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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준님의 서재입니다.

악마사냥꾼은 성기사가 되고 싶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서아준
작품등록일 :
2021.12.19 12:51
최근연재일 :
2022.04.29 18:30
연재수 :
9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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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6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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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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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68

DUMMY

꿈을 꾼 듯, 정신이 몽롱했다.

고개를 치켜드니, 눈앞에는 거뭇한 하늘이 보였다.

날이 나빠서인가, 별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흐린 달만이 애처롭게 홀로 떠있었다.


“쿨럭.”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 이반은 짧게 기침했다.

손을 펴보니, 검붉은 액체가 한 가득이었다.

겉피부가 열상을 입은 듯 따끔거린다.

몸 내부는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이대로 무너져버리면 모든 게 끝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여신이시여.”


이반이 작게 중얼거렸다.

습관처럼 목덜미를 훑었으나, 느껴지는 건 가문의 가보뿐이었다.

프레이 여신의 징표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반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느껴질 리 없는, 익숙한 감촉이 느껴지는 듯 하다.

상상인지, 아니면 망상인지 모르겠으나, 분명 그러했다.

단단하나, 따스한 감각이 손바닥에 가득하다.


“지친 양이 이렇게 묻나이다.”


당연하게도 목소리는 없었다.

목소리는 여신이 존재함을 드러내는 뚜렷한 증거였다.

믿음의 근거였으며, 여신의 손길이 맞닿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신도가 느껴야 할 감정은 좌절일 것이리라.

자신을 져버린 여신에 대한 절망.

그 끝에 피어나는 것은 분노와 불신이여야 했다.

그러나 이반의 깊은 가슴 속에서 은은하게 맴도는 것은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저를 보고 계시나이까.”


오직 그가 느낀 것은 지독한 슬픔.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련함만이 가득했다.

더 이상 여신은 자신에게 눈짓하지 않는 것인가.

자애로운 품과 따스한 위로를 기대할 순 없는 것인가.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서러운 울음만이 목덜미에서 맴돌았다.

목놓아 울고 싶은, 짙게 포효하고 싶은 충동만이 솟구쳤다.

심장이 커다랗게 두근거리며, 마기가 들끓는다.

갈가리 찢겨진 신체는 이를 감당하지 못했다.

이반이 휘청거리며, 후들거리는 다리가 꺾여간다.

무릎이 꺾이며, 무너지려던 그때였다.


“이반. 이반!”


딱딱하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코끝에서 풋풋한 땀내음과 옅은 담배냄새가 느껴진다.

이반의 눈을 가득 매운 것은 보랏빛의 머리칼.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망울이, 그를 마주보았다.


“여신이시여. 감사 드립니다....!”


베르체가 이반을 꼭 끌어안았다.

지쳐 쓰러지려던 여신의 검을 부축했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팔에 힘을 더했다.


“베르체. 네가 왜....”


이반이 멍하니 물었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떤 개자식이 약속을 어겨서 말이야.”

“아....”


그제서야 이반은 베르체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새벽, 그녀를 배웅하겠다던 약속.

스칼렛의 돌발행동으로 지킬 수 없었던 약속.


“미, 미안하다.”

“됐어. 그런 건 이제 상관 없어. 무사했으면 된 거야.”


베르체가 중얼거리며 이반을 꽉 끌어안았다.

어깨에 머리를 파묻고, 작게 중얼거렸다.


“하루라도 더 늦었으면, 용서하지 않았을 거야. 무슨 짓을 해서든 찾아서 배때기에 도끼를 박아 넣었을 걸.”


살벌한 말.

이반은 그 말에서 공포가 아닌 따스함을 느꼈다.

터질 듯이 두근거리던 가슴이 점점 진정되어간다.

그는 가늘게 떨리는 베르체의 어깨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정말 미안하다. 잘못했어.”

“알면서 왜 그랬어?”


베르체가 힘껏 이반의 옆구리를 찌른다.

쿨럭!

이반이 허리를 숙이며 각혈하자, 그녀가 안절부절하며 그를 부축했다.


“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하루 만에 애가 만신창이가 됐어?”

“씁... 하루?”


이반이 이질감이 느껴지는 단어를 캐치하고 되물었다.

베르체가 무슨 문제 있냐는 듯 대답했다.


“그래 하루. 어제 새벽부터 없어져놓고,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나타나셨으니 하루지.”


말을 하다 보니, 화가 솟구쳐 끝에 가서는 지극히 차가운 목소리였다.

지하 유적부터, 콘체스트 마을 주변을 샅샅이 뒤진 그였다.

마을 사람들 역시 밤잠 이루지 못하고 이반을 수색했다.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아, 교단에 연락을 취하려던 그녀였다.

그런데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듯, 근처의 들판에서 발견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베르체가 이반에게 무어라 쏘아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이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 그가 아리와 보낸 시간은 한달 남짓이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와보니 흐른 시간은 단 하루.

꿈이었나, 싶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구멍이 송송 뚫린 바위악어 코트가 아닌, 말끔한 검은색 코트가 보인다.

그 위에는 희미한 술식이 새겨져 있었다.


“진짜 큰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네. 물어도 대답 안 해줄 거지?”


장난스런 물음에 이반은 침묵으로 답했다.

베르체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말없이 떠나면 싫어?”


밝은 목소리.

그러나 그와 대조되는 불안한 듯 떨리는 눈동자.

이반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미안하지만 장담할 순 없겠다.”

“뭐? 이 자식이...!”


베르체가 얼굴을 붉히며 이반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컥, 하며 이반이 피를 토해내자, 베르체가 안절부절하며 그를 부축했다.


“미, 미안. 환자인걸 자꾸 까먹네.”


멋쩍게 웃는 베르체의 미소를 바라보며, 이반은 그녀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덕분에, 이반은 바닥에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었다.


“아무튼, 정말 다행이야. 죽지 않은 걸 보면, 여신께서 돌봐 주셨나봐.”


베르체는 천천히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남은 손으로 여신의 징표를 매만지며, 기도라도 드리듯,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 아래로 떨어지는 눈물을, 이반은 톡톡히 보았다.


“그래. 그럴 거다.”


하늘은 여전히 검다.

달은 흐릿했고, 밤바람은 서늘했다.

그러나 이반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언제나처럼, 가슴에 덜렁거리는 여신의 표식을 움켜쥐었다.

당연하게 목소리는 없었으나, 이반은 그저 속으로 되뇌었다.


‘잃지 않을 겁니다. 부디 지켜 봐주시길.’


여신이시여.

그대가 나를 돌보지 않더라도, 나는 그대의 신실한 종일지니.

모두가 원하는 일상을.

모두가 바라는 미래를.

부디 한줄기 빛으로 밝혀주시옵소서.

어리석은 종은, 부디 그것 하나만을 바라옵나이다.

이반은 어둡고, 차가운 가슴 위에 한 자루의 검을 꽂았다.

신앙심이라는, 믿음의 검이었다.


*


“그래. 찾았다고?”

“예. 하루만에 돌아온 것을 보니, 잠시 바람이라도 쐬고 오셨나 봅니다.”

“다행이군. 애꿎게 돈만 쓸 뻔 했어.”


디미트리 백작이 와인을 머금었다.

콘체스트 마을에서 급파된 소식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반 헤테르의 실종.

이단심문관 베르체가 극히 다급하게 그를 찾고 있다고 했다.

아이작은 눈을 부릅뜨며 사람을 풀었고, 디미트리 백작 역시 뒷골목의 정보단체에게 큰돈을 주고서라도 수소문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바로 그 다음날, 이반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나저나 이단심문관이 그를 신경 쓸 정도일 줄이야.’


프레이 교단의 이단심문관의 위상은 드높다.

왕실의 귀족들도 이단심문관과 엮이길 꺼려할 정도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들에게 이단으로 낙인 찍힌다면, 성왕국을 뜨는 것이 편안할 것이리라.

헌데 이단심문관이 이반의 실종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건 단순히 개인의 입장이 아닌, 교단의 입장이라 보아야 할 것이리라.


“황자와의 연줄도 놀랄 노자인데, 교단까지? 참 탐스러운 녀석이야.”

“누가 말입니까?”

“됐네. 신경 쓸 거 없어.”


디미트리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포크를 들었다.

큼지막한 스테이크를 푹 찔렀다.

넘치는 육즙을 바라보며, 입을 쩍 벌리던 그때였다.


“백작 각하! 손님이 오셨습니다!”


수하의 외침에 백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어, 목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황자전하신가?”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식사 중이라 전해!”


디미트리 백작이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선 다시금 포크를 들어올렸다.

갈색 소스가 먹음직스럽게 떨어진다.

그가 다시금 입을 벌리려던 그때.”


“마담이라 전하면 아실 것이라 하십니다만....”


우뚝.

디미트리 백작의 손이 멈췄다.

그는 고민하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한숨과 함께 스테이크를 내려놓았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하게.”

“예.”


집사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식사가 치워지고, 향긋한 차가 자리했다.

그리고 이윽고 매혹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백작 나으리.”

“별 말씀을.”


한 손으로 가슴께를 가린 채 고개를 숙이는 여성.

풍만한 육체와 야릇하게 솟구치는 붉은 입술.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취는 아찔했다.

마담 리리스는 그런 여성이었다.


“집사. 나가있게.”

“....”

“집사?”

“헛! 예. 알겠습니다.”


멍하니 리리스를 바라보던 집사가 정신을 차렸다.

꾸뻑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떠났다.

단 둘이 남자, 리리스가 꺄르륵 웃으며 말했다.


“어머나. 둘이서 무슨 일을 하시려고 이러십니까? 소녀 두근거립니다.”

“허. 소녀?”


디미트리 백작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뒷골목의 마담 리리스.

그는 그녀를 잘 알았다.

수많은 창녀들의 어머니이자, 그 넓은 치마폭으로 뒷골목을 좌지우지하는 여인.

소문으론 왕실의 1왕자, 지크프리트까지 그녀의 치마폭 아래에 있다는 소리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디미트리 백작이 홀로 뒷골목을 전전할 때부터 들어온 여인이었다.


“40줄 먹고 소녀라니. 하늘이 웃겠군.”

“...오호호. 농담도 심하시와요.”


순간 리리스의 붉은 입술이 초승달을 그렸다.

끈적거리는 혀가 야릇하게 입술을 핥는다.

새하얀 치아가 살풋, 새빨간 입술을 짓씹는다.

그러나 디미트리 백작은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차를 머금고서, 차분하게 물었다.


“그래. 마담. 내겐 무슨 볼일인가?”

“일이 있어야만 사내를 만나나이까? 보고 싶고, 만지고 싶으면 대담을 요청하기도 하는 거지요.”


리리스는 지지 않겠다는 듯 몸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하얀 어깨와 가느다란 쇄골이 뇌쇄적이다.

그 아래로 내려가면 풍만한 가슴이 뭉치며, 깊은 골을 드러낸다.

야릇한 향취를 맘껏 풍기며, 리리스가 붉은 눈망울을 빛냈다.


“백작 각하. 소녀의 마음을 모르겠사와요?”


촉촉한 눈빛.

유혹하듯, 애처롭게 떨리는 어깨.

금방이라도 남성의 애간장을 녹일 듯한 모습.

수많은 사내가 그녀의 유혹에 넘어갔다.

왕실의 왕자든, 늙은 귀족이든 다르지 않았다.

리리스는 이 돼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마담.”


리리스는 그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지극히 차갑고, 딱딱한 표정.

색욕 따윈 일절 보이지 않는, 냉정한 얼굴.

깊은 살 속에 파묻힌 두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난 나를 잘 아네. 뒤룩뒤룩 살이 쪘고, 냄새는 지독하지.”

“오호호. 그걸 좋아하는 여성도....”

“개소리 말게.”


디미트리 백작은 억지로 미소 짓는 리리스의 말을 끊었다.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나에게 추파를 던지는 여성은 두 부류지.”

“나와 파트너가 되어 사업을 부흥시키려는 야심가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날 이용해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개새끼이거나.”


디미트리 백작이 리리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분한 듯, 입술을 짓씹는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내가 보기에, 마담은 적어도 사업가는 아닌 것 같단 말이야.”


리리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 채, 지그시 디미트리 백작을 노려볼 따름이었다.

디미트리 백작은 그 눈빛을 빙긋 웃으며 받아내었다.


“난 개새끼완 대화하지 않네. 무슨 말인지 알았나?”


그저 차분한 음색.

그 안에 실린 날카로운 칼날에 리리스의 이마에 혈관이 움푹 솟았다.

그녀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마지막까지 미소를 유지했다.


“오호호. 오늘 약속이 있다는 걸 깜빡 했군요. 소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말은 알아들어서 다행이군.”


뒷통수를 찌르듯 들려오는 작은 중얼거림.

리리스는 디미트리 상단의 집무실의 문을 닫으며 손아귀를 꽉 움켜쥐었다.

파스스.

문손잡이가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이 돼지새끼가...!’


리리스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녀의 붉은 눈망울 속에서 보랏빛 불꽃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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