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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룩짭짭의 서재요.

컵라면의 3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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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라면.
작품등록일 :
2022.02.07 15:44
최근연재일 :
2023.11.20 05:54
연재수 :
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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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750
글자수 :
14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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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0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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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40쪽

적세인 외전. 12화

DUMMY

“무슨···?”


창가에 등장한 고장원의 모습에 적세인은 먼저 방문 너머의 기척부터 살폈다. 그러자 고장원이 말했다.


“문 앞 두 놈은 이미 정리했다. 움직일 시간이다.”

“잠깐, 무작정 뭘 어쩌겠다고?”

“무작정 일을 진행한 건 너와 류청진이다. 난 그 뒷수습을 하려는 거고.”


적세인은 얼른 검을 챙기면서도 말했다.


“어젯밤 설명해 주지 못한 것은 그만큼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이었소. 갑자기 오경문이 찾아와-”

“상관없다.”

“뭐?”


고장원은 창밖 흑검파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젯밤 바빴던 것은 너희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좀 바빴지.”

“그게 무슨···?”


그때 적세인의 시선도 고장원처럼 창밖을 향했다. 어딘가 먼 곳에서 꽝-하는 폭발음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됐군. 움직이자.”

“저기, 설명을 좀···”


고장원은 설명 대신 훌쩍 창가를 넘어갔다. 적세인은 급히 그 뒤를 따라 창문을 넘어야 했다. 그는 어딘가를 향해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뒤를 따라잡자 그의 입이 열렸다.


“집무실 수색에 실패했을 때부터 상황이 꼬여간다는 걸 짐작했다. 우린 원래 이렇게 오랫동안 흑천무회에 남아있을 생각이 아니었지. 원계획대로라면 우린 지금쯤 흑검파에서 이틀거리는 멀어진 후 무림맹에서 온 타격대와 만나 흑검파 공격계획을 정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던 고장원이 갑작스레 몸을 숙이고 담장 아래에 붙었다. 적세인 역시 반사적으로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러자 담장 너머에서 고함을 치며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고장원은 소리가 멀어지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린 상황이 이상해진 만큼 더 휘말리기 전에 빠져나가기로 했다. 흑검파인들이 문파를 둘러싸고 빈틈없이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빠져나갈 순 없었지. 그래서 성동격서를 벌이기로 했다.”


그때 다시 한번 꽝-하는 굉음이 터졌다. 조금 전 폭발음이 들렸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저 난리를 피우기 위해 챙겨왔던 화약과 비약을 다 썼다. 거의 오 년을 모은 물건들이었는데. 뭐 어쨌든 살아 나가는 게 더 중요했으니 어쩔 수 없지.”

“잠깐. 그럼 당신은 원래 어제 빠져나갈 계획이었단 말이오?”

“나뿐만 아니라 류청진 역시. 저 폭발은 원래 어젯밤에 일어났어야 했다.”

“그럼 류청진이 날 찾아왔던 것은···?”

“그는 너와 함께 가야 한다고 말했다. 넌 사파인이 아니라고. 내 생각엔 우리 순찰대에 끌어들일 셈이었던 것 같은데.”


오경문의 등 뒤에서 갑작스레 등장했던 류청진. 그가 딱 맞춰 등장했던 것은 오경문의 등장을 예견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적세인을 챙겨 흑검파를 떠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가 너무나 간단히 저항을 포기한 이유도 짐작되었다. 일단 고장원이 상황을 알게 되면 탈출할 방법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터였다.


상황을 깨달은 적세인이 다시 말했다.


“그럼 지금 우리 둘만 지금 흑검파를 빠져나가겠다는 것이오?”


고장원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적세인을 돌아보았다.


“미쳤냐? 동료를 버리는 놈은 순찰대 실격이다. 그리고 그 연희라는 소녀 또한 그냥 두면 목숨이 위험할 것이다. 당연히 함께 구해가야지.”

“당연히?”

“그래, 당연히. 순찰대원 명찰을 달고 있으면 그 정도는 해야지. 너도 명심해.”

“···난 아직 그 순찰대에 들어간다고 한 적 없는데.”

“그랬나? 그럼 두고 보자고.”


그즈음 해서 흑검파 전체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문파 여기저기에서 고함 소리가 들리고, 폭발음이 들렸던 곳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그 연기가 어찌나 짙고 커다란지, 마치 검은 기둥이 밤하늘과 지상을 연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장원은 그 연기를 보고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흡족해 보였다.


“물이 부족한 곳에서 화재는 치명적이지. 내일 아침 너희 문파에 전각이 얼마나 남아있을지 보자고.”


그렇게 흑검파를 가로지르질 잠시. 어느 길모퉁이를 돈 순간이었다. 거짓말처럼 두 사람 앞에 흑검파 무인 넷이 나타났다. 그들의 손에 들린 물동이에서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거기! 너희도 도와라! 지금 불이 났다! 이리 와서 물동이 집어!”


그 넷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버럭버럭 소리쳤다. 집에 불이 난 사람다운 목소리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다그침에 고장원의 대답은 칼날이었다.


“끅!”


한순간에 고장원의 칼이 두 사람의 숨통을 끊었다. 완벽한 기습이었다. 가슴 한복판에 칼자국이 난 시체 둘이 풀썩 쓰러졌다. 바닥에 떨어진 물동이가 깨지며 물이 쏟아졌다. 고장원은 연이어 나머지 둘도 공격하기 위해 움직이려다가 움찔 굳었다.


나머지 둘 역시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고, 그 앞에는 적세인이 있었다.


“신입 교육은 따로 안 해도 되겠군. 가자.”

“···”


적세인은 물과 피가 뒤섞여 진탕이 되어가는 바닥을 씁쓸히 바라보다가 고장원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움직이는 것이오?”

“그것도 확인 안 하고 불을 터뜨렸겠나.”


문득 보니 익숙한 길이었다. 어젯밤에도 걸었던 길, 바로 오경문의 집무실을 향한 길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 흑천검괴가 기다리고 있던 길이다. 적세인은 불안감을 느꼈다. 저 앞에 어제도 보았던 집무실 전각이 보였다.


그리고 그 집무실 앞에 흑검파 무인 둘이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거기 멈춰라! 누구냐?”


그 두 사람은 멀리서 불길과 연기가 피어오르고 문파 전체가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너희는? 내일 결투자들 아니냐? 여긴 왜-”


고장원은 칼을 뽑는 것으로 대답했다. 적세인 역시 검을 뽑아 공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흑검파인들이 반사적으로 반격하며 찰나의 순간 네 사람의 검이 뒤얽혀 빛났다.


반짝임 이후는 왈칵 쏟아지는 핏물이었다. 두 사람이 풀썩 쓰러졌고, 그들의 몸을 벗어나 바닥에 번져가는 핏물은 금방 온기를 잃어갔다. 적세인은 휙 칼을 털어내고는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고장원은 그러지 못했다.


“음···”


화들짝 놀란 적세인이 그를 돌아보았다. 고장원의 몸이 기우뚱한 것이 보였다. 그의 옆구리가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또라이!”

“···난 또라이가 아니다. 고장원이다.”


적세인이 급히 그를 부축했다. 그리고 그제야 그의 몸 전체가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당신···”


피가 흘러나오는 부상은 옆구리뿐만이 아니었다. 이틀 전 꿰맸던 상체의 상처에서도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큰 부상 이후 이틀 연이어 치렀던 결투. 그것이 상태를 악화시켰을 것이다. 그의 눈가에는 죽음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코끝에서 식은땀을 뚝뚝 흘리는 와중에도 무표정을 유지했다.


“지하실이 있을 것이다. 지난번엔 시간이 부족해 입구를 찾지 못했지만, 지금은 찾는 게 어렵지 않을 거야. 류청진이 어떤 방식으로든 흔적을 남겨 놨을 테니까. 찾아봐.”

“지금 당신이 걱정해야 할 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냥 찾아보기나 해. 빨리.”

“···”


결국 그녀는 고장원은 집무실 문가에 앉혀놓고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집무실 안에는 오경문이 앉아서 일을 보았을 커다란 탁자와 서책이 가득 꽂힌 책장, 그리고 온갖 서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적세인은 그 한가운데 서서 가만히 집무실 풍경을 바라보았다.


문가에 기대앉아서 호흡을 가다듬던 고장원은 그녀가 움직임 없이 멍하니 집무실 안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입을 열려 했다. 그녀가 어느 단서를 찾아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녀가 성큼 집무실 한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책장을 만지작거렸다. 곧이어 덜컹-하는 무언가 걸쇠가 빠진 소리가 났다. 적세인은 책장을 당겨 열었다. 그러자 그 안쪽에 교묘하게 감춰져 있던 좁은 공간과 아래로 내려가는 입구가 드러났다.


고장원은 작게 미소 지었다.


“···확실히 신입 교육은 필요 없겠군.”


아래로 내려가는 입구를 확인한 적세인이 그를 돌아보았다. 고장원의 안색은 그 짧은 사이에 훨씬 창백해져 있었다.


“두 사람이 이 아래 있단 말이오?”

“소녀는 몰라도 청진은 나름대로 고수라 불릴만한 친구다. 그러니 가장 튼튼한 뇌옥에 가둬두려 했겠지.”

“없을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뭔가 흔적을 발견하고 문을 열었을 것 아니야.”


적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책장 아래 바닥에 흙 자국이 남아있는 것을 보곤 숨겨진 통로를 짐작해냈다. 그것이 류청진이 남긴 흔적이라면 말이 되었다.


“그럼 기다리고 있으시오. 금방 두 사람을 꺼내 올 테니까.”

“그래. 시간이 없으니 빨리 다녀와라.”


적세인은 아래쪽에 있는 여닫이문을 덜컹 열어 몸을 집어넣었다. 아래쪽에 사다리가 있었다. 얼른 타고 내려가니 촛불 하나 없어 시커먼 공간이 보였다. 아무것도 안 보였다는 말이다.


그녀는 그 어둠을 향해 말했다.


“류청진?”

“···적세인?”


과연 그 어둠 속에서 류청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앞으로 몇 발짝 내딛자니 그가 말했다.


“왼쪽으로 한 걸음 더 가면 탁자가 있소. 거기에 화섭자 한 통이 있을 것이오.”


적세인은 그의 말대로 왼쪽으로 한 발짝 움직여 탁자를 찾았다. 그 위를 더듬거리니 작은 통 하나가 잡혔다. 냄새를 맡으니 화섭자가 맞았다. 당겨 열어보니 희미한 불씨를 품은 종이 뭉치가 보였다.


그걸 후후 불어주니 화륵 불이 피어났다. 곧 지하 뇌옥의 풍경이 드러났다. 철창과 그 너머 보이는 얼굴들. 미소를 짓고 있는 류청진과 눈물을 글썽이는 연희.

류청진이 말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소, 적 무사.”

“나도 반갑지만 인사나 나눌 시간이 없군. 철창 열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


적세인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열쇠는 검괴에게 있을 것이오. 대신 뭐 꼬챙이 같은 거 없소?”

“꼬챙이?”

“쇠꼬챙이면 제일 좋소.”


잠시 생각하던 적세인은 머리에 꽂고 있던 쇠비녀를 뽑아 건넸다. 덕분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늘어졌다. 류청진은 비녀를 받아 들며 그 모습을 보고는 싱긋 웃었다.


“금방 돌려주겠소.”


그러고는 빙글 비녀를 돌려 본인 손목에 묶인 쇠고랑을 꼼지락거렸다. 이어서 그걸 본 적세인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쇠고랑이 풀려나갔다. 그는 곧바로 옆에 있던 연희의 쇠고랑도 풀어주고는 쇠창살 너머로 손을 뻗어 열쇠 구멍에 비녀를 집어넣었다.


철창이 덜컹 소리와 함께 열린 것은 물론이었다.


“···무사라기보다는 도둑이 더 어울리겠는데.”

“어허, 어딜 그런 섭섭한 소리를.”


적세인은 돌려받은 비녀로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곧바로 움직이려 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나도 살려줘···”


움찔 놀란 적세인이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화섭자를 들이밀었다. 그곳은 류청진과 연희 반대편 철창이었다. 그 철창 너머 바닥에 누군가가 벌레처럼 기어다니고 있었다. 화섭자를 내밀어 그의 얼굴을 확인한 적세인이 깜짝 놀라 말했다.


“오경문?”

“살려줘···”


그는 오경문이었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당당히 서서 목소리를 높이던 그가 반나절 만에 뇌옥의 바닥을 기고 있었다. 적세인은 황당함까지 느끼며 물었다.


“거기서 뭐 하시오?”

“으으···”


오경문의 상태는 끔찍했다. 그는 두 눈이 터진 상태로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는데, 사지 끝이 피범벅이 된 채 힘을 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류청진이 대신 그의 상태를 설명해 주었다.


“검괴가 그의 눈을 파고 사지 근맥을 끊었소.”

“왜? 어제 도망치려 해서?”

“그것도 있겠지만··· 그보단 그저 먹기 좋게 가공해 두었다는 것이 맞겠군.”


먹기 좋게 가공. 그 말을 들은 적세인이 오경문 주변을 살폈다. 류청진은 그녀가 누굴 찾는지 눈치채고는 말했다.


“포정연은 이미 잡아갔소. 검괴가 내 제안을, 그러니까 시간 끌기를 받아들인 이유가 이것이었소.”

“···본인 제자 잡아먹을 시간을 벌기 위해서?”

“바로 보았소.”


적세인은 씁쓸한 눈으로 꿈틀거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어쨌거나 오늘 낮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벌레처럼 기어다니게 된 모습을 보게 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류청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동정할 필요는 없소. 그는 자기 죄의 대가를 치른 셈이니까.”

“그래도 좀··· 과한 것 같은데.”

“과하지 않소.”


적세인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니 류청진은 냉정한 표정이었다.


“여기서 검괴와 그의 대화를 엿듣다 알게 된 것이 있지. 어제 그가 말했던 아이들, 검괴의 제자들. 그 아이들을 잡아먹은 건 검괴뿐만이 아니었소.”


적세인의 얼굴도 확 차가워졌다. 바닥에서 기던 오경문 역시 그 말을 들었는지 다급히 말했다.


“나, 난 겨우 한 명, 한 명밖에 희생시키지 않았다! 겨우 하나!”

“···그렇군. 그래서 더 두려워했군. 그냥 무공을 익힌 제자들도 잡아먹히는데, 같은 마공을 익힌 자신을 가만 놔둘 리 없다고 생각해서.”


그녀의 말에 오경문이 바닥에서 버둥거렸다.


“대, 대장이 날 속였다! 사부가 날 속였어! 난 죽이고 싶지 않았다! 마공을 익히고 싶지 않았다! 저, 정말이야! 날 살려주면! 살려주면 무림맹에 가서 얼마든지 증언하겠다! 시키는 대로 말하겠어!”

“···”


철창 너머에서 대답이 없자 그는 사지를 퍼덕거리며 철창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다 말하겠다! 전부! 힘의 유혹이 너무 컸다! 마공을 익히면, 그러면 훨씬 쉽고 빠르게 강해질 수 있다고 했다! 사부가 그랬어! 그래서 실수했다! 그 어린 것을 죽여 심장을 뽑아먹었어! 하지만 겨우 하나야! 사부가 잡아먹은 아이는 일곱이나 된다고! 난 겨우 하나잖아! 잘못했다! 죽은 아이의 영전에서 빌겠다! 내 잘못을 죽어라 빌겠다! 그러니 살려줘! 제발! 날 데리고 가아-!”


대답은 없었다. 화섭자의 빛도 없었다. 적세인과 류청진, 연희도 없었다. 그러나 오경문은 벌레처럼 퍼덕거리며 연신 자기 고백을 위장한 변명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


“장원! 자네 괜찮나?”


뇌옥에서 올라온 류청진은 문가에 기대고 앉아있는 고장원을 발견하자마자 급히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눈을 감고 있던 고장원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의 안색은 이제 누가 봐도 위험할 정도로 창백했다.


“···사지 멀쩡하군.”

“그래, 이 어리석은 친구야. 그런데 자넨 다친 몸으로 무슨 무리를 한 건가?”

“어리석기는 그쪽이 더 어리석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검괴에게 항복한 건가. 놈이 그쪽 근맥이라도 하나 끊어놓았으면 구출이고 뭐고 다 물 건너가는 거였어.”

“나야 뭐··· 사실 자네가 구해줄 거라고 믿고 있었지. 무엇보다 검괴에게 중요한 것이 우리가 아니라 제자들을 잡아먹을 시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빌어먹을 놈.”


류청진은 하하 웃었다. 고장원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회포는 나중에 풀기로 하고, 이만 가세.”


그렇게 말한 류청진이 고장원을 일으켜 세웠다. 그 옆으로 연희가 얼른 다가와 반대쪽에서 그를 부축했다. 고장원이 그녀를 보고 말했다.


“괜한 일에 휘말리게 했구나. 미안하다.”

“아뇨. 제가 선택한 일인데요. 괜찮아요.”


연희는 조금 전까지 눈물을 글썽거리던 얼굴을 지우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움직이는 세 사람의 모습을 적세인이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어느 한쪽이 크게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건만 그들은 웃고 있었다.


일단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자는 생각일까, 아니면 정말 이 정도 사건 정도는 웃어넘길 만하다는 것일까. 만약 후자라면 대체 무슨 힘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


생각에 잠겼던 적세인은 문득 자신을 돌아보는 류청진의 시선에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상념에나 잠겨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네 사람은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와 흑검파 외곽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화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지 다급한 고함과 비명, 우르르 달려가는 소란이 멀리서도 들렸다.


그 비명을 들은 류청진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대체 무슨 불을 피운 건가?”

“···그냥 기름과 화약, 몇 가지 비약의 조합일 뿐이네. 혼란의 근본적인 이유는 불이 빠르게 번졌기 때문이야. 이런 메마른 땅에서 그 정도는 일도 아니지.”


고장원은 안색이 창백한 와중에도 씨익 웃고 있었다. 류청진도 웃으며 그를 부축하는 손길에 힘을 주었다.


그때 어디선가 땡땡땡-하는 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거대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죄인들이 도주하고 있다-! 그 년놈들부터 잡아라-!]


흑검파 전체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였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를 일으킬 정도로 강력한 고수. 흑천검괴다.


“무슨 목소리가··· 목소리를 키우는 무공도 있나?”

“황군의 장군들이··· 전장에서 의사소통을 위해 그런 신비한 무공을 개발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았는데··· 소림사 고승이 귀신을 잡을 때 사천왕의 목소리를 흉내 낸다는 말도 있고···”

“제기랄, 그럼 지금 흑천검괴가 적어도 황군의 장군급이란 고수란 말인가?”


류청진은 그렇게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장원을 부축한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고장원은 이제 거의 들려 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빠르게 도주하긴 무리였다. 류청진 역시 낮에는 땡볕에, 밤에는 어둠뿐인 뇌옥에 갇혀 몸과 마음이 축난 상태였고, 연희는 애초에 무공을 모르는 시비였다.


곧이어 병장기를 든 채 우르르 달려오는 기척이 흑검파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시체를 찾았다! 이쪽이다!’하는 고함도 들렸다.


보다 못한 적세인이 함께 고장원을 부축하려던 순간이었다. 그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장원? 뭐하나?”

“먼저 가라.”


류청진의 안색이 확 굳었다.


“이 멍청한 자식이··· 지금 무슨 헛소리야? 그러면 누가 넙죽 알겠다며 떠날 것 같나? 그딴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어서-”

“손끝에 감각이 없다. 팔다리에도.”

“···”


고장원의 그 짧은 말에 류청진은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에 금방 다시 정신을 차렸다.


“원래 피 좀 흘리면 그래.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요양하면 금방 나을 거야.”

“그럴 수도. 하지만 당장 도망쳐야 할 상황엔 이런 걸림돌이 따로 없겠지.”


그 담담한 말에 류청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장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난 이미 결심이 섰다. 더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가라, 류청진.”

“···젠장, 남길 말 있나?”


고장원은 흐린 눈으로 씨익 웃었다.


“내 마지막 벼락을, 그 우렛소리를 잘 듣도록.”


류청진의 입가에도 비슷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고장원의 어깨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그러자 고장원은 홀로 뒤돌아섰다. 연희는 끝까지 그를 놓지 않으려 했지만, 적세인이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당기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손을 놓았다.


“···가자.”


류청진이 앞장서고 적세인은 연희를 엎은 채 그 뒤를 따랐다. 담장 하나를 뛰어넘는 순간 적세인의 눈이 길 한가운데 홀로 선 고장원의 모습을 담았다.


불타는 흑검파와 검은 연기로 가득한 하늘. 그는 그 광경 앞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홀로 서 있었다. 어쩐지 그 장면이 그녀의 가슴 속에 남을 듯했다. 옛날 산문이 불타던 장면만큼이나.


세 사람이 떠난 후 고장원은 천천히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둥글고 단단한 표면이 느껴졌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느껴지리라 짐작한 것이다. 조금 전 말했던 것처럼 손의 감각은 이미 자기 손이 아닌 것처럼 기묘한 상태였다.


그래도 지금 손에 잡힌 물건의 감각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동안 이것을 재현하기 위해 수없이 매만지던 물건이었으니까.


그것은 그의 가문이 낳은 최고의 작품이었고, 동시에 가문을 멸문시킨 최악의 무기였다. 그렇기에 고장원에게도 그것은 더없는 애증의 물건이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엔 충분히 화려한 꽃이었다.


문득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아주 잠깐 생각에 잠겨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의 정면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모두 흑검파의 무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제일 앞에서 이끄는 자는 한 노인이었다.


그 노인이 고장원을 보고 말했다.


“다른 놈들은?”

“떠났다.”

“매정한 놈들이군. 정파니 뭐니 해도 결국은 다친 동료를 버리고 도망친 것이냐?”


고장원은 웃었다. 그는 흑천검괴 너머 잔뜩 몰려온 흑검파인들을 바라보았다. 개중에는 굳은 안색의 포정연도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잡아먹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모르겠군.”


그 뜬금없는 말에 흑천검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동료들이 매정한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아니. 내 벽력을 마주한 늙은 구렁이가 죽을지 살지 모르겠다고.”

“뭐야?”


고장원의 시선이 흑천검괴를 향했다.


“제자들을 다 잡아먹었다면 살 수도 있었겠지. 불을 피워 소란을 일으키길 잘했군. 오늘이나마 스승이 제자를 잡아먹는 패륜을 막을 수 있었으니.”


그 말을 들은 포정연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갔고, 흑검파 무인들 역시 흑천검괴와 포정연을 흘끔거렸다. 하지만 정작 흑천검괴는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이 허리에 찬 흑검을 잡았다.


그걸 본 고장원도 품속에 집어넣었던 손을 꺼냈다. 그의 손에는 주먹보다 조금 더 큰 쇳덩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 둥근 금속을 본 흑천검괴는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 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두 눈을 크게 떴다.


“너-”

“이것이 저 황군도 두려워한 진정한 벼락, 뇌성벽력탄이다! 이제 내 마지막 우레를 들어라-!”


외침과 함께 그의 왼 주먹이 뇌성벽력탄의 윗부분을 내려쳤다. 그 검은 쇠구슬에서 팅-하는 맑은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직후 쇠구슬에서 터져 나온 빛이 그 자리의 모두를 집어삼켰다.


*


콰르르릉-마른하늘에 천둥이 울려 퍼졌다. 흑검파의 마지막 담장을 뛰어넘던 적세인이 걸음을 멈추고 천둥이 울린 하늘을 뒤돌아보았다. 저 멀리 커다란 화염이 뭉글 일어나 밤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이 보였다.


“저건···”

“장원이 그 친구가 말하던 마지막 벼락인 모양이오. 이 멀리에서도 들리고 보일 정도니 굉장하군. 뇌성벽력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최후요··· 동시에 참 어리석은 친구가 아닐 수 없소.”


그렇게 말했지만 류청진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였다. 적세인은 그를 만난 이래 지금의 어깨가 가장 추욱 처져 있다고 느꼈다.


“···갑시다. 어제 새벽에 보낸 보고서에 비상시 암호를 섞어두었소. 비선과 타격대가 그 암호를 제대로 읽었다면 그들은 하루거리에 도착해 있을 것이오. 흑천검괴가 화재 수습을 포기하고 도망치기 전에 잡아야 하오.”

“저 폭발에 휘말렸다면···”

“그래도 죽진 않았을 거요. 마공을 익힌 자들은 그 생명력이 끔찍하게도 질기니까.”


류청진과 적세인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적세인은 등 뒤가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연희가 울고 있었다.


그렇게 흑검파를 벗어나 그 앞에 작은 언덕에 올랐을 즈음이었다. 문득 연희의 가족들은 어찌할 계획인지 의문이 떠올라 적세인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흑검파가 사라지면 이 주변의 마을은 어떻게-”


우-어-어-어-어-!


두 사람의 뜀박질이 우뚝 멈췄다. 절로 그들의 시선이 포효가 들린 곳을 향했다.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불타는 흑검파의 대문을 박살 내고 뛰쳐나왔다. 그 그림자는 곧이어 정확히 류청진과 적세인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정체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흑천검괴였다.


“이런 젠장.”


류청진은 집무실에서 도망치는 와중에 챙겼던 검을 뽑았다. 적세인 역시 연희를 땅에 내려놓고 검을 뽑았다.


그 둘이 검을 뽑는 그 잠깐 사이에 흑천검괴의 그림자가 성큼 다가와서는 일장 거리에서 훌쩍 뛰어올랐다. 두 사람이 급히 대응하려던 찰나, 검괴의 몸이 그들을 뛰어넘어 언덕의 꼭대기에 올라섰다.


그 한순간에 흑천검괴의 위치가 더 높아졌다. 적세인과 류청진이 가졌던 이점이 단번에 불리해진 것이다.


“···검괴!”

“네까짓 놈이 그리 함부로 부를 이름이 아니다, 아해야.”


적세인과 류청진을 내려다보는 흑천검괴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얼굴과 몸은 검댕투성이였고, 머리는 풀려서 산발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모습이 압도적인 것은 그의 오른손에 들린 검과 왼손에 들린 머리통 때문이었다.


적세인이 그 머리통을 알아보았다. 처음에는 고장원인 줄 알았는데, 머리는 여인의 것이었다.


“포정연?”


그녀가 알아본 것이 기껍기라도 한 듯 흑천검괴가 그 머리를 들어 뺨을 물어뜯었다. 찢어진 뺨에서 뭉글 피가 솟아나자 그걸 쭉쭉 빨아먹기까지 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본 연희가 우웩 토악질을 했다.


“미친 늙은이···”


류청진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흑천검괴는 빨던 머리통을 휙 내던졌다. 포정연의 얼굴이 언덕 아래로 굴러갔다.


검괴는 입가에 피범벅을 한 채 쯥-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셨다.


“아주 난장판을 피워놓았구나. 내 흑검파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다니.”

“당신 덕분이오. 어제 그냥 우리 머리를 잘랐으면 이럴 일은 없었겠지.”

“그래, 그랬겠지. 그러니 뒤늦게라도 실수를 만회해야겠다.”


검괴의 두 눈에서 시뻘건 안광이 흘러나왔다. 그의 흑검에서 검붉은 기운이 뭉글 솟아난 것은 물론이었다.


“마인···”

“감탄이 아니라 검을 들어야 할 시간이오.”


검괴의 기운에 압도되었던 적세인은 류청진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두 사람은 검을 다잡고 나란히 섰다.


이 대 일. 일 수에 전력을 싣는 신대륙 무림에선 굉장한 이점이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 서 있는 노인은 지난 십 년 동안 무수한 정파 무림인들을 물리치고 살아남은 노괴였다. 손이 하나 더 많다는 것보다 그의 경험과 무공이 훨씬 위험했다.


언덕 위에 올라 검은 하늘을 배경에 두고 선 흑천검괴는 진정 그 어두운 하늘의 주인 같았다. 그의 몸에서 뭉글뭉글 솟아나는 검은 기운과 붉게 빛나는 두 눈은 그를 암흑세계의 마왕이라 주장하는 듯했다.


그 붉은 눈이 번뜩 빛났다.


“온다!”


외침과 동시에 류청진이 움직였다. 빠른 속도에 그의 몸이 쭈욱 길게 늘어났다. 그 끝에는 곧게 뻗은 칼끝이 있었다.


적세인 역시 움직였다. 검괴를 죽이는 것은 그녀가 원래 가지고 있던 목적이었다. 자연스레 그녀의 손에 제일 익은 검술이 펼쳐졌다. 그녀의 칼끝이 흐릿하게 분절되어 어둠 속에서도 구름처럼 빛났다.


그러나 흑천검괴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번 검을 휘둘러 류청진의 찌르기를 걷어내고, 두 번 휘둘러 적세인의 분절검을 끊어냈다. 너무나 단순한, 그러나 도저히 두 사람으로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의 검이었다.


하지만 공격이 막혔다는 당혹감도 찰나. 적세인과 류청진 둘 모두 다시 한번 움직였다. 일격이 막혔다고 절망하기엔 두 사람이 그동안 익혀온 무공의 세월이 너무 길었다.


다시 한번 적세인의 분절검과 류청진의 찌르기가 검괴를 노렸다. 두 사람 모두 전력을 다했는지 지난 수보다 반 배는 더 빠른 일격이었다.


그 순간 흑천의 칼날이 그들을 덮쳤다.


곧게 뻗었던 류청진의 검이 팅-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적세인은 검이 부러지는 건 막았지만 대신 검에서 전해지는 충격을 해소하지 못해 뒤로 튕겨 나갔다. 두 사람은 언덕의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데구르르 굴렀다.


“큭···”


적세인은 순간 아찔해졌던 정신을 다잡고 굴러가는 몸을 멈췄다. 급히 몸을 일으키며 검괴의 위치를 확인하니, 놈은 저 멀리 쓰러져 있는 류청진에게 성큼 다가서 있었다.


놈의 손이 류청진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그걸 본 적세인이 급히 외쳤다.


“너, 왕운! 이 비열한 강도야!”


흑천검괴의 손이 멈췄다. 그의 붉은 안광이 휙 적세인을 노려보았다.


“네년이 어찌 내 이름을···”


그때 쓰러져 있던 류청진이 와락 몸을 일으키며 검괴를 향해 손을 뿌렸다. 돌과 흙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이 같잖은 놈이-”


적세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흑천검괴를 향해 곧게 달려가며 검을 들었다. 다시 한번, 지난 세월 손이 부르터라 수련했던 검술이 그녀의 손에서 펼쳐졌다.


그 화려하고도 빠른 속도로 황군 무공의 잔인한 기조에서도 어렵게나마 살아남은 무공. 칼날의 화려한 움직임에 빛이 어지럽게 난반사되어 뿌옇게 보이는 검법.


때문에 검으로 푸른 구름을 그리는 듯하다 하여 청운, 그 구름이 상대방을 만나 피 안개를 뿌리는 모습이 마치 석양과 같다 하여 적하.


둘을 합해, 청운적하검법靑雲赤霞劍法이라.


적세인의 모습을 지워지고 오직 검이 그리는 구름만이 남았다. 밤하늘에 피어난 검의 구름이 흑천검괴를 뒤덮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시커먼 흑검이 구름을 뚫고 솟아나 먹물처럼 검은 궤적을 그려 그녀의 구름을 깨뜨렸다.


정확히는 그의 검이 분절된 빛에 속지 않고 정확히 적세인의 목을 노렸고, 그녀가 흑천검괴의 몸에 칼자국을 내는 것보다 목이 먼저 꿰뚫릴 상황이 되자 급히 검을 돌려 수비한 것이다. 그 대가로 그녀의 몸은 다시 뒤로 훌쩍 튕겨 나갔다.


“크흑···”

“···”


적세인의 얼굴에 피가 흘렀다. 이미 턱과 뺨에 흉터가 있던 그녀의 얼굴 한가운데로 붉은 사선을 그리는 상처가 났다. 그곳에서 흐른 피가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흑천검괴는 흙바닥을 구르는 적세인을 뒤쫓아 마무리하는 대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붉은 안광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노인의 눈이 과거를 더듬었다.


“···그래. 기억나는군. 청운적하인가, 장운적하인가 하는 이름의 오래된 검법이었지. 청성산에 넘쳐나는 싸구려 도관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그 멍청한 놈들이··· 이 흑천검법을 가지고 있었지.”


적세인은 놈이 자신의 사문을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조금 전의 충돌로 속이 드글드글 끓고, 얼굴은 피범벅이고, 손아귀는 찢어져 피가 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괴의 말이 이어졌다.


“그 머저리들은 흑천검법을 가지고도 낡은 자기들 검법을 익혔어. 흑천검법이 위험하고, 잔혹한 검술이라 해서.”

“···그건, 흑천검법이, 마공이기 때문이다. 강도놈아··· 그리고 그건, 청운적하의···”


적세인이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며 하는 소리에도 흑천검괴는 비웃음을 흘리며 말을 끊었다.


“그럼 그거라도 익혔어야지. 낡아빠진 무공이나 익히다가 내 손에 다 뒈지지 않았느냐?”

“그건 네놈이, 우물에 독을 풀어서···”

“아, 그랬나? 기억이 잘 안 나는군. 어쨌든 그곳의 도사들을 싹 쳐 죽이고 도관을 불태웠던 건 기억하는데. 네년은 거기서 살아남은 생존자였군.”


흑천검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살살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류청진을 향해 검을 꽂았다.


“컥···”


적세인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눈동자에 가슴팍 한가운데 흑검이 꿰인 류청진의 모습이 담겼다. 그 흑검은 꽂혔던 것이 거짓말이라는 듯 금방 빠져나왔다.


그러나 검이 남긴 상처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주르륵 피가 번졌다. 류청진은 멍한 표정으로 그 상처와 적세인을 번갈아 보고는,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무사님!”

“귀찮게 되었어. 건물이 불타고 칼잡이들이 죽었으니. 하지만 그딴 건 또 금방 모을 수 있지. 이미 쌓아둔 명성이 있으니 전보다도 훨씬 빠를 것이야. 새로 제자들도 키워야겠군. 이번엔 조금 더 똘똘한 녀석들로 모아야겠어···”


멀리 물러나 있던 연희가 놀라서 류청진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흑천검괴는 그녀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혼자 중얼거리며 휘적휘적 언덕 능선을 따라 걸었다. 어느새 하늘의 색이 검은색에서 물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그 밤과 새벽의 경계를 바라보는 검괴의 눈빛이 혼란스레 껌뻑거렸다.


“아, 가까이 있다는 무림맹의 타격대 문제도 있군. 흠. 놈들을 피해 가자면··· 아니지. 왜 피해? 이번 기회에 싸그리 쳐 죽여야겠어. 혁련이 그 친구 힘을 좀 줄여줄 기회군··· 응?”


미친놈처럼 혼자 중얼거리던 흑천검괴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 연희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흐릿해지던 그의 안광이 폭발적으로 빛났다.


“어린 계집. 날 배신한 그 계집이구나.”


마인의 눈에서 살기가 터져 나왔다. 연희는 창백해진 얼굴로 바짝 굳어버렸다. 그것이 겁에 질려 힘이 풀린 것인지, 아니면 그저 류청진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제 흑천검괴의 살의가 그녀를 향하리라는 것뿐이었다.


적세인이 다시 한번 땅을 박차고 달렸다.


이미 그녀의 검법은 두 번이나 검괴에게 파해 당했다. 세 번째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세인은 멈추지 않았다. 복수를 위해서?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사문과 사형제들을 위해서라면, 지금 이렇게 앞으로 달려 나갈 게 아니라 뒤돌아 도망쳐야 했다.


그렇게 다음을 기약하는 게 맞았다. 어쨌든 흑천검괴는 늙어갈 테고, 자신은 아직 젊었으니까. 마침 마공의 부작용인지 검괴의 인지능력에 이상이 생긴 듯 보이니 그쪽이 더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녀는 흑천검괴를 향해 달려갔다. 정확히는 그 앞에 있는 연희와, 아직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류청진을 향해서였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건 어떠한 이성적 판단이라기보단 그저 가슴이 시키는 일이었다. 그들을 구하고 싶기에 앞으로 내달리는 것이다.


그렇게 다시 한번, 그녀의 검이 빛나며 푸른 구름을 그렸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조금 달랐다. 오래되고 끈적한 복수심이 아니라, 그저 눈앞의 사람을 구하겠다는 순수한 의지가 담겼다.


그걸 느끼기라도 했는지 연희를 노려보던 흑천검괴의 눈이 휙 돌아 적세인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청성! 청서엉-! 그 빌어먹을 도사놈드을-!”


놈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흑검이 수십 갈래로 나뉘어 적세인을 덮쳐갔다. 그 흑검의 궤적 하나하나가 검푸른 새벽하늘을 다시 검게 물들이며 휘몰아쳤다. 그것은 마치 끝나가는 밤의 끝자락을 다시 불러들이겠다는 듯 몰아치는 밤의 파도 같았다.


그렇게 적세인의 푸른 구름과 흑천검괴의 밤의 파도가 맞부딪치려던 순간.


별안간 그녀의 푸른 구름 사이에서 한줄기 빛살이 솟았다.


말간 붉은빛. 늦은 오후와 이른 아침에 볼 수 있는, 하루의 탄생과 죽음의 빛. 노을.


새벽녘 짙은 물빛 하늘을 가르고 솟아오른 아침노을이 그녀의 등 뒤에서 빛났다. 그녀의 검과 몸이 그 아침노을과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다.


짙은 색의 푸른 구름과 하늘 사이에서 솟아오른 붉은 노을은 너무나 간단히 흑천검괴의 검은 파도를 갈랐다. 가르고 갈라 그 밤하늘 안에 숨어있던 흑천검괴마저 갈랐다.


흑천검괴의 눈동자에 그 아침노을이 화인처럼 새겨졌다.


“···”


무공의 겨룸은 결국 찰나의 대결, 아무리 크고 화려한 수라고 해도 결국 한순간에 끝나버린다. 그것이 사그라진 후 어딘가 텅 비어버린 듯한 광경에 묘한 공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흑천검괴의 공허감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아직, 짙은 물빛이 적셔지는 중이었다.


분명 먼 동쪽 하늘은 밝아오고 있었지만 아직 아침노을이 보일 만큼 해가 뜨진 않았다. 그 하늘에 조금 전 그가 보았던 푸른 하늘과 아침노을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청운적하검법. 이게 그 낡아빠진 무공이라고?”


흑천검괴는 서 있었지만 적세인은 숨을 헐떡거리며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그녀는 피범벅이 된 얼굴로 검을 세워 기댄 채 짧게 말했다.


“···그래.”

“그리고 그딴 무공에 내 흑천검법이 졌다는 말이군.”


적세인이 고개를 들었다, 피 범벅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흑천검. 그건 청운적하검법의 짝이다. 정확히는, 흑천검법이 청운적하검의 맞상대 검법이지···”

“청운적하검의 수련자를 위해 그 상대방이 익히는 검법이다?”

“그래··· 거기에 언젠가부터 마공이 섞이며 더 독랄해지고, 위험해졌지. 당신이 훔친 건 선조들이 언젠가부터 감당하지 못해 손을 뗀 마공이었어···”

“그리고 결국 진짜 청운적하검법 앞에 패배했다는 말이군···”


흑천검괴는 어딘가 평온해 보였다. 그의 눈이 적세인을 떠나 다시 새벽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치 눈에 남은 아침노을의 잔상을 그 하늘에 겹쳐보겠다는 듯했다.


다음 순간 그의 정수리부터 가슴팍까지가 스르륵 갈라져 피와 장기를 쏟아냈다.

검괴의 시체가 풀썩 쓰러지는 모습을 확인한 적세인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몸을 돌려 연희와 류청진을 찾았다. 자연스럽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쪽을 바라보는 연희가 보였다.


그 앞으로 다가가 풀썩 무릎을 꿇고 앉으니 연희의 무릎을 베고 누운 류청진이 보였다. 그도 적세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겼어.”

“잘했소. 멋진 한 수였소.”

“원래 내 무공 수준으론 이길 수 없었어. 그저 내 검법이 흑천검법의 파해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어쨌든 지금 살아 있는 건 당신이지 않소? 그럼 된 거요.”

“···”


적세인은 류청진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의 상처가 치명적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의 차분함이 생의 마지막 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때 류청진이 말했다.


“적세인. 날 보시오.”

“···”


적세인이 자신을 바라보자, 류청진은 손을 들었다. 적세인은 그 손을 맞잡아 주었다.


“무림맹을 대표해서, 적세인. 당신에게 감사하오. 당신은 이 신대륙의 커다란 위협 하나를 해결한 것이오. 당신 덕분에 이 지역 주민들은 사파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정된 삶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소.”

“···감사 인사는 내가 해야 할 것 같아. 당신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검괴를 물리칠 수 없었을 거야.”


류청진은 빙긋 웃었다.


“상패 대신에 이거 술이라도 한잔 사고 싶은데··· 아무래도 거기까진 힘들 것 같소.”

“술··· 술은 내가 살게.”

“그래 주시겠소?”

“응.”

“고맙소, 적세인.”


적세인은 뭐라 대답하려 입술을 달싹이다가, 무언가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붙잡은 손아귀에 힘이 없었다. 류청진의 눈은 탁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고마웠어, 류청진.”


짧게 속삭인 적세인이 고개를 돌렸다. 동쪽 하늘. 다 타서 시커먼 폐허가 된 흑검파 위로 이제야 아침노을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


비목 위로 주르륵 술이 떨어졌다. 단단한 비목을 타고 흐른 술은 끝내 그 아래 흙바닥까지 흘러내렸다.


“그나마 이 마을에서 제일 비싼 백주요. 나중에 시간 나면 더 좋은 술 사서 오겠소.”


적세인은 그렇게 말하며 나란히 세워진 목비 둘을 바라보았다. 목비에 세워진 내용은 간단했다.

무림순찰대원 류청진. 무림순찰대원 뇌성벽력자 고장원.


“떠나시나요?”


뒤돌아보니 조금은 성숙해진 얼굴의 연희가 서 있었다. 적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도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말했다.


“고마워요. 적 무사님에게도, 그리고 뒤에 계신 두 분께도. 세 분 덕분에 흑검파가 사라지고 무림맹 지부가 들어섰어요.”


적세인은 그 감사 인사에 옅은 미소만 지었다. 그리곤 옆에 세워놓았던 말 위에 훌쩍 올라탔다.


“어디로 가시나요?”


연희의 질문에 적세인은 피풍의와 삿갓을 정리하며 멀리, 서쪽을 바라보았다.


“서쪽. 무림맹으로.”

“무림맹으로요?”

“확인할 게 있어서.”

“어, 뭐 잘못된 게 있나요?”


적세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연희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녀 뒤에 모여든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니. 잘못된 것을 찾는 게 아니라 무엇이 올바른지 찾으려는 거야.”


이어 그녀는 말의 옆구리를 찼다. 그녀가 탄 말은 푸르륵-투레질을 한번 하더니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연희와 마을 사람들, 그리고 목비 둘을 뒤로 한 채 서쪽으로 달려 나갔다.


마른 흙먼지와 선명한 햇빛이 그녀를 마주했다.


작가의말

분량조절 대실패!

원래 5~6화 정도 쓰려 했던 적세인 외전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글 쓰는 지구력을 되찾겠답시고 하루 한 편 분량을 억지로 채우려 한 결과가 이 모양 이 꼴로 나타난 듯합니다... 조금 더 고민하고 잘 쓸 수 있었던 이야기였는데...


생각할수록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이어갈 다른 단편들에서는 더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무림서부 외전- 적세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128 약간의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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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적세인 외전. 4화 +5 23.10.24 536 36 14쪽
6 적세인 외전. 3화 +2 23.10.23 558 33 13쪽
5 적세인 외전. 2화. +3 23.10.21 650 3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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