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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le Paradise

할아버지의 육아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SF

최화린
작품등록일 :
2023.06.05 11:12
최근연재일 :
2023.06.05 17:47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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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수 :
23,169

작성
23.06.05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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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1. 신분증이 무엇인고?

DUMMY

중림동 주민센터. 그곳에서 서기보로 근무를 시작한 사회초년생 은서는 아침부터 난감하기 짝이 없는 민원인을 만났다. 어쩐지 오늘따라 유난히 출근하기가 싫더라니, 첫 타석부터 이런 노인네를 상대하게 될 줄이야.


“그러니까, 어르신. 신분증을 보여주셔야 도와드릴 수 있다니까요.”

“허허, 이보게, 처자. 그게 뭔지 알면 내가 이곳에 왔겠는가.”

“그러면 주민등록번호로 조회해볼게요. 생년월일을 말씀해 주시면······.”

“허허, 처자는 아까부터 내가 답할 수 없는 질문만 하는구려. 나도 모르는 걸 내게 물어보지 마시게.”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허연 수염에 땀과 고름이 덕지덕지 붙어 누렇게 된 삼베옷을 거지처럼 입고 들어온 노인이다. 목소리는 카랑카랑한 탈북자 억양에, 입이고 옷이고 할 것 없이 냄새도 지독해, 마주하고 있기가 아주 고역이었다. 게다가 치매까지 있는지, 따로 연락할 사람도 없고, 심지어 자기 생년월일도 모른단다.

유일하게 대답한 게 제 이름 석 자인데, 그마저도 국내에 존재하지도 않는 척 씨에, 이름이 무려 준경이시란다. 국사 공부하면서 알게 된, 고려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린 그 척준경! 기껏 외웠더니 임용시험엔 나오지도 않은 내용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름이라도 조회가 되면 뭐라도 해볼 텐데, 그것조차 안 되니 어쩌면 주민등록 말소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하아, 어르신. 그러면요. 지금 사시는 곳이 어디세요?”

“내,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이곳에 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들었네만. 밤새도록 관아가 열리기만 기다렸는데, 이리도 따지는 게 많을 줄은 몰랐군그래.”

“사시는 곳이요. 어르신. 지금 어디서 오시는 길이세요?”

“응애! 응애!”

“괜찮다. 괜찮아. 할애비가 안아주잖니.”

“아이고······.”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질 못하니, 정말 마음 같아서는 보건소로 찾아가라고 돌려버리고 싶었다. 품에 안긴 아기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애가 참 목청도 크네. 꼬까옷 예쁘게 잘 입혀 놓고, 엄마는 도대체 어딜 간 거람.’


최은서는 작고 귀여운 것에 약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남의 슬픈 이야기에 눈물을 펑펑 쏟아낸 일화만 해도 부지기수다.

그녀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기를 어렵사리 달래는 독특한 민원인을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설마 엄마가 죽은 거야? 애 하나만 남기고? 그래서 노인네가 저 연세에 혼자······.’


그때 울다가 성질이 난 건지, 아기가 고사리손으로 노인의 흰 수염을 잡아당겼다.

이에 순간 야차같이 변했던 노인이지만, 놀란 아기가 더 큰 울음을 터뜨려버리자, 얼굴이 금세 풀어졌다. 덩달아 깜짝 놀랐던 은서도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기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울어댔다. 보기 싫은 아침드라마를 보는 심정으로 앉아있던 그녀는 노인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여서 말하네만, 함부로 예단하지 말게. 애 엄마는 살아있네. 내게는 질부가 되는 사람이지. 이 아이는 내 종손녀고. 애가 어제부터 굶어서 그러니, 시끄러워도 자네가 좀 이해해주게나.”

“아··· 예······. 에? 혹시 손녀분 어머님··· 그러니까, 질부? 그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들이라고 하네. 천출이라 성은 없으이. 자장자장, 우리 순이. 잘도 잔다, 어허라, 우리 순이, 자장자장.”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걸까. 아기 우는 소리가 시끄러워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주민센터 서기보는 저도 모르게 멍청한 얼굴로 되묻고 말았다.


“들이······?”

“들에서 태어났다고 그런 이름이 되었다고 들었지. 처자는 지체 높은 가문의 여식이라 이름도 잘 받았겠지만, 글을 모르는 백성은 이렇게 짓는 게 보통이라네.”

“어··· 음······. 그러시구나······.”


그녀는 결국 포기했다. 무슨 질문을 하든 상상 그 이상의 대답이 나와버리니, 민원이 해결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밀린 다른 민원부터 처리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뒤로 가셔서 잠시 앉아있으라 말하려는 찰나, 겨우 애를 달래는 데에 성공한 노인이 오히려 물었다.


“그런데 자네 이름 최은서 옆에 있는 글씨는 어떤 자인가?”

“예?”

“내, 학문 성취가 그리 깊지는 않다만, 자네 명판을 보고 이름을 부르는 것엔 문제가 없는데, 도무지 그 왼편에 그려진 것은 읽지 못하여 그런다네. 획이 단정한 걸 보면 중원의 문자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보기엔 부수가 전혀 보이질 않으니.”


???

은서는 노인의 이야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아니,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던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명패를 보고 나서야, 노인의 말뜻을 겨우 알아차렸다.


‘한글도 모른다고?!’


아무리 중증 치매 환자라도 한글이 뭔지는 안다. 모를 수가 없는 시대니까. 조선족이나 탈북민도 대충은 아는 게 한글이다.

그런데 이 민원인은 달랐다. 자신이 알던 상식이 모조리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아니지, 연세를 생각하면 한글은 못 배우셨을지도······. 일제강점기엔 일본말과 한자만 배울 수 있었다고 하니까······. 어라, 그럼 치매가 아닌 걸까? 설마 무국적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그녀의 생각을 중단시킨 것은 아기였다.

응애응애 하는 울음소리가 다시금 주민센터를 울리니, 겨우 자기 용무를 보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금 하나로 모였다.

출근한 지 채 한 시간이 안 되었지만, 은서는 정신적으로 몹시 힘들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과 아이의 사정이 딱했지만, 무국적자나 주민등록 말소자는 행정적으로 도와줄 방법이 드물었다. 그나마도 서기보 3개월차인 그녀로서는 상세한 지원책을 알지도 못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어르신··· 말씀드리기 죄송한데, 혹시 연락할 사람이 전혀 없는, 그러니까 무연고자이시면, 저희 쪽 말고 구청에 사회복지과로 가시면 지원 물품을 받으실 수······.”

“응애! 응애!”

“이 가여운 아이 먹일 한 끼 죽이면 되는데, 그것이 그리 어려운가.”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도요. 절차를 지켜야 해서 그래요.”

“별천지인줄 알았더니··· 참으로 야박한 세상이었구먼······.”

“응애! 응애!”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침부터 실례 많았네.”


노인은 실망과 암담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로 등을 돌렸다.

은서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기가 자꾸 보채며 우는데, 그 눈물을 주름진 손으로 조심스레 쓸어내리는 노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울렸다.


“아가, 이 할애비가 미안하구나. 미안해······.”

“응애! 응애!”


어디선가 쯧쯧 하는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의 뒷모습을 망부석처럼 바라보던 은서는, 더는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에잇! 어르신, 잠시만요!”


애 울음소리 때문에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엄마도 없이 울고만 있는 아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색한 표정으로 뒤돌아본 노인의 입이 어렵사리 열렸다.


“···방금까지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당장은 행정적인 도움이 어렵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해드릴 수 있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저랑 같이 나가요. 죽 사드릴게요.”

“···그래도 되시겠는가?”

“잠깐만 먼저 나가서 기다려주시면요. 외출 허락받고 모셔다드릴게요.”


은서는 노인과 아기를 현관에 세워둔 후 재빨리 몸을 돌렸다. 상사에게 허락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정말 고맙네.”


노인의 애환이 담긴 목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와, 그녀는 처연히 웃었다.

은서는 곧장 동장 집무실로 갔다. 그리고 이 사태를 모조리 듣고 있었을 그를 향해, 싹싹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동장님, 저, 잠깐 나갔다 와도 될까요?”

“이거야 원. 이미 다 저질러 놓고 와서는······.”


중림동의 50대 배불뚝이 센터장은 불편한 심기를 감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은서는 눈치를 보고서, 그저 공손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허락이야 해주겠다만. 내, 은서 씨에게 조언을 하나 해줄 테니, 잘 들어요.”

“예, 동장님.”

“우리 동에 노숙자가 많다는 사실, 은서 씨도 알고 있지요?”

“예, 동장님.”

“은서 씨도 알고 있겠지만, 그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싸고, 드러눕고, 행동합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요. 그런 노숙자를 상대로 호구 역할을 자처하지 마세요. 돈 낭비고, 시간 낭비고, 행정력 낭비니까.”

“예, 동장님.”

“이 나라는 세금을 성실히 납부하는 시민들을 도와주라고 은서 씨를 공무원으로 뽑았어요. 노숙자에게 사비를 털어 도와주라고 그 자리를 준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은서 씨가 그렇게 행동해버리면, 여기서 근무하는 다른 직원들은 뭐가 돼?”

“동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녀가 변명하지 않고 수용의 뜻을 밝히자, 동장의 얼굴도 금방 풀어졌다.


“내 말뜻을 알아듣겠어요?”

“예, 동장님.”

“그걸 알 만한 사람이 아까는 왜 그랬어?”


은서는 동장의 표정을 확인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참, 은서 씨는 조부모님 밑에서 자랐다고 했지.”

“예, 동장님.”


과연 그 핑계가 주효했는지, 무게를 잡던 동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다음부터 안 그러면 되지. 늦지 않게 다녀와요.”

“예.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얼른 가 봐요. 애가 무슨 죄야.”


은서는 동장에게 공손하게 인사한 후 뛰듯이 걸어 나갔다.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으로 팔짱 끼고 쳐다보는 주사보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외출을 부러워하며 엄지를 세우는 서기에겐 눈인사를 건네며 주민센터를 나오니, 아기를 안은 노인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르신.”

“···별천지의 하늘은 이상하구려.”

“예?”

“밤엔 별들이 잠을 자더니, 낮엔 구름도 없이 혼탁하니 말이오.”

“아아, 오늘 미세먼지가 매우 나쁨 수준이라 그럴걸요.”


별생각 없이 대답하던 은서는, 의아한 눈빛이 되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인이 말하는 투가 조금 이상했다. 평생 하늘도 안 보고 산 사람처럼 말이다.

애가 잠깐 울음을 그치니 또 치매가 왔나 싶어서, 그녀는 얼른 노인을 안내했다.


“어르신, 요 앞에 길 따라 내려가면 아기가 먹을 만한 죽을 파는 집이 있어요. 거기로 가요.”


냄새나는 노인은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었다. 아기를 안고 내딛는 걸음조차 위태로워 보인 탓에, 은서는 도저히 멀찌감치 떨어져서 갈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도착하기도 전에 무슨 사달이 나겠다 싶어, 그녀는 아기를 대신 안아서 걷고자 말을 걸었다.


“되었네. 마음은 고맙지만, 내, 아직 이 아이 하나쯤은 품에 안을 수 있어.”

“어르신이 힘들어 보이셔서 그래요. 혹시라도 잘못돼서 넘어지시기라도 하면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

“되었대도!”


좋게 권유하던 은서는 별안간 터져 나온 노성에 깜짝 놀라 말문을 잃었다.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성량이었다. 인근을 지나던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는 것도 모자라, 걷기 좋아하는 비둘기들마저 뒤도 안 돌아보고 날아갈 정도였다.

뒤늦게 귀를 꼭 막은 그녀가 놀란 심정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사과를 했다.


“죄, 죄송해요. 그렇게 싫어하실 줄은 몰랐어요.”

“아닐세. 내, 처자가 좋은 의도로 마음을 써준 것임을 모르지 않네. 다만, 나는 이 아이만큼은 꼭 지켜서 어미에게 무사히 돌려줘야만 한다네. 그럴 의무가 있어.”

“예에······.”

“내 품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 내 품이······.”


은서는 어떤 말 못 할 사정이 있나 보다 하고 넘어갔다. 이럴 땐 그러려니 하는 게 제일이었다. 물론, 노인의 사정보다는 그 큰 목소리에도 울지 않는 아기 쪽이 더 신경 쓰였다는 게 정확했다.


‘손녀가 맞기는 맞나보네. 어른도 깜짝 놀랄 정도인데 방실방실 웃고.’


그랬다. 아기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 분명 배가 몹시 고플 텐데도, 주민센터에서와는 달리, 무척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웃으니까 더 귀엽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아기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방긋 미소를 보여주었다. 은서도 아기를 따라 헤헤 웃었다. 작고 귀여운 걸 좋아하는 그녀로서는 무척이나 눈이 즐거워지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노인이 결국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제 종손녀를 예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본 게다.

두 사람은 아기를 사이에 두고 눈을 마주치고는, 또 한 번 작게 웃었다.


“또 울기 전에 얼른 가요, 어르신.”

“그러세나.”


두 어른과 한 아기는 그렇게 서로의 기분을 맞추며 걸음을 재촉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작가의말

표준어를 쓰려고 하는 경상도 사람처럼, 주인공도 북한말 특유의 강세가 드러나는 표준어를 쓴다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작 본인은 왕궁에 입성하고 나서는 완벽한 표준어를 구사해왔다고 생각하지만요.

주인공이 하는 대사를 더 고풍스럽게? 더 어울리게 조언해주실 분이 계시다면, 언제든 댓글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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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분증이 무엇인고? 23.06.05 24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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