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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단 용병이 뒤늦게 깨달음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강라원
작품등록일 :
2024.01.05 20:01
최근연재일 :
2024.01.18 18:05
연재수 :
14 회
조회수 :
9,564
추천수 :
237
글자수 :
85,801

작성
24.01.1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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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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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글자
19쪽

말단 용병이 뒤늦게 깨달음 10화

DUMMY

라스만 남쪽과 롤랑 남작 영지 사이.

이름 모를 숲속.


‘이곳이다.’


반나절 동안 주변 샅샅이 훑어보던 나는 마침내 희미한 바퀴 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강을 끼고 발달한 라스만에서는 웬만한 운송을 배로 실어 나르기 마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문(南門)을 지키는 문지기의 말에 의하면 주기적으로 수레를 이용해 썩은 피와 고기를 나르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썩은 피와 고기는 고블린을 사육할 때 주로 주는 먹이 중 하나.

그 경로를 쫓으면 자연스럽게 고블린들이 사육당하는 장소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벌써 시간이 이리됐군.’


찌를듯한 침엽수들이 빽빽이 들어찬 하늘 위로 타오르는 듯한 붉은 장막이 내려앉고 있다. 나는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어느새 저물어가는 해. 그리고 곧, 어둠이 찾아왔다.


‘잘 보이지 않는데..’


중간중간 끊기기 시작한 바퀴 자국에 더불어 시야까지 어두워진다. 결국 바퀴 흔적을 쫓는 것을 포기한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고는 귀를 쫑긋 열었다.


전생에서 수많은 의뢰를 쌓아오며 쌓아온 경험이 말하고 있었다.

이 인근에 고블린 사육장이 있다면, 제아무리 입에 마개를 물려놨을지라도 그 특유의 괴성을 완전히 숨기지 못한다는 것을.

특히나 칠흑 같은 밤이 찾아오고, 마물 특유의 야행성이 극대화되는 시간이면 더욱!

그렇게 한 자리에 우두거니 선 채로 얼마나 지났을까?


끼이이- 끼이익!


‘찾았다!’


북쪽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미약한 괴성에 나는 재빨리 기동하기 시작했다. 다만 자세를 낮추고, 숨을 죽인 채 몸을 숨길 수 있는 엄폐물들 골라 이동한다.

귀찮고 사소하지만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첫 회차에서 내 질긴 삶을 이어준 피 같은 습관 중 하나였다.


-배...고파...


그때였다.

어느 새부터인가 모습을 드러낸 글러트니가 내 주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본능적으로 내가 사육장 인근에 가까워졌음을 깨달은 나는 더욱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잠시 뒤.

커다랗게 파여진 구덩이를 발견한 나는 그곳을 들여다보았다가, 황급히 코를 틀어막아야 했다.


‘크윽, 역시. 이런 건 몇 번을 맡아도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는군!’


코끝을 찔러오는 지독한 악취!

구덩이 속에는 고블린 시체들과 더불어 그 배설물과 타액, 피고름 등이 섞여 고약한 냄새를 뿜어내고 있다.

이곳 지척에 사육장이 있음을 확인한 내가 발걸음을 다시 옮기려 할 때였다.


-인과... 부족... 제물.. 부적합.. 그러나... 배고파..


구덩이 주위를 둥둥 떠다니던 글러트니가 그 속으로 쑥- 들어가버린 것이다!


“....야, 인마-!”


놀란 내가 최대한 숨죽인 목소리로 그를 불렀지만 이미 늦었다.

그때, 구덩이 안에서 카득- 카드득-! 거리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서, 설마?”


나는 황급히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진득하고 어두운 안개에 붙잡힌 채, 글러트니의 입속으로 분쇄되어가고 있는 마물들의 시체!


투- 투두둑-


그 탐욕스러운 입놀림 밖으로 떨어지는 내장 덩어리와 눈알, 심장 등이 어두운 구덩이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우우욱!”


그 그로테스크한 과정에 황급히 뒤로 물러난 나는 그대로 속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십수 년을 전장에서 굴러왔음에도 도저히 버텨내지 못할 역겨운 광경!


“우웨에에에엑-!”


그렇게 더 게워낼 것이 없어 침과 뒤섞인 위액만이 입에서 뚝뚝 흘러내릴 때쯤.

심장 속에 잠잠히 자리 잡고 있던 무투의 념이 우우웅- 소리와 기묘한 파장을 토해내는 것이 아닌가?


툭-!


수백, 수천 개의 념이 뭉친 실타래의 형상을 하고 있던 무투의 념! 그 겉을 둘러쌓고 있던 념 중 하나가 툭- 끊어지며 심장 속으로 녹아든다. 그 뒤, 심장 박동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새로운 감각!


‘맙소사-’


멍하니 그를 관조하던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제부터 나는 몇 초 전보다 조금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고, 빨라졌으며,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말이다!


‘으음...! 심지어 마력까지 늘어나다니.’


이는 경악할만한 일이었다.

본래 마력이란 사람마다 그 증가 속도가 매우 다르다.

타고난 자들은 하루가 멀다고 쌓이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수년을 고련 해도 거의 쌓이질 않는 것.

나란 놈은 본래 후자에 가까웠기에 십수 년을 전장에서 굴렀어도 재능 있는 신출내기 용병과 별반 다르지 않은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랬던 과거의 나 자신을 넘어서는 마력이 일순간에 몸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지난날의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 온 것인지.

허탈함에 맥이 빠질 지경이었다.


‘이제야 이해가 갈 것 같다. 그 비리비리했던 루이스가 어떻게 그 짧은 사이에 전쟁영웅으로 거듭나는지.’


고작 광구(光球) 하나 띄우는 것도 힘들어했던 루이스.

그랬던 그가 머지않은 미래에 수천의 군세 앞에서, 압도적인 기동력과 공격력을 앞세워 적 지휘관을 즉살시켜버리는 전장의 악마로 거듭난다.

그런 압도적인 성장세에는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 것!

그 사이에도 글러트니의 포식음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콰득- 콰드드득!


우우우웅-!


그 뒤로도 두 번 더 끊어지고, 심장 속으로 녹아들어 퍼져나간 념의 일부!

그리고, 나는 내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됐음을 깨달았다.


꾸우우욱-


‘강해졌다...’


이 정도라면 이안 정도는 정면에서 압도할만한 힘과 스피드를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아닌가?

그때, 글러트니가 구덩이 속에서 스르르 떠올랐다.


“더, 더 안 먹게?”


무언가 만족스러운 듯 보이는 그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어벙벙한 목소리로 물었다.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토록이나 역겹고, 불쾌했던 글러트니의 포식을 이제는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그만큼 이제껏 가져보지 못한 힘이 주는 쾌락이란 대단했다.

하지만 글러트니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제.. 맛.. 없다... 이런건.. 앞으로 안.. 먹어... 주인... 무능..


“뭐?”


이제는 충분하다는 듯 스르르 사라져버리는 글러트니.

나는 글러트니에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수두룩할 것임을 직감했다.


‘으음... 조금이라도 빨리 루이스를 찾아가겠는데.’


그리고, 이것에 대해 물을 사람은 루이스밖에 없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지금 의뢰를 빨리 처리하고 이동하고자 마음 먹었을 때였다.


“너, 너 뭐야!”


어디선가 나타난 어벙한 놈이 나를 보며 경악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 뒤에는 고블린 시체가 쌓인 수레가 보였다. 아무래도 사육 과정에서 실패한 고블린들을 버리러 온 모양이었다.


“여기에-케헥”


나는 다급히 도움을 요청하려는 놈에게 달려들어 단번에 제압했다. 그러곤 잠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으음...! 확실히 다르다.’


내가 달려들었을 때 반사적으로 놈이 꺼내 휘두른 단검! 그것을 가볍게 본능적으로 회피한 나는, 단번에 목덜미를 내리쳐 기절시킨 것이다.


‘이전의 나였다면 바로 거리를 넓히고, 신경전에 들어갔어야 타이밍이었는데..’


자신감이 붙은 나는 놈이 들고 온 횃불을 끄고는 얕게 경사진 언덕길을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지금 같은 실력이라면 어지간한 놈은 단번에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길이 끝나고, 평평한 땅이 나타났다. 그곳을 본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마어마한 숫자다!’


족히 30개는 될듯한 네모난 철창 감옥!

그 안에는 입에 마개가 물린 고블린들이 들어가 있다. 그놈들은 침입자가 왔음을 감지하고 낑낑거리기 시작했으나 다행히도 마개를 하고 있던 덕분에 이전 괴음과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나는 그중 한 놈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펴보다가, 이마에 새겨진 흉측한 흉터를 발견하고는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언뜻 보면 그저 흉터 불과해 보지만, 실상은 수많은 괴어가 얽혀 이루어진 괴상한 문양!

이야기로만 듣던, 마물들을 조종한다는 마도사의 술수가 분명했다.


‘제, 제기랄. 그냥 단순한 사육사 놈들이 아니었단 말인가?’


꿀꺽-


입 안이 바짝 타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마물들의 습성에 정통해 그를 이용해 먹는 놈들과, 마물을 완전히 지배 아래에 두는 마도사를 상대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도망가자!’


조금도 고민할 필요 없이 결정을 내린 내가 곧바로 발걸음을 돌리려 할 때였다.


“뭐 하는 아이냐?”


뒤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

동시에 등골을 짜릿- 타고 올라오는 불안감과 함께, 나는 다급히 바닥으로 굴렀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나를 살렸다.


쐐애애애액-!


-케엨!


내가 서 있던 자리를 꿰뚫은 괴상하게 늘려진 촉수! 그것은 철창 안 고블린의 이마를 박살 낸 뒤, 흐물흐물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걸 피해? 한가락 하는 인간 아이로구나.”


그곳엔 검은 머리를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상당한 외모를 지닌 미인이었는데, 몸에 착 달라붙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흐물거리며 되돌아간 촉수가 어느새 아름다운 미녀의 손으로 변해버린 탓이었다.


‘저건.. 그냥 마도사가 아니다!’


그 모습을 목도한 나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것은 마도사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저런 식으로 마물의 형태에서 사람의 형태로 뒤바뀐단 말인가?


‘설마...’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 하나가 고개를 치켜든다.


마족(魔族)!


그것들은 본래 과거에 마도사였으나, 천륜을 벗어나는 기괴한 사도(邪道)나, 공양의식과 같은 방법을 통해 이 세계에 부활한 괴물들을 일컬었다.

하지만 대륙에 전란이 일어나고, 한참 후에야 등장할 저주받을 이가 어째서 지금 이곳에 있단 말인가?


“이곳을 어떻게 찾아왔느냐? 나름 비밀을 엄수한다 생각했는데.”


그런 내 생각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지. 그녀는 태연하게 하품을 하며 물었다.


“...이곳에서 쓰일 입마개나 썩은 고기, 쇠창살을 다 어디서 구했겠소? 그 흔적을 따라 왔을 뿐이오.”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하면서도, 최대한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위를 살피며 도주로를 모색했다.

제기랄,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단단한 고블린의 두개골을 단번에 꿰뚫어버린 촉수다.

그 가공할 속도를 떠올린 나는 암담한 심정일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오기 직전, 념을 흡수하며 성장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위력이었으니까.


“어머, 그건 생각 못 했구나. 이래서 심부름도 똑똑한 인간에게 시켜야 하는 건데.”


그녀는 마치 기품 있는 귀부인이라도 되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휘둥그레 떠 보였다.

아마 그 장소가 무도회나, 티파티에서였다면 사내 중 그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목소리와 외모를 지닌 여자였다.

문제는 이곳이 고블린들의 비린내와 피고름, 타액 등으로 악취를 풍기는 사육장 한가운데였다는 것이었다.


“롤랑 남작, 그자가 보내서 왔겠지?”


그녀의 물음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상함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쳐죽일 것처럼 촉수를 날린 건 언제고, 인제 와서 대화나 나누고 있단 말인가?


“그놈은 참 멍청한 놈이다. 값비싼 호위를 고용해 지키고 있어도 모자랄 물건을, 그저 창고 한구석에 처박아두다니.”


그제야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저 마녀는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걸음을 좁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구나!’


그제야 나는 암담함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처음 날아왔던 촉수가, 저 마녀가 낼 수 있었던 최대 전력이 아닐까?

조금 전 기습에 실패했던 탓에, 그녀가 나를 단 한 번에 꿰뚫을만한 거리를 확보하고 있다면 현 상황이 말이 된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마족이라 할지라도 수십, 어쩌면 수백에 다다르는 고블린들을 세뇌하고, 조종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이미 대부분의 마력을 그곳에 소모했을지도 몰랐다.

교단이 무너져내리고, 그 영향력이 약화되어 마족들이 날뛸만한 환경이 조성되는 미래라면 모를까.

하지만 현재의 교단은 그 위세가 멀쩡한 상황!

생각은 찰나였다.


“잘 있으시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발을 박찼다!


“이런! 눈치 빠른 것 같으니라고!”


쒜에에에에엑-!


“컥!”


그 순간, 복부에서 불타오르는듯한 고통을 전해졌다.

마녀가 다급히 날린 촉수가 내 몸 일부를 꿰뚫어버린 것이다!


“크윽!”


한차례 그 자리에 휘청인 나는 으드득- 이를 악문 채 검을 들어 그를 내리쳤다.


퍽-!


그러자 고목을 내려친 듯 박혀버리는 검!

뇌가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이어지고, 눈앞이 새하얘진다.


“으아아아아아!”


그럼에도 나는 입에 거품을 문 채로 미칠 듯이 그를 몇 차례 더 내리쳤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아아아아악! 네, 네놈! 그만! 죽여버릴 테다!”


그때, 마녀의 입에서 들려오는 모공이 송연해지는 고통 어린 비명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촉수가 스르르 회수되는 것 아니겠는가?


‘됐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나는 그대로 비탈길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멀쩡한 몸도 아닌 상태에서, 제대로 된 길도 아닌 비탈길을 몸 성히 내려갈 수 있을 리 없다.

몇 번이고 구르고, 나무와 돌에 부딪히고, 온몸은 흙과 낙엽투성이가 된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그 기세를 죽이지 않은채로 반쯤은 굴러 숲을 벗어났다.

언제 마녀가 쫓아와 촉수를 날릴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허억- 허억... 커억!”


그렇게 어느 정도나 내달렸을까.

어느새 숲을 완전히 벗어났음을 깨달은 나는 그제야 배를 내려다보았다.

꿰뚫린 부위가 피로 흥건히 젖은 것을 넘어, 뚝뚝- 피를 한 방울씩 떨어트리고 있다.

이 상태로 여기까지 온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결국 죽는다. 출혈이라도..’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찌이익- 소매를 찢었다.

그리곤, 그를 상처 부위에 쑤셔 넣는다!


“크, 크아아아악!”


작열하는듯한 고통과 함께 다시 한번 새하얘지는 눈앞.


“크헉, 커허헉-”


제자리에 엎어져 한참을 꿈틀거리던 나는 이내 이를 악물고는 일어났다. 그리고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죽을순 없다!’


첫 회차, 고향을 벗어난 뒤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약자라는 이유로 당해온 얼마나 많은 멸시를 당해왔던가?

의뢰비를 떼먹히는 것은 예사다.

방화와 약탈을 강요당한 적도 있었고, 아직 어린애 티를 벗지 않은 소녀를 희롱하려는 이들을 막아서다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은 적도 있었다.

더욱이 대대적인 전란이 제국을 넘어 대륙을 휩쓴 뒤의 광경은 그야말로 인세지옥!

보급이 부족해진 군대가 마을을 약탈한다.

기근과 흉년, 비정상적인 세금에 고통받던 영주민들의 집에 칼을 든 무리들이 들이닥쳐, 여인들을 취하고, 베고, 범죄 행위를 없애기 위해 불을 놓는다.


-이제부터 남김없이 불태워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부터 죽여버릴 테다!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미쳐버린 시대였다.

범죄 행위에 동참하지 않으면 겁쟁이고, 배신자라며 같은 진영의 병사, 용병들에게 맞아 죽던 시대!

그때의 겁먹고, 어리숙하고, 살고자 했던 나는 어떻게 했던가?


‘아아아아아-’


나는 불을 놓았다!

마른 짚을 타고 탐욕스럽게 그 몸집을 키운 끝에, 오두막집을 살라 먹는 화마(火魔)!


-크하하하하, 잘했다! 이제부터는 네놈도 공범이다! 그러니 혼자만 깨끗한 척, 고고한 척 빼지 말란 말이다,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얼간이 같은 자식아!


나를 비웃는 용병대장의 웃음이 들려온다.

마른 밤하늘을 충천(衝天)하듯 타오르며, 마을 전역을 휩쓸기 시작하는 화마의 환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아아아악!

-사, 살려줘! 너무 아파! 아파! 아파!


온몸에 불이 붙은 자가 팔을 뒤흔들며 뛰어나온다.

매연과 화기를 견디지 못하고, 살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는 생존자들.

나는 그를 보며 절망했다.


-크하하하하! 바퀴벌레들이 튀어나오는구나! 죄다 죽여라! 한 놈도 남기지 말란 말이다!


귓가를 뒤흔드는 광소, 그리고 울려 퍼지는 비명- 비명- 비명!


‘아아아아아- 안돼! 안된다고, 이 개자식들아!’


뒤늦게 깨닫는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끔찍한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러왔다.

숨이 가빠지고, 손발이 덜덜- 떨려온다.

눈이 돌아간 나는 그대로, 용병대장에게 달려들었고-


‘...꺼져라, 버러지!’


그가 휘두른 가벼운 주먹 한 방에 그대로 혼절했다.

그 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군대와 용병들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런 내 앞에 펼쳐져 있던 것은 이미 폐허가 된 마을과 숯덩이처럼 시커멓게 타버린 시체들 뿐!

그때 그 순간.

온몸을 잠식해오는 무력감에 절망하던 내가 무엇을 각오했던가?


‘강해져야 한다!’


약한 자들은, 악(惡)에 동조하지 않으면 생존조차 불가능했던 광기의 세월!

그러니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강해져야 한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전쟁영웅이 되어, 그 광란의 시대를 끝장내버리고야 말겠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이제야 알았는데.’


그런 와중에 기적이 찾아왔다.

이제는 강해지는 방법도 알 것 같았다.

이대로만 간다면, 내 꿈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 저런 괴물 같은 마녀를 만나 죽음을 앞두게 되다니.

나의 꿈이, 그리도 이뤄져서는 안 되는 것이란 말인가?


“쿨럭-!”


어느새 환각은 온데간데없었다.

환청 또한 서서히 멀어져 자취를 감춘다.

현실로 돌아온 내가 발견한 것은,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숲길과 그곳을 비틀거리며 나아가고 있는 사내 한 명 뿐이었다.

죽음의 경계 앞에서 몸을 떠밀었던 흥분은 어느새 가라앉고, 머릿속에서 솟구쳤던 삶에 대한 의지가 서서히 사그라들어간다.


‘내가 뭘 하고 있는거지? 아니, 어딜 가고 있는거냐?’


갈 곳은 없었다.

고향을 등진 뒤로, 나는 가족도, 친우도, 여인도 없는 떠돌이였으니까.

집이 있을 리 없다.

그런 내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그때, 머릿속에서 한 남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루이스 하르만!’


전생의 내게 희망을 보여줬던 전쟁영웅 중 한 명!

맞다.

그 남자를 찾아가야 한다.

이렇다 할 근거는 없었다.

반 죽어가는 상태로 찾아간 나를 그가 받아주리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나에겐 그를 찾아가는 것 외엔 길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곳은 어디지?’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춰 섰다.

여전히 안개라도 낀 듯 흐릿한 시선 속.

세상에 내려앉은 칠흑 같던 어둠의 장막이 어느새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지평선 저 너머에서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여명!

어느새 날이 밝은 것이다.

나는 눈살을 찡그린 채로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누구냐-’


따사로운 빛을 등진 채 걸어오는 누군가.

그는 피투성이가 된 내 모습을 발견하기라도 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이보게! 괜찮나?”


그제야 나의 눈이 스르르 감겨갔다.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라 생각하며.

거기까지가,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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