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캐릭터
32.
아무리 공중파에 관심 없는 시대라지만 1월 1일, 새해 첫 날 만큼은 예외다.
신년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제야의 종 때문.
J&B테크의 장배전방 4인방 역시 컴퓨터 화면으로 KBS를 틀어놓고 제야의 종을 기다리고 있었다.
- 삼! 이! 일!
뒝~ 뒝~
청아하게 울리는 보신각 소리. 감수성 폭발한 전예지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진짜 올해가 벌써 다 갔구나... 뭔가 눈 깜짝할 새 지나간 느낌이야. 시간 진짜 빠르당...”
“하하하. 그만큼 바빴으니까. 다들 한 해 동안 고생 많았어.”
“형도 고생 많으셨어요. 게다가 마지막에 가장 큰 일은 형이 혼자 다 하셨잖아요?”
“맞아! 장관까지 이용해서 파파야헌터를 완전히 없애버렸잖아? 진짜 대단했다고!”
“하하하. 그리 대단한 일은 아냐. 사실상 파파야가 자초한 일이지. 난 그저 파파야택시 때문에 나빠진 이미지를 사용한 게 전부니까.”
“이미지를 이용했다고?”
“응. 경영을 바둑에 비유하자면 돈이 실리고 이미지는 두터움이야. 여기저기서 실리만 챙기다 보면 결국 중앙에서 큰 걸 잃기 마련이거든.”
“그 말이 딱 맞네. 실제로 파파야가 한창 잘 나갈 땐 이미지가 꽤 좋았지만, 자금 확보를 위해 물적분할을 자주 하다 보니 이미지가 나빠졌으니까.”
“그러네요. 실리를 너무 탐내다 보니 이미지적으로 손해를 본 느낌이 없잖아 있어요.”
“아. 어. 응... 그렇구나! 완벽하게 이해했어!”
종종 바둑을 두는 세 사람과 달리, 바둑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전예지가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뭐... 대충 당장 돈 벌려다 욕을 너무 많이 먹었단 뜻이겠지?’
그래도 본질은 잘 캐치하는 전예지였다.
“그래서 뭐, 신년 계획은 있고?”
“물론이지. 일단 보면서 이야기할까?”
장영주가 간만에 화이트보드를 꺼냈다.
“일단 올해 첫 목표는 BEP 전환, 즉 영업이익 흑자전환이야.”
“엥? 첫 목표가 흑자전환이라고? 우리 이미 영업이익 흑자로 돌아선 거 아니었어?”
“그랬었지. 근데 파파야헌터 놈들이 자뻑하는 바람에 12월엔 다시금 적자로 돌아섰어.”
“아라 말대로야. 업계 유지하려고 길드 지원금도 많이 썼고 수익도 줄었었거든. 뭐. 사실 우리 점유율이 밀렸던 게 제일 큰 이유였지만 말야. 하하하!”
작년 J&B테크의 영업이익은 6, 7, 8, 9월 동안 평균적으로 마이너스 740.
10월과 11월에 각각 206, 1143만원의 흑자를 보긴 했지만 12월 파파야 안전사고 때 -2300을 기록했다.
물론 J&B가 홑몸이라면 이 정도로 손해 볼 일은 없었지만, 장영미의 학원 수강생 수를 유지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이득이기에 돈을 더 써야만 했기 때문.
비록 6%의 지분을 들고 있는 메르세데스 엔젤클럽 회원들이 배당금을 독촉하거나 경영에 압박을 하고 있진 않았지만, 이젠 여러모로 때가 됐다.
“안정적인 수입원을 만들어야 할 때가 됐어. 엑시트를 노리던, 계속 운영을 하던 말야.”
“간단하게 캐시카우를 만들자는 거네.”
“그치.”
캐시카우.
BCG, 보스턴컨설팅그룹에서 기업의 비즈니스 사이클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단어로 간단하게 저투자 고효율 수입창출원이다.
“하긴 우리가 캐시카우 아이템이 필요하긴 해. 저번 파파야 참사 때 매출이 토막난 것도 그렇고, 사건 하나하나마다 매출이 오르락내리락하면 기업가치를 높게 평가받기 힘들어.”
“그치. 특히 우리 같은 IT 벤처는 더더욱 그래. 우리는 서비스만 제공하지 실물을 만들어내지 않으니까 유저수랑 매출로만 평가가 가능하거든. 또 자본확보에도 도움이 되고, 캐시카우가 있으면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아.”
“어... 좋은 건 알겠는데, 캐시카우를 어떻게 만들죠?”
방태훈의 질문에 장영주가 씨익 웃었다.
“태훈아. 너가 작년에 덕질하는 데 돈을 얼마나 썼지?”
“작년에요? 어... 한... 400? 아니다. 한 450정도 쓴 것 같은데요.”
“재작년엔?”
“재작년엔 1000만원 정도...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땐 완전 미쳤었네요. 제대하고 나니까 반동이 심해져서... 아하하...”
쑥스럽게 볼을 긁는 방태훈. 옆에서 전예지가 콧물을 킁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재작년 출시된 ‘디지털 세계에서 살아남기’의 판매수익이 1977만원이었으니까.
“근데 갑자기 저 덕질한 건 왜요?”
“다른 게 아니라 캐시카우 모델로 캐릭터 사업을 잡아볼까 하거든.”
“캐릭터 사업이요?”
“캐시카우 아이템은 저투자 고효율을 지향해야 하는데 캐릭터 사업이 딱 그 계열이니까.”
“맞아. 똑같은 에코백이더라도 캐릭터 일러스트 하나만 넣으면 3000원 더 받을 수 있지. 캐릭터만 제대로 뜨면 하나의 IP로도 오래 해먹을 수 있기 때문에 매출대비 투자도 적게 먹는 편이고.”
“그쵸. ‘진짜’들은 좋아하는 캐릭터 굿즈라면 나오는 족족 사기 마련이니까요.”
진성 오타쿠 방태훈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라이트노벨 IP ‘어떤 과학의 바람장막’ 역시, 나온 지 20년이 다 되건만 아직까지도 준수한 매출을 보여주고 있다.
성인이 되어 구매력이 올라온 골수팬들의 힘이다.
얼핏 보면 호구들 돈 쪽쪽 빨아먹는 거로 비칠 수도 있지만, 정작 좋아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IP가 꾸준히 요구에 응하며 물건을 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애초에 shut up and take my money, 닥치고 내 돈 가져가란 말이 왜 나왔겠는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애정이란 그런 것이다.
“게다가 캐릭터 사업에는 또 엄청난 부가효과가 있지.”
“부가효과? 어떤 거?”
“바로 이미지를 이용해 새 유저를 끌어모을 수 있다는 거야. 실제로 파파야는 파파야프렌즈 이용해서 골프사업도 잡아먹고 있잖아? 이미 파파야헌터가 3월에 서비스 종료한다 선언한 시점에서 유저들 점점 흘러나오기 시작할 텐데, 그 사람들 데려가는 데에 캐릭터가 도움이 된다는 거지.”
“말 되네. 게다가 우리 경쟁상대인 양파는 캐릭터가 약하니까, 우리가 캐릭터 잘만 뽑으면 호객효과도 두 배일 거고.”
“그렇군요... 그나저나 캐릭터 사업 한다면 우리 IP는 역시 농장모드겠죠?”
“물론. 이번에 예지가 힘내준 덕에, 농장모드 계절 이벤트도 대성공이었잖아?”
“맞아요. 뮤튜브 댓글에서도 언급이 많더라고요. 특히 허스키가요.”
“헤헤헤. 뭐. 대성공이라 할 것 까지야... 에헤헤...”
돈 얘기에 침울해졌다가도 칭찬받으니까 금방 좋아 죽는 전예지.
실제로 화이트한 눈 배경을 베이스로 순록, 북극곰, 시베리안 허스키 등의 극지동물과 요정들을 등장시킨 ‘Winter is coming!’은 성공을 넘어 대성공이었다.
- ㅅㅂ 농장모드 하다가 감기걸림 ㅋㅋㅋ
└ 너두? 야 나두!
- 진짜 허스키 졸귀탱임... 인형 나오면 평생 껴안고 살 자신 있다...
원래 기획 의도는 AR게임의 치명적 단점, 활동량 줄어드는 겨울에 유저들 충성도도 같이 줄어든다는 걸 방지하기 위해 준비한 이벤트였지만, 오히려 사람들을 너무 밖으로 내몰아 유저들을 감기에 걸리게 만들 정도로 말이다.
그 중에서도 압도적인 호평을 받고 있는 건 ‘허스키’라 불리는 시베리안 허스키.
전예지가 귀엽게, 무조건 귀엽게, 때려죽여도 귀엽게를 목적으로 하여 디자인한 허스키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평이 좋았고, 농장 스펙을 올려주는 요정들보다도 더 많은 인기를 끌었다.
사실상 허스키라는 캐릭터 하나가 ‘Winter is coming!’ 하나를 캐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참에, 허스키를 정식 캐릭터로 격상시켜서 좀 밀어줄까 해.”
“응? 잠만. 우리 동네 용사 정식 마스코트는 우동이잖아. 우동이는?”
“우동이도 물론 푸쉬해 줘야지. 우리 메인 캐릭터고... 저것들도 굿즈로 팔아버리려면 말야. 하하하.”
장영주가 아직까지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야광조끼들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저 야광조끼들은 지들끼리 증식이라도 하나... 여기저기 퍼줘도 도무지 줄어들지를 않네.”
“하하하. 쇼츠 찍으러 갈 때마다 사람들 나눠주고 있는데도 진짜 너무 많더라고. 뭐. 암튼 우동이랑 허스키는 세트로 밀 거야.”
“세트? 어떻게?”
“강아지와 주인 컨셉이겠지. 동물 버디를 데리고 다니는 캐릭터는 흔하니까.”
“맞아. 세계 미디어믹스 1위 백팩몬도 애니메이션은 그 계열이니까 성공 공식을 따라가는 거지.”
모두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배전방 4인방이 예술하려고 모인 사람들도 아니고, 캐시카우 만드는 데서 새로운 걸 시도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성공공식이 있다면 따라가는 편이 무조건 좋다.
“그래서 캐릭터 사업은 어떻게 진행하려고?”
“일단은 우동이와 허스키 이 둘을 메인으로 하고, 요정이랑 동물들 중에서 인기 있는 몇몇만 굿즈로 만들어서 팝업스토어를 해 볼까 해.”
“파, 팝업스토어? 서, 설마...”
벌써부터 과로의 냄새를 맡은 전예지가 몸을 떨었다.
“하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 굿즈들은 대부분 외주로 만들 거니까. 그리고 어디까지나 안테나 샵에 가까운 팝업스토어야. 소비자 반응 탐색을 위한 거니까 큰 규모로 진행하지도 않을 거고.”
“휴우.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전예지.
“그렇군요...”
관종 방태훈이 옆에서 아쉽다는 듯 짭짭 입맛을 다셨다.
******
[ 동하~ 용사 여러분! 우리 동네 용사가 드디어 팝업스토어를 열게 되었습니다! 우동이와 허스키를 비롯한 각종 우동 캐릭터들의 굿즈를 만나보세요! 2월 1일. 용산 어른파크몰에서 만나요! ]
팝업스토어의 홍보는 말할 것도 없이, 83만 구독자를 보유한 공식 뮤튜브 채널을 통해 이루어졌다.
- 허스키너무귀여워ㅠㅠㅠㅠ 지구뿌셔우주뿌셔ㅠㅠㅠ
- 굿즈판매를 하는 우동을 보니 새삼 스킨판매를 하는 베이커가 대단하게 느껴지네...
└ 기 습 숭 배
- ㅋㅋㅋㅋ 저딴걸 왜삼?(적금을 깨며)
- 드디어 떴다 내 우동
순식간에 감탄 반, 드립 반으로 꽉꽉 들어차는 댓글창.
물건은 야광조끼, 봉재인형, 티셔츠, 키링 등 아주 사소한 것들뿐이었지만 댓글 반응은 호평일색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반응하는 유저가 많네. 어쩌면 유저 확보하는 것만 너무 신경쓰느라 유저 관리에는 좀 소홀했을지도. CRM에도 슬슬 손을 대야겠어.’
CRM. 고객 관계 관리.
간단하게 서비스에 대한 고객 충성도 관리다.
실제로 파파야 참사 이후에도 우동의 유저와 뮤튜브 구독자들은 별 이탈 없이 제법 높은 충성도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유저들의 충성도가 높다면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제품 혹은 서비스를 내놓는 것도 기업의 의무지. 무엇보다 돈이 되고.’
그렇게 수많은 댓글들을 읽으며 사업의 방향성을 정하던 장영주.
그의 눈에 조금은 신박한 댓글이 들어왔다.
- 용사 자격증 강의 수강생입니다. 혹시 장영미 강사님 굿즈는 없나요?
└ 22222 이거 필요함
“... 영미 누나 굿즈?”
그러고 보니, 곧 장영미의 학원 클래스가 6주간의 일정을 마치고 곧 끝날 예정.
용사 자격증 발급 심사가 코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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