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이야기(2)
99화 - 마지막 이야기(2)
네그라도는 나를 내려다주곤 재빠르게 정령계로 돌아갔다. 어지간히도 싫었나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어르신의 기운이 흐르는 장소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도 가기 싫다... 그런데 가야 했다. 안 오면 대륙을 멸망시키겠다며 귀여운 자손을 협박해댔으니까. 힘이 약한 자가 가야지 별 수 있나. 오랜 세월 동안 자라온 나무를 베지 않고 잔가지만 쳤다. 속도를 더디게 하는 덴 이게 최고였다.
그러나 우리 성질 급한 어르신은 내 모습을 참지 못하겠는지 나무를 움직여 평평한 길을 만들어주셨다. 무척 황공하다. 결국, 10분 만에 어르신이 거주하시는 나무집에 도착했다. 예상 외로 잘 지어서 놀랐고 가축을 키우셔서 두 번 놀랐다. 드래곤이 가축이라니.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어르신은 뭐가 못마땅한지 장작을 패며 멀뚱멀뚱 서 있는 나에게 말했다.
“너, 꾀병 부렸냐? 왜 이렇게 늦게와?”
“아뇨, 다 나을 때 오라고 하셨던 어르신이잖아요.”
“야, 너, 이리 와서 장작 좀 패라.”
어르신은 뒤로 기지개를 켜며 말씀하셨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패야 했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도끼를 마력에 실어 패니 꽤 손맛이 좋았다. 이 장작이 어르신이었다면, 이 장작이 어르신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매일 팰 텐데!
“너, 내 얼굴이라고 생각한 거냐?”
하여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시다. 나는 어리광부리는 손녀처럼 웃었다. 그러자 어르신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빨리 패라고 재촉하셨다. 결국, 30분 동안 이 많은 장작들을 패야 했다.
“뭐야 벌써 다 했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진 않았지만,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든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나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바깥바람이 춥다며 안으로 들어오라신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드디어 어르신의 러브 하우스로 입성했다. 잠깐 사라지셨다 했는데 어느새 아침 준비를 하고 계셨나? 나는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르신은 내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했으니 먹어야지. 나는 누구처럼 악덕한 녀석이 아니다.”
그 누구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만, 왠지 어르신보단 착하실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바깥으로 내뱉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어르신의 옹졸함의 끝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건 무슨 음식이에요?”
“알 것 없다. 주는 대로 먹어라.”
“네, 네. 음? 이거 엄청 맛있는데요?”
나는 생전 처음 맛보는 음식을 엄청난 속도로 흡입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먹었던 음식은 소화된 지 오래다. 어르신은 말없이 비워진 음식을 채우셨다.
“그런데 안 드세요? 맛있는데.”
“드래곤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
“역시 드래곤이 최고네요!”
그러자 어르신은 키득거리며 나에게 묻는다.
“너에게도 드래곤의 피가 흐르는데?”
“그럼 저도 최고죠!”
“그것 참 편한 논리일세. 돌대가리 손녀야, 먹으면서 들어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달콤하고 물컹거리는 음식을 포크로 살짝 찔렀다. 오오! 뭔가 맛있어 보여.
“이거 뭐예요? 물컹물컹거리는 게 재미있는 음식이네요.”
“푸딩. 드래곤은 말이다... 하아, 이 빡대가리 손녀야, 어르신이 말하면 좀 들어라.”
“계속 말씀하세요. 전 잘 듣고 있어요.”
어르신은 관자놀이를 주무르시더니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푸딩을 찌르며 귀를 활짝 열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드래곤은 위대하다. 이 문장 하나로 종결된다. 지루한 이야기에 하품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내곤 아껴두었던 푸딩이란 녀석을 단숨에 입속으로 넣었다. 어르신은 헛기침을 한 번 하시곤 나에게 물었다.
“드래곤들이 이 대륙을 떠난 이유는 간단하다. 신들은 인간을 택했고 우리는 뒷전이 되었다. 다른 종족도 마찬가지. 그리하여 우리는 신들이 없는 대륙을 향해 떠난 것이지.”
“그런데 어르신은 왜 떠나지 않았어요?”
“유희 중에 네 할머니를 만나서.”
“아하, 할머니가 저처럼 매우 아름다웠나보군요?”
그러자 어르신의 눈빛이 이상해졌다.
“네 할머니를 욕되게 하지 마라. 그 여인은 이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으니까. 오죽했으면 미의 여신이 질투하여 부부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겠느냐.”
“믿지 못하겠네요.”
“말을 말자구나. 아무튼, 나는 동료들을 떠나보내고 네 할머니와 함께 자리를 잡고 새로 시작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지. 미의 여신은 우리에게 저주를 내린 것이다.”
“왠지 알 것 같은데요? 아얏! 왜 때리세요!”
어느새 어르신의 지팡이가 내 머리를 강타했다. 끼어들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우리 사이에 자식이 생기지 않게 했지. 하지만 우리는 부지런히 노력했다.”
“뭐, 밤일을 열심히... 아 자꾸 왜 때리세요!”
“이 꼬맹이가 어르신 말하는데 왜 자꾸 끼어들어!”
“아, 못할 말 했어요? 저도 알건 다 안 다고요!”
“네가 뭘 알아? 고작 20년을 산 주제에 내 앞에서 주름 잡는 것이냐?”
으음, 그건 인정. 나이로 치면 어르신을 이길 수 없다. 아무튼 폭력은 결사반대!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노력했다는 건 다른 신께 기도를 드렸다는 거다. 바로, 아투스님이었지. 아투스님은 우리를 가엾게 여기시곤 미의 여신이 건 저주를 풀어주셨다. 그래서 슈네이도르 가문이 탄생할 수 있던 것이다.”
“아투스님이 큰일을 하셨네요.”
“네 아비가 아투스님의 대주교라며?”
“데니츠 삼촌에게 들었어요?”
“그래, 뭐, 원래 정체는 반역자 수장이었다는 건 둘째 치고 솔직히 놀랐구나.”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지금쯤 내가 사라졌다는 걸 집에선 눈치 챘겠지. 후우, 그래도 후회하진 않는다. 오래전부터 결심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그렇구나. 너, 드래곤 될 생각 없냐?”
이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갑자기 드래곤이라니? 내가 벙찐 얼굴이 되자 어르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왜, 싫으냐?”
“아니, 싫은 건 둘째 치고 그게 쉽게 될 일이에요?”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네 몸엔 드래곤의 피가 흐른다고. 그래서 네게 제안하는 것이다만?”
“다른 사람은요? 데니츠 외삼촌도 있고 프시케 언니도 있고...”
어르신은 고개를 흔드셨다.
“500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드래곤의 피를 가진 아이가 나타났는데 그게 바로 너야. 안타깝게도 말이지.”
정말 안타까운 듯이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더 반감이 생기잖아.
“... 안 될래요.”
“왜? 무한한 수명을 가질 수도 있고 나처럼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도 있는데...”
나는 어르신의 제안을 박차고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인간답게 살 거예요.”
“하아... 이래서 널 빡대가리라고 부르는 거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입은 웃고 계셨다. 뭐, 시험은 통과했다는 건가? 다행이었다.
“그런데 이거 알고 있었느냐?”
“무서운 얼굴로 말하지 마세요. 괜히 불길하잖아요.”
“세례식에서 성별은 누가 정할까?”
어째 정말 불길하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레 어르신께 물었다.
“설마, 어르신이 마음대로 결정하는 건 아니겠죠?”
“어라? 너 알고 있었느냐? 나름 기밀이었다만?”
빠직. 갑자기 머리가 어질어질, 분노 게이지는 최고점을 경신하고 있었다. 내가 참지 못하고 어르신에게 따지려고 하는 순간 망할 입술이 열렸다.
“다시 남자로 만들어줘?”
어르신의 공격에 엄청난 박탈감이 밀려들어온다. 이 사람... 아니, 드래곤 정말 싫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와서 남자라니. 이런 미친 선택이 어디 있어? 내가 토라진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자 어르신은 키득거리며 말씀하셨다.
“뻥이야. 성별은 내가 주관하는 게 아니야. 신들이 결정하는 거지.”
“신들이요?”
“그래, 아투스님이 주관하는 거지만 말이야.”
정말 많이 듣는 이름이었다. 아투스님은 우리와 무슨 관계이십니까? 궁금하네요.
“그런데 외삼촌은 어디에 있어요? 그 날 구하셨다고 하셨잖아요.”
“아, 리로엘 말하는 거냐? 걔 나 몰래 도망쳤던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 물음에 어르신은 주변을 서성거리더니 낡은 서랍을 뒤지셨다. 음, 뭔가 안쓰럽다. 지상 최강의 종족이 이런 구석진 곳에서 살고 있다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난 절대 드래곤이 되지 않을 거다. 왠지 이곳에 살아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까.
“어디 보자. 여기에 있었구나. 자.”
그는 나에게 새하얀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받는 즉시 내용물을 꺼내 읽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겪었을 심적 부담감과 고통을 나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르신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나에게 말씀하셨다.
“왜 떠났는지는 너도 알 것이다.”
나는 다 읽은 편지를 조심히 봉투에 넣고 밀봉했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편지였다.
“제가 가져도 될까요?”
“마음대로. 리로엘 녀석은 네가 이곳에 올 줄 알고 있었더구나. 역시 마음에 들지 않은 녀석이야.”
“어르신 자손입니다만?”
“네 외삼촌이다만?”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다가 결국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으로 서로의 마음이 맞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이곳은 볼 일이 없다. 어르신도 내게 드래곤이 되라는 제안을 더는 하지 않으셨다. 아마 내가 거절 할 걸 알고 있었나 보다.
“엘렌, 만약에 말이다. 다시 한 번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조건은요?”
“미래의 일을 다 기억하고 힘도 그대로고 리블레다인 공작이 블랙 아미와 손을 잡기 전으로 돌아가는 거로 하지. 어떠냐? 이만하면 최상의 조건 같은데?”
마지막 시험일까? 나는 거침없이 대답해주었다.
“거절하겠어요. 전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 그렇구나. 알겠다. 마중 나가지는 않으마. 언제 돌아올 것이냐?”
“으음, 한 5년은 돌아다니려구요. 이번 일을 계기로 뭔가 깨달은 게 많아서요. 정리하려면 그 정돈 걸리지 않을까요?”
이 말을 끝으로 초대 슈네이도르 가주님의 시험을 통과했다. 만약 통과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꼼짝없이 어르신과 이곳에서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내가 가진 힘이 신들에게도 두려웠던 모양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아투스님과 초대 가주님이 힘을 써서 내가 봉인되는 걸 막아주셨다고 한다. 뭔가 비일상적인 내용을 들은 것 같았다. 나중에 아투스님의 신전에 가서 감사의 기도라도 드려야겠다.
밖으로 나오니 상쾌한 아침 공기가 나를 맞이해주었다. 나는 기지개를 한 번 쭉 켜고 네그라도를 소환했다. 자, 이제 어디로 가볼까나? 나에겐 새로운 여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 작가의말
대단원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100화는 에필로그 나갑니다. ㅎㅎ
헉! 그러고보니 오늘 16000자 넘게 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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