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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트베어 님의 서재입니다.

이 조선에는 혁명이 필요해요.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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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리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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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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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26화 - 강대국의 조건 (1)

DUMMY

유형(流刑)이란, 죄를 지은 자를 변방이나 외딴 섬 같은 오지로 보내는 자유형을 의미한다.


‘가택연금, 정치적 영향력의 거세 같은 거지.’


이는 오형(五刑-고대 중국에서 기원한 5가지 형벌) 중 2번째로 무거운 형벌로, 흔히 사극에 나오는 귀양 또는 유배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간단히 말해서 현대의 가택연금과도 같은 형벌이라고 보면 좋다.


“···전조까지만 하더라도 유형은 사실상 죄인을 죽이지 않는 것이 아닌 버려두는 것에 가까웠지. 그저 형식적인 관리에 지나지 않았고. 그래서 죄인이 유형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객사하는 경우가 많았다네.”


내가 남원으로 내려온 지 석 달째 되던 어느 날 아침, 비가 오면 천장에 물이 줄줄 새고 밤에는 모기와 이가 득실거리려 밤잠을 설치던 골방으로 귀한 손님, 찬겸 최익현 씨가 찾아왔다.


그는 말을 하다말고 내가 기거하는 움집에 가까운 초가집을 보며 자신의 감상을 토했다.


“이런, 이런. 관에서 소홀하게 관리하나보군. 이런 것은 모두 수령의 나태함이 원인일 즉 내 당장 형조에 소를 넣어서-.”

“어휴. 그냥 들어오십시오, 나리.”


행여 자기 때문에 폭삭 무너질까 까치발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최익현을 향해 너스레를 떨었다.


“어차피 무너지면 토굴이라도 파서 지내면 됩니다. 그리고 여기 울타리 친 곳까지 나오지 않으면 된다고 군수께서 당부하셨는데, 아전들 말로는 마을까지 내려와서 장도 보고 볼일 봐도 뭐라고 할 사람 없답니다. 하여튼 유형 때문에 오늘날 섬사람들을 천시하는 경향도 생겼다고 들었습니다만.”

“큼큼, 그렇지. 죄인과 그 가문의 후손의 씨를 천시하는 경향이 그래서 생겼음이야. 아, 차 좀 더 따라주게. 커걱! 나이를 먹으니 목이 자연스레 칼칼해지는구먼.”


목을 부여잡은 최익현은 우범선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아니, 어르신. 제가 무슨 승만이 종도 아니고-.”

“이렇게 부탁함세.”


방에서 움직일 때마다 먼지가 풀썩 솟아 뿌연 가루를 사방에 뿌리자 최익현이 ‘허허’하고 웃었다. 이에 우범선은 할 수 없다는 듯 투덜대면서 부엌으로 사라졌다.


그가 부엌으로 사라지자, 최익현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내게 이야기했다.


“얼핏 보기에는 죽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싶지만, 전하께서도 그대에게 자비를 베푸셨네. 유배지가 남원이라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지. 여긴 옛적에 군이 아니라 부였다네.”

“그 이야기는 저도 잘 알지요. 뭐, 자비보다는 배려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애당초 태조께서 새로운 세상을 여시고 귀양살이로 죽었다는 고관대작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려.”

“자네도 참 고집이 세구만. 그대가 태평하게 남원에서 허송세월할 때 한양은 아주 야단법석인데.”


최익현의 말에 한양에서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과 일본공사를 두고 골머리를 앓고 있을 고종을 떠올린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생각해보면 일본공사가 기선대여료를 내라고 강짜를 두는 것은 나와 대원군의 작품이었으니까.


‘그런데 알게 뭐야?’


“큼, 그래도 전하께서 저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려 먼 남원 땅에 밀어 넣으셨는데 정랑께서 저를 이리 찾아오신 사실을 알면 경을 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 허물에 신경 쓸 나였다면 필히 조정에서 아직도 녹을 먹고 있음이야. 그리고 정랑소리 하지 말게.”

“예?”

“사직소를 올리고 낙향하는 길이네. 외척들이 득세하고 간신배가 설치는 조정에서 내가 무엇을 하겠나?”

“···사직이라는 것이 그렇게 대충 사직소 던지고 나와도 되는 거였습니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니 상께서도 참작해주시겠지. 아니면 말고.”


사직서 던지고 그냥 나왔다는 그의 이야기에 내가 황당해하며 입을 떡하고 벌리자 자기 걱정은 사치라는 듯, 손을 허공에 휘저은 노인은 조촐한 내 유배지의 환경, 즉 벌레 먹은 마루와 쓰러질 것 같은 벽과 구멍이 나 빗물이 조금씩 새어나오는 지붕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자네는 잠도 편히 못 자겠군. 내가 연통을 넣어 제자들이 내일로 하여금 집을 수리하도록 도와줌세.”

“아니,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사실 남원으로 출발하기 전에 이미 연통을 보냈네. 아마도 이르면 이틀 안에 손님들이 줄지어 도착할 게야.”

“감사합니다.”


난 그의 배려에 당장 고갤 꾸벅 숙이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하며 한편으론 그의 호의에 궁금하여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소인을 이리도 챙겨주시는 겁니까?”

“어째서 챙겨주느냐고?”

“예.”


내가 묻자,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턱을 괴었던 최익현이 슬며시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스스로를 참된 선비라 여기는 내게 덕을 베푸는 것에 대한 의의가 있냐고 묻는 거라면 딱히 정답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선비는 덕을 쌓고 인을 논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자네가 한양 백성들 앞에서 소리치지 않았나? 하지만 내가 얻을 이득을 논한다면, 흐음. 자네와 이야길 나누면 앞으로 이 나라에 다가올 수차례의 역경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가능성을 보았다고 할까?”

“가능성을, 말입니까?”

“그렇다네. 그래, 가능성. 가능성이 좋겠군.”


가능성이라는 단어에 몇 번이고 힘을 주어 되새긴 최익현은 어느 틈에 우범선이 내려놓고 사라진 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부으며 말했다.


“서양 도적과 왜인, 청국인들이 조약을 들먹이고 한양으로 들어와 제멋대로 집을 짓고 왕래한다면 장차 우리 강산의 재화와 아녀자들을 마음대로 취할 것이니 지금부터라도 걱정하는 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해야 하지 않겠나?”

“제게 화서의 문하로 들어오라, 이리 제안하시는 겝니까?”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조금 기분이 요상하군. 하지만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네.”


그의 말에 나는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작금의 개화와 개항이란 거스를 수 없는 필연이요, 역사의 순리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미 빗장이 부서지고 대문이 활짝 열린 이상, 우리에게 저들의 행패를 막을 힘이 당장은 없습니다.”


내가 척사에 부정적으로 답하자 그는 짐짓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정의 양복쟁이들과 말투가 비슷하구먼.”

“하지만 화친이 상대의 협박이 아닌 상대의 구걸에서 나와야 진정한 화평이고, 화친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호오.”

“겁나서 화친을 청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숨을 돌린 여유는 있겠지요. 하지만 이후 그들이 요구할 끝없는 욕심은 무엇으로 채워주겠습니까? 이게 나라가 망할 첫 번째 단서일 겁니다.”

“동감일세.”


그는 짐짓 자신의 눈이 역시 틀리지 않았었다는 듯, 가볍게 다리를 떨며 말했다.


“저들이 처음 이 땅과 바다에 와서 문정에 임할 때 대포와 총포를 꺼내고 화친을 건넸으니 이는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꿴 것이지. 진정한 화평과 도리는 서로간의 믿음과 약속에서 출발해도 모자를 판에 말이야.”


그의 대답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는 우리의 물산이 서양의 그것에 비교해 조악하고 단순하기 그지없어 나라에 사치품과 소모품이 만연하고, 우리 백성의 가산은 쉽게 허물어질 것인 즉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가볍게 통상을 맺는 것은 불합리하고 근시안적인 문제지요.”

“내가 걱정하는 것도 그대가 말한 것과 같네. 아국의 재화는 적고 제한적이라 당장에 쓸 곳은 많은데 사사로운 제품은 쉽게 들여오니, 이는 곧 나라에 빚이 생기는 것과 같은 것. 내가 가장 크게 고심하는 것은 귀품이 휑하여 종국에 쌀과 같은 곡식이 비싼 값에 팔려 부족해지는 것일세.”

“그렇게 된다면 진실로 그 피해를 보는 것은 소작 붙이는 이들과 몇 뙈기 안 되는 작은 밭을 소유한 이들이니까요.”

“옳은 말일세.”


실제로 위정척사파는 통상반대의 가장 큰 명분으로 삼남을 비롯한 주요 개항장에서 본국보다 훨씬 싼 가격의 쌀과 보리를 비싸게 사들여 본국으로 실어 나르는 일본 무역상들을 가장 먼저 경계했다.


‘위정척사파가 다짜고짜 나라 문 다시 걸어 잠그고 척화비 세우고 세상에 신경 끄자고 한 머저리들은 아니지. 그들도 자신들이 아는 만큼, 듣고 본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친 사람들이다.’


물론 그 듣고 본 세상이 너무 제한적이라 당장에 문만 다시 닫으면 평화로울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살았다. 게다가 그 문도 제대로 못 닫아서 도리어 나라 문을 닫았지만 말이다.


‘그럼 이 처지가 딱해진 유림을 어찌해야 할꼬?’


나는 한양에서의 경험과 최익현을 비롯한 화서학파의 사람들이 내 이야기와 연설을 경청해주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유림 세력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는 수는 존재할 가치조차 없었다.


‘버리면 병신이지.’


이 사람들이 현 조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림짐작해도 7할. 정치인에게 있어서 전체 유권자의 표 7할을 쓰레기통에 던지라는 소리는 혀 깨물고 자살하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 유권자들에게 지지받으면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재료가 필요하다. 재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내가 지역구에서 당선되려면 그럴듯한 재료가 필요했다. 시에 새로운 사업체를 유치한다던지, 아예 아파트 재건축이나 도시설계 공고를 선전해 유권자들로부터 표를 사던지 말이다.


자, 그럼 여기서 유림들이 원하는 게 뭘까?


‘지금 유림은 인정에 목마르다. 자신들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그렇다면 그들에게 문호 개방에서도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나아가 우리 유림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고 세상에서 홀로 설 기회와 방법이 생긴다고 설득한다면, 저들도 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겠지.’


그래, 저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봉건적 형태의 조선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신분제의 혁파와 노비제의 붕괴는 이미 그들도 옛적에 토의를 마친 문제다. 시간이 문제였을 뿐.


‘신분제 혁파는 어차피 이뤄진다.’


그렇다. 진실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유림, 자신들의 역할과 쓸모가 사라져 뒷방 늙은이 취급당하는 현실이 두려운 것이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곤, 눈을 부릅뜨며 입을 열었다.


“···나리께선 성리학적 가치와 이상의 완전한 소멸을 가장 두려워하시는 거지요.”

“허허, 부족한 서생을 이리 매섭게 몰아치는 구려.”


난 애써 소탈하게 웃으며 슬픔과 두려움을 감추려 찻잔으로 입가를 가리는 그를 향해 허릴 곧추 세웠다.


“천하가 뒤집혀도 정도는 언제나 같으니, 그것은 쓸데없는 걱정에 지나지 않겠나?”


미약하지만, 최익현의 목소리가 떨린다.


내가 찌른 주제는 비수가 되어 아직 여물지 않은 최익현의 불안을 제대로 찌른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몰아쳤다.


“허나, 백성들에게 유교학적 가치건, 성리학적 이상향이건 그것이 무에 중요할까요.”

“흐음, 듣자하니 말이 꽤나 과격하네.”

“그래도 신선하니 좋지 아니합니까? 그리고 나리께서도 뱅뱅 쳇바퀴처럼 도는 화서 내 동향이 답답하여 저를 찾아온 것이 아닙니까.”

“이거 내가 사지를 제 발로 찾아왔네, 그려.”


나는 고갤 모로 저으며 실망한 채 일어서려는 그를 향해 재빨리 말했다.


“제 말은 성리학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성리학을 따르면 어떤 이득이 있을지, 무엇이 유리한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정도를 따르는 것에 백성들이 무엇의 이해득실을 따진다는 말인가...?”


나는 그의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묻는 그에게 과장스럽게 손발을 구르며 웃었다.


“하하! 거, 이보십쇼. 저는 이럴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내 말과 태도에서 효과가 있었을까, 내가 답답하여 가슴을 치고 무릎을 두드리자 최익현은 슬그머니 몸을 다시 낮추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에게 나는 자세를 바로하며 이야기했다.


“하루에 피땀 흘려 소작의 반에 반도 못 건지는 농민들이 공맹의 도리요, 충효의 몸가짐을 깨달을 시간이 있겠습니까?”

“...”


아마도 평생 서당 근처도 못갈 가능성이 농후했다. 제아무리 교육열이 세계적으로 1·2등 오가는 민족이라지만, 일단 제 입에 풀칠부터 해야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겠나?


“그리고 애시적부터 집이 부유하고 윤택하여 천자문과 삼강오륜을 뱃속에서 기본으로 깨우치고 나온 대갓집 자제와 흙이나 퍼먹던 소작농의 아들이 어찌 같은 세상을 보고 삶을 경영하겠습니까? 나리와 서생들은 처음부터 출발점을 잘못 짚으셨습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한다고...?”

“천하는 단순히 경전만 읊는 사람들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기대어 살지요.”


그리 말한 나는 서둘러 사람 인 자를 탁자에 그렸다.


그는 내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듯, 수염을 가늘게 떨었고 동공은 크게 확장되어있었다. 아니, 내가 정치의 주체, 혹은 통상의 문제로 걱정해야 할 이들의 외연을 단순히 글줄 꿰는 선비와 유생들에서 구분 없는 모든 백성으로 확장시키자 크게 놀란 얼굴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몰아쳤다. 논파와 설득에 있어서 기본 소양은 상대가 생각하고 정리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에 있었다.


“유림이 통상에 반대하는 것을 두고 왜 세간 사람들이 지지하지 않을까요? 어째서 그들은 통상이 우리에게 당장 손해인 것을 알아도 유림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당장 개항으로 손해를 보는 것은 땅 놀이를 하는 지주와 양반들이 아닌, 공산품을 만드는 공인과 객주들이 아닙니까?”

“그, 그건.”

“왜긴요. 그 통상이라는 것이 당장에 우리에게 위험하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니까, 언제고 그들이 잡아먹힐 수 있음에도 눈앞의 재물에 급급하니까 유림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리, 나리와 양반들은 그저 반대하고 호통치고, 잔소리할 것이 아니라 어째서 백성들이 진실로 위험한지 그들을 설득하고 이해를 시켜야하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정보가 입력된 탓에 굳어버린 최익현을 두고 나는 서안에 쌓아두었던 종이뭉치를 잔뜩 꺼냈다. 짙은 먹 선과 서양에서 들여온 연필로 쓰여 더러워진 종이들은 오늘날 조선에는 이질적인 문자로 가득했다.


썩어도 준치라, 천애 학자인 최익현이 내가 옮긴 서류에 시선이 동하자 내가 대뜸 물었다.


“대국의 조건이 무엇일까요.”

“···대국 말인가?”

“예. 청이나 서양의 영길리, 아라사(러시아제국)와 같은 대국들 말입니다. 그들은 어째서 대국이라고 못내, 천하의 두려움과 존경을 동시에 사는 겁니까?”


내 질문에 눈을 두어 번 껌뻑거린 최익현이 잠시 후 두 눈을 감고는 대답했다.


“어마어마한 영토, 셀 수 없이 많은 백성, 강토에서 자라는 무한한 재화가 아니겠는가?”


그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모로 저었다. 아주 단호하게.


“맞습니다. 허나, 틀렸습니다.”

“어째서인가?”


동시에 우리 사이의 역할이 역전되었다. 나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순수한 의문을 담아 눈을 동그랗게 뜬 이 노인에게 마치 선생이 된 것처럼 설명했다.


“그 세 가지는 전조를 지배하던 원나라도 가진 것이었습니다. 압도적인 무용, 그에 따라온 거대한 영토와 번국, 나아가 약탈과 지배로 강탈한 부. 그런데 그들은 100년을 못가 멸망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된 영문입니까? 그들이 진정 대국입니까?”

“...”


내 설명에 잠시 입을 벌렸던 그는 곧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단서를 드리지요. 영길리는 척박한 섬에 지나지 않아 수백 년 전부터 거친 바다를 오가며 부를 쌓았고, 아라사는 국토의 절반이 황무지와 동토라 백성들이 고된 삶을 보내는 허울뿐인 제국입니다. 이중 청나라만이 오래도록 천하를 정복하고 경영한 전통의 강대국입니다. 허나, 그런 그들이 최근 서양의 열국에게 침략 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대체 왜일까요?”

“영토와 인구, 산업과 재화. 청과 영길리, 아라사의 차이점이라. 차이점···.”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이제는 차게 식은 찻잔의 겉을 손가락으로 튕기곤 생각에 잠겨 입속을 맴돌던 단어를 바보처럼 반복하던 노인에게 차분히 말했다.


“···그것은 그들이 만주족의 나라이되, 한족의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

“영길리는 자신들의 핏줄과 역사에 오래도록 자신감을 품고, 아라사는 황제의 아래에서 자신들의 전통과 존재를 기억합니다. 청나라의 백성과 왕공만이 기름과 물처럼 서로를 경원시 하지요.”


이윽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눈을 번쩍 뜨고 날 바라보는 노인.


“그렇군. 아니, 그래! 그랬던 거야!”


최익현은 숫제 감동하여 탁상의 모서리를 강하게 쥐곤 부들부들 떨었다. 내 조언이 이 고지식하고 어쩌면 가장 위험할지도 모를 남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자세하게 모르겠지만,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확실했다. 왜냐하면 그의 눈이 이보다 더 호의적일 수 없다는 듯이 나를 향해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말해주게. 더!”


곧 50살 먹은 노인이 아닌 것처럼 혈기왕성해진 그는 탁상을 엎을 듯이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빨리 말하게!”

“그, 그렇게 재촉 안하셔도 오늘 이야기할 시간은 많습니다. 좀 뒤로 물러나시고. 예, 아무튼 정리하자면, 제 생각엔 강대국의 조건은 딱 두 가지입니다.”

“그게 뭔가!”


나는 귀청이 떨어질 만큼 뇌성벽력과도 같은 큰 목소리로 소릴 지르는 그에게 헬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미, 민족과 문자입니다! 문자!”

“민족? 문자?”

“하나로 뭉친 민족은 화염에 여러 번 담금질한 쇳물과 같고, 문자는 거대한 궁궐을 짓는데 필요한 반듯한 반석입니다. 둘이 존재해야만 다가오는 풍파에, 그리고 역사에서 반드시 맞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민족, 문자, 민족, 문자, 민-.”

“저, 저기요?”


그러자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몇 차례 단어들을 반복적으로 읊조린 최익현이 불타는 듯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이 사람 오늘 왜 이래요!

당신 원래 이런 캐릭터야?


‘마냥 고지식한 유학자는 아닌 줄 알았는데, 원래 다혈질적이었나? 아니면 내가 잘못 짚은 건가?’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 사이의 역할이 또 바뀌었다. 나는 어딘가 망가진 사람처럼, 혹은 오한이 든 병자처럼 덜덜 떨기 시작한 그를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보았다.


그때였다.


[쾅!]


“역사!”


탁상을 뒤집은 최익현을 피해 나는 얼른 몸을 숨겼다.


“히익!”


찻잔이 허공에 부유하고, 내가 정리한 문서들이 1월 새하얀 눈처럼 내리던 때.


“역사와 민족, 그것이 우리에게 닥칠 고난과 역경을 피할 유일한 방책이로다!”

“뭐, 뭐요!?”


나는 화들짝 놀라 황급히 최익현의 얼굴을 바라봤다.


“헉!”


크, 큰일났다! 이 양반 눈이 완전히 돌아갔어!


‘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마치 귀신이라도 씐 것처럼, 눈을 완전히 뒤집어 동공이 있을 위치가 하얗게 물든 최익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뒤집은 탁상 위로 올라서서는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아, 이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서양의 오랑캐와 중원의 오랑캐, 섬의 해적들이 이 나라 강산과 겨레를 오염시키려 든다면 우리는 반드시 결단을 내려야할 것이니, 오호라 어찌하면 민족의 혼과 역사를 이천만 동포의 귀에 못이 똑똑히 박히도록 만들겠는가? 정답은 우리의 문자이며 역사뿐! 천하의 도리가 바로 서질 못했다면 우리가 세상을 가로막은 창을 부수고 도리어 떨치고 나아가 설파하면 될 것을 어찌 이토록 고심했더냐! 한심하다, 한심해!”

“예, 예엣!?”


그쯤 되자 나는 슬슬 두려웠다.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 각성시킨 것 같았다.


작가의말

오늘도 본 작품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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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43화 - 금수회의록 (1) +7 24.04.28 1,068 47 15쪽
43 42화 - 금의환향 (3) +5 24.04.27 1,074 48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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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38화 - 콜레라 (2) +10 24.04.23 1,014 44 15쪽
38 37화 - 콜레라 (1) +8 24.04.22 1,059 41 14쪽
37 36화 - 대한양행 (3) +17 24.04.21 1,123 51 17쪽
36 35화 - 대한양행 (2) +4 24.04.20 1,121 46 15쪽
35 34화 - 대한양행 (1) +2 24.04.19 1,236 47 18쪽
34 33화 - 혁명의 당위성과 전위당론 (2) +6 24.04.18 1,254 45 13쪽
33 32화 - 혁명의 당위성과 전위당론 (1) +7 24.04.17 1,281 4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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