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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베 님의 서재입니다.

스카치에라의 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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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베
작품등록일 :
2017.11.07 22:11
최근연재일 :
2018.02.10 20:35
연재수 :
4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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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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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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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07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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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7쪽

Chapter [어딘가에선] : 00. 지금 소녀와 소년은.(1)

DUMMY

탁, 타각.


"...역사가 기억하는 이와같은 사실에 비추어 볼때..."


타각. 탁.


"........"


꾸벅, 꾸벅.


"...시토리움 광석을 중심으로한...."


꾸벅, 꾸벅....쿵.


"....시안"


"...쿠우..."


"루시안!"


덜컥!


"?! 네, 네!"


"졸려면 들키지 않고 졸아야 할것 아니냐"


잠이 덜 깨 뿌연 시야에 초로의 남성이 교탁에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쪽을 쏘아보는 모습이 어른거린다.

나...언제 잠들었지?


"네가 내 교육에 흥미를 갖지 못한다는건 잘 알지만, 그 이전에 수업시간에 조는건 용납하기 힘들구나.

그러려고 세금이 쓰이는건 아니니 말이다."


"죄송합니다..."


"뒤에 나가서 잠 깰때까지 서있다 오거라"


"네"


비척비척 일어나 등을 돌려 교실 뒤편으로 향하는 내 귓가로 킥킥 거리는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흘깃, 소리가 들려오는 곳엔 자세를 한껏 숙인채 머리를 맞대고 날 바라보며 웃고있는 한무리의 아이들이.

...웃어?


"선생님"


"뭐냐"


"쟤네 떠들어요"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긴 선생님의 표정이 딱딱히 굳어간다.

한참이나 웃고있던 녀석들은 내가 자신들을 가리키는걸 보곤 그 자세 그대로 멈춰선 교탁 위를 향해 천천히 시선을 옮기고있었다.


"또 너희들이냐..! 너희들은 나가서 손 들고 있어!"


원망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세명의 아이들은 내 뒤를 따라 교실 뒤편에 서서 묵묵히 팔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꼴좋다. 그러게 누가 웃으래?





"너 루시안! 그런식으로 배신하기 있냐?!"


"뭘 니들이 웃어서 그런거잖냐"


수업이 끝나고 난 후, 하교 준비를 서두르던 내 주변으로 아까의 3인조가 다가와 불만을 터트린다.


"야 네가 이상한 자세로 잠들어서 그런거아냐!"


"남이야 이상하게 자건 말건 무슨상관이라냐"


그래 솔직히 수업시간에 졸다 잠든건 내 책임이라 쳐.

근데 그걸로 웃으면 내가 너무....창피해지잖아 이 나쁜녀석들아.


"근데 이마는 괜찮아? 아까 책상에 세게 내리찍던데..."


3인조중 키가작은 녀석이 걱정스럽다는 눈으로 올려다본다.

안그래도 이마가 약간 시큰하던 참이다.


"도브릭, 이 녀석 머리는 돌이 들어서 단단하니까 괜찮을거야"


"....왜 내 이마를 가지고 네가 괜찮다 아니다 판단을 하냐. 데이먼"


도브릭의 머리위에 팔을 올리며 그 큰 얼굴에 통통하게 살이 들어차있는것과는 대조적으로 마른몸을 한 데이먼의 비아냥에 핀잔으로 답해보지만, 혀를 쭉 빼 내밀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녀석은 그런것따윈 전혀 신경쓰지 않는듯 싱글싱글 웃어보인다.

게다가 돌이라니, 나보다 한참 성적이 아래인 니들이 그런말하면 쓰나.


"그리고 너희들도 수업에 집중 안한건 나랑 같잖냐"


"그건 그렇지만...토비 선생님의 수업은 영 집중하기 힘들단말야. 재미도 없고"


"내말이 그말이야"


팔짱을 낀채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는 3인조의 나머지, 필의 말에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어치피 나랑 관련도없는 수업인데다 거의 항상 마지막에 시작하는 수업이다보니 항상 이시간만 되면 하루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무겁게 감기는 눈커풀을 주체할수가 없었다.


거의 매번, 이 시간만큼은 졸면서 보내는게 일상이 되었다.


"우리같은 일반인들이 시토리움에 대해 공부해봤자 졸업하고 광산에 들어갈거 아니면 영 필요도 없다고"


"맞아, 게다가 광산에서도 이렇게 배운건 쓸데도 없을걸?

채굴하기 바쁜데 역사가 어떻고 발달이 어떻고 뭐가 중요해 그런게"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지만,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진지한 자세로 이런 얘기를 나누는 이 녀석들은 그 의외의 정말 중요한것도 하지 않은채 하루하루 노느라 바쁜녀석들이다.

뭐, 어쨌든 일리는 있는말이다. 더군다나 나에게 있어선 그 의미가 더해지니까.


"그래도 광산에서 일하려면 필요하잖아? 시토리움 교육이수시간 같은거"


"난 광산 들어갈거 아니라 상관없네요~ 왜, 도브릭 넌 광산에 들어가게?"


"뭐...그만한 안정적인 직장이 없잖아. 가업은 아버지가 물려주고 싶지 않아하고.."


"그러는 필 너는? 광산 안들어가면 뭐하려고?"


"나야 뭐, 가업 이어야지?"


"필이 굽는 빵이라..."


"그 표정 뭐냐"


으르렁거리며 이를 드러내는 필의 옆모습을 곁눈질로 흘깃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른 녀석들은 의문스러워하지만, 이 녀석이 굽는 빵은 의외로 맛이 좋다.

까칠해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손끝이 세심하기도하고.


"아 루시안 우리 콜 녀석들이랑 축구하러가는데 같이갈래?"


"....니들은 공부 좀 해라 그만놀고"


"오늘만 놀고 내일부터 할거야 임마"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씨익 웃는 필의 말에 실소를 던져주곤 어깨너머로 손을 흔들며 교실을 나선다.


"오늘은 바로 집에 가야해. 기다리는 분들이 계시거든"


"앙?.....아 맞다 오늘이지..

그럼 들어가면서 우리 집 들렸다가라. 아버지가 건네줄게 있대"


"오야~"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소란스런 시장길을 터벅터벅 걷는다.

왕국에서도 변방에 위치한 곳이라 번화했다고 말하긴 무리가 따르지만, 광산이 지근거리에 있기에 그 나름대로 복작스러움은 갖추고있는 마을과 시장거리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과 번잡함으로 활기를 띄고있었다.


어디에든 존재하는 흔한 마을의 풍경.


이런 모습이 되기까지 들여온 수고와 고난의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사람들의 얼굴은 다들 있는 힘껏 미소를 짓고있었다.


딸랑.


"안녕하세요~"


"오 루시안! 어서오거라"


시장 중간즈음에 위치한 고소한 향을 연신 거리에 흩뿌리는 빵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구릿빛 피부의 거대한 덩치를 한 대머리의 중년 남성이 입꼬리를 올리며 반갑게 맞아준다.

험상궃은 외모와 근육질의 거대한 몸집과는 다르게 빵을 밋있게 굽기로 소문난 필의 아버지, 데릭 아저씨다.


"안녕하세요 데릭 아저씨. 오늘도 빵 냄새가 못참을정도로 향기롭네요"


"참을만한 냄새를 내풍겼다간 될 장사도 안되니 말이다"


껄껄 웃는 데릭 아저씨의 뒤로 무슨 소란인지 궁금한 표정을 지은 여자아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가 활짝 웃는 얼굴로 쪼르르 달려나온다.


"루시안 오빠!"


"오오 니르 아가씨 오늘은 집에 있었네?"


"응! 아빠가 빵굽는거 알려준다그래서! 그래서 친구들이 놀러가쟀는데 안나갔어!"


헤헤 웃으며 자랑스럽다는듯 우쭐대며 말하는 니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데릭 아저씨를 빼닮은 필과는 달리 아주머니와 많이 닮은 니르는 그 큰 눈망울을 가늘게 좁히며 기분좋다는듯 목젖을 울려낸다.

다행이야 니르는 귀엽게 태어나줘서.


"필 그녀석이 들렸다 가라던?"


"아 네, 아저씨가 건네주실게 있으시다고"


"뭐 별건 아닌데말이다"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가게 안쪽으로 사라지는 넒은 등을 바라보면서 코끝을 감돌고있던 고소한 냄새를 한껏 들이마신다.


"오늘따라 냄새가 훨씬 고소하네. 뭐 만들고있었어?"


머리에 손을 올려놓고 고양이의 갸릉거리는 소리를 따라하던 니르가 번쩍 눈을 뜨며 홱 소리가 나도록 날 올려다본다.

왜, 왜 그러지?


"좋은 질문이야 루시안 오빠! 오늘은 니르가 새로 고양해낸 빵을 굽고있었거든!"


"고안해낸, 말이지?"


"야옹~"


고양이의 그것처럼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고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던 니르는 이내 가게 한켠에 놓여있는 화덕에 다가가 한창 식히고있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빵을 들고 다가온다.

윗부분이 갈색으로 구워진 반원 형태의 겉모습은 극히 일반적인 빵.

하지만 그 안에서 풍겨나는 냄새는 평범한 외관으론 가둘수없는 고소함을 내뿜어내고 있었다.


"먹어봐!"


불쑥 빵을 내밀며 그 큰 눈망울에서 반짝거리는 별빛을 한껏 쏟아내는 니르의 박력에 못이겨 빵을 받아들고 입가로 가져간다.

입에 가까워지는 빵이 마치 시간이 느려지는것처럼 천천히 다가오며 그 매력적인 향을 더욱 강하게 코 속으로 밀어넣고있었다.


"...우물"


...?!


"우물...우물우물..."


"....꿀꺽"


한입 크게 베어문 빵을 입안에서 천천히 씹어본다.

역시...이 맛은...


"어..어때?"


"....빵맛"


".....헤?"


응 빵맛.


"....빵이니까 빵맛나지. 그러니까 어떠냐구?"


"응 그러니까 빵맛."


"......"


"진짜로"


장난하는것 같겠지만, 진짜 '빵'맛이 난다.

그 왜, 빵하면 흔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런 맛 있잖아. 버터향이 약간 돌면서 밀가루 반죽이 가열되어 서로 조직을 이루는 그 식감까지.

딱 그 맛 그대로다.

그 말인 즉슨.


"...별 특별한맛은 없다는거네?"


"그렇지?"


"그럴리가 없어!"


아니 진짜 그런데 그럴리가 없다그래도...

얘는 자기가 만들고는 아직 안먹어본건가?


"그럴리가...그럴리가 없어...! 하압!"


응 안먹어봤네.


"우물우물! 우물...우물?"


심각한 표정으로 힘차게 빵을 씹던 니르의 얼굴엔 이내 허망한 듯한 표정이 떠오른다.


"....진짜 빵맛이네..."


"그게 그렇게 좌절할 일이니..."


"그럴 이유가 있어!"


그게 무슨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도 나름 맛있는데..."


"아냐!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구! 이건...이건 니르가 의도한 맛이 전혀 없단말야!"


...의도라?


"무언가..무언가 빠트린건가?"


하여간 이녀석이나 필이나 빵에 대한 일이라면 이렇게 사람이 바뀌어버리니 원.

하긴 그건 아버지인 데릭 아저씨도 그러니...유전이려나?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가게 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니르의 시선이 어느 한 점에 멈춰선다.


"....!"


그리곤, 다시 표정엔 절망이 가득.

니르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그곳엔 바닥에 퍼져있는 빨간 액체와 그 위를 유리병이 뒹구르고 있었다.


"....빠트린게 설마 저거니?"


"니르의, 니르의 비전 에센스가아아아아아!!!!"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은 니르의 눈꼬리에는 눈물방울마저 맺혀있었다.

저게...그리 중요한건가?


....왠지 되게 빨간게 좀 못미더워 보이는데...


그 때, 가게 안쪽에서 걸어나오는 커다란 덩치의 그림자가 콰직, 하고.

찰박, 병을 밟아 부순것도 모자라 바닥에 퍼져있는 빨간 액체를 사정없이 밟아버렸다.


"으음? 누가 여기다 이런걸 떨어트린거냐?"


"꺄아아아아아아아아!!!!!"


다시한번 좌절하는 니르의 비명소리에 화들짝 놀란 데릭 아저씨는 서둘러 다가오며,


"이런, 이 녀석 루시안! 숙녀가 싫어하는건 아직 하면 안되잖냐! 대체 무슨 짓을 한거냐!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니르에겐 아직 일러!"


....뭐가?


"...저보단 데릭 아저씨가..."


"..앙? 나 말이냐?"


무슨얘기냐는듯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키셔도...

저기, 뒤에...


"...아..빠....!"


"으, 응? 왜 그러냐 니르야?"


".....카붑"


"?! 으아아아악?!!!"


아프겠다...


어떻게 저기까지 올라간건지, 키가 훨씬 큰 데릭 아저씨의 머리를 깨물고있는 니르와 발버둥치는 데릭 아저씨의 소란 때문에 데릭 아저씨가 내게 무슨 용무를 가지고 계셨던건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그거보다 더 재밌는게 눈앞에 있으니까.





그리고, 잊고있어도 어차피 데릭 아저씨가 잘 기억하고 있어주셨으니 상관없겠지.


'아휴 아파라...자 이거 받거라. 오늘이 그날이지?'


'...기억하고 계셨네요'


'잊을 수 있을리가 없잖냐. 그 녀석은..이 마을의 은인이기 이전에 내 생명의 은인이니까말이다'


'.....'


'네가 싫어하니 직접 찾아갈수는 없지만...이런거라도 챙겨주지 않으면 내 마음이 편치않으니 부디 받아다오'


'...감사합니다'


'..고맙다.

아 참, 루디가 네 집에 먼저 가있을게다'


'루디 아주머니가요?'


'...말려도 들어야말이지..네가 잘 타일러 주겠니?'


'...네'


가게에서 나오기 전 데릭 아저씨와 나눴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며 집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는다.


광산에 가까운 마을과 학교와는 반대편으로 꽤나 떨어진 숲 속 공터의 외딴 통나무집.

매번 긴 등하교길이 불편할만도 한데, 이제와선 숲을 가로지르는 이 길이 꽤나 익숙해져 마을에 들어와 살라는 여러 권유에도 한사코 고개를 젓고있었다.


이제와 마을에서 사는것도 어색하고 그 이전에, 이곳은 떠날래야 떠날수없는 '소중한 곳'이니까.


"미야앙~"


"응?"


숲속 외길이 이어지던 그때.

대강 절반쯤 온 길의 옆 수풀에서 날카로운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양이와는 닮은 듯 다른 울음소리.

녀석, 오늘도 나와있는건가?


"먕, 미야앙"


"키니, 거기있니?"


"미양!"


바스락, 하는 소리가 울리고 수풀이 들썩였다 잠잠해진다.

나 원 참...


"들키지 않으려면 울음소리를 내지말아야지"


".....미양"


"어서나오련"


자세를 낮춰 손을 내미니 들썩거리던 수풀 사이 그림자안에서 두개의 점이 반짝인다.

이내 수풀을 헤치고 네 발의 몸이 긴 고양잇과의 생김새를 한 동물이 천천히 걸어나와 복슬거리는 세가닥의 꼬리를 살랑이며 내밀고있던 손에 머리를 비벼낸다.


"오늘도 숲 속을 돌아다니던거야?"


"미야앙, 미양!"


살짝 짧은 앞발을 팔뚝에 올려놓으며 그 커다란 눈동자로 날 올려다보는 키니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영특한 녀석이다. 사람이 하는 말을 이해하고 대답까지 할 수 있는 짐승은 세상에 이녀석 밖에 없을지도 몰라.


짐승이란 말, 굉장히 싫어하지만.


"집엔? 루디 아주머니 계시니?"


"미양?"


모른다는거구나.

언제부터 나와있었던거야 이녀석은...


"돌아가자"


내 말에 팔을 타고 뛰어올라온 키니는 그 긴몸으로 내 목을 둘러싸고는 볼에 제 얼굴을 문지르며 가르랑거린다.

화창한 날이라 살짝 덥지만, 이 녀석은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날씨가 더운 여름이 되기 전까진 항상 이렇게 날 올라타고 다닌다.

난 더운데...


그래도 뭐, 보들거리는 키니의 털이 기분 좋으니 됬어.

살포시 눈을 감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집까지 남은길을 서두른다.





숲길을 걷다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것들을 보게된다.


아침엔 갓 떠오른 햇빛에 밤새 숲 이곳저곳 방울져 앉아있던 이슬이 반짝이기도 하고,

해가 저 높이 떠오른 정오엔 나뭇잎들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이 마치 커텐처럼 숲 이곳저곳을 가르고 있으며,

어렴풋이 노을이 질 때 쯤부터는 하루 중 딱 그 잠깐동안만 볼수있는 특유의 세상을 수줍다는 듯 드러내보이기 시작해 점점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는 무희마냥 보는이로 하여금 애가 닳도록 만든다.

이윽고 무희의 얼굴이 검은 천에 다 가려지게되면 공연은 막을 내리고..


공연이 끝난 무대에는 다시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아쉬운 듯 하늘에 남아 점점이 반짝이는 오전의 흔적들 이외엔 온갖것들이 검게물드는 어두운 세상의 도래.

인간들이 저 먼 옛날부터 본능적으로 두려워해왔던 시간이 시작되는것이다.

그렇기에 무대를 바라보던 관객들은, 반짝이던 낮의 공연이 끝나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야만한다고 어릴적부터 어른들에게, 그 어른들은 다시 어릴적 어른들에게 당부받아왔으니까.


착한 아이들은, 착한 사람들은 어두운 밤에 돌아다니는게 아니에요. 위험해!


그렇게 착한 것들이 보금자리로 돌아간 어두운 세상에 남아있는건, 얼굴을 보이지 않는 음흉한 악의들.

어두워진 세상에 아직도 남아있는 착한것들을 욕망에 젖어 번들거리는 눈으로 찾아 배회하는 악의들이 우글거리는 밤은 그래서 위험한거다.

다른 어떤곳보다 더욱 어두운 숲 속은 특히나.


"그러니 루디 아주머니도 해가 지기전에 돌아가시길 바랐지만..."


"미양? 먕!"


벌써 노을마저 깊어지는 시간이다.

눈 앞에 보이기 시작한 숲 속 달빛이 내리쬐는 공터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통나무집 창문 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다는 건, 그런 내 기대는 헛되이 사그라 들 뿐이란거지.

하아...


"어두운 숲길은 위험한데.."


별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내일 아침에 가시도록 할 수 밖에.

만약 이걸 노리신거라면...


"...어떻게 생각하니, 키니?"


"미야아아앙...."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까딱이는 키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있겠지.


"....일단 들어가자"


"미양"


어찌되었든 밖에 계속 덩그러니 서있을 순 없는 법이다.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


끼이익.


"어머, 이제오니 루시안?"


따뜻한 온기와 맛있는 냄새가 한꺼번에 뒤섞여 물씬 몰려오는 공기를 타고 여성의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다가온다.

문을 열면 바로 나타나는 넒찍한 단칸방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에 나무접시를 내려놓는 작은 키의 여성.

어느 한 시점에서 시간이 멈춘듯한 외모와 그 잘 구워진 빵의 색을 닮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그녀는 잔잔한 미소로 문을 열고 서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루디 아주머니"


"미야아앙"


날렵한 움직임으로 내 목에서 내려 다가온 키니를 안아든 루디 아주머니는 키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한층 더 짙게 베어물었다.


"키니도 어서오렴. 집에 와보니 없길래 어디갔나 궁금했단다"


"먕, 미양"


길고 두터운 꼬리로 문 바깥쪽을 가리키며 살랑거리는 키니를 품안에 꼬옥 껴안은 루디 아주머니는 여전히 문가에 서있는 날 보고는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 들어오지 않고 뭐하니 루시안?"


"...네"


하아, 입가에서 새어나오는 한숨을 나지막히 흘려내곤 문을 닫으며 루디 아주머니에게 다가간다.

빙긋 웃는 루디 아주머니의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따스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루디 아주머니"


"응? 왜그러니 루시안?"


"오늘, 무슨 날인지는 아시죠..?"


"그럼 모를리가 있겠니?"


역시나.


"하아...제가 이 날은 혼자 보내고 싶어한다는거 뻔히 아시면서..."


"내가 이 날엔 꼭 오고싶어한다는거 알지 않니?"


"...."


항상 그랬지.

억지로라도 이 날만은 어떻게해서든 꼭 우리집에 찾아오시려고 하시는 바람에 그동안 꽤나 애먹었었더랬다.


몇번은 잘 막았지만, 요 최근 몇년동안은 이렇게 집을 비웠을 때 찾아오시니까 별 수 있나.

그래도 그동안은 낮시간에 잠깐 오셨었는데, 오늘은 뭔가 작정하고 오신 듯 한...


"자 보렴 루시안, 오늘은 내가 이미 다 준비해놨단다!"


자랑스럽다는 듯 활짝 웃는 얼굴로 단칸방 어느 한곳을 가리키는 루디 아주머니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아주머니의 말씀대로 이미 '준비'가 전부 끝나있었다.


"...언제오신거에요?"


"얼마 안됬지?"


"그새 이걸 다 하셨다구요?"


"그럼~ 금방 끝냈단다!"


나무로 만든 간략한 테이블. 이것도 없었던거니 만드신거겠지.

그 위에 놓여있는 사이좋은 남자와 여자의 그림이 들어있는 액자.

그 주변을 둘러싼 갖은 꽃들과 잎사귀들. 이것도...직접 공터 주변의 숲에서 따오신 것이리라.

그리고 액자 앞에 놓여있는 여러 음식들.

...이걸 금방 끝냈다고?


"...대단하시네요. 오래도록 해온 저도 시간이 꽤나 걸리는 일인데...

솔직히..감사해요. 이렇게까지 해주셔서"


"이정도야 뭐..오히려 좋게 받아들여줘서 내가 더 고마운걸!"


고개를 끄덕이는 루디 아주머니의 모습에 입가에 지어진 씁쓸한 미소를 애써 거둬낸다.

그래도 이만큼 해주신건 고마운 일이니까.


"그래서 말인데 루시안..

그러니까 이제부터도 내가 해주면 안될까?"


"...이걸요?"


"응"


그동안은 오셔서 가만히 바라만 보시던 루디 아주머니가 손수 준비를 해주신 이유를 알것같았다.

이젠, 직접 제 손으로 하고 싶으신거겠지.

매년마다.


"....."


"안되겠니..?

물론 루시안 네가 직접, 혼자서 보내고 싶어하는 날이라는 건 알겠지만...

나도, 그리고 데릭도..."


점점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시는 아주머니를 두곤 방 안쪽 침대 옆에 놓인 상자로 걸어간다.

그런 내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하신건지 아주머니는 내가 상자를 열고 안에 있던 자그마한 다른 상자를 꺼내 다가왔을 때 까지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중얼중얼..


"...아주머니"


"으, 응?!"


놀란 얼굴로 고개를 치켜드는 아주머니의 눈 앞에 손에 들고있던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 이건..?"


"열어보세요"


주춤거리는 손으로 상자를 받아 든 루디 아주머니는 조심스런 손길로 상자의 뚜껑을 열기시작한다.


그리고, 그 안에 놓인 것들을 본 루디 아주머니는 실이 풀린 인형처럼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루, 루디 아주머니?!"


"이, 이게...이건...!"


열린 상자의 안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을 크게 치켜뜬 채 조금씩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루디 아주머니의 옆에 같이 주저앉아 아주머니의 얼굴을 걱정스레 들여다본다.


놀라실거라는 건 예상 했는데...


"이게..그,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주머니와 아저씨께 전해드리는 유서에요"


"..로이츠와...에밀리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자 안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내 든 아주머니는 주저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본다.

어느샌가 쉴새없이 흐르기 시작한 눈물에 흠뻑 젖은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고있자니 그동안 참 내가 못할짓을 한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부모님의 기일은 항상 혼자 보내고 싶어했던 내 욕심때문에 주변에 계신 부모님과 나보다도 훨씬 오랜시간을 함께 보내오셨던 분들이 느낄 아픔과 슬픔들을 그동안 내가 무시해온건 아닐까.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유서와 유품이 담긴 상자를 그동안 열어보지 못할만큼 나도 많이 힘들었다는 변명을 하더라도, 이건 분명 내 잘못인거다.


이틀 전, 부모님의 기일을 앞두고 한참이나 유품상자를 바라만보던 내가 답답했는지 멋대로 상자를 열어버린 키니가 그 안에서 꺼낸 내게 써주신 부모님의 편지를 읽고 그걸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조만간 자리를 마련할 생각이었는데...아주머니가 더이상 참지 못하실줄은 생각 못했어.


"..부모님께선 돌아가시면서도 마을사람들을 걱정하셨었어요.

전 그것도 모르고...저만 힘들고 아프단 생각에 빠져있었죠.

그 편지, 읽어보세요. 그 안에 부모님께서 아주머니와 데릭 아저씨, 그리고 다른 마을 사람들께 남기신 말씀이 남아있어요.

...저도 읽고는 한참을 울었네요"


머쓱하게 웃는 내 얼굴을 바라보던 루디 아주머니의 눈동자가 천천히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종이를 향한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쳐내는 아주머니를 잠깐 혼자 편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자리를 옮겨 꽃들로 둘러싸인 액자 앞에 데릭 아저씨에게 받은 빵을 올려놓곤 무릎을 꿇고 앉는다.


"...아버지, 어머니. 오늘로 아홉 번째 기일이네요.

이번 기일 준비는 루디 아주머니께서 전부 해주셨어요. 그동안 제가 해드린 서투른 솜씨보단 훨씬 더 좋은 음식들과 꽃이네요..

..죄송해요. 진작에 이럴 기회를 드렸어야했는데..

마을 사람 모두와 마지막으로 보시지도 못하고 떠나셨는데, 그걸 9년 동안이나 제가 막고있었네요"


액자 안에서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젊은 부부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부모님께서 결혼하시고 얼마 되지 않았던 무렵 이 마을을 만드시며 선물받으셨다던 그림인지라 마지막 뵈었던 모습과는 괴리감이 없잖아 있지만, 오히려 지금의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이 그림 속 부모님의 모습이 나는 너무나도 좋다.


"지금부터라도 모두와 한번씩 얼굴을 마주하실 수 있도록 할게요.

그걸 원하셨었죠? 이제야 읽은 부모님의 유서에 그렇게 써져있길래 얼마나 죄송스럽던지..

아버지는..'잘사냐?'가 뭐에요 '잘사냐?'가..뭐, 잘 살고있긴 하지만요"


아버지는 항상 그런분이셨다.

무뚝뚝한 얼굴로, 옆에 서있던 자그마한 내 머리위에 손을 터억 올려놓으시며 거친 손길로 쓰다듬으시던 그 손길처럼 표현은 하지 않으셨지만 항상 날 걱정하시고 챙겨주시던 분..


"어머니도...이것저것 걱정하시는건 알겠지만..빽빽한 글씨가 눈물때문에 다 젖어버려서 제대로 읽지도 못했어요"


눈물이 많으시던 어머니.

마지막까지도 눈물때문에 내 얼굴이 보이지 않으신다며 슬퍼하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기억난다.


"..그리고, 두 분께서 상자안에 따로 남겨주신 반지는 잘 끼고있을게요.

행여나 없어지진 않을까 걱정은 마세요. 이거 손에 꽉껴서 빠지지도 않던데요 뭘"


오른손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본다.

수수한 모양의 반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랜 세월동안 전혀 빛이 바래지 않은 듯 선명한 은빛에 은은한 자주색이 감도는 그 반지는 조용히 내 손가락에서 무언가를 나에게 속삭이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삭임은 이내 뒤편에서 들려오는 오열에 흩어지듯 퍼져나간다.


"...어머니, 아버지. 그곳은 괜찮으세요?

고생만 하셨는데...거기 계시면서 즐길거 다 즐기시고 좀 편안히 계셨으면 좋겠어요.

이제 저도 제 한몸 지킬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걸요, 제 걱정은 마시구요.

마지막으로 유서에 남겨두셨던 당부..꼭 지킬게요"


그게 예전엔, 어릴때는 힘들었지만....

매번 날 볼때마다 죄스런 얼굴로 눈물을 보이시는 마을의 어르신들이나, 항상 날 볼때면 무언가라도 쥐어주려는 마을 아주머니들, 그리고 혼자인 나를 혼자로 놔두지 않는 내 친구들을 이제는 받아들이려해요.

그게, 부모님이 마지막으로 상자 안에 놔두신 그 편지에 적혀있던 마지막 소원이셨으니까요.


그렇게 아홉 번째 부모님이 떠나가신 오늘, 열린 창문 바깥으로 비추는 달의 얼굴이 살포시 웃는 것 같아보이는건 단순한 착각일까.

멈추지 않는 오열을 귓가에 담으며, 창문 바깥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는 내 눈동자에 비춘 달을 그저 언제나처럼 담담히 흘러내리는 눈물에 담아 부모님과의 추억이 어려있는 이 집, 이 땅에 한방울 한방울 적셔낸다.





"....."


"..미야아아앙...."


품 안에서 잠꼬대를 하는 키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감길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눈동자를 꿈뻑꿈뻑 감았다 뜬다.


꼬옥.


"...하아..."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든 루디 아주머니의 퉁퉁 부은 눈과 얼굴이 지근거리에 있는게 신경쓰여서 잠이 안오는것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큰 이유는 오늘이라는 날이 평소와는 같으면서도 다른 하루였기에.

지금껏 보내왔던 부모님 기일은 항상 그래왔듯 내 안에 나 스스로를 가둬두었던 것에 반해, 오늘은 누군가와 함께 날 풀어주었다는 그 사실이 어딘가 시원하면서도 어째서인지 죄스러워서 잠기운이 오다가도 달아나는 것만 같다.


"....."


죄스럽다..죄스럽다라.


문득 화끈한듯한 감각이 전해져오는 오른손 검지를 눈앞에 들어보니 익숙치않은 은빛 반지의 은은했던 자줏빛이 일렁이듯 더 진하게 반짝인다.

닫아둔 창문 틈으로 새어들어온 달빛에 비춘걸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자줏빛이 일렁이며 무언가 소리를 내는것만 같은 기분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럴리는 없겠지만..기분탓인걸까? 정말 무언가가 들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처럼 귀에 닿자마자 들려오는, 아니 느껴지는 마치 환청같으면서도 현실감에 가득 찬 그것은,


기억 속 어머니의 자장가였다.


작가의말

시!!!!!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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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Chapter [만남] : 01. 아가씨께서 오십니다.(7) 17.11.14 85 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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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Chapter [만남] : 01. 아가씨께서 오십니다.(5) 17.11.12 81 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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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hapter [만남] : 01. 아가씨께서 오십니다.(3) 17.11.10 79 0 19쪽
4 Chapter [만남] : 01. 아가씨께서 오십니다.(2) 17.11.09 111 1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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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hapter [어딘가에선] : 00. 지금 소녀와 소년은.(2) 17.11.07 119 0 38쪽
» Chapter [어딘가에선] : 00. 지금 소녀와 소년은.(1) 17.11.07 235 2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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