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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끝에 천하를 묻다

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오채지
작품등록일 :
2013.10.15 00:09
최근연재일 :
2013.11.28 04:00
연재수 :
12 회
조회수 :
555,812
추천수 :
20,664
글자수 :
40,174

작성
13.10.18 13:37
조회
26,758
추천
827
글자
8쪽

3. 술 한잔 할래요?

DUMMY

초립 쓴 사내가 길을 갔다.

육 척 장신에 거친 갈의를 걸쳤는데 초립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가 구리빛으로 번들거렸다.

배에서 내린 적산은 동쪽 해안을 따라 쉬지 않고 걸었다. 도시를 가로질러 인적이 끊어진 외각에 다다를 때까지 걸린 시간은 한나절, 그사이 비는 그치고 구름은 해를 토해냈다.

언덕 한가운데 자리 잡은 무덤은 잡초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인적도 없고, 볕도 좋은 이곳에 풀이 무성하지 않을 리 없다.

누군가 모두 뽑은 것이다.

그것도 손으로 하나하나 정성껏.

그리고 놓아둔 들꽃 한 다발.

길어야 반나절?

묵직한 보퉁이를 내려놓자 철그렁하는 소리가 났다. 오 척의 장검에 초립까지 풀어놓은 적산은 준비해온 향을 피우고 술을 따르고 절을 올렸다.

칠 년 만의 알현, 칠성판에 누운 사부의 천둥 같은 호통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너 이놈! 이 무도한 놈!

“예뻐하신 셋째가 매년 찾았을 터인데 뭘 그러십니까?”

남은 술을 집어 들며 바다를 향해 앉았다.

수평선엔 일찍부터 고기잡이를 나간 어선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바다는 어디나 짠내가 나지만 이곳의 냄새는 달랐다. 세상 어느 바닷가에도 없고, 오직 이곳에서만 맡을 수 있는 냄새. 그건 그녀에 대한 기억이었다.

오늘 두 사람은 반나절의 거리를 두고 서로를 비켜갔다.

어쩌면 이것이 남은 생애 가장 가깝게 만난 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귓전에 생생했다.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



오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어느새 해가 한 뼘밖에 남지 않았다.

적산은 초립과 장검을 챙긴 후 무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당분간 찾아뵙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언덕을 내려와 한참 걷다가 작은 개울을 만났다. 소매를 걷고 두 손을 푹 담근 다음 물을 떠 마셨다. 차가운 냉수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어쩐 일인지 갈증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여자는 아직도 바위 뒤에 숨어 지켜보고 있었다. 범선에서 보았던 그 여자다.

어떻게 뒤를 밟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보이기 시작하더니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붙어서는 도무지 떨어질 줄을 모른다.

처음엔 백 장 거리에서, 다음엔 오십 장 거리에서, 그리고 지금은 이십 장 거리까지 다가왔다. 말을 걸어오지도 않고, 화살을 쏘아 죽이지도 않는다.

그냥 관찰만 한다.

대단한 고집이다.

아니, 조심스럽다고 해야 하나?

처음엔 호기심이려니 했는데 이젠 이쪽에서 궁금해진다.

대체 왜 자신을 따라다니는 건가? 왜 숨어서 지켜보는 건가?

홱!

고개를 꺾자 작은 머리통이 바위 아래로 쏙 사라졌다.

적산은 바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계속 노려 보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바위 뒤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들킨 건가요?”

“안 들켜도 들켰어. 그만 나오지."

여자는 바위 뒤에서 주춤주춤 나오고도 십여 장의 거리를 유지하고 섰다. 작은 바랑에 광목끈 두 개를 매달아 야무지게 짊어졌는데 그 모습이 꼭 게딱지 같았다.

“언제부터 눈치챘어요?”

“처음부터.”

“눈썰미가 대단한데요. 일(一) 점.”

“왜 날 따라다니는 거지?”

“보퉁이 속에 든 건 뭐예요? 유성추? 철퇴? 아니면 세상에 알려진 적 없는 이병(異兵)?”

무덤 앞에서 보퉁이를 내려 놓을 때 철그렁하는 소리를 듣고 병장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적산은 말없이 여자를 노려 보았다. 무거운 압박이 가해지는 눈빛, 여자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인사를 제대로 못했더라고요. 범선에선 고마웠어요."

“단지 그것 때문에?"

“네.”

"인사는 고맙게 받지. 그럼."


분명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선 것 같은데 여자는 저자로 들어설 때까지도 떠나질 않았다. 신기한 건 앞이나 옆으로 나오지 않고 뒤에서만 따라온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오 장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이곳이 목적지였나요?”

“그건 왜 묻지?”

“더 북쪽으로 가실 거면 저랑 동행하실래요? 어차피 그쪽도 혼자인 것 같은데 둘이서 함께 다니면 적적하지도 않고 좋잖아요.”

“싫어.”

허여멀건한 얼굴을 보니 평생 고생 모르고 자란 귀한 집 여식임이 틀림없다. 애써 나이 들어 보이게 옷을 입고 화장을 했지만 높게 쳐줘야 스물네다섯? 어쩌면 더 어릴 수도 있고.

귀한 신분의 아가씨께서 어쩌다 시비도 거느리지 않고 홀로 여행을 하는지 모르겠다만, 한나절 호기심에 장단 맞춰 줄 생각은 없었다.

"동행이 싫으면 제가 그쪽을 사는 건 어때요?"

“무슨 뜻이지?”

“보표(保鏢) 말이에요.”

“나를?”

“안되나요?”

“왜지?”

“범선에서 봤잖아요. 더 설명이 필요해요?”

“해남도로 돌아가는 건 어때?”

“할래요? 말래요?”

“싫어.”

단호한 거절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무덤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예요?”

적산이 우뚝 멈추고 뒤돌아섰다.

아무 생각 없이 걸어오던 여자는 움찔 놀라며 황급히 서너 걸음을 물러섰다.

“이제 그만 갈 길 가지?”

“나 예쁘지 않아요?”

“이렇게 예쁜 내게 무관심한 남자는 당신이 처음이야. 뭐 그런 건가?”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군요. 일(一) 점.”

“계속 귀찮게 하면 무력을 쓸 수도 있어.”

“때리기라도 하실 건가요? 여자를?”

“죽인 적도 있지.”

“오, 단호한 성격. 일(一) 점 추가.”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배고파요. 밥 먹어요. 제가 살게요.”

“.......”

“밥이 싫으면 술이나 한잔할래요?”

적산은 뭔가 건드려선 안 될 물건을 건드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떼놓지 않으면 한동안 두통거리가 될 게 확실하다.

“술은 좀 하나?”

“칫, 나이가 몇인데.”

“몇 살이지?”

“서른둘.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죠.”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애써 피력하려 들지만 속아 넘어갈 적산이 아니었다.

“갈 수 있을 때 조용히 가지?”

“낯선 여자랑 술 한잔할 용기도 없나요?”

“술 마신 다음엔, 나랑 밤이라도 보낼 건가?”

“.......!”

“왜? 낯선 남자랑 술 마실 용기는 있어도 함께 밤을 보낼 용기는 없나보지?”

“지금 저를.... 갖겠다고 말하는 건가요?”

“나와 동행하자고 했을 땐 그 정도 각오는 했던 것 아닌가? 설마 한밤중 인적 없는 산속에서 낯선 남자가 젊은 여자를 곁에 두고 얌전히 잠만 잘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산전수전 모두 겪은 서른두 살께서.”

적산의 현란한 공격에 여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 위로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갔다. 분노, 모욕, 후회, 갈등.... 그러다 무슨 생각에선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까짓 거 밤도 보내죠. 뭐. 가요.”

요것 봐라.

적산은 팔짱을 척 끼면서 물었다.

“남녀가 어떻게 일을 치르는지는 아나?”

“사내아이들이 어떻게 수음(手淫)을 하는지도 알죠. 혹시 아직도?”

이젠 살짝 미친 끼까지 느껴진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여기서 밀리면 바보가 된다.

“굳이 밤까지 기다릴 거 없지.”

적산은 훅 다가가 여자를 번쩍 안아 들고는 맞은 편 여곽으로 뛰쳐 들어갔다.

쾅!

“어서 옵……!”

“빈방 있지?”

“위층이 모두 비어 있습…….”

“계산은 나중에 한다.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라.”

쿵쿵쿵쿵.

“아따, 어지간히 급했는가 보네.”

점소이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순간, 또 한 사람이 여곽의 문을 박차며 들이닥쳤다. 건장한 체구에 칼을 비껴찬 그는 위층으로 사라지는 튼실한 궁둥짝을 올려다보며 호목을 부릅떴다.

“적산?”


작가의말

여러분 반갑습니다.

불초 오 모가 또 왔습니다.

이번 글은 ‘나도 세력 싸움 하지 않는 글 함 써보자.’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도입부가 조금 무겁긴 했지만, 전작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 그렇게 무거운 인간이 못됩니다.  알콩달콩한 얘기도 풀어보고, 속시원한 씬도 만들어 보고, 그러다 불현듯 가슴이 먹먹해 지는 그런 장면도 쓰고싶고 그렇습니다.

끝까지 잘 되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바람이 찹니다.

오케이아웃도어닷컴에서 오리털파카 땡처리전을 하더군요.

여러분 모쪼록 따숩게 입으시고 감기 조심하십시오. (_ _)

 

2013년 10월 18일 계양산 아래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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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6. 마무리를 지어야지 +102 13.11.28 21,489 478 6쪽
11 10. 세상과 싸우는 법 +27 13.10.29 23,848 833 7쪽
10 9. 세상과 싸우는 법 +19 13.10.28 23,332 841 9쪽
9 8. 해신(海神)의 혈육 +34 13.10.25 22,249 843 7쪽
8 7. 해신(海神)의 혈육 +27 13.10.24 22,236 858 7쪽
7 6. 다시 북쪽으로 +27 13.10.23 23,450 869 8쪽
6 5. 다시 북쪽으로 +24 13.10.22 24,900 837 9쪽
5 4. 술 한잔 할래요? +18 13.10.21 25,823 795 10쪽
» 3. 술 한잔 할래요? +26 13.10.18 26,759 827 8쪽
3 2. 놈이 돌아왔다 +21 13.10.17 27,632 903 10쪽
2 1. 놈이 돌아왔다 +27 13.10.16 34,055 929 9쪽
1 0. 서장 +30 13.10.15 33,923 717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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