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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SF

RALL
작품등록일 :
2013.02.24 12:10
최근연재일 :
2016.07.2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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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1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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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1.


“미래가 결정지어져 있다고요? 전 믿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이도록 거대한 알력이 작용하고 있다면, 차라리 믿겠습니다.”

붉은 머리카락과 황금빛 사자의 눈동자를 지닌 소녀는 강직한 목소리로 반론을 제시했다. “흥미롭군요. 그럼 학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교수가 되묻자, 그녀는 유쾌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저는 ‘우주의 의지’ 정도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제로의 공식이죠. 제로라는 결과만 본다면 그건 정해진 미래겠지만, 거기에 도달하기 까지 엄청난 수의 공식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미래를 보고 결정지어져 있다고 단정하는 건 우주라는 학생이 종이가 모자라 바닥이고 벽에 한도 없이 풀어놓은 수학 공식의 일부를 본 정도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현재도 계속 풀어나가고 있을 그 문제풀이를요.”

“그럼 제로는 무엇입니까? 어떤 공식이던 제로가 되는 순간 정해진 미래이지 않습니까?”

“존재가 소멸함이 응당 정해진 미래라면 그는 고려함직 하겠습니다.”

당시 교수는 소녀의 당돌한 말을 웃어넘기며, 꼭 우주 속에서 그 공식을 발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소녀는 훗날 군인으로 우주 함선 승무원이 되었다. 유난히 난 인물이 적은 시기에 우수한 재능과 지휘 실력으로 정점에 섰다.


토너 은하 <시타델 대전>. 시타델 행성계에서 벌어진 은하 해적 스칼렛 핌퍼넬과의 최종 전면전은 무명 풋내기 함장에 불과했던 로델을 단숨에 영웅으로 만든 전투였다.


스칼렛 핌퍼넬은 오래전부터 태양계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시도로, 우주 세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설친 해적이었다. 성단끼리의 소통이 가능해지자 전 은하로 활동 범위를 펼치기 시작해 더 문제가 되었다. 쌍벽을 이루던 레드 헤드단이 증발된 후 우주의 최대 골칫거리로 남게 되어 은하의 사람들과 연맹을 괴롭혔다.

더 두고 볼 수 없게 된 연맹은 칼 K. 로링턴 소장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대응하였으며, 그런 연맹을 조롱하듯 스칼렛 핌퍼넬은 연막작전을 펼쳤다. 거짓 정보책을 심고 개인 상단을 협박하여 위장시킨 후 대규모 함대로 착각하게끔 만들어 태양계로 진격시켰다. 실제 전투선은 모두 경계가 느슨해진 연맹 스테이션으로 보낸 것이다. 대부분이 거짓 정보에 속아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력을 파견했다.

“함장님께서는 출격하지 않습니까?”

당시 로델을 보좌하던 늙은 부함장은 모두가 공을 쌓기 위해 출전하는 상황에서 연맹에 남은 로델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3개월 전, 승무원에서 처음 함장으로 배속 받게 된 로델은 부함장이 보기에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승무원들 개개인에게 관심이 깊은 평범한 군인이었다. 가족 같은 분위기를 중요시 했고, 업무나 지시능력도 나쁘지 않아 좋은 함장으로 남을 수 있는 사람이라 파악했다. 진격해 오는 스칼렛 핌퍼넬과의 전투에서 공을 쌓는다면 충분히 노고를 인정받아 승격할 수 있을 텐데도. 승무원들이 아무리 부추겨도 함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자네는 모든 일에 위험요소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생각하지 않나?”

“물론 그렇습니다만, 스칼렛 핌퍼넬의 모든 병력이라 해도 좋을 대규모 함대가 토너로 향하고 있는데 무엇을 걱정하고 계십니까?”

“내가 스칼렛 핌퍼넬의 대장이라면 지금 와서 토너 은하를 공격하는 짓은 하지 않을 걸세.”

“예?”

“아무리 워프로 성단간의 소통이 원활해 졌다지만 사람들은 그 거리를 망각하고 있다네. 한번 키를 움직이면 다시 되돌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나라면, 모든 군대의 구심점인 연맹을 노리고 올 걸세. 절대로.”

그리고 로델이 가리킨 연맹 돔 하늘 저 너머로 홍색의 함대가 몰려오고 있었다. 로델은 자신의 함선과 연맹 보호 차원으로 남은 오로지 한 개의 대대만을 이끌고 출전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원정 함대들이 돌아오는 열흘 동안 작은 함선의 기동력을 살려 게릴라전을 펼쳤다.

“상대방의 함 내로 워프를 시도할 수 있나?”

이론상으로야 가능했지만, 당시에는 실용화로 넘기기엔 위험성이 큰 시도였다. 시공워프 담당자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로델은 자진해 세기에 남을 첫 미탐색지역 단구간 워프를 시도했고, 성공했다. 스칼렛 핌퍼넬의 대장을 검으로 쓰러트리고 인질로 잡아 적의 사기를 꺾은 것이다. 상대가 되지 않는 전력 차이였음에도 적의 구심점을 획득함으로써 신경을 분산시키고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스칼렛 핌퍼넬과 상대해온 얼마간의 시간 동안, 적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준비를 철저하게 했기에 세울 수 있던 전략이었다.

밀려오는 지원 부대를 감당할 수 없었던 해적은 본거지로 후퇴했다. 로델은 열흘의 농성으로 마음을 잡은 대대의 함장들과 결탁하여 연맹의 대기 지시를 무시하고 해적의 본거지로 향했다. 토너 성단 시타델 행성계. 그 곳에서 최종 전면전이 펼쳐졌다.

“함장님! 이대로는 장갑이 버텨내지 못합니다! 후퇴해야 합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나!”

“앞으로 4분 30초면 한계입니다.”

“적 본함의 앤트로픽 필드의 내구는 얼마까지 와해되었지?”

“72.9%! 3분 12초 뒤 클리어 됩니다!”

로델이 소리쳤다.

“영광을 손에 넣을지, 터져 죽을지를 결정하는 건 1분이다. 1분을 견딜 수 없다면 지금 당장 자리에서 벗어나 신에게 빌도록. 주기도문 하나 외울 시간은 될 테니!”

함선의 피해를 감수한 오버 출력으로 함선포를 쏴 절대 무적으로 악명 높은 적 본함의 방어 필드를 부수고 파괴시켰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나?” 무사히 귀환하여 영웅으로 칭송되는 로델에게 총사령관이 물었다.

“공식을 깨는 이론은 언제고 생겨납니다. 다만 그걸 실제로 대입해 보는 도박은 다들 사양하려 들기 때문에 검증은 늘 뒷전으로 밀려나지요. 어떤 방어 결계도 100% 모든 공격을 차단시킬 수는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힘이 가해진다면 분명 뚫립니다. 그것이 공식의 답이었고 저는 대입해 답을 풀어냈을 뿐입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지 않습니까?”

비록 일부 사상자를 냈고 몇 승무원들이 과격한 전선에서 버티지 못해 은퇴하는 일도 생겼다.(늙은 부함장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마지막 순간 그는 심장에 무리가 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로델은 희생에 비해 엄청난 업적을 세웠음을 인정받아, 괴멸된 스칼렛 핌퍼넬의 이름을 따 우주의 첫 번째 홍염이라는 뜻으로 ‘퍼스트 스칼렛’이라 불리게 되었다.

“자네는 자네를 막아주고 전면적으로 따라줄 사람을 찾지 못하면 언젠가 자신이 만든 불꽃에 온 몸을 불사르고 재조차도 남지 않을 걸세.”

그 후 제독위에 오른 칼 제독은 소장으로 승급한 로델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로델이 그 물음에 어떤 답을 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다만 몇 해가 지나 연맹의 공식 행사에 참가한 로델의 옆에는 한명의 소녀가 부함장의 자격으로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소녀는 퍼스트 스칼렛, 로델 F. 쥬어의 마지막 부함장으로 기록되었다.


<오로지 사실에 의거하여 쓰여진 D. 보이어의 저서 ‘퍼스트 스칼렛’ 편에서 발췌>


* * * * *


평균 우주 은하력 3745년 5월 14일. 지구 영업 10일째.


베스타의 아버지 페리오스 무에마누는 이른 아침부터 VIP실 비품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칼 K. 로링턴 제독 일가가 베스타에 내방하여 투숙하기로 한 날이었다. 본래 그보다 아래인 S 클래스실을 마련할 계획이었으나, 기존 VIP실에 투숙하던 인사가 하루 빨리 퇴실하여 급하게 변경되었기 때문이었다. 베스타에서 NO. 3로 인정받는 그였지만, 영업에는 재주가 랄의 콧물만큼이나 없던 탓에 에일라의 배려로 평소 맡은 시스템 관리 업무와 유사한 비품 관리에 투입되었다.

“준비는 잘 돼가요?”

기존 투숙 흔적을 깨끗이 청소하고 소모된 비품을 점검하여 채워 넣은 뒤 확인 작업에 들어가던 참이었다. 에일라가 최종 점검을 위해 VIP실로 들어왔다.

“이제 마무리 단계란다. 지금도 히비스커스를 좋아하실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장식과 비품 무늬가 전부 히비스커스 꽃이네.”

커튼과 도자기, 사소한 소품이나 일회용 비품에도 주홍색의 히비스커스 꽃이 그려져 있었다.

“칼 제독의 부인께서 좋아하시는 꽃이라고 들은 적이 있지.”

“제독과 아는 사이였어?”

“지구군 복무 중에 인연이 있었지. 정확히는 그 아들인 케프카와 동문이어서 겸사겸사 알게 된 사이였단다.”

싱긋 웃으며 말하는 페리오스의 말에 가시가 돋쳤다. 에일라는 동문이었어도 친구는 아니었음을 짐작했다.

“그나저나 느닷없는 투숙이라 비품이 부족해 아주 죽는 줄 알았다. 새벽부터 거래처에 재고 확보를 해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어.”

“미안해, 아빠. 그래도 제독이나 되니까 이러지. 급수 딸리면 사정 볼 것 없이 S 클래스로 보냈을 거야. 거기다 아드님의 함장 진출 축하라고 하니까 보이는 대로 최고의 대우는 해 줘야 베스타나 함장님 명성에 누가 없지 않겠어?”

페리오스가 미안한 표정을 짓는 딸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생각하기 힘든 과중한 업무를 해내는 아이였다.

“신경 쓰지 마라. 베스타의 직원이라면 못할 일도 해야하지 않느냐.”

“그렇다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곤 안하니까 걱정 마세요.”

“언젠간 하라고 시킬까 두렵기도 한데.”

“못 믿으시네?”

흘겨보는 에일라의 시선을 소리 내 웃으면서 받았다. 삐삣. 기세 좋게 에일라의 인컴이 울렸다. 로링턴 제독 일가가 막 베스타에 승선했다는 연락이었다.

“도착하셨습니까? 네. 지금 가겠습니다.”

“오셨느냐?”

“응. 아빠도 가자. 아는 사이니 인사는 해야지.”

“그래야겠구나. 나도 오랜만에 뵙겠군. 전역할 때도 따로 연락을 드리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인사를 드려야지.”

VIP실에서 나와 VIP 전용 출입구로 향했다. 그리스 신전 양식을 따 일반 출입구보다 배는 고급스럽고 세련된 인테리어의 로비였다. 유명 조각가의 항아리를 든 큐피트 상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로비 구역 테두리를 돌며 조경에 빛을 더했다. 내부의 크리스털 문을 열고 들어온 세 가족은 로비에서부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서 오십시오, 제독. 베스타 일동은 로링턴 일가를 환영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베스타입니다. 친절히 모시겠습니다.”

기다리던 로델이 인사를 건네자 양 옆에서 선별된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회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사람 좋은 인상의 칼 K. 로링턴 제독이 크게 웃으며 로델에게 악수를 청했다.

“허허, 이거 생각보다 훨씬 멋있군.”

“과찬이십니다.”

“내 자네가 잘 할 것이라 믿었네만, 생각 이상으로 아주 잘 하고 있어 기쁘네.”

“그 때 제독의 아낌없는 지지가 없었더라면 많이 어려웠을 겁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부디 우리 베스타에서 편안한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칼 제독이 뒤에서 두 사람을 앞으로 내세웠다. 한명은 인자한 미소를 띈 릴케아스인 여성이었고 표정을 조금 구긴 키 큰 청년은 릴케아스의 피가 절반 섞였으며, 칼 제독과 외견이 매우 흡사해 아들임을 짐작케 했다.

“이쪽이 내 부인 율리안나, 그리고 이 녀석이 이번에 오르페우스의 함장이 된 내 아들 케프카일세.”

“아드님께서 아주 빼 닮으셨군요. 젊었을 적 제독을 보는 것 같습니다. 로델 F. 쥬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부인. 잘 부탁하네, 대령.”

“퍼스트 스칼렛을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남편과 케프카가 함장님의 이야기를 많이 해서 남처럼 여겨지지 않네요.”

“케프카 A. 로링턴입니다.”

사근사근 웃으며 대해주는 율리안나와 달리 케프카는 딱딱하게 소개만 하고 건성으로 악수했다. 로델은 직원들을 시켜 로링턴 일가가 가지고 온 짐을 가져가도록 지시하고 칼 제독과 사담을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기려 했다. 케프카도 동석시키려 하였지만, 피곤하다는 이유로 거절한 터라 에일라와 페리오스에게 모자를 방으로 안내하라 명했다. 그 때야 뒤편에서 대기하던 페리오스의 존재를 눈치 챈 칼 제독이 반색하며 다가왔다.

“아니, 자네 페리오스 아닌가! 허허, 이거 퍼스트 스칼렛은 여러모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독님. 제대 이후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이사람. 자네 같은 사람이 홀연히 제대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섭섭했는지 아는가.”

“급하게 결정한 사항이라 미처 말씀드리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어쨌든 반갑군. 지내는 동안 술이나 한 번 같이 함세.”

로델과 칼 제독이 떠나자 로비에는 한 쌍의 모자와 한 쌍의 부녀가 남았다. 에일라가 간략하게 소개를 했다.

“부함장 에일라 뭬휘유라고 합니다. 지내시는 동안 불편한 사항이나 요청사항은 모두 제게 말씀해주시면 최선을 다해 수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에일라가 앞장서 걸었다. 율리안나와 에일라가 곧 베스타의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에는 감흥을 느끼지 못한 케프카가 발걸음을 조금 늦춰 뒤따라오던 페리오스와 속도를 맞추었다.

“소령, 군에서 나가더니 기껏 이런 곳이군? 군에 있었으면 없는 능력이나마 발휘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소.”

경멸과 조소가 어울린 말이었다. 페리오스는 짐짓 모른 척 정중하게 답했다.

“지금은 대령입니다. 그리고 케프카 소령 역시 변한 게 없으시군요. 아, 지금은 대령이셨지요. 언제나 시야를 넓게 가지라고 말씀 드렸건만, 여전히 가까운 곳만 보시고 멀리 보려 하지 않으십니다. 안타깝군요.”

“군에서 나간 민간인이 무슨 대령이오! 대령이 아무나 받는 계급인 줄 아시오?”

“공이 있으니 계급이 존재하고, 우주군은 전역해도 계급은 유지됩니다만. 베이른 소장 아래로 가셨었다더니, 그 분의 엘리트주의에 철저히 교육당하셨나 보군요. 부친과는 다른 길로 걷기로 하셨습니까?”

“뚫린 입이라고 잘도-”

케프카가 분노를 터트리려 할 때 율리안나의 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케프카. 그만해라. 네가 함장으로 임명된 기념으로 왔는데, 얼굴 붉혀서 좋은 일이 없지 않겠니?”

주변을 보지 못하고 언쟁했음을 깨닫고 페리오스도 한 걸음 물러서 사과했다. 에일라가 눈치로 자리를 벗어나라고 지시했다.

“죄송합니다. 먼저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베스타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케프카는 입을 앙다물고 VIP실에 안내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일라가 두 사람에게 센서 키를 장착하고 시설 사용 방법까지 모두 안내한 후 밖으로 나왔다. 생각보다 페리오스와 케프카의 골이 깊어 보였다. 마침 안내 받아오던 칼 제독에게도 센서 키를 장착시켰다. 칼 제독이 걱정을 담아 물었다.

“페리오스 대령과 아들이 싸우진 않았나?”

“송구스럽습니다만, 약간의 언쟁이 있었습니다.”

“이해하게나. 본래 동문으로 친했다던데, 크게 한 번 다툰 뒤로 내내 저 상태야.”

“저희가 사과드려야 할 일이지요. 모처럼 축하를 위해 내방하셨는데, 저렇게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야.”

“그래서 말인데, 억지로 끌고 왔더니 아무래도 더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 어떻게 좀 부탁하네.”

에일라는 쓴 웃음을 감추고 최선을 다하겠노라 답했다. 제독이 방으로 들어가자 참았던 한숨을 터트렸다. 윗사람들이 말하는 ‘어떻게 좀 해주게’ 만큼이나 사람을 괴롭히는 말이 없음을 새삼스레 체념했다.


페리오스는 흡연구역 외창을 열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에일라가 옆에 서서 페리오스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은 페리오스가 붙여주었다. 이른 아침 시간부터 말없이 담배를 태우는 함선 No. 2와 No. 3의 뒷모습에서 묘한 긴장감을 느낀 흡연자 승무원들은 슬슬 자리를 옮겼다. 범접할 수 없는 우울한 오오라가 감돌았기 때문이었다.

“이 불량 부녀가 가지가지 하는군.”

그러나 오오라에 아랑곳 하지 않는 이가 양 손으로 두 상관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꽤나 강한 충격에 에일라와 페리오스는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아 닥터 좀……”

“살살 좀 치게, 혹 나겠어.”

“아침 일찍부터 맞담배질이나 하면서 음울한 분위기를 풍겨댑니까? 승무원들 정신건강에 안 좋습니다. 이 일 중독자 부함장아, 여기서 떨어트리기 전에 당장 담배 끄고 식당으로 달려가 아침식사부터 하시지요?”

평소보다 배는 더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알페르드가 존댓말과 반말이 기묘하게 섞인 협박을 날렸다.

“아직도 로젠마리 부인 전속 때문에 삐져 있어요? 어제 밤에 돌아가셨잖아요. 이제 화 좀 풀어요. 백 살은 더 연장자면서 째째하게.”

“내목소리를고출력앰프서라운드채널로24시간내도록듣고싶지않으면닥치고가서아침먹어.”

“네.”

에일라가 냉큼 줄행랑쳤다. 쯧쯧. 페리오스가 고개를 저으며 미간을 잔뜩 찌푸린 알페르드에게도 담배를 권했다. 한순간 마음이 동해 눈빛이 흔들렸지만 곧 사양했다. 알페르드는 아무리 스트레스가 쌓여도 약물이나 기호품에 의지하는 것만큼은 의사의 명예를 걸고 한사코 거부했다. 대단한 인내심이라고, 페리오스가 속으로 웃었다.

“됐습니다. 케프카 대령이 왔다고요?”

“그렇게 됐네.”

“베이른 소장이 이번 일을 무척 자랑스러워하겠군요.”

“그 작자야 관료주의의 전형적인 인물이니까. 자신이 키운 이가 신 함선의 함장으로 발탁됐다니 오죽 좋아하겠는가.”

“문제는 우주군 윗물 자체가 관료주의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르페우스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알페르드가 말을 아끼며 물어왔다. 페리오스 또한 생각을 정리해 말을 고르고 조용한 목소리로 의견을 말했다.

“베이른 소장의 입김도 작용하지 않았겠나. 칼 제독 독단만으로는 불가능하겠지. 베이른은 함장에게 오르페우스가 간다는 사실을 가장 반발하고 나설 인물이었을 걸세.”

“함장은 연맹으로 돌아가 지휘하는 일을 ‘독이 든 성배’라고 했지요.”

“생각보다 이번 레드 헤드단의 일은 연맹의 이해관계가 너무 많이 연결된 듯 보이네.”

연맹이 공론화를 꺼리고, 은밀하게 로델을 영입하려 하고, 오르페우스의 발주와 느닷없이 발탁된 젊은 함장도, 윤곽을 드러내지 않는 레드 헤드단의 움직임도.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만 중요한 연결고리가 끊긴 느낌이었다. 알페르드는 인상을 찡그린 채로 생각을 잠시 접었다.

“그럼 말썽쟁이 부함장이 식사 잘 하는지 감시하러 가겠습니다.”

“수고하게. 아비 된 자가 해야 할 일을 맡기는구먼.”

“당신에게 맡기느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지요. 함장과 부함장이 붙어먹어도 괴롭지만, 당신과 부함장이 붙어먹어도 괴롭습니다. 셋이 모이면 접시가 아니라 행성 하나가 깨질 겁니다.”

페리오스가 어처구니없어 허허, 하고 웃었지만 반론은 하지 못했다. 담배꽁초를 착실히 버리고 알페르드를 따라갔다.

“왜 따라오십니까.”

알페르드가 묻자 페리오스는 두 손을 들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별로 신경써주길 바라는 건 아니네만, 나도 아침밥은 안 먹었네.”

알페르드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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