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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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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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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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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글자수 :
612,952

작성
21.06.10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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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86. 탑 (2)

DUMMY

3층은 아래층보다 손상이 심각했다. 기계 대부분이 내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여러 측정기나 감지기는 최대치에 다다라 불길한 경고음을 남발하고 있었다. 기계를 돌보는 인부들은 원인파악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는지 쓸데없이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본래라면 간단한 조작과 점검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기계의 설계도는 황실의 영역이다. 탑에서 벌어진 문제는 단순한 인부들이 다룰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무너지려는 건물을 양손으로 받친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조차 없었더라면 탑은 기능을 정지했을 것이다. 현재 인류에게 최전선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었다.


“반장이 보냈느냐?”


공구 상자를 든 방호복이 헌진과 하나 앞에 서 있었다. 하나는 엄지만 치켜들어 뒤에 있는 헌진을 가리켰다.


“기사 나리가 와서 최상층까지 안내 중이에요.”

“일은 다 끝냈고? 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절 뭘로 보는 거예요? 물론 완벽하게 끝냈죠.”


하나가 우쭐거리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최상층이라, 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


인부는 공구 상자를 옆에 내리며 팔짱을 꼈다.


“길이 아직 안 열렸을지도 모른다. 벽이 원체 변덕스러워야 말이지. 헛걸음일 수도 있다.”

“뭐, 헛걸음을 해봤자 제가 아니라 여기 있는 기사님이죠.”

“살펴 가시오, 기사 나리. 주변에 있는 것들은 만지지 말고. 하나야, 교대시간까지는 돌아와야 한다. 벽에게 안부 전해주고. 너까지 너무 위로는 가지 마라.”


하나가 손을 흔들며 인부를 지나쳤다. 헌진은 잠자코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벽을 인격체인 마냥 말했다.


“벽이란 뭐지.”

“네? 벽은 벽이죠. 작업에도 못 써먹고 말도 안 들어서 다들 벽이라 불러요. 걔는 이름도 없거든요.”


하나가 자신의 명찰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벽이란 단순한 숫자조차 부여받지 못한 무언가를 뜻했다.


헌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벽을 마주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벽이었다. 계단을 가로막은 거대한 살덩이를 헌진은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었다. 살덩이는 호흡이라도 하듯이 꿈틀거렸고 땀을 흘렸다.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저것은 저런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었다. 거대한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명확히 외부를 인지하고 있었고 헌진과 하나의 기척에 반응했다. 생명보다 사물이라고 불러야 어울릴 테지만 그것을 부정하는 괴리감은 형언할 수 없었다.


“야, 비켜.”


하나가 벽에 다가가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벽이 반응하듯 몸을 움츠렸다.


“비키란 말 안 들려?”


살덩이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말은 아니었다. 차라리 호흡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게 뭔 소리야? 위험하긴 뭐가?”


그러나 하나는 벽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헌진은 하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본질은 같은 존재인가. 이미 인류와는 다른 종으로 분화된 이들끼리 의사소통이 가능해도 이상한 바는 아니었다.


“하루 이틀이야? 대충 50년 내내 그랬어! 그게 뭐가 위험하니? 맨날 네가 방해만 해서 다른 사람들도 위로 못 올라가잖아! 작업할 게 산더미같이 있는데!”


나리아는 벽을 주먹으로 두들기고 발로 걷어차기도 했지만 변화는 없었다.


“기사님, 어떡하죠? 위로 보내줄 생각이 없나 본데요.”


베어야 하나. 헌진은 톱니칼을 쥔 채 망설였다. 적어도 다른 인부들이 보고 있을 때 할 짓은 아니었다.


그때 벽이 움츠렸다. 기사라는 단어에 반응한 모양이었다. 하나는 놀라 몇 걸음 물러섰다.


“어어, 지금까지 말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벽이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길을 열었다. 한 사람만 간신히 지나갈 길이다. 헌진은 벽과 대화할 수 없었지만, 그 뜻은 얼핏 이해가 되었다. 기사라는 말에 반응했다면, 오직 기사만 지나가라는 뜻이었다.


“뭐? 왜 나는 지나가지 말란 거야?”


아니나 다를까 하나가 벽에게 따지고 들었다. 헌진은 몰래 칼을 쥔 손을 거두었다.


“지나가겠다.”

“괜찮겠어요? 길은 알아요?”


헌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좁은 길을 통과했다. 뒤에서 하나가 발을 동동 구르는 기척이 들려왔다. 따라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헌진이 지나가자마자 길은 다시 좁혀졌다. 하나를 들이고 싶지 않다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벽을 통과한 순간, 헌진은 벽이 출입을 통제하는 이유를 피부로 깨달았다. 독기가 온몸을 찔러댔다. 헌진의 숨마저 옥죄었다. 기사를 압박할 정도라면 이곳의 독기에 일반인은 형체를 유지하기도 힘들 것이다.


공기마저 무거워진 듯한 공간에는 다른 살덩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문제가 발생한 지점을 덮은 채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방호복을 입지 못해 형체를 잃은 채로도 살덩이들은 작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헌진은 탑에 들어설 때부터 느꼈던 수많은 인기척을 떠올렸다. 그 기척의 대부분은 이렇게 돌아다니는 살덩이들이었을 것이다.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헌진은 본능적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살덩이들로 가득 차 꿈틀대는 가운데, 공구를 양손에 든 누군가가 서 있었다.


긴 머리를 대충 묶고 기름때에 찌든 여성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공구 상자에서는 잡다한 도구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녀를 도우려는 듯 살덩이 몇이 몸통에 전선이나 서류 따위를 운반하고 있었다.


“······린첸이냐.”


헌진이 기억하고 있는 린첸은 쌍검을 능숙하게 다루는 뛰어난 전투요원이었다. 공구와 기술은 그녀와 동떨어진 단어였다. 무기로 삼기 위해 망치를 들었다면 이해가 되었지만, 지금처럼 무언가를 고치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았다.


린첸은 다소 멍한 시선으로 헌진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헌진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흩어졌다. 그녀는 다친 기계를 때리듯 손바닥으로 제 관자놀이 부근을 두들겼다. 그러자 흐려졌던 시선이 어느 정도 또렸해졌다.


“헌진?”

“오랜만이군.”

“오랜만? 네, 그렇네요. 얼마만, 아니, 얼마만이죠?”

“······탑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냐.”

“무슨 일.”


린첸과의 대화는 맞물리지 않았다. 기사조차 고농도의 독기에 지나치게 노출되었으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한때는 누구보다 전투에 앞섰던 린첸의 망가진 모습은 현재 탑의 상황보다 비참하게 보였다. 헌진은 힘없이 칼을 늘어뜨렸다.


“나를 알아보겠느냐.”

“헌진.”


린첸의 코에서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바구니를 얹은 살덩이가 다가와 피를 받아냈다. 린첸은 몇 번인가 눈을 깜빡이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허리춤을 뒤져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린첸의 주머니에서는 한층 더 짙은 피 냄새가 났다. 린첸은 그것을 망설임 없이 들이켰다. 목울대가 울리며 꿀꺽이는 소리가 선명할 만큼 호쾌한 섭취였다.


“후우.”


린첸이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며 입가를 훔쳤다. 손을 따라 입가가 검붉게 덧칠되었다. 주머니에 든 것을 들이킨 린첸의 시선이 그제야 또렷하게 헌진을 바라보았다.


“정말 헌진이었군요. 오랜만이네요? 언제 돌아왔죠?”

“말하자면 길다.”

“말하자면 길다? 여기서 이러고 있는 제 얘기만큼이나 길까요.”


린첸은 나른하게 웃으며 한쪽 코를 막고 힘껏 내뿜었다. 짜낸 듯한 핏줄기가 바구니 위로 쏟아졌다. 코를 마시는 소리가 린첸에게서 들려왔다.


“린첸, 한 가지 확인할 게 있다. 나에게 살의를 느끼고 있나.”

“살의라, 한때는 그랬죠.”


린첸은 아무렇지 않게 헌진을 지나쳐 한 배전판 앞에 섰다. 낡은 전선을 우악스럽게 뜯어내고 뒤따르는 살덩이에게서 적당한 것을 골라내 꽂았다. 손길을 거칠었지만 작업은 섬세하게 이루어졌다. 헌진은 린첸이 다가올 때 슬며시 긴장했지만 아무런 낌새도 없자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잠깐만 기다리겠어요? 이 빌어먹을 것들, 아직 작업을 끝내지 못했거든요.”


배전판을 손 본 린첸이 네모난 기계의 외부를 뜯어내고 안쪽에 손을 집어넣었다. 살덩이가 서류를 보여주듯 솟았다. 린첸은 눈으로 서류를 읽으며 손을 움직였다. 경고음의 수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가 없군.”


헌진이 벽에 몸을 기대며 린첸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더 깊숙이 몸을 들이민 린첸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상하지 않죠. 이봐요, 헌진. 정신을 차리려고 귀한 약까지 들이마셨어요. 계속 그런 실없는 소리만 할 건가요?”

“뭘 마신 거냐.”


아무리 봐도 피가 분명한 액체였다. 약이라고 이름 붙일 것이 아니었다.


“약이라니까요. 이런 곳에서 뇌까지 흐물거리는데 그걸 마시면 정신을 차릴 수가 있어요. 뭐냐고요? 뭘까요? 이런 젠장, 약이 부족한가?”


린첸은 정신 사납게 중얼거리며 작업을 진행했다. 이윽고 일단락을 지었는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안내해.”


린첸이 명령을 내리자 살덩이가 린첸을 이끌었다.


“뭘 그렇게 말이 많아? 오늘 안에 다 끝낼 수 있다니까. 이따가 벽한테 가서 통행금지 해제하라고 해. 나머지는 인부들이 알아서 하겠지.”


린첸이 느닷없이 살덩이 하나를 걷어찼다. 그러나 힘을 전혀 넣지 않았는지 살덩이는 슬쩍 움츠릴 뿐이었다.


“누가 내 걱정하랬어? 시끄럽고 안내나 하라니까.”


헌진은 린첸의 뒤를 따라갔다. 탑에 들어서고부터 계속 누군가를 따라다니고만 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야만 한다. 도시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보다 자신의 옛 동료의 상태를 알고 싶었다.


“넋을 놓고 있으면 얼굴이 흘러내려요. 위층에 제 방이 있는데, 거울을 보다가 깜짝 놀라고는 하죠. 어느 날은 살가죽이 흘러내려서 뇌까지 보이는데, 그게 당연한 제 얼굴인 줄 알았어요. 이게 아니야, 하면서 약을 들이켜고 나서야 몸이 돌아왔죠. 아마 뼈 한두 조각은 이미 녹아서 없을 거예요.”


린첸이 자신의 오른쪽 팔을 들어 보였다. 관절이 있어야 할 팔꿈치 부근이 물줄기처럼 흐물거렸다. 린첸의 말은 담담했지만, 헌진은 그 모습을 보면서 탄식했다.


“린첸, 너를 도와주고 싶다. 그러나 나는 2구역으로 가야 한다. 그러니 말해다오. 나는 이곳에서 벌어진 일과, 너에게 벌어진 일을 알아야만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너에게서 2구역으로 가는 통행권을 받아내야겠다.”


린첸이 잠시 멈춰 서서 헌진을 돌아보았다. 태연한 말투였지만 눈은 얼마간 젖어있었다. 헌진은 린첸과 마주치고 처음으로 그녀의 감정을 엿보았다.


“옛날 얘기는 제 취향이 아니지만요.”


린첸은 설핏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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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85. 탑 (1) 21.06.09 19 2 11쪽
85 84. 3구역 (5) 21.06.08 23 2 11쪽
84 83. 3구역 (4) 21.06.07 19 2 12쪽
83 82. 3구역 (3) 21.06.04 22 2 12쪽
82 81. 3구역 (2) 21.06.03 43 2 11쪽
81 80. 3구역 (1) 21.06.02 24 2 11쪽
80 79. 옛 이야기 (4) 21.06.01 20 2 12쪽
79 78. 옛 이야기 (3) 21.05.31 21 2 14쪽
78 77. 옛 이야기 (2) 21.05.28 20 2 12쪽
77 76. 옛 이야기 (1) 21.05.27 28 2 11쪽
76 75. 기사의 목 (4) 21.05.26 23 2 11쪽
75 74. 기사의 목 (3) 21.05.25 21 1 11쪽
74 73. 기사의 목 (2) 21.05.24 21 1 12쪽
73 72. 기사의 목 (1) 21.05.21 22 2 12쪽
72 71. 출항 (8) 21.05.20 21 2 13쪽
71 70. 출항 (7) 21.05.19 22 2 12쪽
70 69. 출항 (6) 21.05.18 23 2 11쪽
69 68. 출항 (5) 21.05.17 22 2 12쪽
68 67. 출항 (4) 21.05.14 28 2 11쪽
67 66. 출항 (3) 21.05.13 22 2 12쪽
66 65. 출항 (2) 21.05.12 39 2 12쪽
65 64. 출항 (1) 21.05.11 33 2 12쪽
64 63. 방주 전투 (5) 21.05.10 26 2 11쪽
63 62. 방주 전투 (4) 21.05.07 25 2 11쪽
62 61. 방주 전투 (3) 21.05.06 24 1 11쪽
61 60. 방주 전투 (2) 21.05.05 43 2 11쪽
60 59. 방주 전투 (1) 21.05.04 25 2 13쪽
59 58. 두 기사 (3) 21.05.03 25 1 12쪽
58 57. 두 기사 (2) 21.04.30 27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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