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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 님의 서재입니다.

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현대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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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tiger
작품등록일 :
2023.07.14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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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7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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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7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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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세계 제국의 후계자

DUMMY



이 이야기는 역사의 한 축을 건설하였던 자들의 연대기.

또한 왕들의 피와 살들이 빚어낸, 투쟁과 평화로 짜여진 태피스트리다.

더욱이 이것은 광대하고 장엄한 역사책의 마지막 페이지요 황혼이며,

동시에 한 행성의, 한 종족의, 한 국가의, 한 개인의 일기이다.


역사라는 장구한 책.

그것은 과연 누구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이며 누구의 기획으로 지어진 극본인가.

이름 없는 기록자인 나는 후대를 위해 ‘더 위대한 이야기’ 속의 조연이 된 한 청년의 비장한 일대기를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낸다.

그리고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누가 이 역사의 마지막 한 챕터에 담긴 의미를 바르게 깨닫겠는가.




*


나라는 이름의 존재를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기록한 두루마리 역사책.

그것을 모든 시대들의 관측자이자 평가자인 당신들 앞에 펼치고자 한다.

그러나 그 전에 내 역사와 뿌리에 대한 소개로 지면의 일부를 할애하겠다.

부디 양해와 용서를 베풀기를.


먼저 잠시 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고자 한다.

이미 어른이 되어버려 지금의 가치관과 시선으로 그 시절의 나를 회고하는 바다.


본디 한 자녀의 가치관이 형성되는 데 가장 기여를 하는 이는 부모인 법이다.

이 사실은 종종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마냥 평가받던 내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게는 자아형성의 기틀로서, 그리고 내 존재의 뿌리로서 훌륭한 두 주축이 있었다.

당연히 그분들은 다름 아닌,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분들이었다.


우선, 나의 자랑스러운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어린 시절의 내게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내가 이끌고 지켜나가야 할 것들, 곧 나의 조국과 가문에 대한 지식.

그리고 우리들이 지켜온 가치와 명예와 상징들을 말이다.


“네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우리의 터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함이란다.”


그 소중한 가치를 짊어질 자로서 일생을 불태우는 것이 우리 가문의 사명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명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최고 책임자요 상속자였다.


아버지가 물려준 교훈은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무형의 보배였다.

나는 내가 그것들을 책임지리라는 사실에 반발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까지 나아갈 때까지 부단히 노력하며 자신을 채찍질하기를 기뻐했다.


이번에는 나의 가치관을 형성해준 또 다른 한 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지금은 계시지 않은 내 어머니께서도 내게 정신적 유산을 물려주셨다.

그러나 아버지와는 달리 그분은 내게 보다 폭넓은 시야를 일깨워주셨다.

세계라는 더 큰 틀을, 그리고 세계 시민이라는 새 가족의 개념을 알려주셨다.


“너는 우리의 지평을 넓혀줄 아이란다.”


그렇다.

어머니는 내가 가문의 위대한 숙명이라는 옥죔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셨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더욱 풍부한 것들을 품는, 큰 그릇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러한 어머니의 광활함에, 거기 섞인 따스함에 매료되었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를 사랑했다.

그랬기에 그들의 가치관 또한 그렇게 대했다.


세상을 품고 그곳을 변화시키는 바다와 같이 큰 인물.

동시에 내 울타리 속에 속한 모든 존재를 지켜내는 기둥.


어찌보면 그 두 요청은 온전히 합해지기 어려운 퍼즐 같았다.


왜 그토록 그 일이 어려운가.


예를 들어 애국심이라는 마음은 매우 숭고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마음은 필연적으로 외국이라는 타자(他者)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때로는 나라에 대한 사랑이 외국에 대한 증오, 분노, 복수심으로 발현될 수도 있다.


애사심(愛社心) 또한 내가 속한 기업의 번영을 추구함으로서 사회의 번창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그 열정은 내가 속한 집단만의 이익을 명목 삼아 울타리 너머에 대한 관심을 희생케 하기도 한다.


가문과 가정을 향한 애정도 분명 좋은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마음이 내 가족 이외의 존재를 품을 여력을 제한하기도 한다.

인간이란 감정과 의지의 총량이 제한된, 연약한 존재니까.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자와 타의 경계를 나눌 울타리의 존재가 필요하다.

때때로 사람들은 그 울타리 안에서 마음을 함양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거기서 배운 마음을 확장하여 더 넓은 터전에서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얻는다.


“울타리란 배척하라고 지어진 게 아니야. 신께서 우리 가운데 두신 선물이지.”


아버지의 이 증언은 옳았다.

우리는 울타리 속에서 연대를 배우고 그것으로 울타리 너머를 사랑할 역량도 키운다.


울타리 그 자체를 부정하고 무너뜨려 억지로 모두를 품겠노라고 호언장담한 시도들.

역사 속에서 그런 도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고 그 무모하고 교만한 도전들은 항상 실패로 귀결되었다.

때로는 전체주의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그 같은 우매한 실수가 자행되었다.


이를 이른 시절 배웠던 나는 결단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그와 동시에 틀에 갇히지 않고 넓은 그릇이 되고 싶었다.

여섯 살의 불완전했던 내게는 그 두 요구를 조화시키기란 큰 부담이었다.

아직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탓이었다.


내게 사명처럼 얹혀진 이 두 무거운 짐을 어찌 지혜롭게 감당해야 하는가.

이것은 몇십 년 이상 명쾌하고 시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어머니와 작별한 여덟 살 이후 나는 수년 간 거듭 깊이 숙고했다.

소년 시절 내내 그 답을 찾았으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고민하다보면 어른이 되었을 때 끝내 그 답을 찾아내리라 믿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다. 당시의 나는 좋은 표현으로 아직 순수했고 나쁘게 말하면 순진했다.


세월의 흐름은 손살같았다.

한 시대의 절박한 요청은 내게 그리 자비롭고 느긋하게 굴지 않았다.

인류사의 시곗바늘은 내게 신속한 해답을 발견할 것을 요구했다.


스물한 살 무렵의 나는 역사의 요청 앞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의 사명과 일대일로 대면했다.

그렇게하여 나는 왕의 대로(大路) 위에 내 발을 얹었다.

어떤 미래가 기다릴지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서 그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


“너는 가문의 보배이자 신이 내린 귀한 선물이다.”


이것은 우리 가문과 나의 조국이 나를 향해 늘상 던지던 찬사였다.

교만하게 굴어서는 안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웠다.

나는 그들이 나를 어떤 의미로서 그렇게 불렀는지를 알았다.

한편으로는 무거운 마음을 느끼는 동시에 그 명예가 기뻤다.


먼저 내가 사랑하는 나의 집안에 대해 소개하겠다.

나의 가문은 특별했다. 귀중한 소명과 선한 명예가 우리 속에 있었다.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지켜내는 것, 선한 질서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위대한 발전을 지속적으로, 아름답게, 신중하게 가꿔가는 것.


우리 가문은 문자 그대로 신께서 이 임무를 맡기고자 선택한 자들이었다.


혹자는 우리의 명예를 선민주의라고 비난하며 빈정거릴지도 모르겠다.

‘자신들만 잘났다고 생각하는 재수없는 자들’

‘신이 존재하긴 무슨! 자기들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만든 말이지 뭐.’

실제로 그와 같은 비난의 목소리가 수백 년 간 진부하게 떠들어졌다.


허나 선민주의란 권리만 붙잡고 의무를 무시하는 자들에게나 적합한 멸칭이다.

우리의 가문은 그와는 달랐다.

우리는 대대로 그 책임감과 성취를 사람들과 신 앞에서 입증해왔다.


그리고 책임을 성실히 수행한 자들에게는 은혜와 축복이 임하는 법이다.

내 조상들은 훌륭한 명예 속에서 위대한 업적을 쌓았고 무궁히 번창했다.

그들의 지경과 권한은 대를 거듭할수록 번영했고 찬란하게 늘어갔다.


물론 많은 시련과 역경들이 있었고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자들도 숱하게 있었다.

그러나 번번이 승리는 우리의 몫이었고 온갖 고난과 시련은 빛나는 역사로 바뀌었다.


“알렉, 네가 이끌어갈 미래를 늘 생각하며 사색하거라.

그리고 그 소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네 모든 재능과 체력을 성실히 사용하거라.

너는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창조하기 위한 우리의 열쇠다.”


아버지께서는 십대 시절의 내게 가문의 업무를 가르치며 무거운 격려를 주었다.


그분께는 그렇게 말씀하실 자격이 충분했다.

아버지 본인부터가 자신의 할아버지가 세운 명예를 뛰어넘은 성취자였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일평생 존경해왔고 나 역시 그럴 수 있기를 바랐다.


전대를 뛰어넘는다.

이것은 사실 우리 가문의 역대 수장들에게 있어 마땅한 전통과 같았다.

할아버지 역시 증조할아버지의 위업을 뛰어넘었고 증조부님도 그러했다.

조국과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대서사시와 실록이 이를 증명하는 바다.

날조되어 만들어진 ‘승자만의 역사’와는 다른, 정직하고 투명한 역사.

흑역사와 빛나는 역사가 공정히 공개되어 만민의 평가를 통과한 자랑스러운 기록.

나는 그 역사책 위에 더욱 찬란한 마침표를 더하고 싶었다.

최소한 부끄러움을 남기고 싶진 않았다.


“아들아.”

“네, 아버지.”

“우리는 다스리고 통치하되 압제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우리는 늘 우리 위에 높은 주권이 있음을 기억하며 성실한 섭정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는 조상들이 그러했듯, 늘 하늘에 계신 분을 의식했다.

재판관들 위의 최고 재판관, 통치자들 위의 최고 통치자이신 그분을.


“우리는 인류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부름을 받았지 억압하고 부름받지는 않았다.”

“늘 기억에 새겨두겠습니다.”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어떤 이는 이를 권력자의 자기합리화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수많은 국가들이 자신들의 탐심을 이 허울좋은 단어로 위장하였다.

그들은 그 위선의 대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 왕권신수설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달랐다.

우리는 정말 문자 그대로 신께 약속을 받은 자들이었다.


물론 우리의 마음속에도 인간 본연의 탐심과 악함은 존재한다.

나 또한 감히 내가 한 치의 더러움 없이 깨끗한 자라고 자신하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어떤 명예를 뽐낼 자격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악한 본성을 억누를 강력한 제약이 있었다.

바로 ‘국가적 언약’이라는 이름의 제약이 그 열쇠였다.


우리에게 있어서 왕권신수설이란 바로 그 국가적 언약을 뜻했다.

그것은 영원한 번영과 성장을 약속받은 대가로 지켜야하만 하는 규율이었다.

선조들은 그 규율을 불편히 여기지 않았다.

벗어던질 괴로움의 멍에로 여기지 않았고 도리어 명예로 받아들였다.


그 덕에 우리는 천신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도 겸손함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겸손히 낮춘 덕분이었을까.

우리가 다스리는 세계에서는 그 어떤 반역도 결코 성취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인류사 속에서 벌어진 모든 악독한 혁명들을 상대로 승리했다.

나라 안과 밖에서 벌어진 온갖 반역과 반란의 도가니들을 잠재웠다.


그리고 우리는 울타리 밖의 존재들의 마음을 얻는 일에도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지경을 거듭 넓혀나갔고 그 속의 모든 타인을 우리의 일부로 소화했다.

오로지 바다보다 큰 마음의 그릇의 소유자에게만 그런 성취가 허락되는 법이다.


신께서 정말 축복을 허락하셨던 것인가.

그분은 조상들과의 약속을 지키셨던 것인가.

그 증거로 우리는 무수히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문화와 민족을 얻었다.

그것도 피를 거의 흘리지 않고서도, 증오의 연쇄를 쌓지 않고서도 말이다.


누군가 비판할수도 있겠지.

그러나 선조들과 나는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조상은 우리에게 주어진 규율대로 충실히 행했다.

민족들을 인격체로서, 동등한 세계 시민으로서, 그리고 형제로서 대우했다.

심지어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도 그리 하려고, 성실히 노력했다.


이 축복은 궁극적으로는 위대한 국가적 확장으로 발현되었다.

그것은 다음 세대의 통치자에게 있어서는 은총인 동시에 부담이었다.

짊어져야 할 막중한 짐의 무게가 점차 늘어남을 의미하니까.

그러나 그것은 신성하고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부담감이었다.


고조할아버님은 최초의 세계 대전쟁이라는 위기 앞에 도피하지 않으셨고 그 결과 두 대륙과 두 대양을 조국의 영원한 유산으로 남기셨다. 그분은 그 미래 앞에 망설이셨으나 두려움 앞에 굴하지 않았고 기꺼이 승리자의 길을 감당하셨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또 한 번의 세계 격변 속에서 위대한 가치의 불굴을 입증하셨다. 그분들은 세계를 노획하려던 악마적인 세 개의 권세로부터 세상을 지켜내었고 자유 세계의 자발적인 순종과 복종을 얻으셨다.


우리 가문의 보배로운 유산인 그 언약은 보편적 가치를 수호함에 있어 모든 형태의 공화정보다 우월함이 입증되었고, 나의 조국은 모든 민족들을 녹여 하나로 담아낼만큼 포용력이 큰 용광로임이 증명되었다.


나는 가문의 어른들에게 그 모든 이야기를, 곧 가까운 세대의 세계적 신화와 더욱 오래된 세대가 쌓아온 무형의 유산들의 기원을 배우며 벅찬 마음으로 어린 시절 포부를 키워갔다.


그리고 세상은, 사회는, 가문은, 가족들은, 내 친구들은 내게 하염없이 기대를 걸었다.

그들은 내게 암묵적으로 요구했다.

하늘의 섭리가 숱한 세월을 통해 공들여 가공해 온 인류사의 찬란한 축, 그 축을 내가 완성해주기를.

이 제국과 이 가문이 존재하는 목적을 더할 나위 없이 온전하게 성취해주기를 소망했다.




*


세상 모든 민족들과 인종들의 수렴점.

이것은 바로 나를 표현하는 또다른 정체성이었다.

쉽게 말해 나는 모든 민족의 유전자가 섞인 혼혈이었다.


나는 한 체제, 한 국가, 한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모든 이질성이 만나는 교차로요 다양성들의 복합체였다.


이것은 전혀 모순적인 일이 아니었다.

소속감을 고귀한 가치로 추구했던 나의 가문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은 혈통적 순수성을 지키는 대신에 모든 피를 흡수하는 블랙홀이 되기로 작정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성이란 영적이고 정신적인 순수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물리적인 순수성, 우생학적인 순수성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본질적인 순결은 포기하지 않았으나, 허울 뿐인 비본질적 순혈주의는 포기했다.


순혈주의를 버린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모두를 끌어안기 위함이었다.

내 조상들은 세상 만방의 민족과 피를 섞었다.

대를 이어 종족의 벽을 뛰어넘는 사랑을 꽃피웠다.

아니, 비단 연애의 형태가 아닌, 정략혼의 형태일지라도 기꺼이 그러했다.


15세기 무렵만 해도 우리 가문의 뿌리는 분명 유전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그 시절은 그러한 배타성과 순혈주의가 소중한 가치마냥 추앙되던 시절였다.

그러나 역사의 변곡점이 된 그 사건을 계기로 내 조상들은 어리석음을 깨트렸다.

그들은 수십 세기를 앞서 나간 결단을 내렸고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였다.


이 과감한 선택을 취하게 해준 원동력도 국가의 기초가 되었던 언약과 관련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신적인 가치와 인류를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를 어떻게든 행동으로서 신과 사람들 앞에서 증언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순혈주의란 이러한 의무를 가진 자에게는 언행불일치를 범하는 행태였다.


그래서 우리는 노력했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 속에는 구대륙 내 모든 핏줄이 흡수되었다.

신대륙으로 진출한 이후로는 그 세계의 토속 민족까지도 우리 가문에 스며들었다.

지경을 넓혀나갈 때마다 그 세계의 토속 민족들 역시 우리 가문 속에 융화되었다.

큰 주축이 되는 민족들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오지의 소수 민족까지도 말이다.


이는 분명 비대한 자아와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하는 고역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의지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그 노력에 대한 성과와 보상은 분명했다.

여러 민족의 교접으로 탄생한 결실인 내 가문의 수장들과 일원들.

그들은 그 특성 덕에 각기 다른 문화권 모두의 인정을 동시에 받을 수 있었다.


이민족들은 우리의 시민이 되었고 우리를 그들의 왕으로 기꺼이 인정했다.

물론 이것은 혈통의 혼합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군이 되기 위한 피땀 흘리는 노력, 세대를 거듭하며 진보시켜온 능력, 그리고 성공적인 결실로서 입증한 지혜와 능력까지, 그 모든 요인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러나 적어도 '다양성들의 화합체'라는 특성이 우리를 돋보이게 해준 강력한 이점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즉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역사에 유례없는 다양성을 함축한 혼종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본디 혼종이 될수록 그 우수성과 잠재력이 극대화되는 법.

어쩌면 최초의 인간이자 가장 우수했던 인간인 아담의 경지로 회귀하는 프로세스가 바로 인종과 개인간의 혼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담에 가장 근접한 인간이었다.


내 이질성의 두 근원 중 하나인 내 어머니도 제국 출신이 아닌 이방인이셨다.

그것도 무려 동양인, 태평양 유색인종, 아메리카 원주민, 중동인, 이렇게 네 부류가 대에 걸쳐 섞인 분이셨다.

물론 내 아버지도 어머니 못지 않은 혼혈이셨지만, 어머니는 더욱 유별하셨다.

그녀에게는 민족, 문화, 언어의 경계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어린 시절에 떠나보내긴 했지만 내 기억 속에 그분의 모습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분은 아름답고 사고가 깊으며, 모든 틀을 초월하여 자유로이 노니며, 새롭고 창조적인 모습을 무수히 보이신 현자셨다.

나는 그분을 사랑했고 그녀의 내면을 닮아가기를 원했다.


어쩌면 아버지 역시 그런 그녀의 매력에 매혹된 덕에 그녀를 택하였는지도 모른다.

세계 권력의 후계자셨던 아버지가 아무 배경 없는 그녀를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두 분은 유사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매우 달랐으나 그럼에도 분명 서로에게 이끌렸다.


지금의 나는 그 두 분의 영향이 섞여서 빚어진 존재.

시민들은 이런 나를 두고 평가하였다.

역사을 이끄는 두 무형의 원동력이 하나로 합치되어 살과 피와 뼈를 얻었노라고.




*


나는 십대 후반 무렵 큰 시험과 혹독한 시련을 통과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공동으로 세상의 절반을 이끌던 시절.

선과 악의 권세가 충돌하는 사건이, 문명과 문명의 충돌이 일어났다.


우리를 대적하는 이데올로기를 소유한 시스템이 존재했었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영의 지배를 받던 거대한 연방이었다.

제국과 연방은 세상의 두 양대산맥이었다.


두 차례의 대전쟁에서의 승전국으로서 세계를 양분하였던 두 권세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인류 역사상 국가간의 대결은 제국과 연방의 대립이 마지막이 될 것이 자명했다.

냉전 시절 내내 그 대립 가능성은 늘 임박해 있었다.

화약고에 불이 붙여지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에 불과했었다.

모든 역사가들이 그 시한폭탄을 인지하였다.


나 또한 이를 의식했다.

단지 그 일이 내가 청년기를 막 맞이하려던 때에 임박할 줄을 몰랐을 뿐.


한편으로는 두렵고 억울한 마음도 들었으나 나는 마음을 굳게 다졌다.

그리고 스스로를 책망하듯 다독였다.


“두려워 숨고 달아나는 것은 나약한 자들의 몫이다.”


나는 강하고 위대한 자로 자라날 것을 요구받았고 나 스스로도 기대에 부응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내게 맡겨진 몫을 지키고 싶었다.

곧 국가도, 시민들도, 가족들도, 명예와 가치도, 언약도 보존하고 싶었다.

또한 아직 나의 울타리 너머에 있던 자들도 기꺼이 품어주기를 바랐다.

그들도 엄연히 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들이며 존엄한 자들이니까.

그들을 해방하고 싶었으며 그들에게도 우리의 존귀한 가치를 전하고 싶었다.


스무 살을 목전에 둔 나는 몸을 헌신하여 직접 참전하였다.

그렇게 내 포부를 입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했다.


나는 현지에서 몸으로 뛰며 동료들을 구했고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또 끊임없이 전략과 전술을 창출해 여러 위기들을 극복하였다.

아울러 그와중에 학업과 연구도 부단히 병행하면서 학자로서도 군에 기여하였다.

전쟁 후반부에는 지휘관 직위에 더해 요충지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받아 자격을 시험받았다.


그 과정에서 나의 청춘을 바쳐 고통과 더불어 씨름하였다.

때로는 위기의 불구덩이 속에도 내던져졌고 편안한 자리를 버리기도 했다.

나는 밑바닥에서부터 착실히 최선을 다했고 능력을 통해 정상에까지 올라섰다.


그렇게 혼신을 다해 청년기를 보내던 중 어느 순간 나는 시나브로 영웅이 되어있었다.

모두가 등을 맡길 수 있는 위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역전의 명수.

나는 내 조상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세상과 내 사람들 앞에서 나를 증명했다.

허풍이나 말로서가 아닌, 살아숨쉬는 가치가 녹아든 행동으로써 입증했다.


삼 년이 흐른 시점, 인류 최후의 국가간 무력 분쟁은 종말을 맞이했다.

나와 내 아버지는, 내 가문과 내 동료들은, 내 조국은 승리의 열매를 보았다.

우리를 대적하고 파멸시키려 했던 무리를 붕괴시켰다.

억압받던 세상의 주민들을 온전하게 해방하였다.

비록 이것이 고통의 근본적인 최종 종결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커다란 괴로움의 한 축은 사라졌음은 자명했다.


그리고 전리품으로서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얻었다.

역사 속에서 지금껏 누구도 이룩하지 못했던 과업을 이뤘다.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을 거느렸던 조상들조차도 감히 보지 못했던 일을.


할아버지는 그 싸움을 끝으로 다음 세대를 믿고는 후련히 자리에서 떠나섰다.

가장 높은 책무의 권좌 위로 오른 아버지.

그분은 역사상 최초로 인간이 맡기에 가장 무거운 짐을 떠맡게 되셨다.

이름하여 지구라는 이름의 행성을.

이제 국가간의 공식적 투쟁과 선전포고가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그분과 나는 남아있는 모든 고통의 잔재물을 청산할 의무를 감당해내야 했다.


신대륙 전역과 바다들을 통치하던 초강대국이었으며,

로마의 옛 권역이 담긴 대륙을 흡수한 뒤 공식적인 황권을 선언하였고,

세 제국을 패망시키고 이후 한 제국을 더 멸망시킴으로써 마침내 지구권 전역을 사실상 완전히 발 아래 두기에 이른,

새로운 세기의 패권국인 유일극초강대국(唯一極超强大國).

현존하는 진정한 철권 세계 정부.


그리고 그 세계의 차기 지도자이자 미래이며, 지구 제국의 황태자인 나.

알렉시스 벨레로폰 엘 죠세프 브류나크.


지금부터 전해질 이야기들은 나의 평생의 발자취에 대한 소개요.

또한 이 이야기는 내 고뇌와 투쟁, 발버둥의 서사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계의 마지막 미래라는 짐 앞에서 고뇌할 한 청년의 처절한 사투를 그린,

아름답고도 혹독하기 그지없는, 제국 역사의 유종(有終)의 챕터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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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99 다오랑
    작성일
    24.02.27 14:53
    No. 1

    서재 방문 감사차 들러 재밌는 글 추천 선작 드리고 정주행 합니다 작가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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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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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친구인가 감시자인가 23.08.17 78 3 18쪽
6 영웅의 조수 23.08.15 89 3 15쪽
5 자안의 지배자 23.08.06 118 3 19쪽
4 떠돌이 소년 23.07.31 138 2 16쪽
3 양육된 통치자들 23.07.26 219 2 23쪽
2 주권의 목적지 23.07.20 433 3 23쪽
» 세계 제국의 후계자 +1 23.07.17 861 6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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