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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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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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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1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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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5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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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74. 기사의 목 (3)

DUMMY

헬무트가 마른 침을 삼켰다. 기사의 자해를 목전에 두고 평정을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제국의 칼이자 방패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데, 그 결정권을 자신이 지니고 있다. 도시의 집행자인 기사는 그 자체가 독립된 법이다. 집정관과 기사는 별개의 수뇌로서 구역을 다스린다. 비록 스스로 기사를 포기한 페이였지만, 그 목숨의 무게는 감히 잴만한 것이 아니었다.


“페이긴, 그대는 나를 신뢰할 수 있소?”


헬무트가 식은땀을 훔쳤다. 스스로 신뢰를 깎는 말일 수도 있었지만 결정을 유보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기사거나 기사였던 자가 네 명이나 이 자리에 있는데, 그대는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겐가?”


헬무트의 시선이 방황했다. 알베릭은 기절한 채였고 의지할 수 있을 법한 기사는 헌진과 루미스뿐이었다. 헬무트는 그들의 이름조차 몰랐지만 기사라면 그들에게 맡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 경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도 되겠소?”


페이의 뒤를 잡은 채 팔짱을 끼고 있던 헌진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기사는 집정관의 결정에 간섭할 수 없다. 집정관의 뜻대로 해라. 나는 페이긴의 목을 회수하면 그만이다.”


루미스는 창을 품에 끌어안고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눈 언저리가 깊게 파인 그녀의 모습은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헬무트는 차마 그녀를 재촉하지 못했다.


약속이 절대적인 장소다. 헌진은 집정관에게 전권을 위임한 것처럼 보였지만, 기사가 증인인 자리에서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다.


“무엇을 기다리는 겐가, 집정관. 그대가 결정할 것은 간단하지않나. 손쉽게 내 목을 취하고 해방군 동지들의 목숨을 보장하거나, 어렵게 내 목을 취하고 이 자리에 있는 병사들의 목숨 절반을 버리는 것뿐일세.”

“절반이라고.”


헬무트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병사들이 흠칫 떠는 모습이 보였다. 전투가 가능한 기사가 둘이나 있는데 페이는 병사 절반을 데리고 갈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 많은 목숨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 헬무트는 고민을 끝내기로 했다.


“알겠네.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반란군이 또 다른 범죄를 벌이지 않는 한, 지금까지의 죄는 묻지 않겠네.”

“깨어나면 알베릭에게도 전해주게. 구역을 수호하고 싶다면 이 자리의 협정을 명심하고 알아서 잘 처신하라고 말일세. 내가 길러낸 아이들이니 쉽지 않을 게야.”

“······알겠네.”


페이가 자신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살가죽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팽팽해졌다.


“페이긴.”


헌진이 넌지시 페이를 불렀다.


“뭔가. 유언이라도 들어줄 셈인가?”

“원한다면 편하게 보내줄 수 있다.”

“거절하겠네. 태어나는 것조차 스스로 정하지 못한 삶이니 죽음만큼은 자유롭네 누리겠네.”

“너다운 말이다.”


헌진은 옛 동료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페이는 자신이 일으킨 반란을 스스로 매듭지으려 하고 있다. 누군가는 페이의 죽음을 자포자기라고 평가할 것이고, 누군가는 명예로운 죽음을 자처했다고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헌진에게는, 그나마 자신이 일구어낼 수 있었던 것들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칠 줄 아는 어른만이 보였다.


“헌진.”


페이는 제 목을 뜯어내기 직전, 지가나듯 태연한 말투로 헌진을 불렀다.


“말해라.”

“이 도시의 밖에서, 우리는 바다를 보았네. 그렇지 않나?”

“그렇다.”


페이의 말끝이 조금 떨렸다. 죽음이나 고통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헌진은 두려움을 확인하려는 어린아이의 떨림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말일세. 검은 땅만 이어지는 세상에서, 새카만 물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그때 목격한 바다를 소름끼치도록 아름답다고 생각했네. 세상 끝 어디까지고 넘실거리는 물결에, 나는 매료되었다네.”


먼 과거를 더듬는 페이의 기억은 헌진과 같은 곳을 떠올렸다. 기억을 헤집는 페이의 목소리는 불안감으로 흐릿했다.


“그러나 지금,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아. 그대가 황제를 벤 시점에서 모든 기억이 엉망진창이란 말일세.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바다는 어땠나. 그대는 기억하고 있을 테지. 바다는 정말이지 그토록 아름다웠던가?”


배라는 형태를 고집했던 것은 그 아름다움에 이끌렸기 때문인가. 어려진 외견만큼 정신도 어려졌을 테니 기묘한 집착도 이해되었다. 소소한 의문이 풀렸다. 그러나 헌진은 페이의 말에 또 다른 의문을 느꼈다.


페이의 기억을 부정해도 되는 것인지 헌진은 짧게 망설였다. 그러나 옛 동료의 마지막 길 끝에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바다는 대부분이 메마른 땅일 뿐이었다. 바다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기림 제국 근방이 고작이다. 네가 기억하는 바다와 내가 기억하는 바다는 다른 모양이군.”

“그런가.”


먼 과거였으면 페이가 목격한 바다는 진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리아의 말에 따르면, 몇 번의 태양이 떨어진 후 일어난 거대한 지각변동으로 바다 역시 갈라지고 쪼개졌다. 바다라고 부를 수 있는 웅덩이는 고작 이 도시의 서쪽에 얕게 펼쳐져있을 뿐이다. 페이가 말한 것처럼 세상의 끝과 끝을 잇는 바다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의심이 현실로 다가왔다. 헌진의 말에 페이는 공허한 한숨을 내쉬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생명마저 빠져나간 듯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 기억도 그저 심어졌을 뿐이란 말인가?”

“······.”


헌진으로서는 대답할 수 없는 말이었다. 대답을 바란 말도 아니었다. 그 대답은 오직 황제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자문에도 답을 찾을 수 없었고, 페이는 그저 한탄했다.


“나는 진정 내 의지만으로 자유를 추구했을까.”

“그렇게 믿어라.”

“믿어라?”


페이가 피식 웃었다. 크게 벌어진 목덜미에서는 피가 멈추지 않았다. 페이는 떨어지는 핏물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래, 그게 고작인가.”


페이는 마지막으로 헌진을 일별했다.


“잘 있으시게.”


페이의 손이 제 목덜미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목을 뜯으면 모두 끝날 일이다. 반란의 꿈과 애매했던 기억도, 과거의 한탄과 불확실한 자유도 그저 머릿속에 맴도는 환상에 불과하다. 페이는 그 모든 것을 스스로 끝내려 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페이의 목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 그 정적을 찢듯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저기요!”


누구나 당황해 반응이 늦었다. 뜬금없이 허공에서 급속도로 낙하하는 목소리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저 좀 받아줘요!”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나리아에게 반응한 것은 근처에 있던 루미스였다. 나리아가 어째서 하늘에서 떨어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저 작은 몸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루미스는 가볍게 뛰어올라 공중에서 나리아를 낚아챘다.


“고, 고마워요.”


급속도로 뒤집힌 세상에 나리아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주변의 모든 시선이 느닷없이 등장한 소녀에게 집중되었다. 건물 지붕에서 뛰어내리느라 머리를 감추고 있던 모자가 나풀거리며 뒤늦게 떨어졌다. 옅은 금발이 세상에 드러나자 색이 많은 구역에서 유달리 눈에 띄었다.


페이조차 나리아를 보며 의아해했다. 마저 목을 뜯어도 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시선에 부끄러워하던 나리아가 페이를 발견했다. 소녀는 곧 루미스의 품에서 벗어나 페이에게 다가갔다.


“페이! 지붕에 날 혼자만 두고 가면 어쩌라는 거야! 혼자서 어떻게 내려오라고!”

“그대, 지금은 그럴 때가······.”

“그럴 때가 아니긴 뭐가!”


나리아가 주먹으로 페이의 어깨를 두들겼다.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나리아는 홀로 지붕 위에 남자 내려갈 방법을 찾아 전전긍긍했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오가며 마침내 눈 딱 감고 뛰어내리기로 했을 때, 나리아는 저 아래에 있을 헌진이나 루미스가 반응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페이에게 정신이 팔린 두 기사는 반응하지 못했다.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지 않았더라면 그저 피떡이 됐을지도 모른다.


“근데, 지금 뭘 하는 거야?”


나리아가 페이의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목덜미를 쥐고 있는 페이의 모습은 얼핏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페이는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지 몰라 헌진을 돌아보았다. 헌진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나리아에게 다가갔다.


“나리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헌진! 왜 제 통신을 자꾸 무시한 거예요? 그리고 그럴 때가 아니라뇨? 지금 상황 다 끝난 거 아니에요? 페이가 항복한 거 맞죠?”

“아직 안 끝났다.”

“안 끝났다고요? 설마 페이가 지금 자기 목이라도 뜯는 중이라는 건 아니죠?”


나리아는 페이의 자세를 가리키며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나 헌진이 굳은 얼굴로 묵묵히 바라보자, 그 농담이 사실이라고 깨달았다.


“어······진짜에요? 왜?”

“거래를 했다. 페이긴이 최후의 저항을 포기하는 것과, 그의 동지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그 대상이다.”

“······진짜야?”


나리아가 페이를 돌아보았다. 페이는 다소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껏 비장했던 감정이 바보 같을 지경이었다.


“멍청아! 너야말로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나리아의 손끝이 따귀라도 올려붙일 듯 부르르 떨렸다. 멱살을 쥘 기세로 페이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나리아는 머리 끝까지 치민 화에 시뻘갰다.


“네가 죽는다고 뭐가 끝날 것 같아? 해방군이 잠자코 있겠냐고!”

“그 아이들에게는 내가 일러두었다네. 세하라가 그들을 이끌어서······.”

“이 멍청아! 내가 지붕 위에서 다 봤어!”


나리아가 흥분한 손짓으로 허공을 그어댔다. 그 손짓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페이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나리아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들겼다.


“다들 뭐 하는 거예요! 헌진도, 루미스도! 기사잖아요! 알 거 아니에요! 주변을 좀 둘러봐요!”


페이가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이 있는 대로를 둘러싸고 있는 은밀한 시선을 느꼈다.


“이미 포위당했다구요!”


나리아의 고함과 함께 길가에서 살기가 엄습했다. 대로에 늘어선 온갖 건물의 창문과 옥상, 골목길에서 총기와 활을 쥔 반란군이 제국군을 겨냥했다. 그들 중 대다수는 헌진과 루미스를 노렸다.


헌진은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야 그제야 반란군 전체를 감지해냈다. 페이의 죽음을 앞에 두고 방심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페이를 통해 기사의 기능을 누구보다 숙지하고 있던 세하라가 세밀하게 배치한 결과였다. 매복과 기습에 특화한 반란군의 기동력이 함께 발휘되었다.


“흠, 당했군.”


위기감 하나 없이 헌진이 중얼거렸다. 페이는 반란군의 무리 중 세하라를 발견하고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세하라, 어째서.”


헌진이 나리아를 보호하듯 잡아 끌었다.


“잘 키웠구나, 페이긴.”

“지나치게 잘 키운 모양일세.”


페이는 여전히 제 목을 쥐고 있었으나 힘이 빠지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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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68. 출항 (5) 21.05.17 22 2 12쪽
68 67. 출항 (4) 21.05.14 28 2 11쪽
67 66. 출항 (3) 21.05.13 2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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