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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사 님의 서재입니다.

무림실세 왕백수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암사
작품등록일 :
2022.06.14 22:05
최근연재일 :
2024.02.25 01:09
연재수 :
11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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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81,133

작성
22.06.14 22:11
조회
2,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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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글자
12쪽

단주의 유언

안녕하세요.




DUMMY

"아우야~~."




도둑 고양이처럼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지령의 형 관평이었다.




"엇, 형님? 아까는 어디 계시다가 지금 와요?"




"미안, 내가 좀 할 일이 있었거든. 너한테 보여줄 게 있어서 가져왔지."




관평이 품에서 슬그머니 꺼낸 건 조그만 서책이었다. 드디어 형이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는가 하는 생각에 반가운 얼굴로 책을 들여다 본 지령의 눈이 터질 것처럼 튀어나왔다. 작은 책 속에는 지령이 평생 처음 보는 남녀의 뒤섞임이 조잡한 서체로 그려져 있었다.




"하핫, 너 춘화는 처음 보지? 너도 이제 어른이니 이런 걸 봐 줘야 된다. 어른이 그냥 되는 게 아니야."




지령은 눈을 반짝이며 책장을 넘기는 관평의 손을 잡고 책장을 덮었다. 관평이 의아한 눈으로 지령을 내려다 보았다.




"왜, 그림체가 별로야?"




"형님, 어른이 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상단을 지켜야 할 때입니다.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잘 숨겨왔지만, 여러 상단들이 아버님이 부재를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아직 상단은 아버지의 빈 자리가 너무 큽니다. 형님이 하루 빨리 단주를 맡으셔서 유세 표국의 중심을 잡아주셔야 되요."




싱글벙글 웃고 있던 관평이 갑자기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형의 돌발 행동에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지령에게 갑자기 달려든 관평은 동생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간지럽혔다.




"아, 아니 형! 갑자기 이러기가 어딨소! 그만 해요!!"




"내 간지럼도 못 피하는 꼬맹이가 요즘 얼굴만 보면 심각한 얘기를 하니 웃겨서 그런다. 상단은 알아서 잘 돌아갈 테니 대충 챙기고 놔둬."




"아버님이 평생을 일구어 놓으신 상단이에요."




"그러니 아버님 거지 우리 상단은 아니잖아? 아버님은 내일이라도 일어나실 거야. 총명하던 아버님이 갑자기 저리 되실 리가 없지."




지령은 안타까운 마음에 한 마디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자신도 형과 같은 생각이었다. 모르는 게 없었던 자랑스런 아버지, 대담하고 세심하게 상단을 이끌던 훌륭한 단주. 그런 사람이 하루 아침에 모든 걸 잃어버렸다면 어떤 사람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령은 충격을 받은 형의 마음이 이해되면서 결국 그를 더 다그치지 못 했다.




"아우야, 나 내일 흑월제에 다녀와도 돼?"




"며칠 있으면 우리도 흑월제에 내놓을 상품을 가지고 출발할 테니 그 때 가시면 되잖습니까."




"그 때는 일하러 가는 거잖아. 일 말고 놀러 가고 싶다고."




"상품도 살펴 보고 서역으로 떠나는 교역단 환송식에도 참가해야죠."




"원래 그런 일은 부단주가 하는 겁니다. 유 지령 부단주님!"




관평은 지령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손을 흔들며 방을 빠져나갔다. 어차피 막을 생각도 아니었기 때문에 지령은 그를 잡지 않았다. 갑자기 노곤함이 밀려와 침상에 누운 지령은 예전 부친의 인자한 얼굴을 상상하다 잠이 들었다.


꿈에서 지령은 어둡고 차가운 곳에 혼자 서 있었다. 그 곳은 마치 동굴 같아서 지령은 벽을 짚어보려고 했으나 아무리 걸어도 벽이 잡히지 않았다. 끝도 없는 탐색에 지쳐가던 지령의 귀에 괴퍅한 노인의 음성이 들렸다.




[활인이야. 내버려 두는 건 죽이는 것. 맥이 통하도록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활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목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고 별안간 정수리 중앙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지령은 목청껏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마구 몸부림을 친 탓에 침상에서 떨어질 뻔한 것을 무명이 잡아 주었다.




"아, 고마워 크게 다칠 뻔 했네. 너 근데 왜 여기에 있어?"




"밤새 악몽을 꾸신 것 같습니다. 신음 소리가 심상치 않아서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너도 자야지... 다음부턴 나쁜 꿈을 꾸는 정도면 그냥 놔둬. 자는 걸 지키고 서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주공을 지키는 게 저의 일입니다. 잠은 나중에 자면 됩니다."




"그러고 보니 옥련 낭자를 만날 생각에 설레여서 잠을 못 잤나 보구나. 그렇다면 자리를 빨리 주선해야지."




"자꾸 그러시면 산 속에 들어가 호랑이 밥이 되겠소이다."




"그리고 창귀가 되서 돌아오면 옥련 낭자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낭자한테 혼나고 싶어?"




말로는 상대가 되지 못 하는 무명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 제발 좀..."




"알았으니 탁자에 있는 서류 좀 갖다 줘. 살펴보고 아버님께 문안 드리러 가야겠다."




"단주께선 아직 침소에 계십니다. 기침하시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응, 그러면 너도 조반 먹고 와. 난 형님이랑 먹을 거니까 내 건 챙길 필요 없어."




"소단주께선 어제 밤에 산채를 빠져나가셨습니다."




"아우... 그 새를 못 참고 가셨구나. 축제가 그리 좋은가?"




"소단주께선 취향이 확고하시니까요."




"그래, 너 만큼이나 확실하지. 가서 밥 먹고 와."




무명이 방을 나선 후 지령은 위준이 주고 간 서류들을 훑어보았다. 낙양에 새로 궁궐을 짓는 데 공사에 쓰일 벽돌과 나무를 납품하는 관리가 황금 50근을 요구했다는 보고를 본 지령의 입에서 상스런 말이 터져 나왔다.




"거머리 같은 놈들. 백성들의 고초엔 관심도 없는 것들이..."




제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측천무후는 여러 가지 뛰어난 정책을 펼친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만, 정적들을 잔인하게 도륙한 악귀 같은 여자였다. 지령도 멀리서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십 리 밖에서도 그녀의 눈에서 나오는 살기가 보일 것 같았다. 지령은 왠지 무후의 치세가 오래 가지 못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품을 하면서 다음 보고서를 읽던 지령의 손이 빨라졌다. 강남의 작은 고을 역리가 성주에게 올린 보고서를 필사해 온 글인데 내용인 즉, 고을에 한 도인이 나타나 미래에 생길 일을 예언하는데 그 말이 귀신처럼 쏙쏙 들어맞더라는 것이다. 또한 고을의 오랜 환자들을 여럿 고쳐주기도 했는데 그 중엔 노망이 든 구십 세 노파도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노망을... 고쳤다고?"




지령의 눈이 번쩍 띄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역리의 글에 따르면 신묘한 재주를 가진 도인을 도성으로 데려가 성주에게 보이려 했으나 도인은 절대 마을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그 고을에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 어디에 있든 찾아낼 생각이었다.


지령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의복을 챙겨 입고 부친 유 환명의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가까이 가니 코를 찌르는 지린내가 풍겨왔다. 문을 열어보니 마치 태풍이라도 왔다 간 것처럼 방 안이 난장판이었고, 곳곳에 인분이 뿌려져 있었다. 그 와중에 단주 유 환명은 침상 옆 업무를 보던 책상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지령은 최근 보지 못 했던 부친의 모습에 긴장하면서도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아버님,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보통 이 쯤 되면 똥 덩어리가 날아오거나 평생 입에 담지 않았던 욕설이 들려오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마치 노망이 들기 전 평소 떄의 아침처럼 조용했다. 환명이 지령을 보며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오너라, 둘째야."




지령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입술을 악 물고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관평의 말처럼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건가 싶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얼굴을 매만지는 아들의 손을 잡은 환명이 미소를 지었다.




"널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구나."




환명은 아들의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며 그를 옆 자리에 앉혔다. 지령은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으로 부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환명의 지령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잘은 모르겠다만 아주 긴 꿈을 꾼 것 같다. 그런데 왜인지 그 꿈을 또 꾸어야 할 것 같으니 예전에 내게 해야 할 말을 해 두어야겠다."




"뭐든 말씀만 하세요, 아버지."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니 꼭 해야 할 말을 먼저 하마. 나는 관평과 널 똑같이 아끼고 사랑한다. 그래서 상단도 둘이 힘을 합쳐 운영했으면 했지. 하지만 그것이 옳지 않은 생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관평은 가볍지만 사람을 잘 모으니 상단을 키워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찌 되었든 하나뿐인 네 형이니 그를 외면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상단의 대소사는 위준이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만, 그 녀석은 심성이 깊지 못 해서 큰 결정을 내리지 못 하니 그럴 땐 네가 결정을 하고 그가 따르도록 하면 잘 해낼 것이다."




"아버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그리고 이건 특히 중요한데 지금 필요가 없어 보인다 해도 반드시 무공이 뛰어난 무인들을 모으고 수련을 시키도록 해라. 강호에서는 상단도 무력이 있어야 한다. 무력이 없으면 무림맹의 무사들이 승냥이 떼처럼 달려들어 물어뜯을 거다. 정파라는 자들을 믿지 마라. 그들도 권력과 재물 앞에서는 사파와 다를 게 없는 짐승들이니라.


무명을 항상 곁에 두고 어디서든 방심하지 마라. 언제 누가 네 뒤를 노릴지는 너만 모르는 것이다."




"왜 이런 말씀을 제게 하시는 거에요? 이런 건 형한테 알려주셔야죠. 제가 형을 데려올게요. 지금은 산채 밖에 있지만 금방 데려올 수 있습니다!"




환명이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지령을 보며 잡은 손을 꼭 쥐었다. 그러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머리가 갑자기 아프구나. 차를 한 잔 마셔야겠다. 어쩌다 너를 이렇게 낳아서... 아버지가 미안하구나..."




"잠시만,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어서 차 준비하고 의원을 데려와!"




어느새 단주의 침소 밖에서 대기 중이던 무명이 지령의 애타는 부름을 듣고 바로 뛰쳐 나갔다. 얼마 되지 않아 쟁반에 차를 든 하인과 산채에 머무르던 의원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간 무명은 침상에 누워 천장을 보며 침을 흘리고 있는 환명과 그 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는 지령을 발견하였다.


지령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대충 닦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엔 열 여섯 소년이 감당하기 힘든 슬픔과 절망이 담겨 있었다. 지령의 작은 손에는 잠깐동안 만났던 아버지가 쥐어준 작은 쪽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쪽지를 몇 번 찢고는 망설임없이 삼켰다.




"차는 거기 놔 두고 의원은... 단주님을 좀 봐 줘요. 종이를 많이 삼키셨어."




하인과 의원이 자리를 떠난 후에도 지령과 무명은 그 곳에 남았다. 환명이 삼킨 종이들을 입에서 꺼내느라 한 바탕 소동이 벌어진 후라 가뜩이나 엉망이던 방 안은 말 그대로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단주님은... 잠시 돌아오셨던 겁니까?"




지령은 흐릿한 눈을 들어 무명의 눈을 보았다. 그는 만난 지 몇 년 되지 않았는데도 세상에서 믿을 만한 사람을 한 명 뽑으라면 주저 없이 선택할 만한 신뢰를 주는 사람이었다.




"오늘 들은 건... 비밀로 해 줘. 특히 형이 알아선 안 돼."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단주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원래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겁니까?"




"상관없어. 아무도 모를 테니까. 강남도의 장사로 가야겠어."




"지금 말입니까?"




지령은 무명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명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허리에 찬 검을 고쳐 쥐었다.




"아버님의 병환을 꼭 고쳐야겠어."




행복한 하루 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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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99 세비허
    작성일
    22.06.20 03:47
    No. 1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3 암사
    작성일
    22.06.20 14:10
    No. 2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1 악지유
    작성일
    22.07.06 15:40
    No. 3

    종이를 굳이 삼킬 필요가...ㅉ
    그냥 불에 태워도 될 것을.

    그리고 아무리 궁궐을 짓는 벽돌과 자재를 납품받는
    관리라 해도 뇌물로 황금 50근을 요구한다는건 말도
    안되는 소리 같네요.

    당, 송 시대에는 은자의 가치가 아주 높았다고 하는데
    은자로 50근도 대단한데 황금 50근 이라니...

    600g 이 1근 이라면 황금으로 30kg 인데 요즘 기준
    으로도 큰 돈인데 그 당시로는 말할 나위도 없지요.
    새로 건축한 궁궐 1채 가격보다 더 큰 금액일듯. ㅉ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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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기적을 기다리며 +2 22.06.16 1,472 15 12쪽
13 탈출 +2 22.06.16 1,481 16 12쪽
12 지령의 위기(2) +4 22.06.14 1,424 17 11쪽
11 지령의 위기(1) +3 22.06.14 1,489 16 12쪽
10 모용 선화의 정체 +4 22.06.14 1,560 17 12쪽
9 모용세가의 복심 +2 22.06.14 1,559 15 12쪽
8 모용세가의 방문 +3 22.06.14 1,686 19 12쪽
7 관평의 개심 +4 22.06.14 1,815 18 12쪽
6 묘한 인연 +2 22.06.14 2,007 19 12쪽
5 강남의 도인 +4 22.06.14 2,307 21 12쪽
» 단주의 유언 +3 22.06.14 2,570 26 12쪽
3 피곤한 부단주 +4 22.06.14 3,023 30 13쪽
2 위험한 거래(2) +2 22.06.14 3,516 34 13쪽
1 위험한 거래(1) +4 22.06.14 5,367 3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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