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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사 님의 서재입니다.

무림실세 왕백수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암사
작품등록일 :
2022.06.14 22:05
최근연재일 :
2024.02.25 01:09
연재수 :
11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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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870
추천수 :
1,166
글자수 :
581,133

작성
22.06.17 17:16
조회
1,421
추천
13
글자
12쪽

명의는 인성으로 만들어진다

안녕하세요.




DUMMY

무명은 그동안 모았던 돈과 간단한 옷가지들을 챙겼다. 며칠 쓸 돈을 빼놓고 나머지를 작은 비단 주머니에 담아 소녀에게 건넸다. 소녀는 예고없이 다가온 이별을 직감했는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주머니를 받지 않으려 했다.


"하잉, 어서 받아." "......"


"처음부터 얘기했었잖아. 난 때가 되면 언제든 떠나야 하는 사람이야."


"같이 가...." "그 얘기도 했잖아..."


"나 데려가라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대성통곡을 하는 소녀를 보니 백수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그렇다고 험난한 강호행에 스무 살도 안 된 소녀를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백수와 무명은 생선 가게를 나와 바다를 보며 차를 마셨다. 무명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저 아이 이름은 쯔엉 리 하잉입니다. 가족이 장강 근처에서 낚시를 해서 먹고 살았는데 삼 년 전, 장강이 넘쳤을 때 부모 형제를 모두 잃었지요. 억척스럽고 강한 아이라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나갈 겁니다. 그냥 외로워서 저러는 거니 신경쓰지 마세요."


"열다섯도 안 돼 보이는데 당연히 가족이 필요하겠지. 지금이야 우리 상황이 매우 좋지 않으니까 별수 없지만, 중원에 거점을 마련하면 꼭 쭈악, 아니 끄엉... 아무튼 저 아이를 꼭 데리고 오자. 그나저나 무명이가 어린 걸 따지는 줄 알았으면 상단에 있을 때 더 젊은 처자를 소개시켜 주는 건데..."


"주공... 저 아이는 강에 떠내려온 절 구해준 생명의 은인입니다. 다른 뜻은 없으니 행여라도 하잉한테 이상한 얘기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매사에 직선적이고 정직한 아이입니다."


"알았어. 지금 내가 그런 장난이나 하고 있을 때는 아니니 걱정마. 그럼 오늘 푹 쉬고 내일 새벽에 바로 떠나자."


"그런데 대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사천에만 들어가도 제 특이한 외모 때문에 모용 세가의 눈을 피하기 힘들 겁니다. 변장을 해서 피한다 해도 누가 우리한테 도움을 주겠습니까? 중원 바깥에 도움을 청할 곳이 있다면 모를까 지금은 기반이 너무 없습니다."


"기반은 충분해. 역사적으로 대업을 이루는 시작은 말이야, 항상 사람이야.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면 다른 것들은 저절로 달라붙게 되어있지. 그래서 사람을 잘 모아야 되는 거야. 특히나 내세울 게 인적 자원밖에 없는 우리같은 경우엔 더 그렇지."


"우리가... 내세울 게 사람뿐이라고요?"


"넌 지금 실감이 안 나겠지만 사실 우리는 지금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거야. 평범한 무사를 강호 초고수로 만들 수 있는 힘이지. 하지만 그게 확실한 우리의 무기가 되려면 의협심과 인성을 갖춘 자들을 얻어야 해. 지금부터 우린 그런 사람을 찾는 거야."


백수가 무명의 다리를 툭툭 두드렸다. 일 년 넘게 쓰지 않아서 그런지 다친 다리만 얇아져 있었다.


"먼저 네 다리를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의원을 찾아, 아니 만들어야지. 의원이 있는 큰 마을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자."


무명은 자다가도 잠깐씩 깨서 울다 다시 잠드는 하잉을 보며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자를 두려워해서 가족을 이루는 건 생각도 해보지 않은 무명이지만, 항상 자신의 곁에 딱 붙어서 떠나지 않는 소녀와 함께 지내며 자신의 상처 또한 치유되는 걸 느꼈었다.

무명은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가슴 속 깊이 담고 일 년간 다듬어 온 자신의 투박한 검을 꺼내어 손질했다. 폭포에서 잃어버린 검보다 조금 더 무겁고 날도 무디지만,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에 거의 예전만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몸으로 주공을 지켜낼 수 있을까? 주공의 큰 뜻에 방해만 되는 건 아닐까?'


백수가 폭포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알 수가 없는 무명은 사실 백수의 말에 약간의 허풍이 담겨있다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무공을 다 알고있는 대 협객이라는 건 중원 경험이 길지 않은 무명에게도 너무 터무니없었다. 어차피 주공의 방패로 죽겠다 결심한 몸이건만 이제 가족이 생긴 탓인지 자꾸 아쉬움이 생겼다. 거대한 악의 세력에 막무가내로 덤벼들어 생을 마치는 것보다는 제대로 그들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백수를 보필하며 하잉과 함께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무명에게는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었다.


새벽 찬 바람과 함께 눈을 뜬 백수는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문신처럼 달라붙어있던 옥패가 살갗에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떨어져 있었다. 참 신기한 일도 다 있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의 팔과 옥패를 들여다보던 백수는 문득 하잉이 떠올랐다.


'저 아이에게 이걸 주라는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겠구나.'


백수는 칭얼대며 깊게 잠든 소녀의 머리맡에 옥패를 남겨두었다. 밖으로 나오니 무명이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귀한 물건 같은데...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에서 주운 거라 누군가한테는 귀한 물건인지 모르겠으나 나한테는 아니야.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마음 둘 증표가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긴, 누구 정인인데..."


"아오, 진짜..."


두 사람은 가뿐한 발걸음으로 고향 땅을 향한 여정에 올랐다. 마을이 보이면 꼭 객잔에 들러서 주변의 소문을 들었고, 잠은 산에서 잤다. 특히 마을에 의원이 있으면 반드시 들러서 손가락에 고약이라도 바르고 갔는데, 몇 마디 얘기를 나눠 본 백수의 표정이 항상 별로 좋지 않았다. 무명은 백수가 의술이 뛰어난 자를 찾고 있는가보다 싶었으나 깊게 묻지는 않았다.

한 달을 넘게 걷다 보니 사천성과 귀주성의 경계까지 오게 된 어느 날이었다. 두 사람은 산 속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에서 하루를 묵어가기로 하고 방이 두 개뿐인 객잔에 짐을 풀었다. 잠이 덜 깬 얼굴의 점소이가 갈짓자로 춤을 추듯 다가와 대충 끓인 차 두 잔을 내려놓았다. 백수가 남은 잠을 청하려고 급히 자리를 뜨는 점소이를 붙잡았다.


"내가 발에 상처가 난 것이 곪아 걷기가 힘든데 마을에 의원이 있소?"


"한 놈 있기는 한데 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요. 맨날 뭘 하고 다니는지 자리에 있는 적이 없어서 말이죠."


백수는 점소이가 자리를 뜨자마자 짐을 풀어놓고 의원을 찾아 나섰다. 점소이의 말대로 의원이라는 자는 환자를 봐야 할 제 집에 반나절이 넘도록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약초라도 캐러 간 건가?" "진찰을 하는 곳에서 약초 냄새보다 술 냄새가 많이 납니다. 주공이 찾는 의원은 아닌 듯 싶습니다."


"그런 것 같긴 한데 진찰은 한 번 받고 가려고. 며칠째 산길을 걸었더니 진짜로 발에 물집이 생겼어."


"이놈의 의원은 언제 올지 알 수도 없는데 그냥 제가 약을 발라드리겠습니다. 치료도 안 하고 돈을 버는 거니 이 돌팔이 입장에선 횡재겠군요."


무명은 진찰소 안으로 냉큼 들어가더니 간단한 약재를 가지고 나와서 백수의 발에 바르고 상처를 동여맸다.


"이건 기본적인 약초인데 거의 남지 않은 걸 보니 제대로 환자를 돌보지 않는 놈이 분명합니다. 그냥 가시죠."


백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엽전 몇 개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진찰소를 나서려 하는데 갑자기 천둥이라도 치는 듯한 괴성이 들렸다.


"신성한 의원의 집에 어떤 놈이냐아~!!!"


백수와 무명이 돌아보니 비쩍 마르고 눈빛이 쾡한 남자가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오래 말린 명태처럼 생겼는데 키만 커서 보기가 더 흉했다. 얼굴은 마치 양쪽에서 몽둥이로 후려친 것처럼 볼이 쑥 들어가 있었다. 무명이 어이없는 얼굴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신성한 의원이 대낮에 환자는 보지 않고 술판이오? 환자를 치료할 약재도 바닥난 것 같던데 의원이라면 의원다운 자세를 먼저 보여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이오."


"크크큭, 네놈들이 의원다운 게 뭔지 안단 말이야? 내가 오래 살다 보니 이 산골에서 스승을 만났구만그려. 그래, 내 오늘 너희들한테 가르침 한 번 받아보자. 대체 의원다운 자세가 무엇입니까, 스승님들~?"


"천성이 못 된 자로군. 어서 가시죠, 상대할 가치도 없는 놈입니다."


"어딜 그냥 가아아아!!!"


의술은 몰라도 목청 하나는 큰 사내였다. 무명이 귀를 막을 정도로 큰소리를 지른 사내는 성큼성큼 걸어와 백수의 손에 엽전을 턱 하니 올려놓고는 다시 가서 드러누웠다.


"왜 남의 집에 눈먼 돈을 놓고 가려는 게야? 재수 없게."


"우리가 여기 약초를 몇 개 썼소이다. 이건 그 값이요."


"흥, 의원을 찾아왔으면 의원한테 상처를 보이고 진찰을 받은 후에 돈을 내는 거야. 약초 씨부랭이들은 돈을 받고 파는 게 아니라고 . 알았으면 가 봐."


서둘러 자리를 뜨는 무명과는 달리 백수는 고개를 바닥에 대자마자 잠이 든 말린 북어같은 사내를 한참 들여다보다 걸음을 떼었다.


"왜 그러십니까? 목청 큰 걸로는 국경을 지키는 장군감이지만 인성은 엉망인 것 같던데."


"말 뽄새로 사람의 인성을 다 알 수는 없지. 재수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지금 술 벗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니까."


백수와 무명은 다음날 일찍 의원의 집을 다시 찾아갔다. 역시나 말린 북어 한 마리가 마지막으로 본 그 자세로 누워 햇빛에 말려지고 있었다. 백수는 가져온 음식 그릇을 마당에 펼쳐놓고 무명과 후루룩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남자도 허기에는 이길 수 없었는지 입가에 침을 닦으며 스윽 일어나더니 무명과 백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당신들 어제..."


"인사는 됐고 이거나 받으쇼."


남자는 백수가 건네준 젓가락과 대접을 받아들고 어이없다는 듯 두 사람을 보다가 곧 헛웃음을 지으며 대접에 얼굴을 파묻었다. 의원의 집에는 한동안 젓가락 딸그락거리는 소리와 후루룩 국물 들이키는 소리만이 청아하게 울렸다. 남자가 배를 두드리며 마루에 주저앉더니 두 사람에게 곰방대를 권했다. 두 사람이 고개를 젓자 남자 혼자 흐읍하고 깊게 한 모금 연기를 빨더니 후욱 하고 기분좋게 내뱉었다.


"아침부터 이런 후한 대접을 받았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구려. 거기 이쁘장한 청년 상처나 한 번 봅시다."


남자는 대뜸 백수의 신발을 벗기더니 무명이 감아놓은 한지를 벗기고 발바닥의 상처를 살폈다. 남자의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외쳤다.


"아니!!" "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팔 다리까지 이렇게 곱다니.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구만. 이거야 뭐 오늘은 여자들 보러 안 가도 되겠네, 허허허."


"이 망할 돌팔이 놈이..."


무명의 눈에 불꽃이 튀는 걸 백수가 겨우 말렸다. 백수는 자신의 발을 만지던 남자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고 있었다. 팔꿈치 아래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의 깊이를 보아 몇 해 전에 입은 상처인 것 같았다.


"사실은 내가 이런저런 이유로 관군에게 쫓기고 있는데 내일 중으로 산 두 개를 넘어야 하니 치료 좀 잘 해주시오. 사례는 두둑이 하리다."


백수의 말에 남자의 눈썹이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요즘 죄 안 짓고 사는 사람이 있나? 선녀같이 생겨서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러시오?"


"뭐 별 것 아닙니다. 하북에서 잘 나가는 상인 집 부인을 꼬드겨서 재산을 챙겨보려고 했는데 막판에 수가 틀어져서 그 집 애 둘하고 상인 놈을 죽였지 뭐요. 애새끼가 울지만 않았어도 한 몫 제대로 챙겨서 나오는 건데... 하여간 시끄러운 계집과 애새끼는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니까 안 그렇소? 그래도 꽤 챙겨 나왔으니 치료비는 걱정말고 걸을 수 있게만 해....."


"이런 짐승같은 놈들을 봤나!!!!!"


남자의 사자후가 벽을 부수고 나갈 듯 온 집안을 흔들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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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악마의 입 속에는 +1 22.06.18 1,263 12 13쪽
27 상인에겐 반드시 뒷주머니가 있다 +1 22.06.18 1,302 9 22쪽
26 구 세광의 결정 +2 22.06.18 1,325 13 11쪽
25 독사굴에 다시 들어가다 +2 22.06.17 1,372 13 12쪽
» 명의는 인성으로 만들어진다 +1 22.06.17 1,422 13 12쪽
23 그에겐 다 계획이 있다 +1 22.06.17 1,428 15 11쪽
22 남는 건 사람 뿐 +2 22.06.17 1,444 18 12쪽
21 폭포 속으로 +3 22.06.17 1,452 17 14쪽
20 강호의 암기왕 +1 22.06.17 1,476 17 12쪽
19 의로운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1 22.06.17 1,488 18 11쪽
18 동굴의 비밀 +1 22.06.17 1,570 16 12쪽
17 정신나간 노인의 정체 +1 22.06.17 1,503 18 12쪽
16 모용 선화의 야망 +1 22.06.16 1,468 15 12쪽
15 이상한 노인 +1 22.06.16 1,449 16 12쪽
14 기적을 기다리며 +2 22.06.16 1,472 15 12쪽
13 탈출 +2 22.06.16 1,481 16 12쪽
12 지령의 위기(2) +4 22.06.14 1,424 17 11쪽
11 지령의 위기(1) +3 22.06.14 1,489 16 12쪽
10 모용 선화의 정체 +4 22.06.14 1,560 17 12쪽
9 모용세가의 복심 +2 22.06.14 1,559 15 12쪽
8 모용세가의 방문 +3 22.06.14 1,686 19 12쪽
7 관평의 개심 +4 22.06.14 1,815 18 12쪽
6 묘한 인연 +2 22.06.14 2,007 19 12쪽
5 강남의 도인 +4 22.06.14 2,307 21 12쪽
4 단주의 유언 +3 22.06.14 2,570 26 12쪽
3 피곤한 부단주 +4 22.06.14 3,023 30 13쪽
2 위험한 거래(2) +2 22.06.14 3,516 34 13쪽
1 위험한 거래(1) +4 22.06.14 5,367 3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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