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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le Paradise

할아버지의 육아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SF

최화린
작품등록일 :
2023.06.05 11:12
최근연재일 :
2023.06.0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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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5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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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주마등

DUMMY

내 가장 오래된 기억 중 하나를 떠올려보자면, 비 내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나를 대신해 무릎 꿇고 흙탕물에 고개를 조아리던 모습이다. 그 빛바랜 초라함을 내려다보던 이의 비단옷이 홀로 빛나 보였던 탓에, 내 꿈은 입신양명이 되었다.

같은 향리라 하여 동색이 될 수 없음을 깨쳤던 그 날 이후로, 붓을 집어던지고 칼을 들었다. 학문에 힘쓴들 대를 이어 호장의 수족이 될 뿐인 삶을 베어내고자 했다.

가업을 이어갈 것을 강권하던 아버지의 기대가 겨우 말문이 트인 동생에게 옮겨가는 것을 알았지만 무시했다. 어렸던 나는 아버지의 기대대로 자란 나를 상상하는 것보다, 비단옷을 입은 나를 상상하는 게 더 좋았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장군이 되는 일도 흔하다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직업을 세습한다면 평생 말단 향리로 살다 갈 뿐이다. 할아버지도 그러했고,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러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되길 원치 않았다.


가난한 집의 아들이 가업마저 거부하면, 남은 것은 객지를 떠돌 운명뿐이다.

새파란 나이에 품은 웅지로 팔도강산을 유람하며 견문을 넓히던 중, 기회가 닿아 계림공의 식객이 되었다. 내가 몸을 쓰는 것을 좋게 봐준 그의 추천으로 추밀원 별가가 되었을 때, 집안의 도움 없이 아버지와 같은 신분이 되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내가 한 마리의 학이 될지, 아니면 수많은 닭 중에 하나로 남을 뿐인지는, 앞으로의 내 처신에 달려있었다.

그즈음에 계림공이 들려준 이야기는 일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남들과 같은 선택을 한들, 또 하나의 범부가 될 뿐이다. 네 진정 무부가 되고자 한다면, 사면초가의 선택이 될지언정 범부로서는 감히 따르지 못할 길을 가라.”


나는 그 뜻을 좇아 평생을 살았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일패도지하여 퇴각하는 와중에도, 제 목숨만큼은 끔찍이도 위하는 총사령의 뒷모습이 원망스러워 심지를 꺼내어 보인 게 시작이었다.


“장군! 여분의 개마 한 필과 월도를 내게 주신다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워 장군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보일 테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평장사가 어디 한번 해보라며 내어준 긴 칼을 쥐고 말에 오르자, 전신에 사나운 기운이 용솟음쳤다.

홀로 길을 거꾸로 내달려, 추격해오는 선두의 적장을 베고 수십의 기병을 낙상케 하였다. 그 위용에 의기를 세운 장졸 일부가 합세하여, 구해낸 포로들과 함께 한 차례 격전을 더 치르니, 적장 둘의 수급을 추가로 얻었다. 졸전 속 작은 승전보였다.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전공을 세워 보였다는 자긍심은 투옥되며 무너져 내렸다.

총사령관에게 무례한 언사를 하여 욕을 보였단 죄목 앞에선, 전공을 말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하극상으로 죽을 위기에 처한 나를 구해준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중늙은이였다.


“장차 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고자 하나, 대계에 어울리는 장수를 구하기가 난해하였거늘, 비범한 소식이 노구를 이리로 행차케 하였다. 네 용맹을 들어 묻건대, 본관을 따라 북진하며 대고려의 기상을 세울 웅심이 있느냐.”


나는 그날, 태어나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기분을 맛보았다.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던 노인의 입으로 흘러나온 장지가 내 마음을 단숨에 휘어잡았기 때문이었다.

심장을 멋대로 날뛰게 하고, 고개를 저절로 숙이게 만드는 위압감이 그에게 있었다. 그것은 영웅의 풍모였다.

가뜩이나 좁은 옥사만큼 옹졸한 상관에게 갑갑하던 차였다. 대답은 즉시 나왔다.


“남아로 태어나 국가대사에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영광은 없는 줄 아뢰오! 그 길로 나를 이끌어준다면, 금일부로 노인장의 칼이 되리다!”


배움은 짧았으나 뜻을 세움에 머뭇거리거나 흔들리진 않았다. 시대의 영웅이 손을 내밀어주는데, 붙잡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자신을 대원수라 소개한 노인은 그런 나를 보며 파안대소했다.

계림공의 말이 맞았다. 무릇 무부라 하면 범부와는 다른 길을 걸어야 했다.


대원수를 모시게 되면서 직급을 새로이 받았다. 형식적으로는 궁에 소속되어 있되, 실질적으로는 그를 따라 종군하며, 여러 전장에서 장수가 될 경험을 쌓았다.


“작전이 성공하여 적군에 적잖은 피해를 줬으나, 기병 중심인 여진족 특성상 시일이 지난다면 오히려 굳건해질 것이다. 그 전에 석성을 함락시켜야만 한다. 내, 너를 선봉에 세우겠으니, 즉시 출진을 준비토록 하라.”


모두가 죽기를 각오하고 오르는 성벽이건만, 나는 오히려 그곳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았다. 대원수의 기대에 부응함과 동시에 받은 은혜를 갚을 순간이었다.

방패로 하늘을 가리고 달려, 누구보다도 빨리 성벽에 올랐다. 달려드는 적병을 모조리 도륙하며 지휘하는 장수가 보일 때마다 그 목을 치니, 성 안팎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아군이 내지르는 함성이 그렇게 듣기 좋을 수 없었다.


이후 지형의 이점을 믿고 북진해 나가다 복병을 만나 크게 패퇴했을 때도, 오직 나만이 지리멸렬하는 꼴을 애써 외면하는 대신 활로를 찾았다. 본영을 세운 방향으로 돌파하여 대원수만큼은 반드시 지켜내고자 한 것이다.

후미에서 적들의 추격을 저지하며 시간을 버는 사이, 지원군이 당도하여 살아남은 병졸을 수습했다.

대원수가 무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인지한 즉시, 말머리를 돌려 추격해오는 적을 향해 나아갔다. 패잔병 사냥을 즐기는 놈들에게, 대고려의 기상은 결코 한 번의 패전으로 무너지지 않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늘은 내 목숨을 원하지 않았다. 수십의 창칼과 마주하고도 나는 또다시 살아남았고, 인근의 주인 잃은 군마를 수습하여 대원수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천하의 모든 명검을 가져온다 한들 너와 견주랴! 내, 지금부터 너를 아들로 여길 터이니, 너 역시 본관을 아비로 대하라!”


그가 감읍하며 나를 반김에, 제장의 눈총을 한몸에 받았다.

허나 범인들의 시선은 내게 어떤 의미도 되지 못했다. 오직 노회한 대원수의 한줄기 눈물만이 내게 의미가 되었다.

말로써 전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오롯이 이해했다. 담대한 뜻을 논하기엔 이 나라 고려의 현실이 그리 녹록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날, 함께 울고 또 웃었다.


대원수는 패잔병을 수습해 죽령까지 물러났다. 경상도의 요충지인 영주성이 지척인 곳이었다.

그는 여진족의 본대가 곧 따라붙으리라 예상하고는, 죽령의 산세에 기마가 지칠 때를 노려 요격하고자 했다.

대원수의 판단은 적절했지만, 이미 장졸의 기세가 크게 꺾여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영주성으로 퇴각하여 성문을 걸어 잠그자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대원수는 그 직책에도 불구하고 부장들의 요구를 묵살하지 못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영주성에 틀어박힌 우리와 마주하고서, 적은 착실하게 공성을 준비해나가는 모습이었다.

여진이 하나의 기치 아래 점점 세를 불리자, 성안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특히 비축된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구원으로 올 만한 인근의 군영조차 없다는 현실은, 장수들조차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패잔병 특유의 분위기로 인해, 짙은 무력감이 영주성에 만연했다. 이대로는 수성을 택한들 하룻밤을 넘기지 못할 게 자명해 보였다.

나조차 그렇게 판단했으니, 대원수의 생각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허나 대원수는 달리 심모가 있었음인지, 그날 밤, 은밀히 내 막사를 찾아왔다.

그는 이런 시국에선 통수권자의 권위를 뛰어넘는 영웅만이 전의를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내게 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될 방도를 알려주었다.

대원수는 내 목숨을 던짐으로써 영주성을 지킬 방안을 제시했고, 나는 수락했다. 이야기하는 내내 서글퍼 보이던 그의 얼굴에 금이 갈 정도로 나온 즉답이었다.


“이놈아! 내, 장단의 심정으로 자식같이 아끼겠다고 한 너를 사지로 내몰건만, 어찌하여 너는 일말의 헤아림도 없이 내 뜻을 따르느냐?!”


대원수의 비통에도, 나는 크게 웃었다.


“제가 처음 뜻을 세울 때 무부가 되고자 하였고, 대원수께서는 이런 저를 어여삐 여기시어, 대고려의 영웅으로 만들어주겠다 약조하셨습니다. 그것이 지금에서야 이루어질 참이니, 제가 어찌 명령을 따르지 않겠나이까. 아버님.”

“···이 넓은 영주성에서, 정녕 너만이 장수로구나. 좋다. 나는 계자를 잃겠지만, 대신 이 나라 고려가 영웅을 얻음이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내 막사로 찾아오거라.”


다음날은 대원수의 예상대로 진행되었다.

침중한 분위기 속에서, 내가 나가 맞서 싸우자고 강변하자, 다른 장수들이 불쾌한 얼굴로 온갖 거친 언사를 쏟아냈다.

그렇지만 나는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나와 함께 적진으로 나아가 싸울 무부가 아니라면 입을 다물라고. 죽음 앞에서도 투지를 잃지 않는 사람만이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나는 그렇게 갑옷 걸친 범부들과 선을 그었다.

대원수는 다른 장수들에게 눈엣가시가 된 내게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처럼 죽기를 각오한 이들만으로 결사대를 이끌고 나가서 싸워보라고.

개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대원수의 명령에, 다른 장수들의 입에 조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들의 언행은 대원수와 나에게 하등 가치가 없었다. 외세의 침입에 불안해하면서도 터전만큼은 지킬 생각인 민초의 동향만이 중요했다.

나는 군장을 꾸린 후 주막을 찾았다. 아침의 소동은 이미 소문이 되어 저잣거리에 파다하게 퍼진 뒤였다.

나는 평상에 앉아 태평하게 술을 마셨다. 그리고 분연히 찾아오는 자들에게 술잔을 나눠주었다.


“나와 술잔을 나눴으니, 지금부터 그대들은 모두 내 형제다. 그대들의 형제로서 하늘에 대고 맹세하겠다. 나는 형제와 함께 싸우며, 함께 피 흘리고, 함께 죽겠다. 그대들 가운데 누군가 웃는다면, 같이 웃겠다. 운다면, 같이 울겠다. 아프다면, 같이 아파하겠다. 그리고 싸우다 죽는다면, 내가 살아있는 한, 반드시 복수해주겠다.”


가족과 나라를 우리 손으로 지키자는 내 구호에, 주막에 모인 소영웅들은 큰 함성으로 호응했다.

그 자리엔 힘깨나 쓸 법한 청장년이 많았으되, 시주하러 들렀다가 합류한 스님, 굽은 허리가 펴질 줄 모르는 노인, 전쟁통에 가족을 모두 잃은 아낙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길게 땋은 댕기 머리를 싹둑 잘라 참전 의지를 내보인 처녀였다. 막 소녀티를 벗은 그녀는 허리에 손잡이가 닳은 칼을 차고 있었는데, 선비였던 부친의 유언을 따라 국난을 타개하는 일에 몸을 바치고자 했다.

나는 주막을 찾아온 인원 모두의 의지를 존중했고, 뜻을 모은 끝에 함께 성문을 열고 나갔다.

서로 빤히 마주 보는 상황에서 소수의 인원만을 이끌고 공격을 걸어올 줄은 몰랐는지, 정찰병으로 보이는 기병 몇이 접근해왔다. 나는 선두에 서서 달린 끝에 그들을 단숨에 낙마시키고 말을 빼앗아 전력으로 질주했다.

가장 가까운 곳을 들이친 나는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며 일행이 달려올 시간을 벌었다. 마침내 방패를 치켜들고 뒤따라온 형제들이 여진족 막사 곳곳에 불을 질렀다.

몰려드는 수천의 기병을 상대로, 오히려 말을 달려 단기필마를 감행했다. 극한까지 올라간 집중력에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화살의 깃털조차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싸웠다. 다가오는 적을 찌르고 베는 것만 생각했다.

인근이 불바다가 되어 말들이 머뭇거릴 때가 되어서야 내 손이 잠시 멈췄다.

불길을 마주하고 선 적들 가운데 어색한 우리말이 들려왔다.


“너는 포위되었다! 지금이라도 항복하라! 너의 용맹을 높게 사 후대하리라!”


나는 하늘을 보며 웃었다. 적이 오지 않겠다면, 내가 가면 될 일이 아니던가.

말을 방패 삼아 화살을 막으며 불길 사이로 뛰어올랐다. 그 즉시 가장 가까운 적에게 칼을 내지르니, 적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다시 말을 빼앗아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니, 마침내 인마가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퇴각을 고민하는 듯한 적장을 노려보며 크게 외쳤다.


“대고려 장수의 목숨을 취할 자! 더는 없는가! 너라도 와서 가져가 봐라!”


그때 내 육신은 지쳐 있었다. 하지만 정신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으니, 나와 마주하고서 심적으로 지쳐버린 적장의 퇴각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진은 부족사회다. 족장은 전쟁에서 이겨 전리품을 나눠줄 의무가 있다. 전쟁에서 지고 따르는 부족원들을 잃어버린 족장은 권위를 지키지 못한다.

그런고로 나와 마주한 적장은 내 목숨보다 제 안위를 먼저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믿기지 않을 대승에, 나와 함께 한 형제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연신 웃었다.

여진족이 미처 챙기지 못하고 간 물자가 너무나 많아, 우리는 우선 쓰러진 일행만 챙겨 귀환하기로 했다.

그 잠깐의 틈에 어디서 피리를 노획해온 처자가 흥겨운 가락을 연주했기에,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겁지 않을 수 있었다.

벌어진 일을 누대에서 똑똑이 지켜본 장졸이 모두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그대들이 진정 이 나라의 영웅이오. 백성의 내일을 지켜주어서 감사드리오.”


선두에 선 대원수가 자정하여 큰절을 올리니, 뒤에 시립해 있던 장수들이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는 나보다 형제들이 장졸의 존경을 받은 듯하여, 그것이 기뻐 웃었다.

돌이켜보면 이때가 내 생애 가장 충만한 나날이었다.


그 뒤론 동료 장수를 구원하기도 하고, 대원수와 함께 적을 무찌르기도 했다.

다만 여진족과 싸우는 날이 길어질수록 고려의 한계를 명확히 깨달았던 이유로, 나 또한 내심 화의를 바라게 되었다. 전장을 전전하는 건 그만큼 지독한 일이었다.

그 사이 내자도 얻었다. 아녀자의 몸으로 내 뒤를 줄곧 따라다니던 처자였다.

시국이 어수선하여 혼례는 치르지 못하였지만, 함께 하는 형제들에게 축하를 받았으니, 우리 두 사람 모두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와 내자는 여진과의 화의가 정식으로 체결된 후, 일가를 이루었다.


대원수는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 남아로 태어나 한 시대를 풍미했으니, 남은 삶은 가족을 위해 살아보라는 서신을 남겼다.

나는 그 유언을 따르고자 노력했으나, 어떨 때는 가족을 앞에 두고도 심장이 뛰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무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달려왔으나, 막상 전쟁이 끝나고 일상을 살게 되니, 공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겠다 싶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세월이었다. 숨을 쉬고 있으니 그저 살아만 가는 나날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소성군 개국백이 제안한 바에 휘둘렸는지도 모른다.


“장수로서 구국의 영웅에 올랐으니, 이젠 나라의 대들보가 되어보셔야지 않겠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을 양분하자는 이야기는 거부하기엔 너무나 달콤한 과실이었다. 주인을 잃은 칼은 그렇게 권력을 꿈꾸는 야심가의 철퇴가 되었다.

군부를 장악하는 건 쉬웠다. 전쟁을 거치며 상관이었던 자 대부분이 다양한 이유로 군부를 떠났고, 나보다 직책이 빨리 오른 장수도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소성군 개국백은 정략과 모략으로 본인의 자리를 끌어올렸고, 결국엔 거사를 성공시켰다. 그랬던 그조차 딸의 배신은 상상조차 못 한 듯싶었지만 말이다.

동생과 아들을 그때 잃었다. 평소 나를 마뜩잖게 여기던 자들의 소행이었다.

피붙이가 피습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당장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 즉시 호위 병력을 이끌고 궁궐로 달려갔지만, 이미 대문은 굳게 잠긴 뒤였다.

동생과 아들의 시신을 확인한 나는 대노하여 흉수를 잡고자 궁궐에 불을 질렀다. 방화 사건을 계기로 조선국공과 점차 사이가 틀어졌지만, 당시엔 아무래도 좋았다. 그 순간만큼 살심이 강하게 피어올랐던 적도 달리 없었다.


미쳐있던 내가 그나마 정신을 차린 것은 재로 화한 궁궐을 본 직후였던 것 같다. 평생을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던 영혼이 처음으로 지친다고 느꼈으니까.

그날 꿈에 대원수가 찾아와, 처음으로 나를 꾸짖었다. 가족을 지키라던 유언을 어기고서, 고려의 기상을 세우자던 생전의 맹세마저 불태우니, 그것이 정녕 무부의 길이냐고 호통쳤다. 나는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옥죄는 마음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괴팍한 늙은이가 되어버려 있었다. 당장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부터 그러했다.

젊었을 적엔 호기롭다는 소리를 들으며 세상의 중심에서 살았건만, 늙어버린 몸으로 범부는 감히 시도도 못 할 일을 벌여서일까. 이제는 세상은커녕 가족조차 내 곁에 남아있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내 심정을 이해하는 이는 하나 없고, 아첨하며 곳간을 불리는 자들만 가득했다. 이 지경이 되도록 무엇을 바라고 권력을 붙잡고 있었나 싶었다.

수구초심이란 단어가 문득 떠올랐다.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거취를 정리하고자 마음을 먹었을 즈음, 국공의 노비가 결정타를 날렸다.


“궁궐에 화살을 쏘고 불을 지르니, 이는 죽음으로 갚을 죄다!”


다 내던지고 고향으로 떠나도 된다. 권력은 알아서 다음 먹이를 모색할 터였다.

하지만 그래서야 전장을 도망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긴 싫었다. 구천을 떠돌게 되더라도, 대원수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때마침 도착한 왕의 밀서는 말년을 마무리하기에 적당했다. 역으로 선 것을 바르게 되돌리기로 마음먹은 나는 왕에게 다가가 내 죄를 청했다.


“폐물과 준마를 하사받아 감사하오나, 신은 어디까지나 결자해지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토사구팽은 신하에겐 허물이나 군왕에겐 정리이니, 낡고 녹슨 칼은 보고에 들이지 마시고, 다만 쓰고 버리시옵소서.”


왕은 갈등하는 눈빛으로 한참이나 머뭇거렸으나, 결국 내 청을 수락했다.

그리하여 나는 반역도당을 일소한 후, 새로운 권력층에 내 몸을 먹이로 내주었다.

죄가 커 귀양살이를 시작했으되, 성은을 입어 고향 땅에서 친인들 곁에서 죽을 수 있게 되었다. 적당한 마무리였다.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몸이 되어, 하릴없이 삶을 반추해보니 한바탕 춘몽이었다. 대원수의 그림자를 따를 때가 진정 좋았었거늘······. 주제에 안 맞는 욕심을 부린 끝에 영광을 누렸으되 나락도 함께 얻었다.

이제는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온몸이 나른했다. 숨도 점차 가늘어지는 것이,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힘겹게 눈을 떠 따사로운 볕이 드는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평화로웠다. 내게는 과분할 정도로 감사한 종언이었다.

생을 마감함에 있어, 단 하나 아쉬운 것도 없다면 거짓일 터다. 허나 내 경우엔 그것보다 저승에서 만날 동료들과의 재회가 더 기다려지는 일이니······.

생각을 이어가는 것조차 힘겨워 그만 놓으려는 찰나에, 무언가 작지만 묵직한 것이 엉금엉금 기어 내 가슴 위로 올라왔다. 종손녀 순이였다.

답삭 안겨 온 녀석이 꼬물꼬물하더니 내 심장에 제 귀를 가져다 대었다.

오늘내일한다는 큰할아버지가 살아있나 확인이라도 하는 건지 한참을 그리 가만히 있더니, 갑작스레 자세를 바꿔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어린아이 특유의 생기에 마른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 따뜻한 기운이 내게도 조금은 들어왔음인지, 눈을 뜨기 전보다 한결 몸이 개운한 기분이었다.

머리가 어느 정도 개이니, 질부는 무얼 하길래 돌도 안 지난 제 막내딸이 냄새나는 산 송장 위에서 놀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는지 의아해졌다.

소리쳐 부르고 싶었지만, 그럴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아이가 어미의 부재를 느끼고 울지 않게, 힘껏 눈을 마주쳐 주는 게 고작이었다.

내 몸을 놀잇감 삼아 기어 다니던 종손녀가 지쳐 잠들고,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창으로 쏟아지던 붉은 노을빛도 일시에 모습을 감추었다.

온기 하나를 잃어버린 방안이 서늘해졌건만, 질부는커녕 다른 어떤 이도 내 방을 찾지 않았다.

때마침 배가 고팠음인지, 내 품에서 한숨 곤히 자고 일어난 순이가 목청껏 울었다.

그때서야 무언가 나쁜 상황이 닥쳤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침이 돌지 않는 입안을 억지로 깨물어 피를 냈다. 그 아픔에 정신이 번쩍 들었으되, 천천히 피를 돌려 뱉어낸 후, 혀를 움직여 외쳤다.


“게 아무도 없느냐!”


정녕 이상했다. 사력을 다해 목청껏 외쳤음에도 누구 하나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고사리손으로 내 옷깃을 꼭 거머쥔 순이는 여전히 보채고 있었다. 무언가 먹일 만한 것이 필요했다.

애가 우니 집 나갔던 용력도 돌아왔다. 거동을 전혀 하지 못해 등창이 생길 정도였던 몸이거늘, 어디서 이런 힘이 잠들어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침상 귀퉁이를 잡고 겨우 일어나 걸터앉았다.


“쉬이쉬이, 울지 말거라, 아가. 이 할애비가 맛난 걸 찾아줄 터이니, 울지 말렴.”


말은 이렇게 했지만, 다 죽어가는 늙은이가 먹을 만한 것을 만들어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부엌에 가면 뭐라도 먹일 게 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품에 안은 종손녀를 달래며 노구를 움직였다.


내가 아무리 노환이 들었어도 집 구조를 잊어먹을 정도로 멍청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선 순간, 드디어 노망이 나고 만 건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난생처음 보는 것들뿐이었다. 거리를 거니는 사람조차 익숙한 이가 전혀 없었다. 낯설다 못해 민망할 정도였다.

몹시 당혹스러워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니, 발치에 무언가 걸렸다. 벽이었다.

대경하여 두 눈을 부릅떴다. 내 거처가 온데간데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얼빠진 목소리를 내뱉으며 물아를 부정하려는 찰나, 세상 만물을 합친 것보다 더한 현실감을 주는 단 하나의 존재가 나를 격동시켰다.


“응애! 응애!”


그랬다. 밥도 못 빌어먹을 번뇌 따위가 중한 게 아니었다. 몽환이고 나발이고, 당장은 막내 종손녀의 주린 배를 채워줄 방도가 시급했다.

마침 바로 곁을 지나치는 아녀자가 있기에 경황도 없이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여 보오. 생면부지에 참으로 난망한 부탁을 드리오만, 이 딱한 것이 어미도 없이 배를 곯고 있는데, 일다경이라도 좋으니, 잠시 젖을 물려줄 순 없겠는가?”

“어머! 미쳤나 봐!”


부리나케 도망치는 아녀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 수군거리는 소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후회가 막심이었다. 되바라진 연놈들의 시선이 참으로 고약했다. 노숙자가 미쳤다는 둥, 아기가 무서워서 운다는 둥, 별 시답잖은 소리가 다 들렸다.


“참으로 고얀 아해들이로고······?”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가는데, 문득, 어쩐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우선 귀가 밝아도 너무나 밝아져 있었다. 나이가 든 후로 작은 소리는 거의 못 듣고 살았거늘, 지금은 주변을 지나치는 이들의 대화가 모조리 귀에 들어왔다.

힘도 상당 부분 돌아와 있었다. 주먹을 말아쥐니 뚝뚝 소리가 났다. 관절 마디마디가 시원했다. 전성기 시절에 비한다면야 절반에도 못 미칠 정도지만, 곧 죽을 몸으로 식음조차 전폐했던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세상이 변하면서 육신까지 바뀐 것일까.

아무리 머리를 써봐도 이해는커녕 납득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녕 기이했다.


“응애! 응애!”

“어이쿠! 네가 이 할애비 혼을 쏙 빼놓는구나. 그래, 그래. 네 먹을 걸 구해야지.”


그래. 생각은 뒤에 해도 되는 일이다. 살고자 한다면, 살아있는 한, 움직여야 한다.

그것이 나, 척준경이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작가의말

주인공의 종손녀 순()이는 가상의 인물로, 주인공의 남동생과 제수 사이에서 난 조카가 결혼하여 낳은 막내딸이란 설정입니다. 그 조카는 낮은 신분의 여자를 만났기에 부친의 인정을 못 받았고, 부친과 대립하다 가문과 성씨를 버리고 떠난 탓에 화를 면하고 살아남은, 유일한 후손입니다. 후에 삼촌인 척준경이 고향에서 귀양을 살고 있단 소식에 합류, 봉양하고 있다는 설정이죠. 이들 역시 가상의 인물입니다.

 

한자식 표현은 그게 당연한 시대를 살아온 주인공 시점의 서술에서만 주로 등장할 예정입니다. 혹여 불편하신 분이 있다면 아무쪼록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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