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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비스1
작품등록일 :
2020.02.21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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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9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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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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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8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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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95. 예언 (2)

DUMMY

라비의 배를 타고서 얼마나 오랫동안 다이브를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라비가 준 레몬캡슐을 대여섯 개는 먹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효과가 있는 모양인지 다이브 하는 내내 멀미에 시달리지 않았다.


나는 테니얼에게 괜히 나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했고, 테니얼은 목숨을 구해준 빚이 있으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무심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우리가 심해우주에서 빠져나와 처음 본 행성에 착륙하게 되자 테니얼은 조금 신경이 날카로워진 듯 별거 아닌 일에도 라비와 투닥거리며 말다툼을 하곤 했다.


세렌디피티호과 라비의 미크리-아므론호가 착륙한 곳은 안개가 가득한 골짜기의 바닥이었다.


이 곳은 배 두 척이 착륙할 만큼 넓었다. 하지만 사방을 두꺼운 커튼처럼 드리운 안개 때문에 고개를 들어보아도 골짜기의 바닥면을 두르고 있는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 안개는 얼마나 짙었는지 팔을 앞으로 뻗으면 손가락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끼가 잔뜩 낀 바위가 도처에 널려 있었기 때문에 조심해서 걸어가지 않으면 미끄러져 넘어지기가 십상이었다.


이런 곳에서 넘어지면 몸이 다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넘어졌다가 일어서면 아까까지 옆에서 함께 걸어가던 주변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고 헤매게 되는 것이 문제였다.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지고족이나 이런 환경에서 길을 잃지 않고서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었을 테지만, 적절한 장비가 없는 다른 종족이라면 길을 잃고 헤멜 것이 뻔했다.


배에서 내리면서 나는 라비에게 말했다.


"잠깐 세렌디피티호에 들릴게요. 로즈와 앰버에게 인사도 못했어요."


"시간이 많이 지나서 빨리 가야 해요."


라비의 말에 테니얼은 못마땅한 얼굴로 라비 쪽을 향해 턱을 쳐들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라비와 테니얼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라비와 테니얼을 따라서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도 세렌디피티호와 라비의 배 모습은 순식간에 짙은 안개에 쌓여서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안개를 헤치면서 한참동안 이 골짜기를 걸었다. 헤맸다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이 안개 속에서 어디로 가는지 제대로 알기나 하는 건지 라비는 어딘가를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내 허벅지에 슬슬 피로가 쌓이기 시작할 때 쯤 앞장서가던 라비는 걸음을 멈추었다. 라비 앞에는 거대한 절벽이 우뚝 솟아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울퉁불퉁한 바위를 매만지는 것 같더니 갑자기 바위 속으로 사라졌다. 테니얼도 그녀가 사라진 쪽으로 몸을 들이밀었고 테니얼의 모습도 바위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버렸다. 내가 테니얼의 뒤를 따라 바위에 내 이마를 들이대자 아무런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안개를 뚫고 지나간 것처럼 나는 바위를 그대로 통과해 그 안쪽에 있는 넓은 공간으로 들어왔다.


바위 안쪽은 이음새가 없이 매끈한 금속 재질로 된 거대한 복도였다


워킹 로더 너다섯대가 여유 있게 늘어서도 될 정도로 넓고 높은 복도는 조명이 설치되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복도를 따라 10여 분간 걸어가자 빛이 비치지 않는 검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 곳에는 우리 셋을 위해 준비한 것처럼 커다란 의자 세개가 놓여 있었다.


라비와 테니얼이 의자에 앉자 나도 남은 빈 의자에 앉았다. 키가 큰 지고족을 위한 의자라 그런지 내가 앉자 발바닥이 바닥에 닫지도 않았다.


내가 의자에 앉자 우리 앞에 펼쳐진 검은 공간에서 어떤 희미한 빛이 물결 속에서 빛나는 것처럼 일렁이는 것 같더니, 곧 그것은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지고족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 지고족은 매우 오래된 나무처럼 보였다. 피부는 거칠한 두꺼운 나무껍질 같았고 굵게 땋아서 뒤로 넘긴 머리는 아래로 늘어진 나뭇가지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은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자신감에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지고족의 노쇠하고 오래된 육체는 부드러워 보이는 천으로 둘러져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한 지고족이 나타나자 또다시 일렁이는 희미한 빛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이 빛무리도 의자에 앉아있는 지고족의 모양으로 바뀌었는데, 입고 있는 옷이나 머리나 몸을 꾸민 장식은 조금씩 달라도 그들의 육신은 바싹 마른 고목처럼 보였다. 이렇게 나타난 지고족은 모두 열네명이었다. 그들은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라비는 일어나서 희미하게 일렁이며 빛나는 열네명의 지고족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코니지 가문에서 덕토르의 인도를 받은 라비가 원로들께 인사를 드립니다."


라비가 자리에 앉자 테니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니얼도 자신을 온화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지고족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사크라 가문에서 파시르의 인도를 받은 테니얼이 원로들께 인사를 드립니다."


테니얼은 자리에 앉으며 내게 작게 일어나서 소개를 하라고 속삭였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일렁이는 지고족 열넷의 시선이 일시에 내게로 향했다. 이 나이 많아 보이는 지고족들은 경계를 한다거나 위협을 하는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날 환영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호기심에 가득한 눈빛이라고나 할까.


나는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서 더듬거리며 말했다.


"대니 듀플럭스입니다. 어... 저는 인간이구요, 듀플럭스 가문입니다. 제가 인도 받은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어... 여러분께 인사를 드립니다."


라비나 테니얼이 소개한 것처럼 나름 예의를 갖춰서 인사를 한다고는 했지만 어색함을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인사를 마치자 나를 쳐다보고 있던 지고족 중 하나가 메마른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인간은 그 놈과 접촉한 적이 있는 모양이군. 위험하지 않나?"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내가 흐로다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을 두고 말한 모양이었으니까.


"그 작자는 대니를 몇 번 유혹했지만 이겨냈습니다. 정신력이 강한 친구입니다."


라비의 변호에 날 지적했던 지고족은 손가락을 거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이어갔다.


"생각을 읽어보니 그 놈이 이 인간을 향해 사나필 가문이라고 한 모양인데, 그게 무엇인지 아나? 이 인간은 자신이 듀플럭스 가문이라는데?"


" 원래 그 놈은 거짓말을 잘 하지 않습니까. 그런 가문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원로들께서도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라비의 물음에 원로들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후 늙은 지고족들 중 하나가 근엄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곳은 우리 종족에게만 참석이 허락된 곳이다. 하지만 그대는 안건의 특수성과 여기 있는 라비와 테니얼의 추천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대니 듀플럭스 당신은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나 발언을 어느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가?"


"맹... 맹세합니다."


나는 선서를 하듯 한 손을 들었다가 다시 내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내 앞에 일렁이는 지고족들은 모두 나를 빤히 쳐다봤다. 입으로는 맹세한다고 대답했지만 내 진심은 어떤 것인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말이다.


어색할 정도의 침묵이 계속되는 사이에 나는 이 지고족들이 내 대답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 했다. 곧이어 내게 질문을 한 지고족은 라비와 테니얼에게 고개를 돌려 다시 질문했다.


"라비와 테니얼도 그것을 보증하는가?"


"보증합니다."


그는 라비와 테니얼의 대답을 듣자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근엄하게 말했다.


"그럼 의회의 특별 회의를 시작하겠소."


내가 다시 자리에 앉자 여기 빛의 형태로 모인 지고족들도 한명씩 자기를 소개했다.


한명씩 자신의 가문과 인도자, 그리고 도대체 그게 뭘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길고 긴 무언가를 말하며 자신을 소개했는데 한 사람만 해도 이름과 성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길었기 때문에 열네명이나 되는 지고족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는 것은 무리였다. 맨 마지막에 자기를 소개한 풍채 좋은 지고족의 이름의 끝부분이 말라렉스라는 것만 기억났다.


어떤 의식을 치르는 듯 한 긴 소개를 마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지고족은 규범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족이라고 생각했고, 이 이후에 일어날 일들도 이들의 격식과 규범에 따라 길고 지루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개가 끝나자마자 마지막에 자신을 소개했던 지고족이 단도직입적으로 테니얼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 오랜만이군 제독. 도대체 이 의회에는 언제 돌아올 건가?"


제독이라는 말에 테니얼 쪽으로 내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 동안 테니얼의 언행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 예전에 뭔가 큰일을 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제독이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인물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테니얼은 그 표현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저는 제독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중차대한 임무를 실패한 자에게 진급이란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저는 애초에 이 의회의 일원인 적이 없으며 일원이 될 자격도 없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무례하게 들리는 대답에 테니얼에게 질문을 던진 지고족은 화를 낼 줄 알았지만 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것은 의회가 결정할 사항이야. 자네 없이 얼마나 많은 회의가 있었는지 아는가? 라비의 보고를 듣고 우리는 기절초풍했다네. 마지막으로 회의에 참석한 이후에 자네가 뭘 하고 있었는지 말일세. 요즘에는 고철을 팔고 다닌다고?"


"다른 종족들 사이에서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그 돈을 벌려면 뭐라도 해야 하죠."


테니얼의 지금 대답은 상대방이 생각했던 것보다 무례함의 정도가 지나친 모양이었다. 질문을 던졌던 지고족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지고족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자네가 필요하다네. 우리 종족은 점점 줄어들고 있네. 제국에 붙어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자들은 물론이고 어떤 이들은 흐로다에게 속아 넘어가서 육체를 버리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네도 알지 않나?"


"이미 우리 종족은 모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나무가 없어진 이상 멸종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죠."


나는 테니얼의 대답에 깜짝 놀랐지만, 다른 지고족들은 테니얼의 독설에 익숙한 모양인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바로 '그'가 있다면 우리 종족은 다시 회복될 수 있지."


"제가 '그'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지난 번 회의에서 펼친 두루마기도 자네가 '그'라고 말하고 있다네."


"두루마기는 15인이 모두 모여야 펼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테니얼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여전히 심통난 아이를 달래는 듯 한 투로 테니얼에게 차분히 대답했다.


"라비 같은 고귀한 동족이 참석한다면 임시로 두루마기를 펼 수는 있지. 그 내용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말일세."


그 말에 테니얼은 고개를 돌려 잡아먹을 듯 한 눈빛으로 라비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라비는 테니얼의 눈빛에 움츠러들기는커녕 당당하고 여유있는 자세로 테니얼의 시선을 받았다. 둘 사이에 무슨 무언의 대화가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과히 듣기 좋은 내용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다른 지고족들의 표정도 영 불편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만하게, 테니얼. 두루마기는 예언했네. 이 어둠의 시기를 지나는 우리 종족은 다시 일어서게 될 것이라고 말일세. 두루마기가 예언한 조건을 모두 살펴보자면 그걸 이루어 낼 자는 바로 자네일세."


"저도 지금껏 두루마기가 어떤 말을 쏟아냈는지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에서 생존한 자, 순전한 지고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던진 자,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 그리고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자. 이런 것이 조건이라면 여기 있는 라비도 예언을 이룰 수 있습니다.

원로 여러분께서는 이런 내용을 믿습니까? 원로들 말씀처럼 우리 종족은 점점 줄어들어 멸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제국은 이미 온 우주를 다스리고 있고 이젠 흐로다까지 설쳐대지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 종족이 예전 고향에서 행복하게 살던 때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두루마기를 의지할 게 아니라 다른 방법을 생각하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테니얼의 항의는 별 효과가 없는 모양이었다. 처음 말을 꺼냈던 지고족이 대답했다.


"실패했던 그는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를 사랑했던 자가 그를 이끌 것이다. 그는 생명의 빚을 진 다른 고귀한 종족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이것이 지난 번 두루마기의 예언이었네. 그리고 이 예언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네."


그 지고족은 말을 마치면서 긴 손가락을 들어 테니얼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손가락은 천천히 옆으로 움직여 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지고족은 말을 이었다.


"우리가 자네 친구를 여기 함께 오라고 한 것도 이 예언 때문일세. 자네와 라비의 추천도 있었지만 저 친구도 예언의 일부이기에 이곳에 오는 것을 허락한 것이야."


테니얼은 고개를 돌려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입을 떡 벌리고 눈을 크게 뜬 내 표정을 보고서 테니얼은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지고족 예언의 일부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테니얼은 잠시 생각하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원로 여러분께서 정말로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테니얼의 말에 맨 처음 테니얼에게 말을 걸었던 지고족이 대답했다.


"처음 말했던 것처럼 쓸데없는 일은 그만두고 이 의회로 돌아오기 원하네. 하지만 당장 그렇게 못하겠다면 지금 자네가 여기 있을 때 함께 두루마기를 펴길 원하네."


테니얼은 한참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풍채 좋은 이 지고족은 테니얼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자네가 이 예언을 믿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겠네. 하지만 여기 참석한 이상 이 두루마기를 함께 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다른 지고족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테니얼을 쳐다보았다. 마치 그가 곧 땅바닥을 향하고 있는 고개를 들고서 그렇게 하자고 말할 것 같은 희망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더 말없이 생각하던 테니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든 지고족들의 바람에 응답했다.


희미하게 빛나는 지고족들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거기에는 가죽재질인 것처럼 보이는 말린 두루마기가 공중에 떠 있었다. 수십 번, 아니 수백번은 펼쳤다가 다시 말기를 반복한 것처럼 두루마기는 굉장히 낡았고 그 표면은 얼룩덜룩했으며 곳곳에는 갈라진 자국이 보였다. 이 두루마기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천천히 펴졌다.


나는 도대체 이 두루마기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보기 위해 허리를 곧바로 세웠다. 두루마기가 내 시선이 그 표면에 닿을 정도로 아래로 내려왔을 때 나는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두루마기 겉면처럼 세월의 흔적만 남아있었을 뿐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루마기가 완전히 펴지자 두루마기 주변에 있던 지고족들의 눈이 일시에 빛났다. 아니,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마치 눈 안쪽에서 강한 손전등이라도 켠 것처럼 푸르스름한 빛이 여기 모인 지고족들의 두 눈에서 두루마기를 향해 뻗어 나오고 있었다. 곧이어 모든 지고족들이 동시에 입을 열고서 합창을 하는 것처럼 리드미컬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돌아온 탕아이다."


"모든 종족에게 생명의 빚을 진 그는 새로운 새벽을 열 씨앗이 될 것이다."


"그는 과거의 실패와 마주할 것이다."


"그가 모든 종족에게 생명의 빚을 진 것처럼 우리 종족도 빚을 지게 될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올 것이다."


"네 종족이 모일 때 일은 시작될 것이다."


"그가 늙고 병들었을 때 그는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의회의 마지막 회의가 될 것이다."


모든 지고족이 말을 마치자 이들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안광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지고족들 가운데 있던 두루마기는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부스러지기 시작하더니 전체가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그것을 보는 지고족들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경악, 그리고 슬픔이 뭉뚱그려진 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무도 두루마기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한참동안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 침묵은 풍채 좋은 지고족이 깨트렸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우리가 들어온 복도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제독, 얘기해보게. 여기 있는 남자 인간이나 자네의 친구들이 타고 온 배에 있는 종족들에게 자네가 빚을 진 적이 있나?"


테니얼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치였지만 놀랍도록 차분하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들도 절 구해준 적이 있었고 저도 저들을 구해준 적이 있습니다."


"배에 있는 저들은 누구인가?"


"여자 인간, 메몬, 서크족입니다."


뭐? 우리 배에 서크족이 있다고? 나는 고개를 돌려 테니얼을 쳐다보았다. 테니얼은 내 생각을 분명 읽었겠지만 그는 뭔가 다른 생각에 잠긴 듯 아래쪽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자네도 들었듯 두루마기는 오늘 돌아온 자이자 각 종족에게 도움을 받은 자가 '그'라고 말하고 있네. 우리 종족의 새벽을 열 씨앗. 바로 자네가 '그'일세. 자네도 들었지 않는가? 이제 그만 돌아와줬으면 하네, 테니얼 제독."


저 풍채 좋은 지고족은 거의 빌다시피 사정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테니얼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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