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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마음껏 써보는 아라비안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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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3.02.24 11:31
최근연재일 :
2023.03.10 22:42
연재수 :
18 회
조회수 :
402
추천수 :
1
글자수 :
75,967

작성
23.02.28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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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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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생사

DUMMY

둘은 오직 촉각만 남겨진 세상의 장님들처럼 서로를 더듬고 끌어안으며 탐닉해갔다. 온 세상이 예전에 없던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흔들리다가 덜컥 멈춰 서던 순간, 욕망의 달이 남녀의 몸에 들어섰다. 차오르고 다시 이즈러졌다가 금세 다시 차올랐다.


밀회는 예상보다 더 길어졌다.


*


사촌 간의 혼인이 허용되는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행위 자체만 가지고 보면 죄 될 것이 없는 일이었으나, 둘만의 달 그 이면에는 사경에 빠진 자와 그 가족의 절망이 고여 있었다.


인자한 샤는 비애와 한탄으로 보이지 않는 벽을 쌓으며 장남의 병상을 지키는 중이었다.


밤이었다. 사막을 건너온 거대한 어둠이 궁을 짓누르고 있었다.


유약한 왕자가 열락의 신음에 숨차하던 동안, 불의 앞에 분연히 칼을 빼들었던 왕자의 숨은 꺼져가고 있었다.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히.


*


그런데 그날 밤 누구도 믿지 않을 일이 벌어졌다. 신의 섭리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사건이었다.


왕은 어의들까지 물린 채 홀로 왕자의 병상을 지키고 있었다. 침상에 기대어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때 생전 처음 보는 누군가가 침상 옆에 서서 왕자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샤는 대노해 그 침입자에게 고함을 질렀지만,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다시 애를 써봤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소리가 입에서 나가자마자 그것을 잘라 어딘가에 숨겨버리는 통로가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왕은, 너무 무거워서 자신 말고는 제대로 다루는 사람이 없었던 그 거대한 칼을 빼들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리 나지 않는, 그래서 사랑도 미움도 들리지 않는 밤이었다. 침입자 역시 소리를 낼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칠흑의 옷으로 전신을 감싼 채 겨우 눈만 내어놓고 있었지만, 체형으로 미루어 여인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샤의 경계심은 좀체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녀가 옛이야기 속에 나오던 저승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신원미상의 여자는 양 손 손바닥을 펴 샤에게 내보이며 적의가 없음을 알렸다. 하지만 그래도 샤가 칼을 물리지 않자 결국 크게 두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소리 없이 손짓으로만 의사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샤는 그 신호들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알아듣지 못했다. 자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눈이 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소통에 실패한 여인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차도르를 걷어 얼굴을 내보였다. 놀란 샤가 잠시 숨 쉬는 것도 잃어버렸을 정도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칼끝은 바로 고개를 숙였지만, 그와는 반대로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 치밀어 오르는 욕화가 있었다. 평생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잘 다스려왔다고 자부해온 샤조차도 적잖이 당황했을 정도로 이 심경 변화는 급격했다.


여인은 매우 송구스러워하는 듯한 태도로 자신을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계속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자연스럽게 샤를 실외로 이끌었다.


샤는 미심쩍어하지도 못하고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여인을 따라나섰다. 장검은 진작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둘은 궁궐의 수많은 방과 복도와 회랑을 거쳐 너른 정원을 가로질렀다. 여인은 궁궐의 담 앞에서 멈춰 섰다. 젊은 시절 잠행을 즐기던 샤가 자주 월담을 했던 지점이었다.


홀린 듯 여인에게 다가간 샤가 자신도 모르게 그 가녀린 어깨에 손을 얹으려던 순간, 여인은 푸드덕 소리와 함께 일곱 마리의 까마귀로 화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


꿈속의 꿈이었다.


또다시 잠에서 깨어난 샤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살폈지만 여인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들은 차도가 없었고 더 이상 숨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몸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샤는 절망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방금 전의 집중했다. 그렇게 생생한 꿈을 꾸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샤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다시 어린 소년이 된 것처럼.


설렘과 흥분을 안고 궁궐 담 앞에 서던 소년은 어느덧 긴 세월을 돌아 노인이 되어 있었지만, 얼굴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상기되어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꿈속의 신비한 여인이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샤는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작은 병을 발견했다.


그런 종류의 빛을 내는 물질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아버지는 그 병을 가지고 아들에게로 갔다. 마개를 열어 병 속의 물을 아들의 상처에 떨어뜨리고 또 입안에도 흘려 넣었다. 숨이 끊어진 아들이 약을 목으로 넘기지 못하자 직접 입으로 숨을 불어넣었다.


물에서 나온 신비한 빛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상처 주변을 맴돌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아들이 가늘게 눈을 떴다.


아들을 잃은 줄로만 알았던 샤는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남은 평생 동안 쉴 숨을 한 번에 다 몰아서 쉬려는 사람처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주저앉아 있자니 이럴 줄 알았으면 약을 다 먹일 게 아니라 남겼다가 나도 좀 먹어볼 걸 그랬다는 후회도 찾아왔다. 위급하다는 이유로 굳이 아들에게 인공호흡 방식으로 약을 먹인 것마저 영 꺼림칙해졌다.


그렇지만 그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알게 된다면 아들 역시 기분이 나빠질 것이 확실했다. 그냥 비밀로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샤는 이후로 그날의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 사람처럼.


하지만 당시 궁중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화공에게만은 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화공이 남긴 기록이 훗날 궁 밖으로 흘러나오게 되면서 이 믿지 못할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옛이야기로 전승되고 있다.


어쨌거나 왕자는 죽음 문턱에서 소생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


아주 긴 시간이 지나간 것 같았지만, 유혈사태로부터 겨우 이틀이 지난 뒤였다.


이슬람의 장례 절차는 본디 40일 정도에 걸쳐서 진행된다. 그렇지만 시신의 매장만큼은 24시간 안에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그해 고통의 축제에서 희생된 씨름꾼들과 내기권투선수들의 시신은 이틀이 다 되도록 안식을 얻지 못했다. 1차로 왕자와 폭력배들이, 그리고 2차로 근위대가 휩쓸고 지나간 도시를 정리하느라 꼬박 이틀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유족들은 패잔병들처럼 조심스럽게 장례를 준비했다. 혹여 다시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질까 두려워서였다.


항구의 사람들은 그런 유족들을 내심 안쓰러워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돕지는 못하고 있었다.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까지도 다들 쉬쉬하며 말을 아꼈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왜 샤가 직접 나서서 폭력조직을 소탕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런 그들의 의문은 장례식장에서 모두 풀렸다.


야외 장례식장 주변에 다시 근위대가 깔렸다. 무표정한 갑사들을 보고 겁을 집어먹은 유족들은 다시금 잔뜩 긴장했다.


순식간에 삼엄해진 분위기 속에서, 엄살쟁이가 장례식장에 당도해 말에서 내렸다.


그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제 그 누구도 엄살쟁이라고 부를 수 없는 몸이 되어있었다.


항구의 사람들은 너도 나도 모여들어 무엇엔가 홀린 듯 장례식장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놀라움 때문이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망나니 왕자가 바로 그 철딱서니 없는 한량이었다는 사실만도 놀라운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평소 항구도시 아무데나 드러누워 낮잠을 자다가, 기분이 맞지 않으면 바로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고, 돈을 걸고 주먹다짐을 벌이던 인간의 얼굴이 하루아침에 돌변해 그런 위엄을 풍기게 되었다는 것만큼 놀랍지는 않았다.


엄살쟁이, 아니 첫째왕자는 이전과 달리 아주 근엄하고 침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안색은 몹시 창백했다.


왕자는 화려한 비단옷이 아닌 상복을 입고 있었다. 아흐마드가 다리를 절며 왕자의 옆에 시립해 식장을 안내했다.


왕자는 스스럼없이 다가와 유족들의 손을 잡았다. 그제야 곡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마치 왕자가 이제부터 울어도 좋다고 공인이라도 해준 것처럼.


공포에 짓이겨져 있던 슬픔이 비로소 풀려나고 있었다. 구겨져 있던 종이가 다시 펴지듯 시작된 울음소리는 끊어질 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왕자는 몸도 가누지 못하고 오열하는 유족들을 하나하나 부축하고 위로했다. 불구가 되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된 희생자들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잡고 사과와 격려를 전했다.


그리고 장례 이후의 삶을 위한 금을 내렸다.


삶이란 참으로 염치없는 식욕을 가지고 있어 왕자가 가지고 온 금만으로는 그 배를 다 채울 수 없었다. 결국 왕자는 목걸이는 물론 손의 반지까지 빼어 유족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매장이 시작되었다.


아흐마드의 형과 그 동료들은, 칼싸움이 벌어진 곳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 묻혔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다.


아흐마드는 야자수 그늘 아래로 왕자를 인도했다. 왕자는 장례가 다 끝날 때까지 꼿꼿이 기품 있게 서서 그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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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획기적 23.03.10 13 0 9쪽
17 직업병 23.03.09 13 0 9쪽
16 격리되어 23.03.08 16 0 10쪽
15 전쟁의 시작 23.03.07 16 0 9쪽
14 피와 바람 23.03.06 18 0 9쪽
13 집권 원년 23.03.05 18 0 10쪽
12 낙마 23.03.04 18 0 10쪽
11 신분상승 23.03.03 20 0 9쪽
10 꽃비 내리는 항구 23.03.02 24 0 10쪽
» 생사 23.02.28 19 0 10쪽
8 메르시하 23.02.27 18 0 9쪽
7 갑사들 23.02.26 21 0 10쪽
6 싸움 남 23.02.25 23 0 9쪽
5 사건사고 23.02.25 22 0 9쪽
4 엄살쟁이 23.02.25 20 0 9쪽
3 내기권투가 시작 23.02.24 26 0 10쪽
2 두 아들 23.02.24 35 1 9쪽
1 무적의 군주 23.02.24 62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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