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다미달 님의 서재입니다.

라이칸슬로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다미달
작품등록일 :
2022.08.01 22:22
최근연재일 :
2023.03.28 22:20
연재수 :
134 회
조회수 :
10,621
추천수 :
514
글자수 :
1,060,207

작성
22.08.01 23:10
조회
1,324
추천
10
글자
25쪽

무두장이 아간 (1)

DUMMY

"늑대 한 마리 튀어나올 것 같은 밤이군."


숯꾼이 부지깽이로 장작을 뒤지며 읊조렸다. 그러자 소쿠리에 고구마를 담고 있던 소년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샛노란 보름달이 밤하늘에 걸려 있었다.


"벌써 보름이네. 내일 마을로 돌아갈 거지?"


"안 갈 이유가 있나. 좋은 숯도 많이 챙겼는데."


"이번에는 좀 오래 있다가 오자, 아빠. 이러다 엄마 얼굴 까먹겠어."


"까먹어도 돼. 너네 엄마 얼굴 정도는."


아들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숯꾼은 낄낄거리며 고구마 놓을 자리를 만들었다.


동그랗게 판 곳에 고구마를 놓자 불똥이 사방에 흩뿌려졌다. 아들은 연기가 자기에게로 오자 손을 마구 휘저었다.


두 사람은 고구마가 익을 때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아들은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말했다.


"아빠. 근데 그거 사실이야?"


"뭐가."


"그 늑대 괴물 있잖아. 라이카나스라프. 그거 진짜 있어?"


길다란 나뭇가지로 고구마를 쿡쿡 찌르던 숯꾼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누구한테 들은 거야, 그거."


"그냥 지나가다가 들었어."


아들은 괜히 시선을 피했지만 숯꾼은 집요하게 쳐다봤다. 다음날 아침까지 입 다물 자신이 없던 아들은 하는 수없이 입을 열었다.


"브라놀프 형이 말해줬어. 그래서 보름달이 뜨는 날에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그 녀석은 벌목이나 제대로 할 것이지. 맨날 저급한 나무나 주는 새끼."


"아빠!"


아들이 나무라듯 소리쳤다. 숯꾼은 가볍게 무시하고 잘 익은 고구마를 찔러 건네주었다. 김이 먹음직스럽게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호들갑 떨지 말고 이거나 먹어. 그리고 라이칸스로프라고 하는 거야. 라이카나가 아니고."


"발음이 왜 그리 어려워."


"늑대 인간이라고 하던지, 그럼."


아들은 그건 별로 입에 감기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숯꾼은 부지깽이로 아들 머리를 때린 다음 말했다.


"알겠냐? 그런 괴물은 옛저녁에 다 사라졌어. 지금은 없다고."


"그럼 옛날에는 있었다는 거야?"


아들이 물었다. 숯꾼은 말없이 고구마를 껍질 채로 먹었다. 거뭇한 재가 입가에 덕지덕지 묻었다.


"있었겠지. 아빠도 몰라. 근데 네 할아버지는 봤다더라."


"진짜?"


아들은 유난히 맑은 눈동자로 아빠를 쳐다보았다. 그런 아들을 보며 숯꾼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숯 구울 때도 저런 눈이었으면 좋겠다만.'


"어떻게 생겼는데? 할아버지는 그 괴물 어디서 본 거야?"


"여기지. 할아버지도 여기서 일하셨으니까."


"···여기?"


아들이 멍하니 되물을 때였다. 스산한 바람과 함께 어떤 울음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두 사람 사이에서 말이 잠시 멈췄다. 아들은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불길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침 라이칸스로프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참인지라 안 할래도 안 할 수가 없었다.


"저건 늑대 소리가 아냐. 고라니 소리지."


그때 숯꾼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들은 손에 든 고구마를 먹는 대신 다급히 물었다.


"정말 고라니야? 아닌데. 분명 처음 듣는 울음소리였단 말이야!"


"밤이라서 그렇지, 낮에 들으면 별거 아냐. 쉰 소리 말고 먹기나 해. 참고로 내일 아침은 없어. 그게 끝이야."


겁에 질려 있던 아들은 금세 풀이 죽었다. 아무리 무서운 설화도 결국 현실이라는 두터운 벽을 뚫지 못하는 법이었다.


아들은 내일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할 자신의 처지에 한탄했다.


"잠깐."


숯꾼이 손바닥을 보이며 속삭였다. 이미 흥이 식어버린 아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소리내며 고구마를 먹었다.


"좀 조용히 해봐! 지금 무슨 소리가 났다고."


"얼른 먹으라면서. 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봤자···."


그들 뒤에 있던 수풀이 세차게 움직였다. 아들은 화들짝 놀라며 헐레벌떡 아빠 옆으로 이동했다.


숯꾼은 발갛게 달아오른 부지깽이를 앞세우고 천천히 일어났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하는 소리만 들릴 무렵.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났다.


숯꾼과 아들은 동시에 '으헉!', '으힉!' 하는 소리를 내며 자빠졌다. 귀신이라고 믿어도 될 만한 몰골이었다.


"누, 누누, 누구시오?"


간신히 제정신을 차린 숯꾼이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낯선 이는 초점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몸에는 꽃씨나 나무 줄기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산길 따라 움직인 게 아닌, 험난한 숲을 그대로 가로지른 것 같았다.


"이보시오?"


"미쳤나 봐, 아빠."


아들이 속삭였다. 평상시 아들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그도 이번만큼은 순순히 동조했다.


"아빠. 저것도 봐봐. 누가 안겨 있어."


"안겼다고?"


"아니. 안겨 있다고."


아들이 손을 뻗었다. 물론 이방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로. 숯꾼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확실히 누군가 안겨 있긴 했다.


체구를 보니 아이인 듯싶었다. 숯꾼은 혀로 입술을 축인 뒤 말했다.


"이보시오. 혹시 길을 잃어 헤매고 있는 것이오? 그럼 이리 오시오. 여기 물도 있고 먹을 것도 있소. 필요하다면 묵는 것도 괜찮소."


"아빠. 산적이면 어떡하라고?"


"산적이 애 데리고 저런 꼴로 다니냐? 게다가 여긴 산적 없어. 그리 험난하지도 않고 깊지도 않은···."


숯꾼이 말을 멈췄다. 아들이 이방인을 보며 이상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숯꾼은 아들이 보는 곳을 따라봤다.


이방인의 몸이 별안간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이방인은 입가에 침을 뚝뚝 흘리며 기이한 소리를 냈다.


"도망, 쳐."


툭. 이방인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밑으로 떨어졌다. 아이는 눈을 뜬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숯꾼은 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건 죽은 거다. 저 미친 놈이 죽은 아이를 들고 다닌 거였어.


"선반 뒤에 칼이 있어. 그거 갖고 와."


"집에 그런 게 있었어?"


"얼른!"


아들은 후다닥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숯꾼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진 모르나 일단 진정하시오. 흥분하지 말고, 뒤로 서서히 물러나시오. 아시겠소? 이보시오. 내 말 듣고 있소? 이보시오. 물러나란 말이오!"


끝에 가서는 거의 애원에 가까워졌다. 숯꾼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이방인의 몸이 시시각각 커지기 시작했다.


옷이 찢어지고 피부가 벗겨졌다. 그리고 검은 털이 온몸에 자라나기 시작했다.


"아빠, 이거 찾았···."


밖으로 나온 아들은 경악했다. 칼이 땅으로 떨어졌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느새 그들의 앞에 의문 모를 괴물이 서 있었다.


괴물은 달빛을 품은 눈을 하고서 그들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숯꾼이 퍼뜩 정신이 들었다. 감당 못할 공포가 온몸을 잠식해서 그런 걸까.


오히려 숨어 있던 이성이 돌아왔다. 숯꾼은 아들을 밀어내며 외쳤다.


"도망가!"


그게 숯꾼의 마지막 말이었다. 한 팔이 뜯김과 동시에 목이 날아갔다.


아들은 얼굴에 뭔가 묻었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괴물이 팔을 휘두르는 순간, 아들의 몸이 반으로 쪼개졌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시체 두 구가 생겼다. 괴물은 시체에 코를 박고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먹었다.


그럴 때마다 시체는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괴물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입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을 바라본 괴물은 토해내듯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나타났다. 근처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길래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혹시 숯꾼 부자가 맹수에게 당했을까 싶어 나름대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다들 충격에 빠져있는 사이, 한 용맹한 자가 꼬챙이로 괴물을 찔렀다.


만약 상대가 곰이나 호랑이었다면 충분히 유효한 공격이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검은 괴물은 단순한 맹수 수준이 아니었다.


"라이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괴물, 라이칸스로프가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


눈.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머리 위에 뜬 달이 밝게 빛나는 밤.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마을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무너져 있었다.


아들은 딱딱하게 굳은 몸을 하고서 움직이지 않았다. 숨은 쉬고 있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언제부터 이랬던 것일까. 아마 한 달 전부터였겠지.


자기 눈앞에서 엄마가 죽는 광경은, 어른이고 어린아이고 큰 충격을 받을 만한 장면이니까.


더군다나 한창 어미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려야 할 아이에겐 그보다 끔찍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들이 살아 있다는 데에 큰 기쁨을 느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심장이 뛰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내 손에는 재와 살점이 묻어 있었다. 입가에는 씹다 만 고깃덩이가 걸려 있었다.


누구의 살점일까. 귓가에는 아직도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찌르고 죽는 사람, 도망치는 사람, 살려달라 애원하는 사람, 땅으로 파고 들어가려는 사람.


하나같이 필사적이고 애처로웠다. 그런 그들을 나는 남김없이 도륙했다.


바람이 불었다. 찢어진 웃옷은 넝마조각과 같아 힘없이 흔들렸다.


검은 눈동자가 위로 날아올랐다. 까마귀는 마을 전체를 배회하며 한없이 울어댔다.


여기 라이칸스로프가 있다. 여기 라이칸스로프가 있다.


마치 까마귀는 그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입이 그려내는 대로, 움직이는 대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아들을 품에 안았다.


다시는 이런 짓을 벌이지 않을 것이다. 수백 번도 넘게 했던 다짐을, 이번에도 마음속으로 되뇌이고 또 되뇌었다.


달빛이 땅을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볼썽사나운 몰골을 하고 있는 마을을 등에 지고서 하염없이 걸어갔다.


******


"아간. 밝은 새벽이 왔어."


천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간은 잠들 때와 마찬가지로, 일어날 때도 스르르 눈을 떴다. 눈동자를 굴려 옆을 보던 아간은 이내 상체를 일으켰다.


아간은 덧창 틈으로 바깥을 보았다. 대기가 파리한 낯빛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해가 뜨려면 조금 더 시간이 흘려야 할 듯싶었다.


밝은 새벽이라니. 말이 안 맞는걸.


아간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상대가 그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농담을 주고 받고 싶어서 그런 말을 꺼냈던 것일 테지.


하지만 아간은 아침, 아니 새벽부터 되도 않는 말장난을 하고 싶진 않았다. 잠 기운을 떨쳐내는 것도 힘든데 재미없는 말장난까지 해야 한다니.


차라리 일을 하는 게 더 나았다.


아간의 무두장이 동료, 라이트는 요란스레 옷을 입고 있었다. 하도 입어서 그런지 옷은 잔뜩 헤져 있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부욱 찢어질 것만 같았다.


"몸이 가려워서 한숨도 못 잤어."


라이트가 말했다. 아간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서 자꾸 뒤척였던 겁니까?"


"이런. 나 때문에 제대로 못 잤어?"


"아뇨. 단지 눈을 뜰 때마다 뒤척이는 것 같아서요."


"뭐. 일상이니까."


"그보다 언제 불로 지져줄까요?"


"이따가. 작업장에 먼저 가 있을게."


라이트는 한껏 기지개를 피더니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바람이 잠깐 들어왔다. 해가 뜨지도 않았건만 벌써 열기의 향취가 나는 듯했다.


계절은 아직 초여름에 불과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더위는 기세를 더해가고 있었다. 아간은 작업장에서 나는 냄새가 앞으로 심해질 거란 걸 짐작했다. 생각만 해도 코에 악취가 감도는 것 같았다.


아간은 라이트 따라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라이트는 커다란 통 안에 얼굴을 넣고 있었다. 오줌과 똥이 섞여 있는 물이다 보니 냄새는 상상을 초월했다.


라이트는 멀쩡했다. 오히려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잘 되고 있군. 이틀만 더 담가놓으면 되겠어."


"혹시 가죽을 받으러 오라고 한 곳이 있습니까?"


"응. 근데 이따 낮에 가야 돼. 지금은 이것부터 하자. 아, 일단 밥부터 먹을까?"


아간은 미간을 찌푸렸고 라이트는 웃었다. 역겨운 냄새가 가득한 작업장에 한 번 들어온 이상 밥 먹으러 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돌던 입맛도 사라지는 곳이 바로 무두질 작업장이었다.


그들은 하루 동안 물에 담가놨던 소 가죽을 꺼냈다. 담궈 놓기 전에 소금을 뿌려둔 터라 새 물로 씻어내야 했다.


두 사람은 여러 장의 가죽을 바닥에 펼쳐놓고는 온몸을 써가며 박박 닦았다. 가죽에 붙은 지방이 물컹거리며 떨어져나갔다.


가죽을 씻은 그들은 한 장씩 들어 석회물이 담긴 통 안에 넣었다. 물을 흠뻑 먹은 가죽은 무겁고 미끄러웠다.


얼마 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벌써 날이 밝아 있었다. 아간과 라이트는 근처 강가에 가서 몸을 씻었다. 그리고 아침으로 빵과 풀뿌리, 소금에 절인 돼지 지방을 먹었다.


"아간. 지금 해줄 수 있어?"


라이트가 물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한두 번 해보나? 나야 좋지."


아간이 불이 붙은 장작 하나를 꺼냈다. 라이트는 빵을 오물오물 씹으며 팔을 보여주었다. 팔에는 흉터와 상처가 즐비했다.


소금기와 오물을 머금은 가죽을 손질하다 보니 자연스레 생긴 피부병이었다.


아간은 장작으로 라이트의 팔을 훑어주었다. 불이 상처에 닿을 때마다 라이트는 몸을 움찔했지만 이내 목젖을 보이며 웃었다.


"하면 할수록 더 간지러워지는 것 같은데."


"그만할까요?"


"아니. 더 해줘. 그래도 계속 하면 시원한 맛이 있어."


"이러다 화상 입습니다."


"그러니까 잘 해봐."


아간은 한숨 섞인 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리 봐도 거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 답지 않았다.


라이트는 언제나 웃었고 즐거워했다. 그 점 때문에 사람들은 라이트가 모자라다고 비웃었지만 라이트는 개의치 않아 했다.


'순박하고 착한 사람이야.'


틈만 나면 성질을 내는 아간에게,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해주는 사람이었다.


아간은 일과 사람, 모두 잘 만났다고 생각했다. 둘 중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달픈 삶이 될 것이다.


아간은 냄새 나고 더럽고 천박한 이곳이 좋았다.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소가 아간을 더욱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넌 아직 이 일 한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를 거야. 나처럼 이렇게 되기 전에 그만두는 게 좋을걸."


"나 없이 혼자서 저걸 다 할 수 있겠습니까?"


"너 오기 전에 저 많은 걸 누가 다 했을 것 같아?"


아간은 수긍했다.


"그래도 이 일 말고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어요. 이게 저와 맞기도 하고요."


"그래? 그러면 맹세할 수 있어? 죽을 때까지 무두질을 하겠노라고."


아간이 묵묵부답을 일관하자 라이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해본 소리야. 어쨌든 빈말로라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혹여 말없이 어디로 떠날까봐 걱정했거든. 역시 혼자 하는 것보다 같이 하니까 더 좋아. 심심하지도 않고."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마저 남은 작업을 했다.


낮이 되자 그들은 가죽을 가지러 갔다. 길은 평탄했다. 쾌청한 날이었고 바람도 잔잔했다.


따스한 햇볕이 얼굴에 내려앉자 라이트는 기분 좋은 얼굴로 휘파람을 불렀다.


"라이트 씨. 잠시 멈추고 이리로."


"응? 왜?"


아간은 고개를 저으며 라이트를 왼쪽으로 오게 했다. 라이트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그때, 한 무리의 아이들이 급작스레 나타났다.


풀밭에 몸을 숨긴 채 줄곧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겨!"


외침에 맞춰 바닥에서 밧줄이 올라왔다. 아마 발에 걸려 넘어지게 할 속셈인 듯했다.


아간이 라이트를 막지 않았다면 필시 걸려 넘어졌을 것이다.


"공격하라!"


하지만 사냥꾼 롬의 아들, 젠은 애통해하는 대신 다음 명령을 내렸다. 사방에서 돌멩이가 날아왔다.


크기는 작았어도 머리에라도 명중시키면 큰 부상을 입힐 수도 있었다.


라이트가 황급히 팔로 얼굴을 가렸다. 아간은 미간을 좁히더니 날아오는 돌멩이를 손등으로 툭툭 쳐냈다.


도중에 다리나 어깨에 맞긴 했지만 아간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아이들은 허망한 얼굴을 지었다. 그때 젠이 외쳤다.


"지금!"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아이 두 명이 물동이를 머리에 얹고서 달려왔다. 라이트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 넘어져, 애들아!"


"쏟아내!"


물동이가 라이트와 아간에게로 쏟아지기 직전. 화살이 쉭 허공을 가로지르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물동이가 박살 났다.


아간이 돌멩이를 들고 있었다. 방금 아이들이 던진 그 돌멩이였다.


아간은 예리한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준비해둔 공격이 벌써 다 끝났는지 아이들은 눈만 굴리고 있었다.


한편, 물동이를 이고 있던 아이 두 명은 몸이 흠뻑 젖어버리자 그 자리에서 울었다. 라이트는 아이들에게 달려가 소매로 닦아주었다.


"날이 좋아서 금방 마를 거야. 괜찮아."


"더러워! 냄새나!"


아이들은 팔을 위로 번쩍 들더니 사방으로 흩어졌다. 젠은 도망치지 말라고 일갈했지만 듣는 아이는 없었다.


홀로 남은 젠은 두 무두장이에게 소리쳤다.


"모지리 두 명! 다음에는 실패하지 않겠어!"


"또 놀러 와!"


라이트가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간은 손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요즘에 잠잠하다 했더니 다시 시작하는군요."


"그러게. 점점 발전하는 것 같은데? 물통까지 준비할 줄은 몰랐어. 예전에는 흙만 뿌렸었는데."


라이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아간은 찌푸린 얼굴로 아이들이 도망친 방향을 바라보았다. 예전이라 함은 아간이 이곳에 정착하기 전을 말했다.


언제부터 괴롭힘이 시작되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정작 당사자인 라이트는 놀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아간은 이에 대해 더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햇살보다 환하게 웃는 라이트를 보자 쏙 들어갔다.


"안 가?"


"예. 가죠."


******


아간과 라이트가 양을 도축하는 곳에 도착했다. 털을 벗겨낸 가죽이 한쪽에 층층이 쌓여 있었다.


도축장에는 핏덩이와 지방 냄새 때문에 고약한 냄새가 감돌았다. 그러나 아간과 라이트는 태연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빨리도 왔군."


도축하던 사람이 뒤를 힐끗 보았다. 그는 간단하게 인사를 한 다음 다시 일에 집중했다.


서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배척하지도 않았다. 낮은 곳에서 일하는 자들이니만큼 서로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간과 라이트는 방해하고 싶지 않아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두 사람을 보고 비웃거나 쑥덕댔다. 누구도 인사하거나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무두장이는 별로 불만을 드러내지 않않았다. 다른 이가 뭐라 하건 눈앞에 있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작업이 끝났다. 아간은 쌓여 있는 양 가죽을 한 번에 들어올렸다. 결코 혼자 들 수 없는 무게임에도 아간은 가뿐하게 들어올렸다. 그러자 구경하던 사람들은 잠시 침묵하더니 속삭였다.


"일한지 이제 반 년 밖에 안 됐다며?"


아간은 주변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수레에 양 가죽을 실었다. 라이트만이 웃으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천직이군!"


조용히 있던 사람들은 두 무두장이가 떠나자 그제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작업장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점심을 먹고 작업을 재개했다.


가죽에 소금을 뿌리고, 석회물에 담고, 곡도와 대패로 털을 밀어내고, 똥오줌 통에 담기를 반복. 그렇게 나온 가죽을 햇볕에 말리는 것으로 마무리.


이 작업은 시간이 흘러도, 계절이 바뀌어도 항상 똑같았다. 다른 건 냄새 뿐이었다. 여름이 되면 더욱 심하게 났고 겨울이 되면 그나마 나았다.


고단하고 지겨운 작업의 반복. 하지만 아간과 라이트는 세상의 굴레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열심히 일을 했다.


그들은 틈만 나면 대화를 주고 받았다. 사실 대화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주로 라이트가 말하고 아간은 듣기만 했으니까.


라이트는 태생적으로 좋은 입담꾼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지루하고 재미없게 만드는 건 입담꾼의 소양이 아니었다.


게다가 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한다면 입담꾼으로서의 재능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러나 아간은 묵묵히 들어주었다. 적절할 때면 맞장구도 쳐주곤 했는데 그러면 라이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신나게 더 이야기를 해댔다.


아간은 잡생각이 나지 않아서 좋았고 라이트는 말을 들어줄 상대가 있어서 좋았다. 둘은 서로에게 필요한, 그야말로 죽이 잘 맞는 짝꿍이었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시간은 결코 오래 가지 않았다.


언제나 시끄럽게 떠들 것 같던 라이트가 입을 다물고 잠자리에 들어가고.


졸졸 흐르는 강줄기마저 움츠러들고 시끄럽게 울어대던 풀벌레도 지쳐 잠에 들 만큼 깊은 밤이 찾아오는 순간이 오자.


아간은 극심한 죄책감과 고독,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흉폭함을 느꼈다. 특히 오늘처럼 완연한 보름달이 떠오를 때면 더욱 그랬다.


천천히 잠자리에서 일어난 아간은 옆을 돌아보았다. 라이트는 팔과 발바닥을 벅벅 긁으며 신음을 내었다. 그래도 잠이 더 고픈지 얼마 안 가 꿈나라에 빠져들었다.


어두운 얼굴로 라이트를 들여다본 아간은 문을 열고 나갔다. 밖은 은색으로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달. 그놈의 달 때문이었다.


아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두 팔로 몸을 감쌌다. 날씨는 여름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 있었지만 아간은 추위를 느꼈다.


서늘한 칼날을 가슴 안에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간은 숲으로 들어갔다. 울창히 자리한 나뭇잎들은 몸에 몸을 포개고 있었다. 덕분에 시린 달빛은 땅에 당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도 시간 문제였다. 달은 언제나 아간을 들끓게 만들었다. 특히 꽉 차오른 달일 수록 심해졌다.


더, 더 깊이.


아간은 숲의 종심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되기만 한다면 저 꼬리별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 산맥 안쪽까지도 들어가고 싶었다.


험하고 비탈진 곳이라면 인적도 드물 테니까.


하지만 아간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커다란 그릇이라 해도 쉬지 않고 물을 들이붓는다면 결국에는 넘쳐 흐를 것이다.


지대한 인내심을 가진 자도, 무한에 가까운 고문을 받으면 미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아간은 오늘도 용솟음치는 광기에 지고 말았다.


"크, 아."


등이 한껏 굽어졌다. 상체가 부풀어오르자 옷이 팽팽히 당겨졌다.


아간은 급히 옷을 벗었다. 순식간에 나체가 되어버렸지만 아간은 수치심 한 점 느끼지 않았다.


다른 의미에서의 수치심을 이미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간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이성과 지성을 단번에 날려버리는 이 순간이 끔찍했다. 최후에 남겨놓았던 인간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생각도 머지 않아 사라질 것이다.


"아아아!"


몸이 변형되기 시작했다.


팔다리가 길어지고 얼굴에 털이 자라났다. 손톱과 발톱이 정성들여 벼려놓은 칼 못지 않게 날카로워졌다. 검게 물들어지는 피부는 가죽으로 만든 갑옷만큼이나 두껍고 질겨졌다.


비틀리고 꺾이는, 다른 생물체로 탈피되는 과정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아간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죽 찢어진 입가에 촘촘히 박힌 이빨이 엿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눈동자 색이었다. 달빛을 담은 것처럼 시고 하얀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다.


라이칸스로프가 몸을 일으켰다. 과거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으며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 그런 것들은 이제 중요치 않았다.


배가 고프고 피가 고프다. 단지 그뿐이면 충분했다.


"크아아아!"


목을 길게 빼며 울음소리를 토해낸 라이칸스로프는 네 발로 땅을 딛었다. 야생성을 불러일으키는 밤과 모습을 감춰주는 숲. 밤의 숲은 그가 마음껏 날뛰기 좋은 곳임이 분명했다.


라이칸스로프가 이빨을 드러냈다. 사냥이 시작되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라이칸슬로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4 피 냄새 (1) 22.08.16 91 5 23쪽
13 두 라이칸스로프 (4) 22.08.15 94 5 18쪽
12 두 라이칸스로프 (3) 22.08.14 96 7 12쪽
11 두 라이칸스로프 (2) 22.08.13 96 7 12쪽
10 두 라이칸스로프 (1) 22.08.12 117 5 16쪽
9 때이른 한계 (4) 22.08.11 109 6 17쪽
8 때이른 한계 (3) 22.08.10 112 6 15쪽
7 때이른 한계 (2) 22.08.09 132 4 14쪽
6 때이른 한계 (1) 22.08.08 172 5 12쪽
5 무두장이 아간 (5) 22.08.05 181 7 17쪽
4 무두장이 아간 (4) 22.08.04 188 6 12쪽
3 무두장이 아간 (3) 22.08.03 220 6 12쪽
2 무두장이 아간 (2) 22.08.02 350 8 17쪽
» 무두장이 아간 (1) +1 22.08.01 1,325 10 2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