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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슈퍼 님의 서재입니다.

사기학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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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슈퍼
작품등록일 :
2022.10.29 14:53
최근연재일 :
2022.12.04 18:35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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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3
추천수 :
850
글자수 :
183,014

작성
22.11.0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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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그녀.

DUMMY

광수 아저씨는 그날 청주 출장을 다녀온 뒤로 집에 들어오는 횟수가 뜸해지셨다.

가끔 양말이나 속옷을 갈아입으러 밤늦게 잠시 들렀다 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광수 아저씨 손엔 항상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아니 제가 언제 공개수사를 무작정 반대했습니까? 확실해지기 전까진 잠시 미뤄보자고 했을 뿐이죠. 생각을 해보세요. 그날 녀석들은 마치 우리가 도착할 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정태성이 사주했다는 일방적인 진술만 믿지 마시고 좀 더 캐보잔 말입니다. 도주하는 마당에 정태성 그놈이 뭐 얻을 게 있다고 접점도 없는 애들까지 불러들여서 형사들을 상대로 그런 짓을 벌인단 말입니까.”


물론 그럴 때마다 나는 자는 척을 해야만 했다.

아빠와 관련된 사건으로 전화가 올 때면, 광수 아저씨는 항상 밖으로 나가 통화를 하셨으니까.


“아니, 언제부터 여론 눈치 보면서 일했다고 그러십니까! 만약 나중에 정태성이 사주한 게 아니라고 밝혀지면 어떡하실 겁니까? 누가 책임질건데요? 그러니까 공개수사 발표는 조금만 미루고 일단 조사부터 더 해보자는 말입니다. 제 말은···.”


그날 광수 아저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TV에서는 살인 용의자 수배란 제목으로 두 남자 얼굴이 공개됐다.


용의자 정태성과 공범 정태수.


판박이처럼 똑 닮은 두 남자 사진 아래엔 사건 개요가 적혀있었는데, 내가 겪었던 그 날의 사건 외에 ‘살인 교사’라는 항목이 한 줄 더 추가돼 있었다.


그렇게 온 세상이 녀석들의 이야기로 떠들썩할 때쯤, 난 다시 한번 아빠의 천막을 찾았다.


“아빠. 학교 다녀왔어요.”


왜 이곳을 다시 찾아왔는지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랄까?


한결같은 주황색 노점들 사이에서 유독 멋들어지게 빛나는 흰색 천막.

트랜드를 따라야 한다며, 3일 동안 고심한 끝에 제작한 ‘타로’라고 적힌 폰트. 그 아래에 신비로운 문양이 박힌 포밍테이블과 간이의자 위에 놓인 고양이 모양의 쿠션까지.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자리에 국화꽃을 비롯한 각종 꽃다발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윤빈이 왔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만복 아재가 내 키만 한 싸리비를 들고 활짝 웃고 계셨다.

아빠 천막 주변에만 네모반듯하게 눈이 쌓이지 않아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마 만복 아재가 치워주신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아재는 절뚝이는 걸음으로 내 곁에 다가와 시원섭섭한 얼굴로 아빠의 천막을 응시하셨다.


“범인도 밝혀졌으니, 이제 네 아빠도 편히 눈을 감겠구나. 천하의 몹쓸 것들···.”


“다 아저씨 덕분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두 손을 모으고 90도로 인사하자, 만복 아재는 뭐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 채 허공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위로 한껏 치솟은 입꼬리가 실룩이는 걸 보니, 꼭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셨다.


“그나저나 넌? 요즘도 그 형사 놈 집에 머물고?”


“네.”


만복 아재는 씹어 뱉듯 무슨 말을 꺼내려다 말고, 이내 다시 체념한 표정으로 쩝‒ 하고 입맛을 다시셨다.


“따라오렴. 밥 먹게.”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라 난 굳이 거절하진 않았다.

만복 아재 노점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날 발견한 주변 상인들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는데, 주로 위로의 말이나, 녀석들의 정체가 밝혀졌으니 이제 죗값을 치를 일만 남았다는 말들을 전해주셨다.

그럴 때마다 만복 아재의 콧구멍엔 어김없이 힘이 잔뜩 실렸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가고 2004년 한해도 단 하루밖에 남지 않은 31일 날 저녁. 한창 연말 시상식을 방영하던 TV에서 갑작스럽게 뉴스 속보가 떴다.


[지난 종로 상가 노점에서 발생했던 묻지 마 살인사건 용의자 정태성과 공범 정태수가 오늘 오후 7시 30분경에 청주 명암저수지 모 산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청산염이 담긴 약봉지와 유서가 현장에서 함께 발견된 점을 미루어 보아, 공개수사의 압박감을 못 이긴 음독자살로 추정되며, 정확한 사인은 부검을 통해···]


이상했다.

어른들이 흔히 하는 말로 똥 싸다만 느낌이랄까?


미적지근한 결말도 결말이지만, 그 결말이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게 무엇보다 찜찜했다.


‘자살이라···.’


난 아빠처럼 관상만으로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는 재주는 없었지만, 옆에서 그 모습을 2년 넘게 봐온 덕분에, 모든 사람은 유형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이었다.


만약 내가 정태성이었다면, 도피상황에서 그런 결과를 택했을까?


물론 난 범죄자가 아니기에 결과를 알 길이 없다.

또한, 내 머릿속 유형별 카테고리에서 범죄자에 대한 항목은 없었기에 상황을 유추해볼 수도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시할 수 있다.


그 살기 어린 눈빛과 자신감 넘치는 행동을 선보였던 정태성에게 ‘자살’과 ‘유서’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는 것을.



***



새해가 밝았지만, 광수 아저씨의 표정은 시종일관 어두웠다.


아주 잠깐, 흐지부지 마무리돼버린 사건 때문인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한때, 범인의 신원조차 밝히지 못했을 만큼 일이 안 풀렸을 때도 내 앞에선 항상 허허 웃는 표정만을 지어 보이셨던 아저씨였으니까.


그렇게 오전 내내 죽상이셨던 아저씨는 뭔가 결심했다는 듯 결연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셨다.


“윤빈아. 우리 외식하러 갈까?”


“네.”


따뜻한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오니, 민기 아저씨가 차 속에서 시동을 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인사동에 있는 유명한 백숙 집이었는데, 새해 첫날 점심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선택권 없이 떡국을 먹어야만 했다.


“이야! 형님. 그래도 닭 육수가 제대로 우러나서인지, 기가 막히게 맛나네요.”


“······”


민기 아저씨의 과장 섞인 호들갑에도 광수 아저씨는 우걱우걱 떡국만을 퍼 드셨다.


“형님. 저기 어떻습니까? 손님도 많아 보이는데.”


백숙 집 다음 코스로는 외관이 꽤 세련되게 생긴 어느 한 브런치 카페였다.

식사를 마쳤으면 애피타이저를 해줘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라며, 민기 아저씨가 안내한 곳이었다.

나는 디저트가 맞는 표현이라고 정정해 주고 싶었지만, 광수 아저씨의 어두운 분위기를 봐서 참기로 했다.


“이야‒! 젊은 청춘들 여기 다 모여있었네.”


카페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형 누나들로 가득했는데,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다들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눈치였다.


민기 아저씨가 카운터를 향해 호쾌하게 다방 커피를 주문하는 동안, 광수 아저씨와 난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저씨. 혹시 무슨 일 있어요?”


내심 물어볼까 말까 고민했던 질문이었다.

그런 내 물음에 아저씨는 그제야 자신의 표정이 시종일관 굳어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치열까지 드러나는 환한 미소를 급히 선사하셨다.


“일은 무슨···. 윤빈아 새해 첫날인데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우리 애피타이저 먹고 쇼핑하러 갈까?”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게 없는데, 다음에 가면 안 될까요?”


무슨 일이 있느냐는 질문에 뜬금없는 화제전환.

그 뜬금없는 쇼핑 제안을 은근슬쩍 다음으로 미루자, 더욱 난처해지는 아저씨의 표정.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짐작은, 차를 다 마시고 다시 카페 밖으로 나왔을 때 확신으로 바뀌었다.


“아쉽지만, 삼촌은 일이 있어서 다시 서로 들어가 볼게. 자! 주눅 들지 말고 항상 씩씩해야 한다?”


난생처음 민기 아저씨가 내 손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여준 것이다.


‘떠날 때가 됐구나.’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며칠 전 가정 방문 조사를 위해, 광수 아저씨 댁에 기관에서 사람이 찾아온 적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됐다.


광수 아저씨가 그동안 입양절차를 밟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가정 조사가 끝났을 무렵, 광수 아저씨의 얼굴은 지금처럼 우울함이 그득한 표정이셨다.


아마도 재산이나 불규칙한 직장 생활 패턴 때문에 자격 요건이 충분치 못했던 모양이다.


“아저씨. 짐은 언제 챙기면 되나요?”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아저씨는 잠시나마 흠칫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하지만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까슬하게 자란 수염을 매만지며, 두꺼운 입술을 떼셨다.


“미안하구나. 시설만큼은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아니에요. 애쓰신 거 다 알아요.”


가식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다.

첫눈이 내리던 그 날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확히 22일.

아저씨가 구청에 손을 써주지 않았다면, 난 보호시설로 넘어가도 진작 넘어갔을 것이다.


“돌아오는 월요일까지 아직 시간은 있으니, 짐은 그때 가서 챙기자꾸나.”


“네.”


그리고선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렇게 말없이 터덜터덜 집 앞까지 도착했을 때, 갑자기 광수 아저씨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빌라촌에선 보기 힘든 고급 세단과 일반 승용차 한 대가 현관문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거 참···. 진짜 경우 없네.”


혹시나 붙어있을지 모를 연락처를 찾아보기 위해, 광수 아저씨가 세단 앞쪽으로 다가선 순간, 두 대의 자동차 문이 동시에 열리며, 원피스 차림의 한 여성과 검은색 정장 차림의 남자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


그중 여성과 눈이 마주친 광수 아저씨는 안 그래도 굳어있던 표정이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천수연···. 네가 어떻게···.”


나 또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쌍꺼풀 하나 없이 매끈하게 빚어진 반달 같은 눈매.

달걀처럼 둥그스름하게 올라간 턱선과 위쪽으로 치우친 입꼬리. 그리고 세련되게 치솟은 콧날까지.


머리 스타일이 올림머리라는 것만 빼면, 사진 속에서 봤던 돌아가신 엄마와 너무나도 똑 닮은 얼굴이었다.


그 여성이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내게로 다가왔다.


“안녕? 네가 윤빈이로구나?”


마치 엄마가 되살아나서 날 반기는 것만 같았다.


물론, 엄마를 실제로 본 기억은 없다. 내가 태어난 지 백일도 안 돼서 돌아가셨단 이야기만 전해 들었으니까.


“누구세요?”


반색하며 다가온 그녀는 짐짓 섭섭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정말 모르는 거니?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니? 난 네 이모란다. 네 엄마 천수정의 쌍둥이 동생 천수연.”


정말 몰랐다.

아빠는 단 한 번도 엄마에게 쌍둥이 동생이 있었단 사실을 내게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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