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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준님의 서재입니다.

악마사냥꾼은 성기사가 되고 싶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서아준
작품등록일 :
2021.12.19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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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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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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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0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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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76

DUMMY

“이반. 네 뜻은 알겠다.”


시간이 흐르고 올리는 정신을 되찾았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으나 그녀는 헤테르 백작가의 안주인이었다.

또한, 이반 헤테르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이반의 결정이 예상 외이며, 감동적이긴 했으나 감정과 현실은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딸을 구하는 건 이 어미에게 맡겨다오.”


지글거리는 태양와 대지마저 얼려버릴 새하얀 달.

끈적거리는 공기와 오염된 대지.

우글거리는 마수는 그곳이 신에게 버림받은 땅임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마경이란 그런 곳이었다.

비록 레이나가 실종된 곳이 마경의 초입이라지만, 쉽게 여길 곳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올리는 결심을 굳혔다.

자신의 모든 인맥과 명예를 내려놓을 것을 결심했다.


‘가족을 구하려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그 계기는 이반의 한마디였다.

그녀가 딸의 실종소식을 듣고서, 곧바로 헤테르 백작가의 악마사냥꾼들에게 마경을 수색하라 명령하지 않은 이유도.

아리스가를 비롯한 넓게 뻗쳐놓은 그녀의 인맥을 이용하지 않은 이유도.

굳이 현재, 이곳의 책임자인 자신의 오라비에게 찾아간 이유도.

결국 체면과 명예의 문제였다.

정말 딸아이가 걱정돼 미칠 것 같았다면, 이미 검을 뽑아 들었어야 했다.

혈혈단신으로나마, 마경을 헤집으며 딸아이의 이름을 울부짖어야 했다.

모정이란 그런 것이니까.

한 줌의 이성마저 태워버리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아리스의 핏줄을 이었다.

항상 냉정해라.

저주와도 같은 가훈 때문일까.

눈물샘이 마르지 않을 지금 같은 상황에도, 그녀는 절차를 따랐다.

비록 흥분했으나, 모든 것을 내던지지는 않았다.

그 선택으로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명문가의 핏줄이 그녀를 옭아매었다.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 했어.”


올리는 중얼거리며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삶에서 감정에 따른 선택을 한 적은 몇 번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는 알았다.

이성으로 선택한 길이 항상 옳지는 않다는 걸.

때론 감정적인, 충동적인 일의 결과가 삶에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그 증거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 해,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


“어머니.”


이반은 올리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새하얗게 질려 꽉 움켜쥔 주먹위로, 손을 덮어주었다.

감정에 무너지는 그녀를 지탱해주었다.


“레이나는 무사할 겁니다. 그러니 침착하세요.”

“하지만....”


올리가 눈을 뜨고 이반을 바라보았다.

증오나, 분노는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떨림만이 가득했다.

딸아이를 걱정하는 어미의 눈이었다.


“들어와.”


이반이 나지막이 말하자, 안으로 한 여성이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에 올리가 눈을 부릅떴다.


“베르체 이단심문관?”


몇 번이고 본 얼굴이었다.

이단심문관 부쳐의 제자이자 알비온 대주교의 손녀.

그녀의 명성은 성왕국 전체에 퍼져있었다.

최연소 이단심문관이자 교황의 최측근 중 하나.

이단심문관들에게 사사 받은 그녀의 무력은 고위 성기사급이라 평가되었다.

30줄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를 감안하면, 경악할 일이었다.


“반갑습니다. 헤테르 백작님. 백작부인.”


베르체는 목례를 취하며 예의를 갖췄다.


“이단심문관. 어째서 그대가 이곳에 있는가? 혹시 이반 때문인가?”

“네. 맞습니다.”


헤테르 백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신제 이전, 이반의 심문을 맡은 자가 베르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혹여 아직까지 의심을 거두지 않고 이반의 뒤를 쫓는 중인가 싶었다.

그러나, 이윽고 그는 자신의 생각이 오해임을 깨달았다.


“이반만이 아닌, 성왕국의 신민들을 위해 이곳에 있지요.”


베르체는 이단심문관이었고, 이곳은 마경이었다.

망자의 군대가 범람한 지금, 이단심문관이 이곳에 자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마를 등에 엎고, 생을 부정하는 시체들만큼 이단에 가까운 자들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마경으로 향한 어린 신도들이 있다 들었습니다만.”


베르체가 이반의 곁에 섰다.

이반은 올리의 손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 베르체 이단심문관이 저와 동행할 겁니다. 두 분은 이곳에서 백작가의 악마사냥꾼들을 지휘해 주십시오. 망자의 군대가 신성한 땅을 즈려 밟지 못하도록.”


헤테르 백작이 올리를 바라보았다.

올리 역시 그를 마주보았다.

서로 떨리는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던 둘은 끝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으마. 그리고.”


올리가 이반의 손을 꽉 붙잡았다.

부러질 듯이,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꽉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다치지마렴. 아들.”

“물론입니다. 어머니.”


격렬한 포옹은 없었다.

서로 맞잡은 손에 온기를 담았을 뿐.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올리는 이반을 믿었고, 이반은 기꺼이 일어섰다.

헤테르 백작이 그의 어깨를 두들겨주었고, 억지로 미소 지으며 여신께 그의 안녕을 빌었다.

회포를 나눌 시간도 없이, 이반은 헤테르 백작가가 자리한 막사를 떠났다.

물론 베르체와 단 둘은 아니었다.


“찰스.”

“예. 도련님.”


이반의 곁에서 찰스가 고개를 숙였다.

집사장인 그는 명목상 악마사냥꾼이 아니었다.

올리와 헤테르 백작은 그를 이반에게 붙여주었다.

이것밖에 못해주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벨과 에이미는 잘 지내고 있나?”

“예. 물론입니다.”


벨과 에이미.

이반이 거둬들인 두 아이들.

그는 미래를 위한 씨앗을 심었고, 그 싹은 훌륭히 자라났다.


“벨은 악마사냥꾼들을 돕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배웠는지, 아주 호평이 자자하더군요. 대범하고, 정확하다면서.”


벨은 악마사냥꾼과 함께 마경의 척후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이나 헤테르 백작가의 일원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에이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종 서류에 능하고 똘똘해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마경의 지도제작에 도움이 되었다 하더군요.”


에이미는 백작가 내부의 일을 돕고 있었다.

재고를 파악하고, 물자를 보급했으며 사후관리를 처리했다.

척후가 제공한 정보를 통해 망자들의 이동경로를 파악하기도 했다.

악마사냥꾼들이 고립되지 않고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장하군.”


누구의 지시도 아니었다.

둘은 스스로 선택하였고, 스스로 일어섰다.

이반의 도움이, 부쳐의 가르침이 있었다 하더라도 굳은 결의와 각오가 없으면 없었을 것이리라.


“둘이 누군데 그렇게 좋아해?”


모르는 이름에 베르체가 의문을 가졌다.

이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왜 이렇게 태연해 보여? 여동생이 고립되어 있다며.”


베르체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대지진 때,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이반이었다.

지금은 무려 가족인 여동생이 마경에 고립된 상황.

그러나 이반은 어째서인지 급해 보이지 않았다.


“사이가 안 좋다고는 들었는데. 그래서 그래?”


레이나라면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어찌 보면 둘은 동문이었다.

같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배웠으니.


-저는 레이나. 레이나 아리스입니다.


스스로를 레이나 아리스라 소개하던 당돌한 꼬마아이.

삼촌이 지인에게 부탁 받았다며, 헐헐 웃던 그날이 떠오른다.

둘은 비록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나, 말동무 정도는 되었다.

그녀가 증오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게 자신의 오라비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때는 아리스가의 이야기인줄 알았으나,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레이나는 헤테르가의 여식이었으며, 이반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그런 이유 때문일 리가 있나.”


이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걱정 따윈 전혀 없어 보이는 모습.

부모 앞에서의 모습은 연기였단 말인가?

베르체가 지그시 이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반은 태연하게 웃었다.


“너무 걱정마라. 레이나는 무사할 테니.”

“...여신께 맹세코?”

“물론.”


한 톨의 망설임조차 없는 즉답.

베르체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믿을게.”


무슨 생각을 하는 진 모르겠다.

그러나, 이반의 표정은 밝았고 걱정 따윈 없었다.


‘여신이시여. 부디.’


베르체는 여신의 표식을 움켜쥐며 작게 기도 드렸다.

이반이 걱정하지 않는 이유가.

여동생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 아닌, 여동생의 안전에 확신 때문이기를.


*


“레이나. 이것 좀 드십시오.”


요르한이 꾸물거리며 손을 뻗었다.

더럽고 지저분한 손 위로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다.

보기만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날 것처럼 생긴 벌레.

지네를 닮은 그것은, 수십 개의 다리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고마워요.”


그러나 레이나는 익숙하다는 듯이 그것을 받아 들고 입에 우겨 넣었다.

죽기 싫다는 듯이, 벌레가 몸 안에서 꿈틀거린다.

다리가 입천장을 할퀴며 발악하기 시작했다.

레이나는 망설임 없이 턱을 움직였다.

단단한 갑각이 깨져나가며, 비릿한 육즙이 팍하고 터진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역한 냄새가 코에 맴돈다.

그러나 레이나는 억지로 씹어 삼켰다.


‘일주일이 지났나.’


마경 고립 7일차.

식량은 진작에 떨어졌고, 고립된 위치조차 짐작이 안 된다.

스켈레톤 무리를 격파하며, 헤맨 끝에 가까스로 은신처 비슷한 곳을 찾았으나 그게 전부.

밤과 낮을 오가며 극변하는 기후는 그들의 육신을 갉아먹었다.

밤마다 울부짖는 기괴한 울음소리는 그들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여신이시여. 대체 왜 이런 시련을....”


울먹거리며 기도 드리는 성기사 하나.


“죽을 거야. 모두 죽을 거라고.”


몸을 웅크린 채, 삶을 비관하는 성기사 하나.


“버림 받은 거야. 여신께선 우리를 버렸다고!”


믿음을 져버린 성기사 하나.

마경에 고립된 성기사들은 모두 촉망 받는 기재들이었다.

나름대로 명성을 떨치며, 교단의 다음세대를 이어갈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어렸다.

성기사로써도, 여신을 모시는 신도로써도.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포기하지 말아요.”


레이나가 일어섰다.

그녀 역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축축한 동굴의 벽면을 짚으며, 가까스로 쓰러지려는 몸을 지탱했다.

그러나 끝내 그녀는 두발로 굳건히 섰다.


“여신께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시련은 우릴 단단하게 하는 망치질일 따름입니다. 포기해선 안돼요.”


그녀의 목소리가 웅웅 거리며 메아리쳤다.

성기사들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름답던 얼굴은 이미 흐트러졌다.

피가 말라 붙었고, 흙과 오물이 이곳 저곳에 가득했다.

새하얗게 빛나던 갑주는 깨지고, 부러져 빛을 잃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살아있잖아요. 아직 안 죽었잖아. 그럼 발버둥이라도 치자고!”


치자고, 치자고, 치자고.

메아리치는 목소리에 성기사들이 귀를 막았다.

눈을 감고,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바닥에 파묻었다.

그들의 옆에는 이가 나간 검과 깨진 방패가 자리하고 있었다.


“레이나. 진정하시오.”


요르한이 그녀를 만류했다.

레이나는 거칠게 호흡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전쟁의 여신을 모신다는 것들이...!’


처음에는 모두가 반짝거리는 자들인 줄 알았다.

여신에 대해 찬미하며, 의기를 위해 검을 들어올린 자들.

마경에 자원한 이유도 오직 악을 처단하고, 죄 없는 이들을 구하기 위함이라 떠들던 자들.

그러나 그 실체는 어떠한가?


‘스승님.’


레이나는 가슴깨를 더듬었다.

작은 철조각이 만져졌다.

서늘한 기운이 손바닥에 맴돌자, 그녀는 조금 정신을 차렸다.

그때였다.


“적입니다! 스켈레톤 부대가 접근 중!”


경계를 서고 있던 아인테르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요르한이 굳은 표정으로 일어섰다.

레이나가 다급히 일어서며 검과 방패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다른 성기사들은 아니었다.


“끝이야. 드디어 끝이라고.”

“으흐흐. 저를 버린 당신을 원망합니다. 여신이시여.”


성기사들은 현실을 외면하듯, 눈을 감았다.

복종하듯, 고개를 바닥에 파묻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레이나가 입술을 짓씹었다.


“레이나. 어서!”


요르한이 레이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레이나는 처연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저들을 지켜야 하나요? 여신도, 자신도 져버린 자들인데 어째서?”


마음 한 켠이 무너진다.

무언가 꾸물거리는 감각이 심장을, 머리를 좀먹는다.

물에 잉크가 떨어지듯, 절망이 그녀의 몸에 퍼져나간다.

보랏빛 기운이 그녀의 눈망울에 깃든다.

마경에 자욱한 마기의 안개가 끝내, 그녀를 절망에 젖어 들게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병들어 약한 자들을 돌보는 것에 무슨 이유가 필요할꼬.”


작은 목소리.

그러나 그것은 커다랗게 메아리 쳐 레이나의 귓가에 닿았다.

그녀의 고개가 부러질 듯 돌아갔다.


“잠시 쉬거라. 힘들 땐 쉴 줄도 알아야 한다.”


약간 낮은, 처음 듣는 목소리.

그러나 레이나는 동굴 밖으로 향하는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은 어째서인지, 지극히 그리운 모습과 똑같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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