘기를 믿겠다는 사람마저 있을 정도였다.


성좌 신앙과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강령술 따윈 많고 많은 마법 중 하나였으니 마냥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렇게 실력이 실적으로 이어지고, 실적이 소문을 낳으며, 소문이 괴담으로 자라날 무렵.


다인은 신문을 읽던 중에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이제는 슬슬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망나니로서 음해당하는 것 못지않게 칼잡이로서의 명성 또한 과분할 정도로 쌓은 것 같다고.


그는 루퍼스 백작의 기사이자 경비대의 일원으로서 충분히 활약했고, 이 이상 명성을 쌓으려면 옛 시대에 멸종했다던 고룡이나 사교도의 우상인 해신이라도 살해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니 이제 소기의 목적은 이뤘다고 생각하며 사표를 내러 갈 무렵.


경비대장의 집무실에 도착한 다인은 자신이 한가지 착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사표를 내는 것은 그의 몫이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경비대장의 권한이라는 점이었다.


카를 헨더슨.


루퍼스 백작가의 망나니 출신 경비대장.


그는 젊은 경비조장의 사표를 윤허하지 않았다.


직책과 연륜에 맞게 곱게 포장해서 말하긴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요즘처럼 흉흉한 시국에 싱싱한 인재를 방생할 수는 없어서였다. 그의 눈에 다인 루퍼스는 쉽게 놓아줘서는 안 되는 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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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직 (1) 24.02.29 2,245 50 12쪽
1 기사 괴담 +13 24.02.28 3,150 5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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