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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SF

RALL
작품등록일 :
2013.02.24 12:10
최근연재일 :
2016.07.24 12:00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6,409
추천수 :
87
글자수 :
271,722

작성
15.11.0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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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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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22쪽

<4> 찾으시는 온천이 있습니까? - 1

DUMMY

1.


평균 우주 은하력 3745년 5월 4일. 토너 은하 태양계, 지구 영업 1일째.


에일라는 평소 영업의 두 배에 달하는 인컴 연락과 상황 지시 보고에 시달렸다. 링 함대를 발족시킨 지구인만큼 링 함대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손님들로 인해 영업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객실의 90%가 차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승무원 전체를 쉬는 인력 없이 배치하고 혹시나 있을 문제 상황에 대비하도록 지시했다.

“기술부, C-54구역의 자판기, F-03구역의 비품 발매기 점검 들어가세요. 시설물품관리부, 객실 3305, 1705, 1007, 4713, A-12 테라피실에 비품 요청 있습니다. 로그 확인해서 지급하십시오. 온천관리부, 7FA의 히노끼탕과 10CE의 자수정탕, 2PW의 화산암탕의 오염도가 기준치를 상회합니다. 당장 체크하고 정화해주세요. 현재 안내원이 부족합니다. 견습생도 일곱 명을 프론트로 배치바랍니다. 객실관리원 담당, 불편신고 접수되어 있습니다. 606호에서 1505호로 이동바랍니다. 의료부, 호흡곤란 호소 환자의 우선 진료 부탁드립니다. 위치는 9번 휴게실입니다. 5번 휴게실에서 미성년자 음주 보고 있습니다. 잡아서 보호자 연락 바랍니다. 레크리에이션부, 이벤트 계획표가 아직 안 올라왔어요. 10분 안에 계획안 확인해서 영업부로 넘기십시오. 앞으로 14분 뒤 2교대로 로테이션 들어갑니다. 교대자들은 5분 전까지 각자의 위치에서 인수인계 바랍니다.”

제 1 메인 브릿지의 함장석에 앉아 에일라는 이른 새벽부터 점심시간에 이른 지금까지 쉴 새 없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녀를 돕는 메인 오퍼레이터들은 이미 진이 빠질 대로 빠져 교대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보통 8시간씩 3교대가 일반적이었지만, 인원수가 적거나 활동량이 적은 부서는 2교대의 격무를 치르기도 했다.

--- 부함장, 휴식 시간이다.

알페르드의 연락을 받고서야 휴식 시간을 자각했다. 아직 처리 못한 일이 잔뜩 있었지만, 그 사이 교대된 쌩쌩한 오퍼레이터들이 빠르게 처리 중이었으므로 한 숨 돌리기로 했다. 에일라는 네 시간의 수면시간, 도합 두 시간의 휴식시간을 합친 여섯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모두 업무에 쏟아 부었다.

이도 의료부의 힘으로(정확히는 알페르드의 힘으로) 간신이 조율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장에 쓰러질만한 과로를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아 반 협박으로 수면 시간과 휴식 시간을 처방 내렸다. 그래서 베스타에서는 에일라가 수면을 취하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 동안은 절대로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생겼다.

그 불문율이 오랜만에 깨졌다. 알페르드의 비난을 감내하고 전달할 정도면 오죽 급한 안건일 것이었다.

“부함장님, 휴식 시간 중에 죄송합니다만 급한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급한 연락? 어디서죠?”

“칼 K. 로링턴 제독이십니다.”

에일라가 자리를 뜨려다 다시 앉았다.

칼 K. 로링턴. 은하 연맹 제독 중 한사람으로 지구인이었다. 인자하고 자상한 성격으로 군 내나 연맹 내에서 인망이 높으며, 군을 은퇴하고 링 함선을 운영하게 된 로델과 에일라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은 인물이기도 했다. 통신을 연결하자 화상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이고 콧수염을 기른 신사였다. 에일라가 약식으로 경례했다.

--- 오랜만일세, 에일라 중령.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 바쁜데 연락해서 미안하네. 자네에게 부탁을 좀 하고 싶어서 말이야.

“제독님의 부탁이라니, 드문 일이군요. 응당 수렴하지요. 무엇입니까?”

--- 실은 이번에 내 아들이 서클릿 함선의 함장으로 처음 부임하게 되었다네. 그 축하를 겸 해서 우리 가족 세 명이 투숙하고 싶어. 참 면구하네만, 어떻게 안 되겠나?

“제독님의 아드님이시라면 케프카 대령님 말씀이시군요? 함장직이라니, 축하드립니다. 그런 일이라면 기꺼이 해 드려야죠.”

연신 미안한 표정이던 칼 제독이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옆 집 아저씨 마냥 친근한 모양새였다. 에일라가 예약 일정표를 확인했다. 이런 상황이 영업 중에 꼭 한번은 있기 때문에 일부러 다수의 객실에 여력을 두었다. 개중 가장 좋은 객실을 골랐다.

“언제부터 투숙하시겠습니까?”

--- 13일부터 사흘간이네. 오전 중에 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변동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 고맙네. 중장은 잘 있는가?

“잘 지내고 계십니다. 어쩐지 연맹 스테이션에서 뵐 수 없더라니, 지구에 계셨군요.”

--- 케프카의 첫 출항이 지구라서 미리 와 있었지. 들어보았는가? 오르페우스 호라고 이번에 새로 건조된 최신식 함선이야.

오르페우스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듣기로 은하 연맹이 상당한 자금을 투자했다는 최신식 서클릿 함선이었다. 성능으로 말하자면 향후 몇 년 동안 상회할 스펙이 나올 수 없다는 전망까지 있었다. 순식간에 몇 가지 의문이 들었으나, 에일라는 밝게 웃으며 응대했다.

“대단하군요.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 무척 자랑스럽지. 하하, 그럼 잘 부탁하네.

“당일 뵙겠습니다.”

통신이 끊기고 칼 제독의 화상도 사라졌다. 로델에게 보고를 하려 했지만 알페르드의 통신이 뒤이어 울렸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식사를 하러 제 10 브릿지로 향했다. 어쩐지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다.

“5분 지각이다.”

제 10 브릿지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알페르드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노려보았다. 에일라가 깊게 한숨 쉬었다.

“좀 봐줘요. 칼 제독으로부터 연락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칼 제독? 칼 K. 로링턴 제독 말인가?”

“네. 아드님이신 케프카 대령이 이번에 첫 서클릿 함선의 함장으로 부임한다기에 축하 겸 투숙 예약을 부탁하더군요.”

알페르드가 잡아놓은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에일라 전용 건강식이 잔뜩 준비되어 있었다. 보통 성인 남자의 두 배는 됨직한 양이었다. 에일라는 근처의 음식부터 하나씩 집어 먹기 시작했다. 알페르드도 식사를 가져와 건너편에 앉았다.

“오르페우스 호라고 하더군요.”

“첫 부임 치고는 대단한 호사로군. 근간에 나온 함선 중에는 최고 스펙 아닌가?”

“그렇죠? 아무리 제독의 아들이고 엘리트라곤 해도 첫 부임 함선에 냅다 오르페우스를 발탁했다는 건…… 칼 제독이 공작을 펼쳤다고 해도 쉽게 성사될 문제가 아닐 텐데.”

새로 건조된 함선은 연륜 있는 함장들이 지휘해 충분히 길을 들이는 것이 관례였다. 위신 문제도 있을뿐더러, 함선의 운용에 대해 잘 모르는 풋내기가 서투르게 함선을 운용하다 부숴먹기라도 한다면 보통 손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최근 일련의 일들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알페르드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레드 헤드에 대해 말하는 것임을 알고 에일라도 고개만 끄덕여 수긍했다. 아직 레드 헤드에 관한 이야기는 로델과 에일라, 알페르드, 페리오스를 비롯해 당시 레드 캡스를 검거했던 몇 승무원들 외에는 불문에 부쳐진 상태였다. 아직 소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는 판단 하에서였다.

“시기가 너무 잘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정도 규모의 해적을 소탕하려면 연맹 측에서도 총력을 다 해야 할 테니까.”

“함장이 이번 일을 수락하며 베스타를 버릴 생각이었다면, 아마도 오르페우스는 함장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렇다면 케프카 대령의 부임은 오히려 반대의 상황이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칼 제독이나 대령이 원했다기보다, 오히려 원하지 않은 상황일지도 모르는.”

“희생양이겠군.”

이미 연맹이 파견한 군대를 잡아먹은 전적이 있는 레드 헤드단이다. 오르페우스 호가 대 레드 헤드를 목적으로 건조되었다면, 그 만큼의 역량이 있는 이를 함장으로 임명해야 앞뒤가 맞았다. 연맹은 그 역할을 로델이 해 주길 원하고 있었을 터.

“함장님은 총사령관위를 거절했죠. 전면전에서 연맹의 함선에 부임하기를 거절했기에 연맹 측에서는 진퇴양난의 상황인 셈이고, 아무도 총사령관의 짐을 스스로 업으려 하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연맹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적당한 이를 함장으로 끌어올려 영웅을 만든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시나리오에 거북한 기분이 들었다. 따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순간 눈앞에서 별이 튀었다.

“아얏!”

“손이 놀고 있다. 얼른 먹기나 해.”

“아휴, 그렇다고 이마를 때려요? 혹 나면 책임 질 거예요?”

“그 정도는 얼마든 책임져 주지.”

알페르드의 느닷없는 기습공격이었다. 욱신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중단된 식사에 열중했다. 이미 식사를 마친 알페르드는 턱을 괴고 식사하는 에일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업계가 아무리 능력 중심이라지만, 스물 셋 밖에 되지 않은 한참이나 애송이가 너무 많은걸 신경 쓰고 있었다. 말린다고 들을 인물도 아니기에 적당히 환기시켜 주기로 했다.

“지나치게 앞서 생각하지 마. 아직 케프카 대령이 오르페우스 호의 함장이 되었다는 사실밖에 모르잖아. 그저 타이밍이 잘 맞았을 수도 있어.”

“네. 너무 멀리 생각했네요.”

에일라는 한숨을 쉬며 잡념을 떨치려 애썼다. 다른 생각이 개입할 여지도 아까운 영업일이었다. 에일라는 기어이 모든 음식을 위장 속으로 집어넣고 수면실을 찾았다. 여전히 수면에 투자하는 시간은 아까웠지만,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기에 잠이 아주 효율적이란 사실을 깨달은 이후론 그 필요성을 조금씩 인정했다. 지금 같은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짧은 단잠이었다.


* * * * *


5월 9일.


한 쌍의 신혼부부는 감격에 찬 모습으로 거대한 붉은 물고기 앞에 다다랐다. 보다 아름다운 경관을 위해 외부 우주 스테이션에 정박한 베스타는 그들 같은 일반 서민에겐 꿈과 진배없었다. 특히나 지구는 링 함선 이용률이 높기 때문에, 그 중에서도 유난히 인기가 높은 베스타의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몇 달 전부터 높은 경쟁률을 뚫고 예약해야만 했다.

“에밀리, 저게 베스타에요. 너무 멋지지 않아요?”

“멋지다기 보단 귀엽네요. 꼭 금붕어 같아. 고마워요 로디. 내 부탁 들어줘서.”

“뭘요. 당신의 부탁이라면 베스타 전체를 전세 낼 각오로 들어줄게요.”

“하여간 허풍은.”

달콤한 말을 나누며 차례가 되어 안내 받기를 기다렸다. 신혼 여행지를 고르다 에밀리의 ‘베스타에 한번 꼭 가보고 싶다’는 말을 듣고 이틀 밤을 새며 예약 전쟁에 뛰어든 로디였다. 간신히 예약을 완료하고 티켓을 거머쥔 두 사람은 아예 결혼식도 베스타에 승선하기 전 날로 잡아버렸다. 신혼여행이라 무리한 나머지 베스타에 투숙하는 사흘에 투자한 돈만 그들 두 사람의 세 달치 봉급에 달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로디 그린힐 님과 에밀리 킴 님 계십니까?”

“예! 예! 여기 있습니다.”

곧 호명하는 소리에 얼른 답하며 일어섰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다른 대기 손님들의 눈치를 한 몸에 받았지만 기쁨에 곤죽이 된 신혼부부는 거칠 것이 없었다. 두 사람에게 다가온 이는 꾸밈없는 미소가 잘 어울리는 예쁘장한 소년과 상당히 큰 키에 무표정한 표정의 훤칠한 미남이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두 분을 안내해 드릴 베스타 직원 허밀 리타스, 이쪽은 도우미인 테오라고 합니다.”

“잘 부탁해요, 리타스 씨, 테오 씨.”

자기소개와 인사를 나누고 자동문을 넘자 넓은 로비가 펼쳐졌다. 곳곳의 기둥은 인조 수족관으로 꾸며졌고 각 벽면마다 게이트와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직원들과 뒤늦게 투숙 의뢰를 하러 온 사람들로 시장 바닥처럼 복잡했다. 사람들에게 치일 수도 있었지만 건장한 체격의 테오가 몸으로 막아 길을 만들었기에 편하게 이동했다. 에밀리가 고맙다고 인사를 해도 고개만 끄덕일 뿐 별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낯을 가리는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다.

처음으로 안내된 곳은 ‘고객관리실-21’라고 팻말이 붙은 방이었다. 사무적인 장소라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거실처럼 안락한 방이었다. 허밀은 두 사람을 쇼파에 앉히고 홀로그램 입력장치를 올려주었다.

“여기서 우선 고객 카드를 만들겠습니다. 고객님께서 베스타에 체류하시는 동안 사용하실 코드를 만들 거예요.”

“코드요?”

“베스타 내부의 모든 시설들은 발급된 코드로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객실, 온천, 식사, 헬스, 휴게실, 이벤트 홀 같은 시설들의 입장이나 자판기의 이용에도 필요하지요. 고객님들께서 굳이 현금이나 크레디트를 따로 가지고 다니시지 않아도 되도록 후불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린 모든 시스템은 투숙 비용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무료로 이용하실 수 있고요. 기념품이나 특별한 서비스를 이용하실 때만 과금 되오니 그 부분은 팸플릿을 곧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에밀리와 로디는 만족하며 간단한 신상정보와 시민 코드를 입력해 고객 카드를 작성했다. 그 후 테오가 두 사람의 검지 끝에 붉은 광원을 뿜는 펜을 가져다 댔다. 허밀이 베스타 내에서 사용되는 특별한 센서를 손끝에 각인시키는 작업이라 설명 했다.

“문을 여실 땐 열쇠가 있는 판에 손끝을 가져다 대시기만 하면 됩니다. 또 건강이 나빠지시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엔 손끝이 파랗게 변하니까, 그때는 내선으로 연락 주시거나 의료부를 찾아주시면 진단해 주실 거예요.”

“좋은 시스템이네요.”

“저희 과학 기술 연구부의 비장의 발명이죠. 그럼 두 분이 머무실 객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또 다시 그 북새통을 빠져나가는가 싶었지만 의외로 고객 관리실 내부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외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투명한 벽 너머로 보이는 우주의 모습에 신혼부부가 탄성을 터트렸다.

“우주 외부의 모습은 객실과 휴게실, 일부 온천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온천중에서는 노천탕도 운영되고 있으니, 우주를 보다 가까이 벗 삼아 온천을 즐기시려면 이용해 주세요.”

“마술 상자 같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놀랄 일뿐이네요. 그쵸, 로디?”

“그래요. 정말 잘 온 것 같아.”

행복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허밀은 으쓱해졌다. 객실에서 서비스 이용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마지막으로 안내하고 방을 나왔다. 객실 내에는 굳이 허밀이 설명하지 않아도 헤스티아 시스템이 고객들이 원하는 부분을 잘 안내해주었다. 허밀이 인컴으로 안내를 완료했음을 알리자 담당 오퍼레이터의 수고했다는 말이 돌아왔다. 오늘 허밀에게 주어진 업무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이제 끝났다……”

“수고했다.”

허밀이 기지개를 켰다. 팔과 허리에서 으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꽤 긴장하고 있던 탓이었다.

“테오도 수고 많았어요. 힘들죠?”

“신체 피로 지수에는 한참 미달이다.”

“그냥 괜찮다고 답하시면 돼요.”

“괜찮다.”

테오와의 대화도 많이 익숙해졌다. 테오는 VIP실을 나와 허밀과 같은 방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영문도 모른 채 다른 방으로 쫓겨나게 된 마이클에게만 미안할 따름이었다. 나중에 확실히 이야기 하겠다는 약속을 대가로 양해 받았다. 하지만 안드로이드는 수면이라는 개념이 없어, 허밀이 자는 동안에 테오는 내내 깨어 있었다. 처음 며칠은 신경 쓰였지만 그것도 테오의 생활이라 생각하고 존중해 주기로 했다.

“저녁 먹을 시간이다.”

“그러네요. 밥 먹어요. 오늘 정식은 닭고기 필라프에 양파 스프라던데.”

“브로콜리는 남기지 말고 먹어야 한다.”

“알고 있어요! 테오까지 잔소리야.”

투덜거리며 제 10 브릿지로 향했다. 테오도 그를 알아보는 승무원들이 늘어 인사를 주고받곤 했다. 테오가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는 이유는 그가 보통 안드로이드와 차원이 다른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밀은 안드로이드가 식사를 할 수 있다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비록 소량이었지만, 착실히 허밀과 매 끼니를 함께 했다.

그 부분에 대해 테오는 ‘인간이 섭취하는 유기물을 자가 발전 연료로 사용한다.’라고 했다. 기존의 안드로이드는 외부의 전력 공급이 필요하나, 테오는 달리 인간처럼 식사를 해서 그 성분을 연료로 만드는 기능이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어쩐지 공상과학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본인이 그렇다니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허밀에게는 사실을 검증할만한 지식이 없었을 뿐더러 함부로 누군가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허밀 왔냐? 테오 씨도 여전히 구질구질한 얼굴이구만.”

“네 발랑 까진 태도도 여전하군.”

“아아~ 저 무표정한 얼굴, 저 시크한 대사. 역시 멋져~”

마이클의 농담에도 농담으로 응수할 줄 알았다. 감정의 표현이라기엔 미묘했지만, 베스타에서 꼭 몇 년은 생활한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반응이 나왔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테오를 안드로이드라고 생각지 못하게 만들었다. 허밀도 그가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때때로 잊었다.

“너희들, 베스타 외부에 나갈 일 있을 땐 조심해라.”

식사를 가져와 앉자 애플 중사가 생도들에게 일침했다.

“무슨 일 있나요?”

“요 며칠 사이 베스타 승무원과 손님을 대상으로 난폭한 녀석들이 시비를 건다는구나. 이미 몇은 조금 다치거나 삥을 뜯기기도 했다더군.”

“정거장 치안대는 뭘 한대요?”

그런 일이 있다면 분명 치안대라 불리는 일종의 경찰들이 나서야 했다. 애플 중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녀석들이 얼마나 잽싼지 신고만 들어가면 찾기도 어렵게 흩어진다더라. 24시간 경비 체제로 만들기에는 손님들의 동요도 클 것 같고. 아마 베스타 내 전투부 인원들이 경비를 강화하는 쪽으로 명령이 하달 될 듯 해. 너희들도 혼자 다니지 말고 꼭 무리지어 다니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도록. 알겠나? 특히 꼬드김에 넘어가서 납치당하거나 하면 혼난다.”

마지막 말에 찔끔한 허밀과 마이클은 몸을 살짝 움츠렸다. 레드 캡스의 일로 허밀과 마이클은 본의 아니게 요주의 생도로 찍혀버렸다. 애플 중사가 자리를 뜨자 생도들은 저마다 난폭한 녀석들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평범한 깡패라는 평범한 발상부터 실은 함장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라는 소설 같은 상상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으나, 무엇 하나 설득력이 없었다.


허밀은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 악기를 챙겨왔다. 허밀은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 노래를 했다. 테오가 늘 요청하기도 했고 피곤에 지친 승무원들을 격려하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몇 사람에 불과했던 청취자도 제법 늘어, 요즘엔 허밀의 노래를 듣느라 일부러 제 10 브릿지를 찾거나 저녁 식사를 늦게 하는 승무원도 생겼다.

“오늘은 무슨 노래를 하지?”

“지구니까 지구 노래가 좋겠어요. 민요라도 불러볼까. 테오는 도통 신청을 안 하네요. 듣고 싶은 노래 없어요?”

테오는 악보를 고르는 허밀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짧게 말했다.

“<Fly me to the moon>.”

“에, 날 달로 데려가 줘요? 그런 노래가 있었나?”

“지구의 우주 세기 이전에 불렸던 노래다. 화성과 달의 이주가 시작되었을 땐 지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도 불렸다고 하더군.”

“그런 노래가 있었군요. 아, 찾았다. 이거구나.”

허밀이 샘플 음원을 헤스티아에 부탁해 재생시켰다. 노이즈 낀 낡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지구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노래였다.

“곡조도 쉽고 좋네요. 가사도 무척 달콤하고. 어쩐지 슬픈 기분도 들고……”

“그 노래가 듣고 싶다.”

“응, 알았어요. 좀 클래식하게 연주 해야겠네.”

무대로 올라가 오늘 연주할 곡명을 차례대로 이야기 했다. 마지막으로 테오가 선곡한 곡의 제목을 말하자 지구인 승무원 몇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목소리와 현을 가다듬고 연주를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의 전주가 흘러나올 때, 베스타 내의 셀 수 없는 다양한 소리가 일제히 침묵했다.


헤스티아의 명령이었다. 헤스티아를 통한 베스타의 스피커는 각자의 역할을 멈추고 허밀의 노래를 송신했다. 메인 브릿지에 있던 이들은 느닷없는 헤스티아의 통제 불능에 혼란스러워 했다. 고작 2~3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스템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나자 시스템을 관리하던 페리오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다만, 우주를 배경으로 온천을 즐기던 사람들, 휴게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 무드 있는 식사를 즐기던 사람들은 달을 그리는 부드러운 노래와 음성에 빠져들었다. 저편에 보이는 커다란 달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깜짝 이벤트에 많은 이들이 기뻐했다.


날 달로 데려가 줘요

별들 사이를 누비며

목성과 화성의 봄은 어떤지 보게 해줘요

다시 말해 내 손을 잡아줘요

내게 키스해줘요


로디와 에밀리는 객실 테라스에서 와인을 나누는 로맨틱한 분위기에서 노래를 들었다. 우주의 하늘과 흘러가는 달 아래에 만끽하는 신혼여행의 밤은 녹아들 것처럼 달콤했다.

“사랑해요. 에밀리. 나 같은 남자와 결혼해줘서 고마워.”

“나야말로 고마워요, 로디.”

깊게 포옹하고 키스했다. 두 사람은 벅찬 행복에 젖었다.


노래로 가득찬 내 마음

영원히 그 노랠 부르게 해줘요

당신은 내가 갈망하고

숭배하며 동경하는 사람이죠

그러니까 진심을 담아줘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그래서였을까? 신혼부부는 노래가 끝날 무렵 정신을 잃었다. 갑작스런 일이었다. 그들 뒤로 그림자에 몸을 숨긴 이가 웃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행복에 취한 부부는 그들 자신에게 닥쳐온 위험은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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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6> 오늘부터 임시 휴무입니다. - 1 15.11.27 170 3 21쪽
22 <5> 추천 패키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5 15.11.25 152 3 20쪽
21 <5> 추천 패키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4 15.11.23 166 3 21쪽
20 <5> 추천 패키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3 15.11.20 131 3 18쪽
19 <5> 추천 패키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2 15.11.18 143 3 18쪽
18 <5> 추천 패키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1 15.11.16 174 3 19쪽
17 <4> 찾으시는 온천이 있습니까? - 4 15.11.13 180 5 19쪽
16 <4> 찾으시는 온천이 있습니까? - 3 15.11.11 172 4 19쪽
15 <4> 찾으시는 온천이 있습니까? - 2 15.11.09 184 3 19쪽
» <4> 찾으시는 온천이 있습니까? - 1 15.11.09 173 4 22쪽
13 <3> 편안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 5 15.11.08 156 3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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