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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븐 님의 서재입니다.

천재 피아니스트의 영혼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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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븐
작품등록일 :
2023.05.10 13:41
최근연재일 :
2023.06.25 23:55
연재수 :
39 회
조회수 :
6,657
추천수 :
372
글자수 :
205,830

작성
23.05.12 18:00
조회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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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시작의 아라베스크

DUMMY

재은에게 이끌려 도착한 곳은 음악실.

아직 수업은 시작하지 않는 시간이라, 이곳엔 그녀와 노헌 뿐이었다.


‘아니, 대체 뭔데?’


노헌은 그저 억울했다.


어제 있었던 광장에서의 연주.

그건 오직 현묵의 의지, 노헌은 그저 강제로 몸을 빼앗겼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람 무안하게 꼽주는 게 취미니?”

“···뭐?”

“너 때문에 영상에 내 얼굴 팔렸잖아, 어떻게 책임질 건데?”


교실에서 봤던 10만 조회 수의 영상.


‘영상 올린 사람한테나 말하지, 왜 나한테···.’


반박하고 싶은 말은 수두룩했지만, 지금 입 밖으로 내뱉었다간 이걸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노헌은 알고 있었다.


이윽고 그를 노려보는 재은의 입에선 상상할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관심 주니까 네가 잘 치는 줄 알지? 너 개 못 치니까 착각하지 마.”


어이없는 헛소리.

노헌은 필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피아니스트 강현묵이 개 못 친다고?’


몸의 주인은 노헌이지만,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건 분명 강현묵이었다.

그런 소릴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건 대한민국에 있어서 그녀가 유일할 것이 분명했다.


그때 떠오르는 현묵의 혼잣말.


- 【아직 어리구나.】 -


그건 열등감에 휩싸인 재은을 칭하는 말이었다.


‘역시 천재라 이런 경험이 많은 걸까?’


실제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는 사람들을 노헌은 종종 보곤 했다.

바로 친구, 리나의 곁에서.


‘그러고 보니, 이재은, 리나랑 사이 안 좋았지?’


이리나 역시 옛날부터 유명한 피아노 영재였기에 주위의 질투를 많이 받곤 했다. 대표적으로 눈앞에 있는 이재은 같은 사람에게.


그런 리나가 유학을 가니, 목적지를 잃은 질투가 갑자기 나타난 노헌을 향한 것이었다.


“야! 내 말 안 들려?”

“어, 어? 뭐라고?”


귀를 꿰뚫는 신경질적인 목소리.

노헌은 상념에서 벗어나 그녀를 쳐다봤다.


“어제 개 못 쳤던 「겨울바람」 다시 쳐보라고!”


「겨울바람」

어제 현묵이 쳤던 쇼팽의 곡.

쇼팽 에뛰드 중 극악의 난이도로 유명한 입시 곡이었다.


“뭐해? 쫄려?”


솔직히 왜 다시 쳐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헌이지만, 그녀의 짜증에 떠밀려 머뭇머뭇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


“쳐줄 수 있죠···?”


오직 한 명에게만 들리는 작은 속삭임.

흔쾌히 수락할 거라는 노헌의 예상과 달리.


【안··· 돼.】


돌아온 것은 침울한 목소리.


“네? 왜 안 되는데요? 어제는 분명―”

【나도 쳐주고 싶어, 그런데···.】



칠 수가 없어.



노헌이 당황하여 입을 열려던 순간.


“혼자 뭐라고 중얼대는 거야?”


또다시 재촉해오는 재은의 목소리.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는 현묵.


벼랑 끝에서 노헌은 결국 포기했다.


“못 쳐”

“뭐?”

“못 친다고.”


처음엔 당황하더니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 치는 이재은.


‘애초에 나는 원래 피아노 못 쳤는데.’


그리고 어제 그 연주는 어디까지나 현묵의 것, 원래의 노헌이었다면 지금처럼 칠 수 없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재은은 그걸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


“이제야 좀 눈치라는 게 생겼구나? 처음부터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노헌아?”


간드러진 목소리로 웃는 그녀.

아마 노헌이 슬슬 기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얘는 조금 심한데?】

“그러게요···.”


노헌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현묵과 소곤소곤 대화했다.

그때 학교 전체에 울려 퍼지는 예비 종소리, 곧 수업이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그럼, 앞으로 잘하자? 노헌아~”


그 말을 끝으로 음악실을 나서는 이재은.


‘대체 친하지도 않으면서 왜 이렇게 이름을 부르는지 모르겠네’


생각하며 노헌도 음악실을 나가려는 순간.


“콩쿨 준비하느라 바빠죽겠는데 별것도 아닌 놈이 나대고 있어, 아 짜증 나.”


문 너머로 들려오는 이재은의 혼잣말.


“콩쿨···?”


노헌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교실로 돌아갔다.



♪♪♪



그날 저녁, 노헌의 핸드폰에 온 메시지.


[야야! 왜 나한테 얘기 안 해줬어! 강현묵 피아니스트 큰일 난 거!]


발신자는 프랑스로 떠난 리나였다.

평소에는 강현묵에 관한 정보를 챙겨보는 그녀였지만, 아무래도 유학 간 직후라 바쁜 나머지 소식을 늦게 접한 모양이었다.


【이리나···?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아, 얘도 전국에서 알아주는 피아노 영재라서, 들어본 거 아닐까요?”

【아아! 네 친구였구나? 연주 들어봤는데 얘 엄청 잘 치더라.】


국내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이렇게 말하다니, 리나는 노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친구였다.


‘만약 이 이야기를 본인에게 해준다면 엄청 좋아했을 텐데···.’


하지만, 몸에 깃든 강현묵의 영혼이 리나를 칭찬해줬다고 말해줘도 헛소리하지 마라, 소리칠 것이 뻔했다.


[나는 네가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지, 너 강현묵 SNS도 팔로우 해놨잖아.]


노헌이 뒤늦게 답장을 보내자.


[너무 바빠서 핸드폰도 거의 못 봤어. 집 청소도 해야 하고 새로 다닐 학교 가는 길도 가봐야 하고···.]


곧장 되돌아온 건 끝없이 한탄하는 장문의 글.


【나도 유학 처음 갔을 때는 그랬지.】


현묵은 굉장히 공감됐던 모양인지, 그 시절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노헌은 리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보내줬지만···.


[그래, 한 번 열심히 해볼게!]


뭐가 그리 바쁜지, 이 대답을 마지막으로 사라진 리나.

아무래도 또 잔소리라 생각하고 도망간 듯했다.


【그래서 그 콩쿨에서 내가 우승을 했는데···.】


그사이에도 끝나지 않은 현묵의 이야기.

그러고 보니, 그와의 대화는 처음처럼 어색하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하긴 거의 3일째 한 몸에서 같이 지내고 있으니까.’


볼일을 볼 때나, 샤워할 때나, 조금 불편한 점은 있었지만, 그래도 든든한 형이 한 명 생긴 것 같아 노헌은 지금 생활이 썩 만족스러웠다.


물론 현묵의 생각은 정반대였지만 말이다.



♪♪♪



‘대체 언제까지 갇혀있어야 하는 거지?’


현묵,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건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어제 노헌의 몸으로 피아노를 쳤던 건 꿈이었던 것처럼, 오늘은 아무리 피아노를 치고 싶다, 생각해도 아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노헌의 몸을 마음대로 사용했다가 그땐 진짜로 노헌이 무당을 찾아갈 수도 있었기에 항상 조심하고 있던 그였다.


‘지금쯤 내 몸은 어떻게 됐을까.’


아마 의식불명으로 중환자실에 갇혀있을 현묵의 몸.

이대로 가면 영영 갇혀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만약 먼 시간 후 되돌아간다고 해도 자신의 손가락은 오랜 방치에 굳어버려 피아노를 치려면 오랜 재활이 필요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쇼팽 콩쿨도···.’


여전히 미련이 남는 마지막 숙제.

만약 이 몸에 갇혀있더라도 쇼팽 콩쿨에 나갈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은 그였다.


그 순간 번뜩 떠오르는 아이디어.


‘잠깐만! 노헌의 몸으로 연주하면 되잖아.’


비록 어제 잠깐에 불과했지만, 현묵은 노헌의 몸으로 피아노를 쳤었다.

만약 그때처럼 현묵의 의지로 피아노를 칠 수 있게만 된다면 노헌을 피아니스트로 만들어주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걸 노헌이 받아들일지 모르겠네.’


현묵이 3일간 지켜본 노헌은 그저 평범한 중학교 3학년에 불과했다.

남들처럼 적당히 대학에 들어가고 직장을 다니는 것이 노헌의 목표, 피아노와 전혀 연관이 없던 그에게 제안해봤자 거절당할 것이 눈에 선했다.


‘으음··· 어떡하지.’


고민하던 그를 깨운 건 현관 도어락 소리.


“어, 왔어?”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노헌이 고개를 돌렸다.


“오빠, 이거 뭐야?”


들어온 사람은 바로 이노헌의 여동생, 이나은이었다.

그녀가 내민 건 오늘 아침 노헌이 학교에서 본 피아노 영상.


“어, 어?”

“오빠, 원래 피아노 친 적 없잖아.”


오늘 하루 노헌이 몇 번이나 들은 질문.

그때마다 노헌은 예전부터 남몰래 독학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번 상대는 한 집에서 사는 여동생.


‘노헌아, 가족인데 거짓말이 통하겠니?’


하지만 현묵의 생각도 그저 잠시.


“그냥, 독학했어.”

“아, 그래···?”


바로 납득해 버리는 나은의 모습에 현묵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그게 다야?’


언제부터 쳤냐, 피아노 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거짓말 아니냐 등등 여러 질문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나은의 다음 질문은 뜬금없었다.


“왜 독학했어? 엄마, 아빠한테 학원 보내달라고 해도 됐잖아.”

“어차피 말해봤자··· 아니다. 너한테 이런 말을 해서 뭐하겠냐.”


무언가 말하려다 고개를 내젓곤 방으로 들어가 버린 노헌.


딱 봐도 무언가 사연이 있는 분위기에 안 그래도 현묵이 하려던 제안은 더 꺼내기 힘들어졌다.


‘그래도 말해야 해.’


언제까지 숨기고만 있을 순 없다.

노헌에게 사연이 있듯, 현묵에게도 그의 사연이 있었다.


【노헌, 이참에 피아노 배워보지 않을래?】

“피아노요?”


처음부터 콩쿨이니, 뭐니,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

차라리 취미부터 시작하는 게 어떻냐는 것이 현묵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뇨, 어차피 학원도 못 다닐 거고, 관심도 없어서···.”


탐탁치 못한 노헌의 반응, 현묵의 계획과는 정반대였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끝낼 수 없었다.


【학원은 괜찮아, 여기 누구보다 피아노 잘 치는 선생님이 있잖아, 그리고 너 매일 자기 전에 듣는 그 곡, 네 손으로 연주해보고 싶지 않아?】


현묵과 함께한 지난 3일.

노헌은 항상 자기 전에 한 영상을 보고 잠이 들었다.

그건 바로 어린 시절 리나의 콩쿨 영상.

드뷔시의 「아라베스크」라는 곡이었다.


“아니, 그걸 제가 어떻게 쳐요? 그렇게 어려운 곡을!”

【어렵지 않아, 너보다 어린 친구도 콩쿨에서 치는걸?】


물론 현묵도 지금의 노헌이 치기에는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직설적으로 말해버리면 그가 포기할 것이 뻔하기에 열심히 설득했다.

다소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오늘 아침에 음악실에서 피아노 쳤어, 못 쳤어?】

“못 쳤죠. 근데 그건 갑자기 왜···.”

【이미 영상을 본 사람들에겐 독학했다고 말해놨는데 만약 친구들이나 나은이가 피아노 쳐달라고 하면 어떡할 거야?】

“못··· 치겠죠.”


거짓말쟁이가 되기 싫다면 피아노를 배워라.

조금 비겁한 협박이었지만, 지금의 현묵으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조금씩 흔들리는 노헌의 마음.


【나한테 한 번 받는 레슨비가 얼만 줄 알아? 무려 몇백만 원이야. 너는 지금 나한테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거라고.】


‘나 되게 추하다···.’


굉장히 부끄럽고도 추악한 현묵의 발언.

말을 내뱉자마자 몸부림치고 싶었지만, 여기선 강하게 나가야 했다.


“하지만, 저는 한 번도 쳐본 적도 없는데···.”


완곡히 거절했던 처음과는 달리 소극적으로 변한 노헌.

이젠 조곤조곤 다독여줄 차례였다.


【「아라베스크」는 드뷔시가 쓴 최초의 피아노곡이야.】


드뷔시는 로마 유학을 다녀온 후, 「아라베스크」를 작곡했다.

우아하고 로맨틱한 곡의 분위기는 백여 년이 지난 현재도 사랑받고 있으며 우리나라 콩쿨에서도 종종 등장한다.


【「아라베스크」를 시작으로 드뷔시는 여러 명곡을 써나갔지. 그런데 노헌아, 처음은 항상 두렵다?】


공부도, 게임도 시작할 땐 못 하는 게 당연하다.

다들 처음이니까.


【나도 첫 콩쿨을 나갔을 땐 손이 벌벌 떨렸어, 하지만, 이 세상엔 시작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드뷔시도 작곡을 시작했기에 아라베스크를 쓸 수 있었다.

현묵 또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기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다.


【언젠간 네가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기겠지, 하지만 네가 이렇게 시작하는 걸 포기해버린다면 그때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야.】


나는 네가 시작의 재미를 느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함께 쳐보자.

시작의 「아라베스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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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천예고등학교 +1 23.05.14 235 10 12쪽
4 88명의 친구 +2 23.05.13 257 11 12쪽
» 시작의 아라베스크 +1 23.05.12 317 13 12쪽
2 피아니스트와 중학생 +1 23.05.11 396 10 12쪽
1 하늘에서 떨어진 피아니스트 +2 23.05.10 686 1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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